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식/인물평

이상설 선생약사

오늘의 쉼터 2008. 1. 12. 15:48
 

1. 이상설 선생( 1870-1917 )

  

 

2. 이상설선생 생가 및 숭렬사(사당)

유형 : 도지정문화재(기념물 제77호)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134-2(산직마을)

                                  생가 안내문

 

 

                               동상

                              사당 정문

 

                                             사 당

 

                                      술렬사 기념관과 비각

  

                            비각(보재 이상설선생의 행적이 세겨져있다)

 

                                          홍살문

 

                                      전면에서 본 사당전경.

 

                                    숭렬사 경내전경.

 사진출처 :  시나브로 가는 집 

 

3. 이상설선생 약사(李相卨先生 略史)    

조국(祖國)을 찾아 민족정기(民族正氣)를 세우려던 수많은 애국지사(愛國志士)중에서도 대표적인 지도자이며 큰 어른이 보재(溥齋)이상설(李相卨)이다.

 

이상설은 제국주의 열강(列强)이 한반도(韓半島)를 에워싸던 1870년(高宗7년), 음력 12월7일 오늘날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山尺里 山直)마을에서 선비 이행우(李行雨)와 벽진이씨(碧珍李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순오(舜五), 호(號)는 보재(溥齋),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이다.

고려조(高麗朝)의 명유 익재 이제현(名儒 益齋 李齊賢)의 22대손(代孫)이 되며, 6세가 되던 1876년에 이조참의(吏曺參議)를 지내던 이용우(李龍雨)에게 출계(出系)하여 학문(學問)에 전심 하였다.

 

이상설은 25세(歲)가 되던 해인 1894년에 갑오문과(甲午文科)에 급제하고, 이미 율곡 이이(栗谷 李珥)를 조술(祖述)할 큰 학자로 칭송될 만큼 학문이 숙성 하였다.

그후 관계(官界)에 나가 한림학사(翰林學士), 승지(承旨)등을 거쳐 36세가 되던해인 1905년 에는 의정부 참찬(議政府 參贊)에 발탁 되었다.

 

이상설은 이해말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는 나라와 민족의 비운(悲運)을 맞이하여 순국(殉國)의 결의로 그 조약(條約) 파기에 진력 하였지만 돌이킬수 없음을 알고 5차례에 걸친 사직소(辭職疏)를 올리어 관직(官職)을 벗고, 저 유명(有名)한  네델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사행(使行)을 비롯한 국권수호(國權守護)와 그를 이은 민족독립운동(民族獨立運動)에 온 생애(生涯)를 바치어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에 새 장(章)을 기록 하였다.

 

이상설은 구학문(舊學問)을 수학(修學)한 왕조관인(王朝官人) 이지만, 누구 보다도 앞장서 근대사상과 학문을 받아들여 구미(歐美)의 정치, 경제, 문화를 섭취하였고, 영어, 불어, 러시아어, 일어를 구사할수 있었다.

그 보다도 그는 국제정치(國際政治)와 세계대세(世界大勢)를 인식하여 국가와 민족의 진로(進路)를 밝힐수 있는 당대의 동량(棟梁)으로 추앙 되었고, 또한 스스로 앞장서 그를 구현(具顯)하기 위하여 형극(荊棘)에 찬 민족독립운동(民族獨立運動)에 헌신하였다.

 

이상설의 그같은 활동 중 두드러진 것만을 들면,

 

첫째, 1907년 6월에 네델란드 헤이그(海牙)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을 대동하고 참석하여 한국의 주권수호(主權守護)를 위한 국제외교(國際外交)인 이 사행(使行)에서 그는 온갖 고초 끝에 회의장(會議場)에 당도 하였으나, 국력(國力)의 뒷받침이 없고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협상(利權協商)의 성격을 지닌 동회의(同會議)에서 소기의 목적은 달성치 못하였다. 

