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여성의병 윤희순 | ||||||
지난 9월은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강원이낳은 전국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여사의 발자취를 쫓기 위해 동분서주 했던 1달여가 아닌가 생각된다. 춘천보훈지청에서는 지난 8월 29일 73주기 추모헌다례를 시작으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의 학술세미나와 기념 사진전·미술전,사적지순례와 백일장, 추모의 밤 등 선양행사를 다양하게 개최했고,지난 일요일 국립춘천박물관 강당에서의 기념 작곡발표회를 끝으로 윤희순 여사의 삶을 기리고자 했던 짧은 여정을 아쉬움 속에 마무리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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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개와 열정의 삶, 최초의 여성의병 윤희순 선생
-2008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독립기념관- (1860. 6. 25 ~ 1935. 8. 1)
윤희순(尹熙順) 의사는 1860년 6월 25일 서울에서 아버지 윤익상(尹翼商) 선생과 어머니 평해 황씨의 큰 딸로 태어났다.
유학자 집안에서 나고 자란 의사는 16세 되던 1876년에 춘천의병장 외당(畏堂) 류홍석(柳弘錫)의 큰 아들이자, 팔도창의대장 의암 류인석의 조카인 류제원(柳濟遠)과 결혼하였다.
1907년 일제가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자 의사는 군자금을 모아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놋쇠와 구리를 구입하고 탄환, 유황 등으로 화승총에 쓸 화약을 직접 제작·공급하는 탄약제조소를 운영하였다.
또한 여자의병 30여 명을 모집하여 의병의 취사와 세탁을 도맡아하는 한편, 직접 의병훈련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비록 의사는 직접 의병전투에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후방에서 그들을 적극 지원하며 의병운동에 힘을 쏟았다.
특히 관군과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밀고자를 꾸짖고 청년과 여성들에게 의병운동에 나설 것을 주장하며 8편의 의병가와 4편의 경고문을 남겼는데 이는 최초의 한글의병가이자 민족저항시가로, 많은 사람들의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기여하였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한 의사는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인재를 양성하고자 환인현에 노학당(勞學堂)을 설립하였다.
의사는 교장으로 활동하며 학교운영자금을 모으는데 힘을 쏟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한국인과 중국인들에게 항일애국노래를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의사의 노력으로 양성된 50여 명의 항일운동가는 요동일대를 중심으로 일제에 맞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노학당이 폐교되자 의사는 무순(撫順)의 포가둔으로 이주하고 중국인들과 힘을 합쳐 한중연합단체인 조선독립단을 조직하였다.
1926년에는 항일인재를 양성하고자 조선독립단 학교를 설립하고 조선독립단 가족부대를 만들고 직접 군사훈련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3대에 걸쳐 의병활동을 뒷바라지 하고 스스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의사는 선대의 투철한 항일애국정신을 후대에 알리고자 「서정록」을 저술하고 1935년 8월 1일 75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남존여비 관념이 생활 깊숙히 뿌리 내린 구한말, 부엌과 안방의 여성이 '안사람 의병단'을 이끌고 의병장으로 나서 활동한 것은 당시의 금기를 깨는 행동이었다.
금기를 깨고 당당히 일어선 여성은 서울이나 부산, 대구 너른 도시에 사는 여성이 아니었다.
강원도 춘천 산간마을에 사는 尹熙順선생(1860∼1935)이었다.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쳐지면 왜놈 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쏘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 있나. 우리도 나가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에게 붙잡히면 왜놈 시정 받들쏘냐. 우리 의병 도와주세. 우리 나라 성공하면 우리 나라 만세로다. 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
이 노래는 윤희순이 여성들의 구국의식을 깨우치기 위해 지은 '안사람 의병가'이다. 윤희순은 안사람 의병가 노래를 지은 뒤 '자주 읽어보고 외워 두고 하여라'라는 메모를 해 둘 정도로 결연했다.
