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우리역사

백악산아사달 대전자문화

오늘의 쉼터 2008. 9. 7. 16:41

 

백악산아사달 대전자문화bc2049~bc1285

6세 달문, 7세 한율, 8세 우서한, 9세 아술, 10세 노을, 11세 도해,

12세 아한, 13세 흘달, 14세 고불, 15세 대음, 16세 위나,

17세 여율, 18세 동엄, 19세 구모소, 20세고홀, 21세 소태 단군.....

 

 6세 단군 달문은 우가였는데 5세 단군 구을을 축출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단군 구을이 마한 땅에 나가서 묻혀야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마한 땅에서 일어난 일인데 번한에서 이 사건에 개입하여서 군사를 보내어 경호했다고 하였다. 
단군 달문은 35년 후에야 여러 제후들을 구월산에 모아서 정식으로 즉위하고 백악산아사달로 천도했는데 

이는 본래 우가의 고장으로 소밀랑이라고 하던 곳이다. 

 

그리하여 백아강(마한)은 저울그릇, 소밀랑은 저울대, 안덕향(번한)은 저울추라는 신경 예찬의 노래가

지어졌다. 

우가 달문의 새수도 소밀랑은 소의 물이라는 뜻이다.

이미 신석기 유적지중에서 우하량 유적지가 대릉하 최상류에 있으니 대릉하가 단군 시대에 소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릉하의 가지중에 망우하(牛河)가 있는데 이는 숫소물이라는 뜻이다.

 내몽고 오한기(敖汉旗)에서 내려와 요녕성 조양시 동쪽에서 대릉하로 합쳐진다.

 

요나라는 여기 망우하 상류에 백천주(白川州)={북표시(北票市) 흑성자(黑城子)}를 두었는데,

그 북쪽 최상류에 북천주(北川州)까지 두었던 것이 <거란지리도>에만 나온다.

북천주는 금나라때의 천주(川州)라고도 한다.

 

 


 

 

금나라 때 만들어진 거란지리도를 보면 백천주는 북표시 흑성자이고 무평주는 무안주이며

다른말로 신주인데 지금 오한기(敖汉旗) 소재지다.

(무안이라는 한자 말과 오한이라는 한자 말은 모두 우한으로 발음한다.)

원주는 현도군 위치다.

성주는 부신시 홍모자성이다.
이를 위성지도에 표시하면 아래와 같은데 북천주가 바로 백악산아사달이다.

 

 

이 북천주 위치인 현재의 오한기(敖汉旗) 대전자향(大甸子)에서 엄청난 고고학적 발굴 결과가 있었다. 

약 4000년전부터 3000년전 사이에 만들어진 대전자에서는 참호를 판 성지 내에 백성들의 거주지와

궁전터가 발굴되었다.


아울러 800개의 묘장이 발굴되었는데, 그중에는 중국 최초의 황금 장식 귀걸이가 있었다.
그외 1600개의 도자기는 생활 도기가 아니라 매우 예술적인 것으로서 제기. 술잔 등이었고

이때 붉은 안료는 옷나무 칠로서 중국 최초로 칠기(漆器)를 만들기도 했다.

이 칠기 기술과 채도의 문양은 용산문화와 은나라에 계승되었다.



 

칠기와 금속 공예가 발달한 백악산 아사달은 최고 예술의 도시다.

그외 다양한 옥기와 청동기가 있었는데 청동기는 모두 57건이며 그중 41건은 귀걸이었는데

이들은 순동이 아니라 시라무렌에서 나온 주석을 함유한 청동이었다.

구리칼(铜刀)도 있었는데 이는 주조를 한 후에 단조하여 만들었다.

 겉에는 주석이 함유된 철광석 안료를 사용했다.

그외 보석 마노를 이용한 잔도 있었다.
생물 부장품으로는 개머리와 돼지머리 등도 있었다.

 

이중 개의 유전자는 현재 일본 오키나와의 류규견(琉球犬)과 유전자가 완전 일치하여

단군시대의 일본교류를 증명해준다.

 

3세 단군 가륵 때에 동해안 두지주의 예읍이 반란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를 베었는데

그 후손 중에 협야노가 일본 삼도에 갔다고 하였다.

"소시모리"는 일본서기에도 등장한다.

동해안에 정평군이 파지성이었고 함흥이 두지성으로 추측되며 그곳이 훗날 우수국이 되었다.

