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식/인물평

안중근의사의 일생

오늘의 쉼터 2008. 10. 6. 14:29

 

◈ 안중근의사의 일생

 

안중근의사 1879년 9월 2일(음력 7월 16일) 출생하다.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 황석동에서 부 안태훈과 모 백천조씨 사이에서 3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나다. 태어날때 배와 가슴에 북두칠성 모양의 7개의 흑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고 해서 아명을 응칠이라 하다. 1907년 망명 후 이 이름으로 행세하다. 본관이 순흥으로 고려조 명헌 안향의 26대 자손이며, 해주부에 10여대 세거한 향반으로 조부 안인수는 진해 현감을 지냈으며, 부 안태훈은 성균진사이다. 고주부 때부터 해주, 봉산, 연안 일대에 많은 전답을 장만하여 황해도에서 이름난 부호가문으로 알려져 부친때까지 이어졌다.
 
  부친 안태훈 진사 박영효가 주도하던 개화파에서 일본에 파견할 70명의 유학생의 일원으로 선발되다. 그러나 갑신정변(1884)의 실패로 수구파 정권의 탄압 대상이 되자 안태훈은 고향으로 은거하다.
   
  안의사 일가 청계동으로 이사하다.
  안태훈 진사는 일가 70~80명을 거느리고 세거하던 해주를 떠나 신천군 두나면 천봉산 밑 청계동으로 이사하다.
  안의사 유학을 수악하며 한편 무예를 익혀 무인의 기상을 높이다.
  안중근은 소년시절에 조부의 사랑을 받으며 집안에 마련된 서당에서 학문을 수학하고 사서삼경과 자치통감 9권, 조선사, 만국역사 등을 읽다. 한편 포수군들을 따라 사격술을 익히고 사냥을 즐기다.
   
  동생 정근이 출생하다.
 
  동생 공근이 출생하다.
   
  조부 인수가 사망하자 안의사는 애통하여 병이 나서 반년간 치병하다.
   
  안의사 김아려 규수와 결혼하다.
  재녕군 신환면 김홍변의 딸 김아려(17세)와 결혼하여 후에 2남 1녀(딸 현생, 아들 분도, 후생)를 두게 되다.
  안의사 소요로 번진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는 신천 의봉군의 선봉장으로 선전하여 용맹을 떨치다.
  황해도에서 동학 농민군이 소요를 벌일때 안태훈은 의병을 일으켜 그들과 전투를 별였고, 안의사는 의려장인 부친을 도와 자진 선봉장이 되어 적장소를 급습하고 큰 공을 세우다. 이때 안중근이 붉은 옷을 입고 있었으므로 적당이 달아나면서 '천강홍의장군(하늘에서 내려온 홍의장군)‘이라 칭하다. 안태훈은 동학당에게서 노획한 1,000여 푸대의 쌀을 군량미로 사용하여 훗날 그 상환을 독촉받아 곤경에 직면하게 된다.
안의사와 김구가 상봉하는 인연을 갖다.
동학군의 해주성 공격의 선봉장 김구가 패전, 피신 중 안태훈 의려장의 초청으로 청계동에서 40~50일간 은거생활을 하다.
  안태훈이 동학군으로부터 노획한 천여 푸대의 양곡을 군량으로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되어 탁지부 대신 어윤중과 전 선혜청 당상 민영준으로부터 양곡을 상환하라는 압박을 받았으나 개화파 김종한의 중재로 일시 무마되다.
  안의사 무예를 익히며 무인의 기상을 높이다.
  청소년 시절부터 안중근은 “벗을 얻어 의를 맺는 일”, “술마시고 노래부르고 춤추기”, “총으로 사냥하기”, “준마를 타고 달리기” 등을 즐기다.
   
  부친 안태훈 진사 천주교당으로 피신, 천주교 교리를 습득하다.
  민영준이 다시 양곡의 상환문제를 들고 나오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안태훈이 천주교당으로 수 개월간 피신하고, 교당안에서 성서도 읽으면서 천주교 강론을 듣고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도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 사이 민영준의 일이 마무리되자 안태훈은 120권의 천주교 교리문답을 가지고 청계동으로 돌아와서 주민들과 인근의 유지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전교활동을 시작하다.
안태훈은 청계동으로 귀향한 후 일가 친척과 마을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 사람을 보내 매화동 본당의 벨렘신부를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초빙하다.
   
  안중근은 1월 중순 빌렘 신부로부터 토마스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다.
  이때 그의 부친을 비롯하여 숙부, 사촌 등 일가 친척과 청계동 및 인근 마을사람등 모두 33명이 함께 세례를 받다.
안중근은 빌렘 신부로부터 교리를 공부하며 평신도의 신분으로 빌렘신부와 함께 전도를 하게 되었고, 한편 불어를 배우며 신사조를 수용하게 되었다. 이 해 말 안의사는 청계동을 사목 방문한 뮈텔 주교를 해주까지 수행하다.
   
