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구려

위성으로 찾는 고구려 졸본성과 동명왕묘

오늘의 쉼터 2009. 2. 12. 15:34

 

 

 

 

위성으로 찾는 고구려 졸본성과 동명왕묘

 

 

이제까지 고구려 강토에 대한 연구는 중국에서 알려준 몇 개의 고구려성과

그들이 편의대로 왜곡한 지명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였다.

그런데 이제 위성 탐색으로 고구려 모든 영토에 대한 자세한 탐사가 가능해졌으니

고구려 역사 연구 방법이 새로 개척되었다.

그 첫번째 성과로서 고구려 졸본성과 동명왕묘를 새로 찾아밝힌다.


고주몽은 [광개토왕비문]에서 비류수에 홀본성을 지어 건국하였고,

 다음해 비류왕인 송양의 항복을 받고,

3년후에는 골령에 황룡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서 궁궐을 지었는데,

이것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졸본천의 졸본성이다.

졸본성은 주몽왕과 고국천왕, 고국원왕이 묻혔다.

고국원왕 때는 황성(黃城)이라고 했는데 눌현성이라는 이름도 전하고,

이는 누루 황(黃)의 우리말에서 비롯된다.

고국원왕이 황성으로 옮긴 후에, 고구려왕은 졸본부 행차를 할 필요가 없었으니,

장수왕의 평양성 천도전까지 졸본부 행차 기록이 없다.

 

 

[수성왕갈석비문]에서는 유리왕이 비류수의 위나암에 정도하며,

고주몽의 졸본부 황성은 천부(天府)라고 불렀다.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에서 고려고국(高麗故國)으로 기록된

발해 압록부 서경성 녹주(綠州), [신당서(新唐書)]에서 신주(神州)로 기록된 것이

고국원왕이 천도하였던 황성이며, 본래 고주몽의 졸본성이다.

그런데 발해 압록부 압록강이 현재의 요하(遼河)인 것을 모르고,

엉뚱하게 환인현 오녀산성을 오늘까지 주몽왕의 졸본성으로 잘못 알아왔다.

요나라 기록에 발해 서경성은 석성으로서 폭이 무려 20리(8km)였던 대성인데,

요나라 때 반란으로 인하여 폐지되어서, 그 뒤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요동행부지]를 남긴 금나라 문사였던 왕적(王寂)이 심양시 북쪽 현재 개원시에

설치되었던 함평부에 가서, 하루는 부근에 굉장히 큰 성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찾아가니 입구 마을 사람이 고구려 폐성이라는 했는데 직접 보니

성중에 함원전이 있고, (성을 세운 주몽이) 만세지계(萬世之計)을 세웠다가

당나라 장수 이세적에게 강토를 도둑질 당하여 국파천년한(國破千年恨)을

왕적이 느낀 곳이었다.

금나라 왕적이 보았던 발해 신주,

고구려 천부였던 졸본성은 대체 개원시 어디에 있는가?

 위성 사진으로 탐색한 결과 개원시 북쪽 창도현 천두진(泉頭鎭) 동쪽

소가둔(邵家屯)의 굉대한 성터였다.

 

 

신주의 위치는 고구려, 발해의 압록강이었던 요하(遼河) 하구로부터

물길로 830리라고 [신당서]에 기록되었는데 천두진이 그 위치로서 대략 맞다.

일반 지도 상에는 천두진 동쪽에 소가둔이 표시되어있고,

그 남쪽에 황정자(黃頂子), 소가남구(巢家南溝)가 표현되어 있고,

그 남쪽에 초가구(肖家溝) 유원지가 있다.

 

 

 

이를 위성으로 들여다보면 자세하게 고구려 졸본부 황성터가 보인다.

지도상의 천두는 고구려 천부나 발해 신주가 변한 말이다.

“주”-“두”의 발음은 구개음화 이전인 고대에 혼용되었다.

황정자는 황성의 변음이고, 소가둔(邵家屯)은 [수서]에서

소열제(昭列帝)라고 불렀던 고국원왕의 시호에서 비롯된 것이며

소가남구(巢家南溝)도 역시 고국원왕 이름인 쇠(釗)의 남쪽성이란 뜻이다.

또한 초가구는 소수림왕이 세운 초문사(肖門寺)에서 비롯된다.

이중에서 소가남구가 졸본부 성이다. 거기에 동북으로 황성이 보태졌다.

두 성은 합쳐서 폭이 대략 8km다. 성둘레는 20km이상이다.

 

고주몽이 죽어, 용산에 묻혔는데,

그 동명묘가 성의 서남쪽에 있으며 산 이름은 황룡산이며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주몽의 장지인 용산인 것이다.

황성 동남쪽에는 유리왕이 골천에 세웠던 이궁인 위원보산성이 있다.

골천은 지금의 구하(寇河)다.

동명왕묘 남쪽의 류가구는 금나라 문사 왕적이 신도비를 보러 놀러갔던

당나라 장수 류인공 7세손의 집이다.

그 바로 곁에 동명왕묘가 있었건만, 당시 왕적은 이를 알지 못했으니,

고구려 역사 유적이 요나라 이후에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것이다.


이제 고구려 역사는 처음부터 다시 쓰여져야 한다.

졸본성으로부터 서북 380리에 비류수가 있었고, 홀본성과 국내성이

그 비류수 주변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태종의 역사 왜곡부터 시원이 된 중국의 떼거지식 동북공정에 맞서서

우리는 21세기 방법으로 고구려 본색을 올바로 찾아내어

그 역사 정신을 후세에 똑똑히 가르치고 만대에 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