뿌리와 역사/고구려

동북 최대 산성 구평양성 발견

오늘의 쉼터 2009. 2. 12. 15:21

 

 

 

 

◈동북 최대 산성 구평양성 발견

 

동북지방 최대, 고구려 최대 산성인 구평양성이 심양시(沈陽市) 서북

조병산시(調兵山市)와 철법시(鐵法市), 법고시(法庫市) 경계 산악지대에서 발견되었다.

 

 구평양도 전경

 

북단의 사산성에서 남단의 위성까지 직선 거리가  무려 18.5km에 달하며

이는 서울시청에서 의정부까지 거리다.

 

 

고구려강물 먼저 위치도를 보면 요하가 서남으로 꺽이는데 있다.

졸본부 황성으로부터 물길로 200리 서남쪽에 있던 구도성(九都城)이다.

 

 

상세지도

현지의 상세 지도를 보면 법고시에서 조병산시로 향하는 철로가 빙 돌아간 양초구(洋草溝),

사산구(蛇山溝)의 토축 성벽부터 평양도가 시작되는데 이는 평양의 북성이다.

사산이라는 이름으로 보아서 가장 나중에 지어진 것이다. 

사산성은 양초성을 포함여서 동서 길이가 8km다.

 

 

북단 사산성

이 지역의 산 이름이 명나라 때 책인 <요동지>에서 도산(刀山)과 필산(畢山)이었는데

도산(都山)이 원말이고 필산은 도성의 끝산이라는 의미다.

지금은 이를 합쳐서 조병산(調兵山)이라고 한다.

<요동지>에서 도필산은 요하 서안에 있었다.

즉 지금의 물길은 바뀐 것이고, 고대에는 조병산시 바로 동쪽에 강물이 흘렀으며

그 흔적이 위성사진으로 보인다.

 

 

쇄성(고국원왕성)

조병산시 남쪽 철법시 서편에 쇄룡구(鎖龍溝)와 고려구(高麗구), 성자(城子)가 보이는데,

쇄룡구가 바로 고국원왕이 증축한 평양성이며, 전연의 모용황과 목저성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도망한 단웅곡이 된다. 또한 백제의 공격으로 고국원왕이 전사한 곳이다.

서북면 장벽이 위성 사진으로 뚜렷하다.  쇄성은 동벽의 길이가 6.5km다.

이 쇄성 궁터 위에 고구려 궁궐을 복원하면 얼마나 멋질까?

 

 

고국원왕 쇄룡성...

쇄성 서북벽

 

 

남성(동천왕성)

그 아래 성자산(城子山)이 있는데 340m로서 이 지역에서 가장 높다.

성자산 동북방에 위치한 남성이 동천왕이 지은 평양성이다.  남성은 동벽의 길이가 6km다.

성자산 서북에 단가향이 있는데 이는 3세 단군 가륵의 평양성이다.

 

 

단군성과 패수성

그 서남의 토성은 낙랑군 패수현성이 된다.  패수현성은 원형이며 종축이 1.5Km다.

서남에는 평양도의 남단을 지키는 위성이 보인다.

서북으로는 능원이 보이는데 이 중에는 몇분의 단군릉을 비롯하여 모용황에게 도굴당한

미천왕릉도 있을 것이다. 낙랑군 조선성은 서남쪽에 있다.

<단군세기>에 의하면 6세 단군 위나 때에 만들었고 소밀성이라고 하였다.

위만의 손자 우거가 들어와서 한무제와 맞서 싸우다가 암살당해서 한사군이 설치된

낙랑군 조선성이 되었다.  조선성은 종축이 3.3km다.

 

 

낙랑군 조선성

 <단군세기>에서 고조선을 세운 단군 왕검은 유궐에 계셨다가 봉정(蓬亭)에서 돌아가셨는데,

지금 창무시 위자구(葦子溝) 봉황성(鳳凰城)이라고 한다.  왕검유궐은 종축이 3km다.

 

 

단군시조 왕검성

봉황성을 둘러싸고 유리왕이 위나암성을 지었고,

<소수림왕비문>에 의하면 그 동쪽에 소수림왕이 금읍(禁邑)을 지었다. 

위나암성은 동벽이 4.5km이고, 위나암동성은 서북벽이 6km다.

위나암성 남쪽 성벽에 석조상은 환인, 환웅, 단군 등의 삼성을 기리는 조상벽(造像壁)인지,

 소수림왕이 만든 불상벽인지 알 수 없다.

 

 

봉황성을 둘러 싼 위나암성과 위나암동성

<수성왕갈석비문>에 의하면 유리왕은 비류수에 정도했고, 수성왕이 현도군에 국내성을 지었다.

따라서 위나암성 서쪽 물이 지금은 양식목하(梁息牧河)라고 부르지만 본래 비류수이고,

낙랑군의 열수이며 분열산에서 내려온다고 했으니 분려산이 곧 봉황산이자 낙랑군 불이현이 되는 것이다. 

또한 조선을 지나는 물은 소밀랑이었던 수수하가 있고 평양성에서 내려오는 서패수가 있는데 두 물을 합쳐서

<조선열전>에서는 패수라고 하였다. 발해 때는 수수하를 기수(淇水)라고 하였다.

현재의 요하는 당시에 이들 두 물과 만나지 않았으며 따로 대수(帶水)라고 하였다. 

왜곡축소된 한국사 이제 다시 쓰여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