  안의사 교회활동에 헌신하다.
  4월 하순, 빌렘 신부가 청계동 본당신부로 옮겨 청계동 본당이 설립되다. 청계동 본당에서 안중근은 숙부 안태건회장과 함께 교회일에 헌신하다. 안중근은 돈독한 신앙심을 갖고 청계당 성당의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한 빌렘 신부를 따라 미사 복사도 하면서 그를 수행하여 황해도의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전교활동에 열중하다.
  안의사, 무법 일본인을 꾸짖어 승복시키다.
  안중근이 서울에 가서 친구들과 더불어 거리를 걸어가다가 한 일본인이 말을 타고 지나가던 한국 사람을 강제로 끌어내리고 말을 탈취하려고 하는 장면을 목격하다. 이때 안중근이 그 약탈자의 얼굴을 치면서 권총을 뽑아 그의 배에 갖다대고 그를 크게 꾸짖어 승복시키다. 말 주인이 말을 도로 찾아서 간 후 그 일본사람을 놓아주니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의 이름을 알고자 하다.
   
  안의사 교회의 총대로 추대되어 교우들의 난제해결에 앞장서다.
  천주교를 비방하는 금광 감리 주가가 천주교에 대한 비방을 심하게 하여 교회의 피해가 커지자 안중근이 초대로 선정되어 주가를 힐문할 때 무기를 든 금광 일꾼 400~500명의 위협을 받고 간신히 벗어나다.
만인계(채표회사) 사장에 피선되어 출표식 때 기계 고장으로 군중 앞에서 수난을 당하였으나 함경도 사람 허봉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다.
서울사는 전 참판 김중환이 옹진군민의 돈 5,000냥을 빼앗아 간 일과 해주부 지방대 병영 위관 한원교가 이경주의 집을 비롯한 재산과 아내를 강제로 빼앗은 두가지 사실을 따지고자 상경하였으나 이루지 못하다.
  안의사 대학설립을 건의하다.
  한국 교인들이 학문에 어두워서 교리를 전도하는데 어려움이 적지 않다고 생각하고 서양 수사회 가운데서 박학한 선비 몇을 청해다가 대학을 설립하여 국내의 연준 자제들을 가르칠 것을 뮈텔 주교에게 건의하였으나 거절 당하다. 이후 빌렘 신부로부터 배우던 불어공부를 중단하다.
  조정에서 해서교안을 사핵하고자 조핵사 이응익을 파견하여 천주교회의 중요 인물을 잡아들이는데,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과 숙부 안태건도 포함되었으나 빌렘 신부가 감싸주었고, 안태운은 몇달 동안 숨어다니다.
  안태훈이 청국인 서가에게 봉변을 당하자 안중근이 친구 이창순과 함께 서가를 찾아가 따지고 외부에 청원한 결과, 진남포 재판소에 환부하여 승소판결을 받다. 후에 다른 청국인의 소개로 서가와 만나 화해하다.
  교우들을 성직자의 권위로 일방적으로 제압하는 빌렘신부에 대항하여 서울의 뮈텔 주교에게 하소하려 하다가 빌렘 신부에게 구타를 당하다. 이때 굴욕을 참고 신부에게 대들지 않고 곧 화해하다.
   
  안의사 중국 상해와 산동반도를 유력하다.
  신문, 잡지, 각국 역사등을 읽으면서 정치사상과 독립정신을 높이던 안중근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침탈하려는 의도를 드러내자 안태훈과 상의하여 중국 산동이나 상해에 국외 항일터전을 잡을 계획으로 출국하여 중국의 상해와 청도 등지를 두루 다니다. 상해에서 민영익을 2~3차례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하고, 상인 서상근을 찾아가서 구국의 방도에 대하여 논의했으나 동의를 얻지 못하다. 처음에는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할 방도는 외국의 도움을 구하는 길도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상해의 천주교당에서 우연히 만난 친면이 깊은 르각신부의 권면으로 교육의 발달, 사회의 확장, 민심의 단합, 실력의 양성등 4가지에 힘 써야함을 깨다고 진남포로 돌아오다.
  안의사 일가 교통 요충지인 진남포로 이사하는 중 부친이 재녕에서 병사하다. 가족들이 청계동에 돌아가 장례를 치르다. 안의사는 상해에서 돌아와 이 사실을 듣고, 진남포를 떠나 제계를 지키기 위해 청계동으로 다시가 상례를 마치고 가족들과 함께 그 해 겨울을 보내다. 이 때 안중근은 독립하는 날까지 술을 끊기로 맹세하다.
  이 해, 장남 분도가 출생하다. 그러나 1914년 망명지 북만주 무린에서 조졸하다.
   
  안의사 일가 진남포로 이사하고, 육영사업에 헌신하다.
  4월 안중근이 가족을 데리고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이사해 양옥 한 채를 짓고 살림을 안정시키고, 교육구국운동에 투신하여 진남포에서 삼흥학교, 프랑스 신부가 경영하던 천주교 계통의 돈의학교의 재정을 맡으면서 2대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이 무렵 서우학회(뒤에 서북학회로 개칭)에 가입하다.
   