 

그러나 그로서는 일제(日帝)에 짓밟히는 한국의 실정을 국제공의(國際公議)에 제기시키고자 최선을 다하였고, 또한 그 길로 윤병구(尹炳球), 이위종(李瑋鍾), 송헌수(宋憲樹)등을 대동하고 영국, 독일, 미국, 러시아 여러나라를  직접 순방 하면서 한국의 독립이 도양평화(東洋平和)의 관건(關鍵)임을 주장하고 나아가 한국의 영세중립(永世中立)을 주장 하였다.

1909년 봄까지의 이와 같은 이상설의 폭넓은 국제적 활동이 민족수난(民族受難)에 접어든 한민족(韓民族)의 독립문제를 비로소 국제정치에 제기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둘째, 1909년 러시아 시베리아 연해주에 망명지(亡命地)를 정한 이상설은 그후 이동녕(李東寧), 이종호(李鍾浩), 정재관(鄭在寬), 이동휘(李東輝)등, 동지를 규합하여 연해주와 중국 서북간도(西北間島), 멀리 하와이와 미주본토(美洲本土)에 교우(僑寓)하는 모든해외 한인을 조직(組織)하여 한국독립운동의 터전을 잡고 1914년에는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국권상실후(國權喪失後) 최초의 망명정부(亡命政府)의 이름을 전한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세워 그 정통령(正統領)에 추대되어 국내의 민족운동을 총령(總領)하였다.

 

이 동안에 그는 성명회(聲明會 : National committee of Korea),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 권업회(勸業會),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 등을 조직, 지도하여 일관된 항일독립운동을 계속 하였다. 그중 성명회(聲明會) 에서는 일제와의 한일합병조약(韓日合倂條約)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미국, 러시아, 등 열강에게 대하여 일제의 침략 규탄과 한민족 독립의 정당성(正當性)을 밝히는 선언서(宣言書)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는 8,624명에 달하는 민족운동자의 서명이 붙은 이 선언서에서

"우리는 세계속에서 대한국(大韓國)의 이름을 간직하고, 한국민은 대한국민(大韓國民)이란 지위를 결코 잃지않고 간직 하기로 결정 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의 과업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광복(光復)과 국권(國權)의 회복에 기필코 도달할 때까지 손에 무기(武器)를 들고 일본과 투쟁할 것이며 아울러 장차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진정한 한국민은 자신의 자유와 국가의 광복을 취득하기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고 조국의 독립의지(獨立意志)를 천명하였다.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는 수립된 후, 곧 제1차세계대전이 발생하자 그 틈에 일제와 제휴한 제정러시아와 연합군의 일원으로 등장하는 일제의 탄압으로 표면적 활동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경륜 정신(精神)은 국내외의 모든 독립운동자에게 계승되어갔다.

 

셋째, 1906년 8월 헤이그에 가는 도중에 북상(北上)한 한인이 개척한 북간도 용정(北間島 龍井)땅에 근대적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건립(建立)하여 일백여만의 한인이 사는 북간도를 비롯한 남북만주(南北滿洲)와 연해주 지방에 민족주의 교육을 펴고 나아가 조국 광복운동의 기지화(基地化)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서전서숙은 그 다음해인 1907년 헤이그로 사행(使行)하는 이유에서 그의 동지인 여준(呂準)등에 맡겨져 잠시 더 운영되었으나, 곧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폐숙(廢塾) 하였다.

 

그러나 그 설립의 목적(目的)과 이념(理念)은 가까이는 북간도의 명동학교(明東學校)와 서간도 신흥학교(新興學校), 연해주의 한민학교(韓民學校)로 이어지고, 멀리는 국내외의 각 지방마다 한민족의 터전에는 어디에나  이와같은 민족주의교육(民族主義敎育)이 확대되어 수많은 민족운동(民族運動)의 역군이 배출될수 있었다.

