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식/인물평

최초의 여성의병 윤희순

오늘의 쉼터 2008. 11. 14. 00:41

 

 

최초의 여성의병 윤희순

 


 

 

 

 

 

 

지난 9월은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강원이낳은 전국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여사의 발자취를 쫓기 위해 동분서주 했던 1달여가 아닌가 생각된다. 춘천보훈지청에서는 지난 8월 29일 73주기 추모헌다례를 시작으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의 학술세미나와 기념 사진전·미술전,사적지순례와 백일장, 추모의 밤 등 선양행사를 다양하게 개최했고,지난 일요일 국립춘천박물관 강당에서의 기념 작곡발표회를 끝으로 윤희순 여사의 삶을 기리고자 했던 짧은 여정을 아쉬움 속에 마무리 하게 되었다.


특히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국가에서 기리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것은 애국충절의 고장인 강원의 큰 자랑인 동시에 다시 한번 강원의 기개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고 독립운동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선각자적 여성이었을 뿐만 아니라 물질만능과 이기주의에 물든 요즘 우리사회가 요청하는 새로운 어머니상을 보여주고, 정신문화의 가치를 교육하고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고 공동체를 가르친 참 어머니로서의 윤희순 여사의 면모를 조명해 본 한달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윤희순 여사는 한말 일제 무력 침략에 맞서 여성의병을 모아 안사람의병단을 결성해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부르게 하며 여성의 독립운동참여를 독려했으며, 1910년 국권을 빼앗기자 차가운 만주 땅으로 건너가 척박한 산간을 전전하며 독립을 위해 진력하다 1935년 8월 29일(음력 8월 1일) 독립운동가인 장남 유돈상(1894∼1935)의 피살에 항거하며 단식하다 처절한 생을 마감하셨다.

또한 최근 망명지 중국 환인현에서 항일인재를 길렀던 학교터 ‘노학당’의 실체가 밝혀지는 등 국외에서의 활동 족적이 새롭게 조명되면서 역사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당시 여성의 항일활동 평가에 대해 남성의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렀다는 지금까지의 보편적인 시각을 벗어나 남성 지배 사회구조에서 인습의 굴레를 쓰고있던 여성상을 극복하고 한손에는 붓과 한손에는 총을 들고 남성보다 오히려 더 치열한 몸부림을 보여주신 선각자이기도 하셨다.

이처럼 운신의 폭이 제한적이었던 시대에 장소와 신분, 학문 등의 영역에서 ‘선’을 뛰어넘어 경계를 넓혔을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만리타국에서 자신을 사랑하던 시아버지와 남편을 잃고 한때는 실의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실천했던 인물이었기도 하다. 또한 이국땅에 살면서도 가족부대라는 별칭을 들으며 독립운동을 지속하고 자녀모두를 독립운동에 투신케하는 등 여사를 둘러싼 삶은 드라마나 영화로 구성하여도 손색없을 정도로 기개와 열정으로 가득찬 삶이었다 할 수 있다.

윤희순 여사의 이러한 항일운동의 공훈을 기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며 춘천 남면에 해주윤씨 의적비를, 춘천시립도서관 정원에 동상건립 및 중국 요녕성 선생의 묘터에 윤희순 항일 기념비를 세웠으며 독립기념관 경내에 여성독립운동가로는 세번째로 애국시 어록비가 건립된 바 있다. 지난 1달간 9월의 독립운동가 윤희순 여사의 구국열정과 활동상을 기리기 위한 각종 기념, 학술, 문화행사에 참여하여 지역사회과 국가를 위해 위국헌신하셨던 숭고한 뜻을 기리는데 많은 도움을 주신 각계각층의 도민 여러분에게 다시한번 감사드리며, 결실의 계절인 이 가을에 우리 강원도민의 맥박 속에 고동치고 있는 윤희순 여사의 드높은 기상과 강인한 신념을 바탕으로 고귀한 애국충정이 헛되지 않도록 국민화합과 국론 결집을 통해 국가발전과 민족번영의 길을 열어 갈 것을 새롭게 다짐하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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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개와 열정의 삶, 최초의 여성의병 윤희순 선생

 

-2008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독립기념관- (1860. 6. 25 ~ 1935. 8. 1)

윤희순(尹熙順) 의사는 1860년 6월 25일 서울에서 아버지 윤익상(尹翼商) 선생과 어머니 평해 황씨의 큰 딸로 태어났다.