  봄에 안태훈과 친분이 있던 김진사가 안중근을 찾아와서 간도, 노령 등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을 권하다. 안중근은 재정을 마련하고자 한재호와 송병운등과 함께 삼합의라는 석탄회사를 만들었으나 일본인의 방해로 인하여 수천원을 손해만 보다.
  안의사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다.
  이 무렵 대구에서 발생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안중근은 이 운동에 적극 참여, 국채보상회 관서지부를 설치하고 1천여명의 선비들이 모인 평양 명륜당에서 의연금을 내도록 권유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 아내와 제수들에게도 권고하여 반지 폐물까지 헌납하도록 하는 등 열성적으로 구국을 위한 활동을 벌이다.
  안의사 서울에서 군대해산을 목도하고, 간도,연해주 지역으로 망명하다.
  8월 1일 정미 7조약을 이어 군대가 해산되어 시위대가 봉기하였을 때에 안중근은 국외활동을 통해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자 서울을 떠나 부산에 도착한 후에 다시 원산으로 향하다. 원산에서 선편을 이용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려 했으나 청진에서 일제 임검경관에게 발각되어 하선하다. 이에 다시 육로로 함북 회녕을 경유하여 두만강을 건너 8월 16일 북간도 용정에 도착하다. 용정촌을 중심으로 북간도 일대를 3개월 동안 시찰하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일으키려 하였지만, 이미 그곳에 일제 침략기구인 총감부간도파출소가 설치되어 여의치 못하므로 10월 20일에 연추를 지나 해삼위로 향하다.
  연해주에서 조국독립투쟁을 시작하다.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안중근은 계동청년회의 임시사찰직을 맡아 항일독립운동에 큰 경륜을 펴기 시작하였다. 한인사회의 유력자들에게 의병부대 창설에 대해 설득작업을 시작하고, 이 과정에서 엄인섭, 김기룡등과 의형제를 맺다.
  이해 차남 준생이 출생하다.
   
  안중근은 연해주의 한인촌을 순회하면서 동의회 회원을 모집하기 위하여 유세작업을 벌이다.
  이에 다수의 한인들이 호응하여 무기, 자금 등을 지원하자 마침내 국외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총독에 김두성, 총대장에 이범윤을 추대하고, 안중근은 참모중장의 임무를 맡다. 이들은 군기 등을 비밀히 수송하여 두만강 근처에서 모인 후 국내진입작전을 도모하다.
  안의사 300여 명의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국내진입작전을 벌이다.
  7월(음력 6월), 안중근등 여러 의병장이 대를 나우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 부근 홍의동과 신아산 부근으로 진공하다. 안중근 부대는 몇 차례 승첩을 올리고 일본군인과 상인등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다. 안중근은 만국공법에 의거하여 포로들을 석방하면서 무기까지 내어주었다. 이 때문에 동료의병들과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중에서 부대를 나누어서 떠나버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석방한 포로들에 의해 일본군에게 위치가 노출되면서 기습공격을 받고 회녕 영산에서 일군과 약 4~5시간 큰 접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하다. 안중근은 수 명의 의병과 함께 일본군을 피해 달아나면서 열이틀 동안 단 두끼만 겨우 얻어먹는 등 곤경을 겪으면서 연추의 의병 본거지로 돌아가다.
일본군을 피해 도망가는 동안 안중근이 2명의 의병에게 대세를 주다.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톡에서 의병의 재기를 도모했으나 여의치 못하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수청, 하바로프스크 등을 순회하면서 각지 한인사회의 교육과 사회 조직 건설에 힘쓰다. 특히 기선을 타고 흑룡강 상류 수천 여리를 시찰하다. 그러던 중 어느 산골짜기에서 일진회 회원들에게 잡혀서 구타를 당하고 죽음의 위기에서 간신히 풀려나 친지 집에서 상한 곳을 치료하며 그 해 겨울을 지냈다. 이 무렵 안중근이 1906년경부터 1907년 초까지 진남포에서 운영해 오던 삼흥학교는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하여 진남포의 오성학교의 야학부로 재편되다. 8월 20일 황해, 평안 양도의 50여 학교 5,000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개최된 연합운동회에서 1906년부터 1907년까지 안중근이 재건에 힘쓴 진남포의 돈의학교가 우등을 차지하다.
   