 

그러나 이상설(李相卨)은 조국광복을 못보고 1917년 음력 3월2일 연해주(沿海州) 우수리스크(雙城子)에서 48세(歲)의 한창 나이로 천추의 한을 품은채 작고 하였다.

젊어서도 병약하여 몇차례 요양하였던 그는 12년 동안 가족과 떨어져 홀로 해외에서 자기몸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조국광복(祖國光復)에 심신(心身)을 다 바친 까닭에 1916년 부터는 피를 토하는 중병(重病)으로 병석에 누웠다.

 

그리고 1년을 두고 투병하였으나 아무 효험이 없어 임종이 가까워지자

"동지(同志)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孤魂)인들 조국에 돌아갈수있으랴,

내 몸과 유품(遺品)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후 제사(祭祀)도 지내지 말라"는 서릿발 같은 유언(遺言)을 남기었다.

 

임종을 지킨 이동년(李東寧)과  백순(白純), 조완구(趙婉九), 이민복(李敏馥)등은 그의 유언을 쫓아 수이푼하(綏芬河)강에 장작을 쌓아놓고 화장하여 그 재를 강물에 날렸다.

그 강물은 아무르만으로 흘러 조수를 따라 동해(東海)에 다달아 조국강산에 파도치는 것이다.

이때 그의 문고(文藁)와 유품(遺品)도 알뜰이 거두어 불살랐다.

 

그와 가까웠던 독립운동의 동지들은 물론, 나라를 잃은 국내외의 망국 조선인은 누구든지 애통한 심금을 금할길 없었다.

멀리 미국의 신한민보(新韓民報)는 이런 글을 실어 고혼을 조문 하였다.

"시베리아의 바람이 급하고 오소리강의 물결이 목매치니 오호라 우리 공(李相卨)이 길이 갔도다.

만리사절(萬里使節)이 바다를 건널때는 천년국장(千年國章)이 땅에 떨어진 날이다.

성패(成敗)야 어찌 논하리요.

충의(忠義)를 깊이 공경 하노라.

공(公)은 몸을 버렸거늘 우리는 몸을 보존하였으니 한줌에 차는 눈물이 실로 공을 위로함이 아니요, 스스로 슬퍼함이로다.

지금 본국에 명월(明月)이 달렸나니 공(公)의 영혼이 항상 임(臨)하소서"

 

이상설의 위업은 컸다.

그가 작고한 2년 뒤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3.1운동 이라는 거족적독립운동(擧族的獨立運動)이 일어났다.

이상설의 가까운 동지인 이동녕(李東寧), 이회영(李會榮), 조성환(曺成煥), 이시영(李始榮, 이동휘(李東輝)등은 

그의 유지를 계승하여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臨時政附)를 세워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이끌게 되었다.

 

이상설이 오랫동안 망명(亡命)했던 시베리아에서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성립되어 독립결의를 새로 다짐 하면서

일제와의 혈전(血戰)을 선언 하였다.

또한 서북간도를 비롯하여 남북만주 에서는 그동안 양성된 광복군(獨立軍)을 바탕으로 군정부(軍政府)가 세워지고

많은 독립군단(獨立軍團)이 항전체제(抗戰體制)로 정비되어 1920년대의 독립군의 항일전이 펼쳐졌다.

 

미주의 교포들은 독립대회를 열어 세계 여론에 한국의 독립을 외치고 군자금(軍資金)을 모았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민족의식(民族意識)의 새로운 각성과 민족역량(民族力量)의 향상을 꾀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어

한민족의 광복은 보다 밝게 비쳐갔다.(尹炳奭 著  李相卨 傳에서)

 

                                                                                              끝

 

'종합상식 > 인물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0) 2009.02.23
최초의 여성의병 윤희순  (0) 2008.11.14
안중근의사의 일생  (0) 2008.10.06
유엔 사무총장  (0) 2008.05.22
◈ 다른나라사람들이 본 이순신장군  (0) 2008.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