본관은 해주, 尹翼商의 딸로 서울(현재 경기도 구리) 태생인 윤희순은 16세에 위정척사파의 선비 춘천시 남면 柳弘錫(1841-1913)의 장남 柳濟遠(1859-1915)과 결혼했다.
천성이 씩씩하고 활달한 것으로 알려진 尹熙順은 결혼 전 시어머니가 작고,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 1895년 명성왕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으로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시아버지가 출정할 때 함께 종군하겠다고 간절히 요청했다.
'국가의 존망이 당할 때 구국 대열에 참여하는데 어찌 남녀의 차별이 있겠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아버지가 집안 일에 힘쓸 것을 당부하자 그때부터 집 뒤에 단을 모으고 10여개월 매일같이 의병진이 성공할 것을 항상 기원하면서 의병들이 올 때마다 음식과 옷을 조달했다.
궁핍했던 당시의 사정에 비춰보면 쉽지 않은 일이다. 또 '안사람 의병가' '안사람 의병가 노래' '병정 노래' 등의 노래를 창작해 보급하면서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여성들의 의병활동 참여를 이끌어 냈다.
왜병들이 尹선생에게 위압적으로, 때로는 달콤한 말로 시아버지와 남편의 거처를 추궁할 때에 강철같이 강경했다고 한다.
尹熙順은 여성 특유의 강한 애국심과 민족적인 자부심이 담긴 '왜놈 대장 보거라' 라는 경고문을 쓰며 여성의병단 출현을 예고한다.
'너희 놈들이 우리나라가 욕심나면 그냥 와서 구경이나 하고 갈 것이지, 우리가 너희 놈들에게 무슨 잘못을 하였느냐.
우리나라 사람 이용하여 우리나라 임금님을 괴롭히며 우리나라를 너희놈들이 무슨 일로 통칠한단 말이냐.
아무리 유순한 백성이라 한들 가만히 보고만 있을 줄 알았단 말이냐.
절대로 우리 임금님을 괴롭히지 말라.
만약 너희 놈들이 우리 임금님, 우리 안사람네들을 괴롭히면 우리 조선의 안사람들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줄 아느냐.
우리 안사람도 의병을 할 것이다.……'
을사조약으로 국가가 위태롭게 되자 1907년 전국 각지에서 정미의병을 일으켜 저항했는데, 춘천서는 시아버지 柳弘錫이 의병대장이 돼 춘천 진병산(陳兵山) 의암소(衣岩所) 가평 주길리(珠吉里) 등서 싸웠다.
의병 600여명과 의인 친척 남녀 노소가 모두 모여 가정리 여우내골에서 의병훈련을 하며 화약과 탄환을 만드니 尹선생은 이에 적극 참여했다.
이때 춘천시 남면 마을에서 30여명의 여성들을 동원해 군자금을 모아 의병을 도왔다.
또 쇠와 구리를 구입해 화약과 탄알을 제조해 의병에게 수송했으며 식사와 빨래 뒷바라지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 때의 '군자금 명단'을 보면 '남종댁(南宗宅) 20兩 ·항곡댁(恒谷宅) 10량 65전 ·계양소댁(桂陽小宅) 10량 ·지산소댁(芝山小宅) 12량 ·오댁 5량 ·여아댁 1량 ·죽산댁 1량 ·반이댁 2량 ·이곡댁 5량 또 5량 ……' 으로 기록돼 있어 여성의병들의 손길이 새삼 느껴진다.
하지만 일제에 나라를 강점당하자 이듬해인 1911년 시아버지, 남편과 함께 낯설은 만주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망명 2년뒤인 1913년 시아버지, 2년후 남편마저 세상을 등지자 화전을 일구면서 악전고투하며 柳敦相(1894-19354)과 敏相 두아들이 조선독립단에 참여해 독립 활동을 하는 것을 뒷바라지 했다.