  안의사 단지동맹을 통해 동의단지회를 조직하다.
  3월 5일경(음력 2월7일경), 안중근은 연추 하리에서 11명의 동지와 함께 모여 왼손 무명지를 끊어 그 피로 ‘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치며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조국의 독립회복과 동양평화유지를 위해 헌신하는 동의단지회를 결성하다. 안의사가 회장에 선임, 회무를 주관하다.
단지혈맹동지 12명
안응칠(31세), 김기룡(30세), 강순기(40세), 정원주(30세), 박봉석(32세), 유치홍(40세)
조응순(25세), 황병길(25세), 백규삼(27세), 김백춘(25세), 김천화(26세), 강창두(27세)
  안의사 ‘인심결합론’을 발표하다.
  3월 21일, ‘해조신간’에 ‘안응칠’이란 이름으로 기서하여 인심을 단합하여 국권을 회복하는 방량에 대하여 논하다.
  10월 초, 해삼위에서 소문과 신문을 통해 이등박문이 22일경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거사를 결심하다. 안중근은 우덕순과 동행의거를 제의하고, 우덕순도 쾌히 동의하다.
  안의사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하얼빈에 도착하다.
  10월 21일, 아침에 안중근, 우덕순은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하얼빈으로 향하던중 통역을 맡아줄 유동하와 동행하다. 22일 하얼빈에 도착하여 김성백의 집에서 유숙하고 다음날 조도선을 찾아가서 함께 거사를 동모하다. 대동공보사 주필 이강에게 거사결행과 자금에 관한 편지를 쓰고 거사의 결의를 읊은 ‘장부가’를 짓고, 우덕순도 이에 화답하는 ‘거의가’를 짓다.
  안의사 일행 의거지를 선택하고자 채가구역으로 가다.
  10월 24일, 아침에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 정거장으로 나가서, 역의 관리를 통해 러청열차가 서로 바뀌는 정거장이 채가구 등지임을 알게되다. 유동하는 남아서 연락을 담당하게 하고, 우덕순, 조도선과 함께 채가구 역에 이르러 하차하다. 안중근 일행은 이등박문이 10월 26일 아침 6시경에 이 곳(채가구)을 지날 것이라는 사실을 정거장 사무원을 통해 확인하다.
  10월 25일, 안중근은 거사의 만전을 위하여 채가구를 거사의 한 지점으로 정하여 우덕순, 조도선등에게 맡기고, 자신은 하얼빈으로 돌아와 하얼빈역을 의거지로 작정, 거사준비를 하다.
  10월 26일(음력 9월 13일), 채가구에서 거사를 도모하던 우덕순, 조도선은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수상하게 여겨져, 열차가 지나가는 시각에 그들이 투숙한 역 구내여관의 문을 잠궈 방안에 갇혀 있다가 거사에 실패하다.
  안의사 하얼빈 역두에서 이등박문을 총살응징하다.
  안중근은 오전 7시경 역으로 나가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역사안 찻집에서 이등의 도착을 기다리다. 오전 9시경 이등을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자 러시아 코코프췌프 대장대신이 기내영접을 하다. 약 20분뒤 이등이 수행원을 거느리고 코코프체프의 안내를 받으며 열차에서 내려 도열한 의장대를 사열하고 이어 각국 사절단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받기 시작하다. 이 때 안의사는 9시 30분경 러시아 의장대 뒤쪽에 서 있다가 약 10여보의 거리를 두고 선 자세로 브로닝 권총을 발사하여 이등에게 3발을 명중시키고, 이등을 수행하던 하얼빈 천상 총영사, 삼 비서관, 전중 만철 이사 등에게 부상을 입히다.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에 의해 체포되자 ‘코리아 후라(대한민국 만세)’를 3번 외치다. 거사 직후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된 안중근은 하얼빈역 헌병대 분파소에서 러시아 검찰관에게 심문을 당하다가 오후 8,9시경에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지다.
치명상을 입은 이등은 곧 러시아 장교들과 일본인 수행원들에 의해 열차 내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약 20분 후에 69세로 절명하다.
  안의사 일제관헌으로부터 본격적인 심문을 받기 시작하다.
  10월 30일경,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에서 구연효융 검찰관의 심문을 받기 시작하다.
  안의사 관련 연루자와 함께 여순 관동도독부 감옥으로 이감되다.
  11월 1일, 일본헌병과 러시아 헌병의 감시하에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정대호, 김성옥 등 9인이 여순구 감옥으로 향하다. 11월 3일, 여순구에 이르러 감옥에 수감되다.
  일본정부 관동도독부 법원에 안의사 ‘사형’을 지령하다.
  12월 2일 소촌수태랑 외무대신이 현지 파견중인 창지철길 정무국장을 통하여 ‘중형징죄’를 전보로 명령 전달하게 하고 나아가 고등법원장 평석씨인을 본국으로 소환해 ‘사형판결’을 위한 공판개정을 다짐받았다.
  12월 중순, 안중근의 동생 정근, 공근이 여순감옥으로 안중근을 면회오다.
  안중근은 국내에서 찾아온 두 동생을 4~5일만에, 혹은 10여일만에 차례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이 자리에서 안중근은 한국인 변호사를 청해 올 일과 천주교 신부를 청해다가 종부성사 받을 일들을 부탁하다. 또한 안중근이 자신의 자서전 ‘안응칠역사’를 집필하기 시작하다.
   
