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우리역사

◐ 광개토왕 비문의 백제 여러 성 규명

오늘의 쉼터 2008. 9. 15. 21:16

 

 

◐ 광개토왕 비문의 백제 여러 성 규명

 

 

 

 

<광개토왕 비문>에서 396년에 광개토왕이 공취한 백제 58성은 아래와 같이 비정된다.

 

 

 

1번) 일팔성(壹八城)은 단동시 봉성현 봉황산성(鳳凰山城)이다.

현재는 일면성(一面城)이라고도 한다.

성 둘레는 30여리에 이르는 대성이다.

백제 진사왕(辰斯王)이 쌓은 관방의 최북단인 팔곤성(八坤城)과 관련하여 그 서쪽의 봉황산성을

역시 관방성의 하나로서 일팔성으로 추정한다.

팔곤성은 팔하천(八河川)이라고도 부른 요동반도 단동시 애양현(~陽縣) 관수진(灌水鎭)의

고대보산성(高臺堡山城)으로 추정된다.
곤은 관과 고대모음 "아래아"로서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백제 팔곤성을 고구려에서는 곤팔성이라고 고쳐불렀는데 역시 백제 관방인 팔일성도 일팔성으로

고쳐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백제 관방이나 국경에 팔(八)자가 들어가는 일이 많다.

팔령, 팔령천 등이 그렇다. 따라서 일팔성은 봉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한다.

 봉황성은 고구려 연개소문의 고향이라고도 전하는데 연개소문에 이르러 현재 규모로 커졌을 것이다.

 

2번) 구모로성(臼模盧城)은 수암현(岫巖縣) 동북쪽 황화전(黃花甸)의 노성구산성(老城溝山城)이다.

성 둘레는 약 3리이다.

 대양수(大洋水)의 동쪽 가지에 있는데, 동쪽 가지 계곡을 구곡(九谷)이라 하며

이는 구곡(舊谷)의 변형이다.

부근의 송수구산성(松樹溝山城)은 성 둘레가 5리인데 고구려 때 쌓은 것으로 고려된다.

 

3번) 약모로성(若模盧城)은 애하 변의 구련성(九連城)으로 추정한다.

여기까지 3성은 압록강 북쪽에 있고 이후 성들은 압록강 남쪽에 있다.


4번) 간궁리성(幹弓利城)은 의주시 동남쪽 20리에 있었던 전문령(箭門嶺) 고성(古城)으로 추정한다.

간궁리성의 간궁(幹弓)을 뒤집으면 궁간(弓幹)이 되는데 평안북도 의주 동쪽 삼림(森林)에서는

활의 재료가 되는 궁간목(弓幹木)을 생산하였다.

 궁간은 활대를 말하며 전문령의 전(箭)은 화살을 말하여 서로 유사점이 있다.

이 전문령고성은 의주 동남 20십리에 있던 토성으로서 백제 초기 토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성 둘레는 11600척(4000m)이고, 62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전문령고성의 현재 위치는 의주시 송산동(松山洞), 대문리(大門里) 부근이 된다.

송산동은 금강산과 횡금산 사이에 위치하여 있는데 금강산(金剛山,524m)은 조선시대 송산(松山)이었다.

간궁산, 궁간산弓(幹山)으로부터 금강산(金剛山)이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궁간목은 청천강 이북에서 주로 생산된다.

간궁리성은 의주를 통할하던 백제 대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5번) ○○○ 무명성은 모수성(牟水城)으로 추정하며 의주 서남쪽 백마산성(白馬山城)이다.

현재는 고구려성으로 분류되는데 백제가 먼저 쌓은 것이다.

백마산성은 토성(土城)으로서 내성 둘레가 2590m이고, 외성 둘레는 2430m인데

외성은 조선시대에 세웠다. 

다음은 두비압령한(豆比鴨嶺韓)으로서 피현군(枇縣郡) 용골산성의 위치인데

고구려군은 모수(牟水)=(三橋川)를 건너지 않고 동쪽으로 갔다.

 

6번) 각미성(閣彌城)은 천마군(天馬郡) 각구봉(角拘峰) 남쪽 고영삭진(古寧朔鎭)으로 추정한다.

 토성이 있었다.

 

7번) 모로성(牟盧城)은 천마군 식송진(植松鎭) 고성(古城)으로 추정한다.