 

[삼국사기지리지] 중의 고구려편에서

우수주가 바로 동해안 함흥이며 이때 이미 함흥에서 일본 시마네현으로 가는 뱃길이 있었다.

고분에서 나온 두 마리 개의 소측정 연대는 각각 bc1695±130年,bc1735±135年으로서

이 문화지의 연대가 4000년전에 만들어진 것을 확증 시켜준다.


즉 이곳은 어느 문화지와 비교할 수 없는 대량 청동기 발굴 문화지로서 그 예술 수준은 왕도를

보여주고 있는데 중국에서도 감탄하여 세계적인 고편(海内外孤篇)이라고 명명하여 부른다.
이것이 바로 단군시대 천년수도 백악산 아사달이며 풍요의 도시이고 예술의 도시이다.

 

 

 

그러나 궁성지는 제사시설을 포함한 더 큰 산성으로 감싸여져 있다.

산성의 이름은 월명구다.

소밀랑성으로 천도한 우가 달문을 한자로 바꾼 것이 월문인데 훗날 월명으로 와전된 것으로 고려된다.
서북쪽에는 고구려 신성이었다가 요나라 무안주가 되었던 무안주성터가 있다.

무안주에는 개몰리수가 있었는데 이는 개모성을 의미한다.

그 바로 북쪽에서 구택도(狗澤都)라는 명문이 새겨진 도기가 출현했다. 

발해는 개모성을 진주(辰州)라고 이름붙였다. 

진주는 진한(辰韓)에서 유래했다고 요사에 기록되었다.

 진한(眞韓)은 환인,환웅의 신시 아사달을 의미하며 고조선의 백악산 아사달은 진한(辰韓)이라 했는데 

우리 고어 발음에서 별 신(辰)이 있으니 신한으로 읽어야 옳을 것이고 그래서 고구려는 신성(新城)이라 

했던 것이다.

한편 구택도는 전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청구의 구(邱)를 의미할 수도 있다.

건너편이 바로 청구성이다.

진시황 때에 남쪽의 낙랑성과 청구성까지 함락되어 진나라 만리장성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청구인들이 물러나와 만든 것이 구택일 수 있다. 

환웅천왕은 중국에서 구려왕(九黎王)이라고 하였다.

환웅천왕이 청구성 사람들을 데리고 중국 산동반도의 청구로 옮겨가서 용산문화를 만든 것인데 

남아있던 청구인들도 스스로 구려(九黎), 구택(狗澤)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신시 현도군의 구려(句麗)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물론 청구의 구려인들이 현도군의 구려로 이주했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서 백악산 아사달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물이 망우하, 즉 숫소하, 소물이라서 소밀랑이다.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는 백천이라고 하였었다.


백악산아사달의 북쪽 평원은 우고토牛古土라고 하는데 우가 지역이라는 뜻이다.

한편 백악산 서북쪽에 역시 청동기 시대 산성터가 발굴되었는데 오한기(敖汉旗) 

살리파향(萨力巴乡) 하라구촌(哈拉沟村)에 위치한 성자산(城子山)이다.

이곳에서는 동북 최대의 제사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산정부에 석축을 둘러 쌓은 것이다.

 

동쪽으로는 요나라 강성주(降聖州0 성이 있는데, 요나라 태조비가 신인에게 납치되어서 

애를 가졌고 그애가 자라서 요나라 태종이 되었다고 전한다.
산성의 총 둘레는 1310m이고 9개의 문이 있다.

그 안에 돼지머리를 조각한 거대석이 있다.



돼지머리 조각 거대석 좌우 모습

 

8세 단군 때에 벼농사가 흥하였다.

   이때는 밭에 심는 벼로 고려된다.
11세 단군 때에 신시아사달에 환웅을 모시는 대시전을 세웠다.
또한 이때부터 송화강에 관청을 두고 동북방을 개발하였다.
12세 단군 때에 요하 남쪽에 순수관경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는 금주시 남쪽일 것으로 고려된다.
13세 단군 때에 오성취루(五星聚婁)의 기록이 있다.

   이는 초저녁에 수성부터,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 다 보였다는 것인데 실제 계산과 4년 차이가 있다.

   아무튼  이 기록이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면 <죽서기년>에 의한 은나라 멸망 기록은

   다시 <사기> 기록과 일치하는 <단군세기> 기록으로 연대를 고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