  안의사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공판개시되다.
  1월 31일 ~ 2월 1일경부터, 일본의 검찰관과 옥리들의 심문태도가 강압적으로 돌변하고 안중근에게 공판개정일이 6~7일 뒤로 결정되었다고 통보하다. 또한 이미 허가한 한국인 변호사의 변호는 물론 영국, 러시아, 스페인 등의 외국변호사도 일체 변호가 허가되지 않으며, 일보인 관선 변호사만이 허용된다는 사실을 통보하다.
  여순공판 개정되다.
  1910년 2월 7일 오전 10시, 중국 여순 관동도독부 고등법원 제1호 법정에서 재판장 진과십장의 단독심리하에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등 하얼빈 의거 관련자 4인에 대한 제 1회 공판이 열리다. 재판부는 재판장에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장 진과십장, 담당검찰관은 구연효융, 관선변호사는 수야길태랑, 겸전정치, 서기 도변랑일로 전원 일본인 일색으로 구성하다. 이 공판에서 우선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 네 피고인의 인적사항 확인 다음 안중근에 대한 신문이 전개되다. 안중근은 “3년전부터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등을 포살코자 했으며, 이 거사는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결행한 것이다”라고 진술하다.
  2월 8일 오전 11시, 제 2회 공판이 속개되어 우덕순과 조도선에 대한 개별신문이 행해지다.
  우덕순은 하얼빈 의거에 참가한 이유를 “안중근은 의병으로서 한 일이겠으나 자신은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당연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고 진술하다. 조도선은 정대호가 데리고 오기로 되어있는 안중근의 가족을 마중 나갈 때 러시아어 통역을 도와주기 위해서 안중근과 채가구로 동행하였다고 진술하다.
  2월 9일 오전 9시 50분, 제 3회 공판이 개정되다.
  먼저 유동하에 대한 개별신문이 행해지다. 유동하는 안중근의 거사 의도를 몰랐다고 진술하다. 오후부터 재판장의 정거취조가 행해져 안중근이 이강에게 보내려던 편지와 안중근, 우덕순의 시가 러시아와 일본 관헌에 의해 밝혀진 사실들이 제시되다. 여기서 안중근은 ‘이등박문죄악’ 15개조를 설명하다. 중도에 재판장에 의하여 중지 당하다.
  2월 9일 오전 9시 50분, 제 3회 공판이 개정되다.
  먼저 유동하에 대한 개별신문이 행해지다. 유동하는 안중근의 거사 의도를 몰랐다고 진술하다. 오후부터 재판장의 정거취조가 행해져 안중근이 이강에게 보내려던 편지와 안중근, 우덕순의 시가 러시아와 일본 관헌에 의해 밝혀진 사실들이 제시되다. 여기서 안중근은 ‘이등박문죄악’ 15개조를 설명하다. 중도에 재판장에 의하여 중지 당하다.
  2월 10일 오전 9시 40분, 제 4회 공판이 시작되다.
  구연 검찰관으로부터 가자에 대한 형량이 구형되는데 안중근은 사형, 우덕순, 조도선은 징역 3년, 유동하는 징역 1년 6개월이 구형되다.
  2월 12일 오전 9시 30분, 제 5회 공판이 개정되다.
  두 일본인 관선 변호사의 변론이 행해지다. 겸전 변호사는 주로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에 대해 변론하고 수야 변호사는 안중근에 대하여 변호하다. 변론이 끝난 후 피고인들의 최후 진술에서 안중근은 일제의 침략적 간계를 규탄하면서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이등박문을 제거했다고 진술하고 자신을 단순한 자객으로 취급하지 말고 전쟁중에 잡힌 포로로 대접하여 마땅히 만국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라고 진술하다.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제 6회(최종판결)이 개정되다.
  재판장은 일본 형법을 적용시켜 안중근에게 사형, 우덕순에게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에게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하다.
이러한 선고를 받고도 안중근은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말하면서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취하다.
  1910년 3월 8일, 한국으로부터 여순감옥으로 빌렘신부가 찾아오다.
  다음 날인 9일부터 10일까지 빌렘신부가 안의사의 영생영락을 위하여 고해성사와 미철성찰대례, 예수의 성례성혈을 받아 모시는 대예식을 행하다. 안중근은 이 미사 중에 직접 속사를 하고 성체를 받아 모시다. 이때 감옥소의 일반관리들도 함께 참례하다. 면회실에서 검찰관, 전옥, 통역, 간수장, 두 변호사 등이 입회하에 안정근, 안공근 두 아우와 빌렘 신부를 면회하고 20분 동안 기도를 드린 후 동포에게 고하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다.
  1910년 3월 15일, 안중근은 자서전 ‘안응칠역사’를 탈고하다.
  안중근은 지난 1909년 12월 13일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그의 자서전 ‘안응칠역사’를 92일만에 탈고하고,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하다. 한편 이 무렵부터 안중근은 ‘국가안위노심초사’,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등 한문 붓글씨로 된 많은 유작을 남기기 시작하다.
안중근이 갇혀있는 감옥소에 관계하던 많은 일본인들이 비단과 지필묵을 가지고 와서 안의사에게 기념소장할 붓글씨를 써줄 것을 부탁하다.
  안중근은 25일 동생 정근과 공근을 마지막 면화하는 자리에서 모친과 부인, 숙부, 동생, 뮈텔주교, 빌렘신부 등에게 미리 써놓았던 6통의 유서를 전하다. 이 보다 앞서 안병찬 변호사를 통하여 뼈에 사무치는 동포에게 고하는 유언을 전달하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의사 여순감옥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다.
  안중근은 전날 고향으로부터 보내온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형장으로 나아가기 전에 약 10분간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 임형직전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을 묻는 검찰관의 물음에, “나의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므로 임형관리들도 앞으로 한일간에 화합하여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고 하고 이 자리에서 함께 ‘동양평화만세’를 부를 것을 제기하자 반대하고 교수형을 집행, 안의사는 의연하게 순국하다. 안중근의 시신은 새로 송판으로 만든 침관에 안치된 후 여순감옥 묘지에 권폄되다.