 문곡산(門谷山) 아래인데 모로를 문곡으로 바꾼 것이 된다.

 

8번) 미사성(彌沙城)은 천마군 서고성(西古城)터로 추정한다.

서고성은 승암산 아래인데 미사(彌沙)가 사미로 뒤바뀌었다.

사미(沙彌)는 20세 이하의 어린 남자 승(僧)을 의미하므로, 다시 현재의 승암산(僧巖山)으로 바뀌었다.


9번) 고사조성(古舍조城)은 선천군 동림성(東林城)으로 추정된다.

석축과 토축이 함께 있으며 그 둘레는 17560척이다.

고선주성(古宣州城)이었다.

사조가 축약되어 선주(宣州)로 되었다.

수묘인을 바친 사조성(舍?城)은 철산군(鐵山郡)으로 추정한다.

 

10번) 아단성(阿旦城)은 선천군(宣川郡) 대륙산(大陸山)으로 고려한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아단성은 없고 아차성(阿且城)만 두 번 나온다.

책계대왕이 고구려를 막기 위해 위례성(평안남도 평성시)을 수리하고,

사성(평양성) 등과 함께 쌓았고,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끌려가서 죽은 곳이다.

 고구려의 기록이 아단성이지만 본래가 백제 아차성의 오기(誤記)로 추정한다.

아단성과 함께 수묘인을 공출한 잡진성(雜珍城)은 선천군 검산성(劒山城)으로 추정된다.


11번) 고리성(古利城)은 곽산군(郭山郡) 읍성이다.

곽산성, 또는 능한산성(凌漢山城)이라고도 하였다.

석성으로서 성 둘레는 6913척이다.

곽산군(郭山郡)은 고려시대 장리현(長利縣)이었던 기록이 있다.

 

12번) 무명성 0 리성(利城)은 어리성(於利城)으로 추정한다.

능한산성이 당어령(堂於嶺)에 있으므로 그 아래는 어리성으로 추정하였다.

정주군(定州郡) 서주리(西州里)에 위치한 성동산성(城洞山城)으로서

성 둘레는 3만척에 달하는 토석성(土石城)이다.

 

13번) 잡미성(雜彌城)은 정주군 남쪽 제석산(帝釋山)에 위치한

성 둘레 7000척의 육지고성(育地古城)이다.

정주군 오산리(五山里)에 있으며 현재는 익주성(益州城)이라고 한다.

육지성이 익주성으로 변한 것이다. 이 산성은 고구려 때 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백제 고성도 되는 것이다.

그 다음 동쪽은 운전군(雲田郡) 봉두산성(鳳頭山城), 즉 구모객두성(句牟客頭)성인데

고구려군은 이를 지나지 않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14번) 오리성(奧利城)은 구성군 오봉면 조양리 고성지(古城池)로 추정한다.

태천군을 흐르는 오지천천(烏知遷川)과 관련하여 해석한다.

구성군 남쪽 30리에 고성지(古城池)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이 오리성일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위치는 오봉면 조양리이다.

구성군 기룡리(氣龍里)에 니성(泥城)이 있다.

그 부근 지명에 “어미 역(驛)”과 “엄교(嚴橋)” 등이 있는데 어머니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는 수묘인을 바친 오리성의 후신으로 추정한다.

 즉 구성군 오봉면의 오리성이 기룡리에 옮겨져 새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어머니의 방언이 오마니이다.

 

15번) 구모성勾牟城은 운전군 목우산(牧牛山,416m)은 구모산을 뒤집은 이름이다.

또한 수묘인을 공출한 구모객두성(句牟客頭城)은 운전군 가산리 봉두산성(鳳頭山城)으로 추정한다.

봉두산성은 석성이며 성 둘레는 9067척이다.

구모객두는 환12국의 하나인 구모액국(句牟額國)의 후신으로 추정된다.

혹은 구모객두의 기록이 옳고 《단군세기》가 환12국의 이름을 옮겨적으면서 구모액국으로

기록하였을 수도 있다.

 

16번) 고수야라성(古須耶羅城)은 대관군(大館郡)의 읍성 위치에 있던 대삭주성(大朔州城)으로 추정된다.

성 둘레는 4615척의 석성이었다.

 

17번) 무명성 頁은 수추성(須鄒城)으로 추정하며 대관군 수동면(水洞面) 용성리(龍城里) 위치로

추정된다.