유학자 집안에서 나고 자란 의사는 16세 되던 1876년에 춘천의병장 외당(畏堂) 류홍석(柳弘錫)의 큰 아들이자, 팔도창의대장 의암 류인석의 조카인 류제원(柳濟遠)과 결혼하였다.

일본이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1896년 단발령을 발표하자 의사는 나라를 구하는데 남녀의 구별이 없으며 여자들도 의병에 참여하고 의병대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며 ‘안사람 의병가’등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의 의병활동을 촉구하였다.


1907년 일제가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자 의사는 군자금을 모아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놋쇠와 구리를 구입하고 탄환, 유황 등으로 화승총에 쓸 화약을 직접 제작·공급하는 탄약제조소를 운영하였다.

또한 여자의병 30여 명을 모집하여 의병의 취사와 세탁을 도맡아하는 한편, 직접 의병훈련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비록 의사는 직접 의병전투에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후방에서 그들을 적극 지원하며 의병운동에 힘을 쏟았다.

특히 관군과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밀고자를 꾸짖고 청년과 여성들에게 의병운동에 나설 것을 주장하며 8편의 의병가와 4편의 경고문을 남겼는데 이는 최초의 한글의병가이자 민족저항시가로, 많은 사람들의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기여하였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한 의사는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인재를 양성하고자 환인현에 노학당(勞學堂)을 설립하였다.

의사는 교장으로 활동하며 학교운영자금을 모으는데 힘을 쏟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한국인과 중국인들에게 항일애국노래를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의사의 노력으로 양성된 50여 명의 항일운동가는 요동일대를 중심으로 일제에 맞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노학당이 폐교되자 의사는 무순(撫順)의 포가둔으로 이주하고 중국인들과 힘을 합쳐 한중연합단체인 조선독립단을 조직하였다.

1926년에는 항일인재를 양성하고자 조선독립단 학교를 설립하고 조선독립단 가족부대를 만들고 직접 군사훈련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3대에 걸쳐 의병활동을 뒷바라지 하고 스스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의사는 선대의 투철한 항일애국정신을 후대에 알리고자 「서정록」을 저술하고 1935년 8월 1일 75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여성의병장 尹熙順 선생

남존여비 관념이 생활 깊숙히 뿌리 내린 구한말, 부엌과 안방의 여성이 '안사람 의병단'을 이끌고 의병장으로 나서 활동한 것은 당시의 금기를 깨는 행동이었다.

금기를 깨고 당당히 일어선 여성은 서울이나 부산, 대구 너른 도시에 사는 여성이 아니었다.

강원도 춘천 산간마을에 사는 尹熙順선생(1860∼1935)이었다.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쳐지면 왜놈 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쏘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 있나. 우리도 나가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에게 붙잡히면 왜놈 시정 받들쏘냐. 우리 의병 도와주세. 우리 나라 성공하면 우리 나라 만세로다. 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


이 노래는 윤희순이 여성들의 구국의식을 깨우치기 위해 지은 '안사람 의병가'이다. 윤희순은 안사람 의병가 노래를 지은 뒤 '자주 읽어보고 외워 두고 하여라'라는 메모를 해 둘 정도로 결연했다.

본관은 해주, 尹翼商의 딸로 서울(현재 경기도 구리) 태생인 윤희순은 16세에 위정척사파의 선비 춘천시 남면 柳弘錫(1841-1913)의 장남 柳濟遠(1859-1915)과 결혼했다.

천성이 씩씩하고 활달한 것으로 알려진 尹熙順은 결혼 전 시어머니가 작고,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 1895년 명성왕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으로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시아버지가 출정할 때 함께 종군하겠다고 간절히 요청했다.

'국가의 존망이 당할 때 구국 대열에 참여하는데 어찌 남녀의 차별이 있겠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아버지가 집안 일에 힘쓸 것을 당부하자 그때부터 집 뒤에 단을 모으고 10여개월 매일같이 의병진이 성공할 것을 항상 기원하면서 의병들이 올 때마다 음식과 옷을 조달했다.

궁핍했던 당시의 사정에 비춰보면 쉽지 않은 일이다. 또 '안사람 의병가' '안사람 의병가 노래' '병정 노래' 등의 노래를 창작해 보급하면서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여성들의 의병활동 참여를 이끌어 냈다.