 

유묵들

志士仁人殺身成仁

지사와 어진사람은 몸을 죽여 인을 이룩한다.

안의사는 유가사상의 4가지 덕목중 의를 가장 중시했지만 인,예,지에 관한 글도 남겼다. 이는 바로 인의 성취에 대한 안의사의 심회가 담긴 글이다.
현재 안의사 기념관에 사진이 전시되고 있고 광장 옥석에 조각하여 살신성인의 애국정신을 추모하고 있다.

國家安危勞心焦思

국가와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보물 제1150-1호

여순법원의 당시 검찰관 야스오카 세이시로가 친절하게 대해준데 대한 보답으로 친필한 이 묵서는 이후 야스오카의 장녀 우에노도시코씨가 감추어 소장해 오던것을 동경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원장이 헌납받아 76년 2월 11일 안의사 기념관에 기증했다.
 

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보물 제1150-2호

안의사가 여순감옥에서 공판정을 오갈때마다 경호를 맡으면서 안의사의 사상과 인격에 감복, 안의사를 스승으로 받들었던 간수 일본군헌병 지바 도시치에게 써준것으로 전한다.



見利思義見危授命

위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보물 제596-6호

'정당하게 얻은 부귀가 아니면 취하지 않는다', '의를 보고 행하지 않는것은 용감함이 아니다'는 뜻을 담고 있다.
 

日出露消兮 正合運理
日盈必○兮 不覺其兆

해가뜨면 이슬이 사라지나니
천지의 이치에 부합되도다.
해가차면 반드시 기우니
그 징조를 깨닫지 못하는도다.

제국주의 정략인 침략전쟁을 일삼는 일본의 패망을 예언한 말로 안의사의 동양평화사상에 연결되는 대목이다.
이 글은 정-반-합으로 전개되는 변증법적 우주운행원리를 해가차고 기울어지는 것에 비유해 일본 제국주의의 종말도 오래지않아 다가올것이라고 예언한 말이다.

見利思義見危授命

위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보물 제596-6호

'정당하게 얻은 부귀가 아니면 취하지 않는다', '의를 보고 행하지 않는것은 용감함이 아니다'는 뜻을 담고 있다.
 

東洋大勢思杳玄 有志男兒豈安眠
和局未成猶慷慨 政略不改眞可憐

동양대세 생각하매 아득하고 어둡거니
뜻 있는 사나이 편한잠을 어이자리
평화시국 못이룸이 이리도 슬픈지고
정략(침략전쟁)을 고치지 않으니 참 가엽도다.

보물 제596-5호

안의사의 동양평화에 관한 지론이 담긴글이다.
동양대세의 관계와 평화정략으로 동양3국이 단결해야 '서세동점'의 위기를 극복할수 있다는 세계관을 갖고있었다.

天堂之福永遠之樂

천당의 복은 영원한 즐거움이다.

가톨릭 신앙은 안의사의 정신적 기둥이었다. 아버지 태훈의 천주교 입교에 따라 가톨릭신자가 된 안의사는 19세에 토마스(도마)란 영세명을 얻는다.
이 유묵은 최서면씨가 81년 일본에서 확인, 사진을 보내와 현재 안의사 사진첩에 전하고 있다.
 

人無遠慮難成大業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보물 제596-8호

안의사는 부친 별세후 1906년 봄 가족을 이끌고 진남포로 이주, 조국독립을 위한 장기적인 계획에 착수한다. 선비와 국민이 흥하여 나라를 일으킨다는 뜻의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통한 구국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안의사는 사리사욕에 급급하지 않고 사재까지 털어 교육사업을 벌였지만 조국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결국 의병투쟁과 하얼빈역의 거사로 치닫게 된다.

白日莫虛渡靑春不再來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앞 글귀와 마친가지로 만 3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한점 부끄럼없고 빈틈없이 살아온 안의사가 후세에게 들려준 처세철학이다.
 

五老奉爲筆 靑天一丈紙
三湘作硯池 寫我腹中詩

오로봉으로 붓을 삼고
푸른 하늘 한 장 종이 삼아
삼상의 물로 먹을 갈아
뱃속에 담긴 시를 쓰련다.