첫 글자에 분명 혈(頁)자가 보이는데 이는 고어체에서 수(首)를 대신한다. 

 

18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귀성군(龜城郡) 북쪽 굴룡산 산성으로 추정한다. 

석축으로 성둘레는 1만 50척이었다.

 

19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귀성(龜城)으로 추정한다. 

석축으로 성둘레는 1만 1만2335척이다.

 

20번) 분이야라성(分而耶羅城)은 두 강역을 나누는 성으로 추정한다.

 태천泰川의 동쪽, 퇴라산고성(退羅山古城)으로 추정한다.

 성 둘레는 6674척이다.

 퇴라산은 지령산(地靈山,300m)로 바뀌었다. 
 

21번) 무명성성은 알 수 없다.

 

22번) 무명성○○은 박천군(博川郡) 박릉성(博陵城) 위치로 추정된다.

 

23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안주읍 고성은 석성으로서 6050척이었다.

 

24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사성(蛇城)으로 추정된다.

 개천의 고사산산성과 관련될 것이며 고사산산성은 성둘레가  3만6761척으로 대성이다.

 

25번) 두노성豆(奴城)은 문덕군 대니면 마두산(馬豆山,536m)의 서쪽 일대로 고려한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에 주둔한 마읍산(馬邑山)도 이곳이다.

고려 때에 안술진(安戌鎭), 혹은 (安仁鎭)이라고 쌓은 해변토성(海邊土城)의 위치로 보며,

당시에 성 둘레가 2490척이다.

 

26번) 비성(沸城)은 숙천군(肅川郡) 고읍성으로 추정한다.

성 둘레는 4050척의 토성이다.

 

27번) 무명성  0 이성(0 利城)은 비리성(比利城)으로 추정한다.

숙천군(肅川郡)의 접무봉(蝶舞峰,340m) 남쪽, 호전성(虎田城)이다.

숙천읍 동쪽 20리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호전성은 토성으로서 성 둘레는 9710척이다.

비리는 피리로 읽어서 한자어로 호적(胡笛)으로 바뀌어 다시 호전성(虎田城)으로 바뀌었다.

호전성의 산봉우리는 역시 피리봉을 바꾼 호적봉에서 호접봉(胡蝶峰)이라고 바뀌어서 다시

오늘날의 접무봉(蝶舞峰)으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현재의 접무봉과 접무봉 기슭 아래 호전성은 둘 다 한자어 호적(胡笛),

즉 우리말 피리에서 유래한 것이다.


28번) 미추성(彌鄒城)은 평원군 영유현 위치의 태조산 남쪽 미두산성(米豆山城)으로 추정하였다.

미두산성은 토성으로서 둘레는 4380척이다.

둘레가 1820척이 되는 고소토성古(小土城)이 영유현 자리에 있었는데 온조(溫祚) 도래 당시의

미추홀이고, 미추산성은 비류의 후예들이 도래하여 지어진 산성일 것으로 추정된다.

 

29번) 야리성(也利城)은 자모산성(慈母山城)으로 추정한다.

평성시 어중리(御重里)에 있다.

성 둘레는 5Km이며 99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 대성이다.

내성이 북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내성이 백제 성으로 추정된다.

아리, 또는 야리는 다 알을 어원으로 하며 어머니를 의미한다.

미추성이 바라보이는 자모산성은 《삼국사기백제본기》의 부아악(負兒岳)으로 추정하는데,

부아악의 뜻은 아이를 업은 자애로운 어머니 산이다.


30번) 대산한성大(山韓城)은 백제 국성이었던 대동강의 북한산성 안학궁이다.

  

31번) 소가성(掃加城)은 평성시 소사산(蘇射山,354m)과 관련된 성으로 추정하는데.

 그 북쪽에 니성(泥城)이라는 성 둘레 1250척의 작은 토성이 있었다.

 이하는 대산한성 안학궁이 함락되면서 대동강 이북에 위치해서 항복해서 얻은 성들일 것이다.

 

32번) 돈발성(敦拔城)은 한자를 풀어서 발이 족(足)으로 바뀌었다고 보면,

 대성산성 북쪽의 대동군 자족면(紫足面)이 된다.