왜병들이 尹선생에게 위압적으로, 때로는 달콤한 말로 시아버지와 남편의 거처를 추궁할 때에 강철같이 강경했다고 한다.


尹熙順은 여성 특유의 강한 애국심과 민족적인 자부심이 담긴 '왜놈 대장 보거라' 라는 경고문을 쓰며 여성의병단 출현을 예고한다.

'너희 놈들이 우리나라가 욕심나면 그냥 와서 구경이나 하고 갈 것이지, 우리가 너희 놈들에게 무슨 잘못을 하였느냐.

우리나라 사람 이용하여 우리나라 임금님을 괴롭히며 우리나라를 너희놈들이 무슨 일로 통칠한단 말이냐.

아무리 유순한 백성이라 한들 가만히 보고만 있을 줄 알았단 말이냐.

절대로 우리 임금님을 괴롭히지 말라.

만약 너희 놈들이 우리 임금님, 우리 안사람네들을 괴롭히면 우리 조선의 안사람들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줄 아느냐.

우리 안사람도 의병을 할 것이다.……'


을사조약으로 국가가 위태롭게 되자 1907년 전국 각지에서 정미의병을 일으켜 저항했는데, 춘천서는 시아버지 柳弘錫이 의병대장이 돼 춘천 진병산(陳兵山) 의암소(衣岩所) 가평 주길리(珠吉里) 등서 싸웠다.

의병 600여명과 의인 친척 남녀 노소가 모두 모여 가정리 여우내골에서 의병훈련을 하며 화약과 탄환을 만드니 尹선생은 이에 적극 참여했다.


이때 춘천시 남면 마을에서 30여명의 여성들을 동원해 군자금을 모아 의병을 도왔다.

또 쇠와 구리를 구입해 화약과 탄알을 제조해 의병에게 수송했으며 식사와 빨래 뒷바라지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 때의 '군자금 명단'을 보면 '남종댁(南宗宅) 20兩 ·항곡댁(恒谷宅) 10량 65전 ·계양소댁(桂陽小宅) 10량 ·지산소댁(芝山小宅) 12량 ·오댁 5량 ·여아댁 1량 ·죽산댁 1량 ·반이댁 2량 ·이곡댁 5량 또 5량 ……' 으로 기록돼 있어 여성의병들의 손길이 새삼 느껴진다.

하지만 일제에 나라를 강점당하자 이듬해인 1911년 시아버지, 남편과 함께 낯설은 만주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망명 2년뒤인 1913년 시아버지, 2년후 남편마저 세상을 등지자 화전을 일구면서 악전고투하며 柳敦相(1894-19354)과 敏相 두아들이 조선독립단에 참여해 독립 활동을 하는 것을 뒷바라지 했다.

왜적이 가족을 몰살시키기 위해 尹熙順 집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그러다 1935년 7월 19일 중국 무순에서 대한독립단 청년들에게 강의하던 장남 柳敦相이 일본경찰에 체포당해 모진 고문으로 순국하자 직접 땅을 파서 아들을 묻고는 그 울분을 이기지 못한 채 식음을 전폐하다 12일만인 8월 1일 자손에게 훈계하는 글과 일생록을 남기고 이국 땅에서 일생을 마쳤다.

漢族 친구들에 의해 만주 해성현(海城縣) 묘관둔(苗官屯) 북산(北山)에 안장됐으며 1994년 비로소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와 향리인 남면 관천리 선영에 안장됐다.

정부에서는 뒤늦게 1990년 공로를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지역사회에서는 한국여성예림회 강원지회에서 90년대들어 추모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춘천시립도서관 후원에 윤희순 상, 윤희순 생가터에 해주윤씨의적비, 묘소에 애국선열윤희순여사사적비 등이 건립돼있다.

춘천시 남면 일대에 유적지가 있으나 보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朴漢卨강원대 사학과 교수는 "당시의 서찰을 통해 추적해보면 윤희순선생이 남장을 하고 충주로 의병 원정을 나서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고 피력했다.