보물 제596-9호

안의사는 청소년시절 가장 즐기던 것으로 첫째 친구와 의를 맺는것이요, 둘째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것이요, 셋째 총으로 사냥하는것이요, 넷째 날랜말을 타고 달리는것이다. 라고 했듯이 의리와 호방함을 갖춘 무사적 기질의 소유자였다.



百忍堂中有泰和

백번 참는 집안에 태평과 화목이 있다.

보물 제596-1호

인내를 강조한말.
선현들의 구전글귀로 "한결같이 부지런히 일하는 세상에는 어려움이 없다."와 짝을 이루는 말이다.
 

歲寒然後知松柏之不彫

눈보라 친 연후에야
잣나무가 이울지 않음을 안다.

보물 제569-10호

달리 말하면 날씨가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평상시에 애국자니 충신이니 하고 떠들어대도 나라가 위험할때야 비로소 스스로 희생하는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丈夫雖死心如鐵 義士臨危機似雲

장부가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쇠와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기운이 구름같도다

보물 제569-12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결연한 자세와 굳센 기개가 드러나 글이다. 오른쪽 윗부분에 증맹경시라고 쓰여 있는 점으로 보아 여순감옥을 찾아온 일본인경찰관에게 써준것으로 보인다.
 
 

庸工難用連抱奇材

서투른 목수는
아름드리 큰 재목을 쓰기 어렵다.

보물 제569-7호

큰 인물이 아니면 뛰어난 인재를 기용하지 못한다는 말로, 불의를 보면 참지못하고 구국운동에 앞장선 안의사의 지도자관이 잘 나타난 구절이라 할 수 있다.



金刀山刀水慘雲難息

검산과 칼끝에
처참한 구름조차 쉬기 어렵다

침략전쟁을 일삼는 당시 국제정세를 풍자한 글이다.
안의사 며느리인 정옥녀씨가 소장하고 있다가 후손이 간직하고 있다.
 

臥病人事絶 嗟君萬里行
河橋不相送 江樹遠含情

나는 병석에 누워 일지 못하고
그대는 만리 먼길을 떠나갔는가
다릿못에 같이나가 보내길업고
강언덕 나무숲에 정만 어렸네

중국 당나라 시인 송지문의 시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黃金百萬而不如一敎子

황금 백만냥도
자식 하나 가르침만 못하다.

'명심보감' 훈자편에 나오는 "황금 한 궤작이 자식에게 경서 한권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라는 내용과 같다.
 

思君千里 以表寸誠
望眼欲穿 幸勿負情

나라를 걱정하며 천리밖에 나와
당신을 향해 바라보니 눈이 뚫어질것 같으오
나의 이 작은 정성을 바치오니
행여나 이정을 버리지 마소서

보물 제569-11호

안의사의 우국충절을 나타낸글이다.
쓰러져가는 조국의 운명과 황제의 비운을 생각하면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이 한몸 바칠각오가 되있음을 시사한 비장한 글로 송강 정철으 사미인곡에서 임금에 대한 간절한 충절을 한여인이 지아비를 사모하는 마음에 비유하면서 자신의 뜻을 표현한것과 같다.

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

궂은 옷,궂은 밥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더불어 의논할 수 없다.

보물 제569-4호

가난하고 천한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 안의사의 인생관이 반영된 말이다.
 

博學於文約之以禮

글공부를 널리 하고 예법으로 몸단속하라

보물 제569-13호

안의사의 수신철학이 담긴 글이다.
이 유묵은 예를 강조한 유일한 글이다.
이 내용은 안의사가 여순감옥에 수감되고 사흘뒤인 11월6일 미조부치 검찰관에게 제출한 '한국인 안응칠 소회'에도 들어있다.



喫蔬飮水藥在其中

나물 먹고 물마시니 그 속에 낙이 있네

부귀를 부러워하지 않는 탈속의 심사가 드러난 구절이다. 안의사에게 부귀는 한낱 뜬구름에 불과했다.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보물 제569-2호

안의사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명구로 실천운동에 참여하면서도 학문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경구라 할 수 있다.



言語無非菩薩手段擧皆虎狼

말은 보살 아닌 것이 없건마는
하는 짓은 모두가 사납고 간특하다.

을사조약 정미 7조약 등 일제가 한구을 집어삼키려던 의도들은 모두 겉으로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걸고 있지만 뒤로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위한 사전기도였던 사실을 비난한 글이다.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해마다 계절따라 같은 꽃이 피건만
해마다 사람들은 같지 않고 변하네

보물 제569-3호

자연의 섭리는 그대로이나, 세월따라 사람들은 변하고 있다는 당시의 암울한 현실을 걱정하는 구절이다.



貧而無諂富而無驕

가난하되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는다

'논어'학이편에 나오는 구절의 인용이다.
 

弱肉强食風塵時代

약한자를 강한자가 잡아먹는 풍진시대다

영-미-일-로 등 당시 강국들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시대상을 반영한 글이다.