왜적이 가족을 몰살시키기 위해 尹熙順 집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그러다 1935년 7월 19일 중국 무순에서 대한독립단 청년들에게 강의하던 장남 柳敦相이 일본경찰에 체포당해 모진 고문으로 순국하자 직접 땅을 파서 아들을 묻고는 그 울분을 이기지 못한 채 식음을 전폐하다 12일만인 8월 1일 자손에게 훈계하는 글과 일생록을 남기고 이국 땅에서 일생을 마쳤다.
漢族 친구들에 의해 만주 해성현(海城縣) 묘관둔(苗官屯) 북산(北山)에 안장됐으며 1994년 비로소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와 향리인 남면 관천리 선영에 안장됐다.
정부에서는 뒤늦게 1990년 공로를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지역사회에서는 한국여성예림회 강원지회에서 90년대들어 추모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춘천시립도서관 후원에 윤희순 상, 윤희순 생가터에 해주윤씨의적비, 묘소에 애국선열윤희순여사사적비 등이 건립돼있다.
춘천시 남면 일대에 유적지가 있으나 보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朴漢卨강원대 사학과 교수는 "당시의 서찰을 통해 추적해보면 윤희순선생이 남장을 하고 충주로 의병 원정을 나서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고 피력했다.
윤희순이 남긴 글에 대한 문학적인 조명이 이뤄지고 있는데, 朴敏一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윤희순이 직접 짓고 쓴 '안사람 의병가' 등 13편은 역사를 문학으로 수렴한 역사인식과 문예적 역량은 최초의 여성의병가로 자리매김되며 한국의병문화사의 넓이와 크기와 깊이를 튼실하게 하는 기반을 마련해준다"고 평가했다.
강영심 박사(이화여대 사학과 강사)는 "안사람 의병단은 그 성격상 우리나라 최초의 여군이라 지칭할수 있으며 이들의 구국정신은 일제하 항일 여성운동으로 이어져 독립전쟁론으로 맥을 이었다는데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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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의병자금과 탄약·군량이 부족하게 되자 윤희순은 향민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해 여의내골〔餘義川谷〕주산(周山)에서 놋쇠와 구리를 구입하고 무기와 탄환을 제조, 공급하였다.
한편으로는 의병가를 지어 부르게 하여 의병 훈련을 진작시켰다.
유홍석이 주길리 전투에서 부상당한 뒤 제천 장담리(長潭里) 유중교의 집에 머무르고 치료하면서 의병 재조직을 계획하던 중 1910년 8월 국치를 당하게 되었다.
유홍석이 왜적의 통치를 받을 수 없다 하여 먼저 만주로 이주하였다.
이후 1911년 윤희순 가족 역시 유홍석을 뒤따라 만주로 들어가서 의병 재거를 도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3년 12월 유홍석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고, 1915년 1월 이미 망명해 온 유인석이 죽었으며, 남편인 유제원 또한 같은 해 10월 회인현(懷仁縣)에서 죽었다.
이에 윤희순은 대한독립단에 가입해 투쟁하는 돈상(敦相)·민상(敏相) 두 아들을 포함한 자손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맏아들인 돈상이 그의 처남 음성국(陰聖國)과 함께 일본경찰에게 잡혀 고문 끝에 1935년 7월 19일 순국하였다.
3대에 걸쳐 의병활동의 뒷바라지를 하던 그는 10여 일 뒤인 8월 1일 자손에게 훈계하는 글과 일생기록을 남기고 향년 76세로 만주땅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시신은 만주 해성현 묘관둔(海城縣苗官屯) 북산에 장사지냈고, 아직 고향으로 반장(返葬)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윤희순의 간절한 애국정신과 일생에 걸친 의병활동의 뒷바라지를 추앙해 1982년 11월 9일 강원대학교에서 〈해주윤씨의적비 海州尹氏義蹟碑〉를 항골마을에 건립하였다.
1983년 8월 3일 대통령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강원의병사(강원의병운동사연구회, 1987)
≪참고문헌≫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인물 >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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