돈(敦)이 돈(豚), 시(豕), 시(柴), 자(紫)로 바뀌는 과정을 추정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대성산성 동북쪽 산사면에 대성산성과는 다른 토성이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토성 둘레는 5160척이라고 하였다.

이 토성의 위치가 바로 자족면(紫足面)이며, 백제가 쌓은 토성으로서 돈발성으로 추정된다.

즉 대성산성의 전신이다.


33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34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35번) 루매성(婁賣城)은 청암동 토성이다.

노성(魯城)이라고도 하였다.

 

36번) 산나성(散那城)은 고방산 산성(高坊山 山城)으로 추정한다.

성 둘레는 4Km이다.

 

37번) 무명성  0루성(○婁城)은 청호동 산성(淸湖洞-山城)으로 추정한다.


38번) 세성(細城)은 평양시 삼석구역 손자산(孫子山,356m) 남쪽 삼성리(三成里)로 추정한다.

 고성은 알 수 없다.   

 

39번) 모루성(牟婁城)은 평성시(平城市) 한왕리(漢王里) 고성(古城)으로 추정한다.

 

40번) 우루성(于婁城)은 첫자가 희미하지만 대개 우루성으로 해석한다.

우륵지(于勒池)가 있던 평원군 노지면 대주리(大州里)로 추정한다.

우륵지는 거문고를 타는 가야인 우륵이 왔던 곳이 아니라 우루지(于婁池)의 와전으로 추정된다.

우루지에 고성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41번) 성(城)은 증산군(甑山郡) 함종면(咸從面) 고읍성으로 추정한다.

석성이며 성 둘레는 4334척이다.

 산성도 있는데 역시 석축이며 2246척이다.

함종(咸從)은 비류의 백성들이 비류가 죽고 온조 땅에 건너올 때 낙종(樂從)했다는

백제 건국기의 기록과 관련될 것으로 본다.


42번) 연루성(燕婁城)은 평안남도 용강군 어을동토성으로 추정한다.

 황룡산성은 오석산(烏石山,566m)을 중심으로 쌓은 성 둘레 6620m의 대성이다.

그 서쪽의 어을동토성(於乙洞土城)은 성 둘레 1212척의 토성으로서 평산군 신사비가 발견된 곳이다.

 

43번) 석지리성(析支利城)은 용강군(龍岡郡) 삼화읍 고성(三和邑 古城)으로 추정한다.

토축이며 성 둘레는 4630척이다.

 

44번) 암문지성(巖門至城)은 평안남도 용강군 암성면(巖城面)이다.

 암성리(巖城里)가 남아 있다.

고성은 알 수 없다.

 

45번) 임성(林城)은 평안북도 염주군(鹽州郡) 성림성(城林城)으로 추정한다.

 

46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47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무명성()()()은 잡진성(雜珍城)으로 추정되며

그 위치는 선천군(宣川郡) 검산성(劒山城)이다.

 

48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49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50번) 취추성(就鄒城)은 알 수 없다.

 

51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52번) 고모루성(古牟婁城)은 알 수 없다.

 

53번) 윤노성(閏奴城)은 알 수 없다.

 

54번) 관노성(貫奴城)은 압록강 북쪽 관전현(寬甸縣)으로 추정된다.

 

55번) 삼양성(三穰城)은 평양시 삼석구역 삼성동으로 추정된다.

 

56번) 무명성○○은 미성(味城)으로 추정한다.

 영변군 약산성(藥山城)으로 추정한다.

영변읍 고성은 철옹성으로서 4성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중 가장 오래된 성 둘레 1Km의 약산성(藥山城) 고성으로 추정한다.

영변은 밀운(密雲)성이라고도 하였었다.

그래서 미성이었을 수 있다.

 

57번) 무명성()()() 나성(羅城)은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으로 추정한다. 

영변군 고무주성(古撫州城)으로 추정된다. 

토성으로 성둘레는 5947척이다.

영변군에는 단군시대 모한(慕韓)이 있었다.

 

58번) 구천성(仇天城)은 순천시 은산(殷山)이다.

북쪽 천성산(天聖山)이 구천성(仇天城)이 된 것이다.

구천성은 은산의 고읍성으로 추정되는데 토성이며 성 둘레는 5168척이고 우물 9개와 연못 3개가 있었다.

천성산 꼭대기에 고구려, 백제 시조 동명왕의 마적(馬跡)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온조대왕의 마적과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