 

 

天與不受反受其殃耳

만일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벌을 받게 된다. 폭 31.7cm 길이 135cm. 보물 제 569-24호, 안의사기념관에 사진본이 전시되고 있다. 안의사는 이등박문이 스스로 하얼빈에 온 것을 하늘이 준 기회로 확신하고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를 감행했다.

 
 
 

貧與賤人之所惡者也

가난하고 천한 것은 사람들이 싫어한다.

폭 42cm, 길이 120cm 가량. 사진본이 안의사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안의사의 富貴貧賤에 대한 올바른 생활철학이 간결하게 표현된 유묵이다. 論語 里仁편에 “부귀는 누구나 탐내는 것이나 올바른 도리로 얻은 것이 아니면 누리지 말며 사람마다 가난과 천함은 싫어하는 바이지만 그 도로 얻음이 아니더라도 버리지 말고 감수하라”라고 한 글귀에서 인용된 것이나 간결한 재구성의 표현이 돋보인다.



一勤天下無難事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운 것이 없다.

안의사의 순국일인 1910년 3월 26일자 『만주일일신문』에 사진본으로 보도되어 안의사 유묵으로는 최초로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원본의 전래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안의사의 성실한 인생관이 투영된 휘호이고 ‘百忍堂中有泰和’와 짝을 이루는 글귀라고 할 수 있다.
 

人類社會 代表重任

인류사회의 대표는 책임이 무겁다.

안의사기념관에 사진본이 전시되고 있다.



不仁者 不可以久處約

어질지 못한 자는 궁핍한 곳에서 오래 못 견딘다.

폭 40cm 길이 150cm. 論語 里仁편에서 인용한 글귀이다. 안의사의 어진 성품과 인내심을 엿보이게 하는 휘호로 평가된다.
 

敏而好學 不恥下問

민첩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 말라.

폭 40cm 길이 150cm. 論語 公治편에 “敏而好學 不下問 是以謂之文也”라고 한 문구에서 인용하였다. 尙武의 기질을 갖은 안의사지만 학문을 중시하였음을 보여주는 글귀이다.



澹泊明志 寧靜致遠

담백한 밝은 뜻이 편안하고 고요하여 오래 전수된다.

조선일보사 조사부에 사진본이 소장되고 있다. 유묵소재와 진부여부를 확인중이다.
 

臨水?魚 不如退結網

물에 다달아 고기를 부러워 함은 물러가서 그물을 뜨니만 못하다.




長歎一聲 先弔日本

장탄 일성으로 먼저 일본의 명망을 조상한다.

일본 東京 구대만총독부 관리를 역임한 집안에 전래하는 유묵으로 근래 金光萬이 확인, 국내에 사진본이 공개된 것이다. 진부 여부와 전래과정들을 확인 중이다.
 
忍 耐

보물 제569-18호

참고 견딘다는 안의사 평생의 좌우명

第 一 江 山
보물 제569-14호
삼천리 금수강산 한반도에 대한 사랑, 조국애를 나타낸 글
 
極 樂
보물 제호
안의사의 신앙과 종교관이 나타난 글귀이다.
仁 智 堂
보물 제569-17호
어질고 지혜로와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당호
 
日通淸話公
청나라말을 할줄 아는 일본인 통역관에게 써준 글로 오른쪽 윗부분에 증기요타선생이라고 쓰여있다. (소재불명)
自 愛 室
스스로를 아끼라는 뜻의 이 글귀는 어느 정자나 당시 학교 연구실등에 쓰였던것으로 보인다.
 
年年點檢人間事 惟有東風不世情
해마다세상일 헤아려보니
다만 봄바람만이 세태를 따르지 않네
사람들은 모두 변하고 시국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데 자연만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임을 뜻하고 있다.
孤莫孤於自恃
스스로 잘난체 하는것보다 더 외로운것은 없다
보물 제569-16호
평소 용렬함을 드러내지 않고 뛰어남을 과시하지 않은 안의사의 겸손이 잘 나타난 구절이다.
 
雲 齊

보물 제 569-20호.

 안의사 기념관에 소장, 전시되고 있다.
靑 草 塘
보물 제 569-15호
안의사기념관에 사진본이 전시되고 있다.
 
敬 天
폭 67cm, 길이 34.5cm. 경전의 ‘경천애인’에서 인용한 것으로 일제의 침략을 질타하는 뜻이 담겼다.
百世淸風
일본 동경에 소장, 국내에 사진본이 소개되고 있다. 안의사 고향에도 암각되어 어릴 때도 보았던 ‘百世淸風’이란 문구는 정의로운 세계가 실현되기를 바랬던 안의사의 염원이 담긴 것으로 해석된다.
 
獨 立
독립. 폭 63cm 길이 33cm. 金光萬 확인, 국내에 소개된 것이다. 상세한 것은 확인중이다.

 

 

'종합상식 > 인물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0) 2009.02.23
최초의 여성의병 윤희순  (0) 2008.11.14
유엔 사무총장  (0) 2008.05.22
◈ 다른나라사람들이 본 이순신장군  (0) 2008.02.29
이상설 선생약사  (0) 2008.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