윤희순이 남긴 글에 대한 문학적인 조명이 이뤄지고 있는데, 朴敏一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윤희순이 직접 짓고 쓴 '안사람 의병가' 등 13편은 역사를 문학으로 수렴한 역사인식과 문예적 역량은 최초의 여성의병가로 자리매김되며 한국의병문화사의 넓이와 크기와 깊이를 튼실하게 하는 기반을 마련해준다"고 평가했다.

강영심 박사(이화여대 사학과 강사)는 "안사람 의병단은 그 성격상 우리나라 최초의 여군이라 지칭할수 있으며 이들의 구국정신은 일제하 항일 여성운동으로 이어져 독립전쟁론으로 맥을 이었다는데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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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순 [尹熙順]
 
1860(철종 11)∼1935. 독립운동가. 본관은 해주(海州). 서울 출신. 익상(翼商)의 딸이다. 16세 때 고흥유씨(高興柳氏) 제원(濟遠)에게 출가해 유홍석(柳弘錫)의 며느리, 유중교(柳重敎)의 증손부가 되었다.
1895년 민비시해사건과 단발령이 강행되자 시아버지인 유홍석이 유중악(柳重岳)·유중락(柳重洛) 등의 춘천 유림과 더불어 이소응(李昭應)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춘천과 가평 일대에서 의병작전을 전개할 때, 윤희순은 〈안사람의 의병가〉·〈병정의 노래〉 등 수십 수의 의병가를 지어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직접·간접으로 춘천의병 활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이 때 춘천의병이 무기의 열세로 적의 공격을 못이겨 유홍석이 재종제인 유인석(柳麟錫)의 제천의병(湖左義陣)에 가담하였고 또 유인석과 함께 요동에 갔다가 귀국하는 동안에, 다른 지방에서 온 의병에게 마을 부녀자와 협력하여 밥을 지어주고, 빨래를 해주는 등 의병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그 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이어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황제가 퇴위하고 한국군대마저 해산되자 각지에 흩어진 해산군에 의해 정미의병이 봉기하였다.
이에 같은 해 8월 유홍석은 족숙인 유중악 등과 모의하고 가정리(柯亭里) 항골〔恒谷〕에서 유영석(柳寧錫)·유봉석(柳鳳錫)·박화지(朴華芝) 등과 더불어 의병 600명으로 가평 주길리(珠吉里) 등지에서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이 때 의병자금과 탄약·군량이 부족하게 되자 윤희순은 향민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해 여의내골〔餘義川谷〕주산(周山)에서 놋쇠와 구리를 구입하고 무기와 탄환을 제조, 공급하였다.

한편으로는 의병가를 지어 부르게 하여 의병 훈련을 진작시켰다.

유홍석이 주길리 전투에서 부상당한 뒤 제천 장담리(長潭里) 유중교의 집에 머무르고 치료하면서 의병 재조직을 계획하던 중 1910년 8월 국치를 당하게 되었다.

유홍석이 왜적의 통치를 받을 수 없다 하여 먼저 만주로 이주하였다.

이후 1911년 윤희순 가족 역시 유홍석을 뒤따라 만주로 들어가서 의병 재거를 도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3년 12월 유홍석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고, 1915년 1월 이미 망명해 온 유인석이 죽었으며, 남편인 유제원 또한 같은 해 10월 회인현(懷仁縣)에서 죽었다.

이에 윤희순은 대한독립단에 가입해 투쟁하는 돈상(敦相)·민상(敏相) 두 아들을 포함한 자손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맏아들인 돈상이 그의 처남 음성국(陰聖國)과 함께 일본경찰에게 잡혀 고문 끝에 1935년 7월 19일 순국하였다.

3대에 걸쳐 의병활동의 뒷바라지를 하던 그는 10여 일 뒤인 8월 1일 자손에게 훈계하는 글과 일생기록을 남기고 향년 76세로 만주땅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시신은 만주 해성현 묘관둔(海城縣苗官屯) 북산에 장사지냈고, 아직 고향으로 반장(返葬)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윤희순의 간절한 애국정신과 일생에 걸친 의병활동의 뒷바라지를 추앙해 1982년 11월 9일 강원대학교에서 〈해주윤씨의적비 海州尹氏義蹟碑〉를 항골마을에 건립하였다.

1983년 8월 3일 대통령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畏堂先生三世錄(朴漢卨 編, 江原日報社, 1983)
≪참고문헌≫ 강원의병사(강원의병운동사연구회, 1987)
≪참고문헌≫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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