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우리역사

단군조선 고대산문화 (청동기시대)

오늘의 쉼터 2008. 9. 7. 16:08

단군조선 고대산문화bc2300~bc2049 
단군 왕검, 2세 부루, 3세 가륵, 4세 오사구, 5세 구을 단군

 

1. 단웅의 단목국 평양성  

2. 왕검의 궁홀산 금미달과 고대산문화

3. 장당경, 평양성, 험독성과 마한성 등

 

기원전 2830년, 13세 사와라 환웅 때에, 배달국의 왕비족이었던 웅녀 여왕의 후손 려(黎)가

단목국(檀木國) 왕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460년후 단목국 왕검 단웅(檀熊)이 웅씨왕녀에게서 아들 단군(檀君)을 얻으니 기원전 2370년이다.
단군은 14세에 웅씨왕의 비왕으로 임명되어 24년간 섭정하다가 웅씨 왕국 왕검에 올랐다.
그해, 2333년 단목국에 들어가 구환족(九桓族)을 통일하고, 대표 왕검인 [신한辰韓]으로 등극하였다.
신인 왕검이 800명과 함께 단국(檀國)으로부터 아사달(阿斯達)의 단목지허(檀木之墟)로 와서

국인들의 추대로 천제가 되었다.

 

 

1.  단웅의 단목국 평양성

<단군세기(檀君世紀)>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고 어머니는 웅씨왕녀이며 bc2370년 박달나무 밑에서 태어났다.

14세가 되어 웅씨의 왕은 그를 비왕으로 삼았고 대읍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bc2333년 왕검은 단국으로부터 아사달 단목지허(檀木之墟)에 이르러 단군으로 즉위하였다.

비서갑(斐西岬)의 하백녀(河伯女)를 거두어 아내로 삼았다."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에서 기록은 다음과 같다.

"13세 사와라(斯瓦羅) 환웅의 초기에 웅녀군(熊女君)의 후손으로 여(黎)라는 자가 있어 왕검(王儉)으로

책봉이 되어 단허(檀墟)에 봉토를 받았다.

460년 뒤에 왕검 려(黎)의 후손에서 신인 왕검(王儉)이 태어나 웅씨왕의 비왕(裨王)이 되어 대읍을

다스리는 것을 섭정하였다.

 

왕검은 비왕으로 24년을 지냈다.

그후 웅씨왕이 전사하자 신인 왕검이 대신하여 구환(九桓)을 통일하고 단군 왕검이라고 하였다.

단군 왕검은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思達)에 조선을 세워 개국하였고 국토를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통치하고 진한(辰韓)은 스스로 통치하셨다."

 

윗 글로서 유추하면 기원전 2830년,

 13세 사와라 환웅 무렵에, 웅씨의 후손 려(黎)가 태어나 단목국(檀木國) 왕검(王儉)으로 임명되었다.

환웅국은 치우 환웅 때에 이르러 수도를 산동반도 태산 동쪽 용산으로 옮겨가고, 권력의 공백이 일어난

동북아시아에는 여러 소국들이 남아 있었다. 

460년후, 소국중의 하나인 단목국이 커지고, 왕검 려의 후손 중에서 단웅(檀熊)의 아들이

단군(檀君) 왕검(王儉)으로 태어나니 기원전 2370년이다.

단목국은 아래에서 비정한 철령시(鐵嶺市)가 되고, 왕검은 소읍이던 청천강 마한에서 태어나

14세에 비왕이 되어 24년간 섭정하다가 부왕을 계승하여서 철령시 단목국의 왕이 되고,

마침내 천산 신시의 신시씨를 밀어내고, 만주를 재편한다.

또 달리호(達里湖)변의 비서갑을 쳐서 하백녀를 부인으로 얻고,

서남쪽의 치우 후손 치두남과는 타협하여 번한으로 삼아서 만주 통일,

구환(九桓) 통일의 과업을 이룬 것이 된다.

 

왕검의 아버지 나라인 단웅의 단목국(檀木國)은 342년 고구려 고국원왕때 환도성(丸都城) 남쪽에서

전연군(前燕軍)에게 패하여 고국원왕이 도주한 단웅곡(斷熊谷)을 단서로 추적한다.

단웅곡(斷熊谷)은 본래 단웅곡(檀熊谷)인 것이다. 

현재 조병산시(調兵山市)다.

동천왕이 이곳에 평양성을 세웠고, 고국원왕은 이 평양성에서 백제군에게 전사하였다.

요나라 때 이 부근에 단주(檀州)를 두었다가 기주(淇州)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는 발해 환주(桓州) 기수현(淇水縣)과도 관련된다.

<신당서>에서는 이 기수현을 구도현성(九都縣城)이라고도 하였다.

여기는 단목국 왕검 려나 단웅의 구택이 된다. 

 

한편 단군 44세 단군 구물 시대에 해성에 이궁을 지어 역시 평양(海城平壤)이라고 하였다.

46세,47세 단군의 수도였다.

 

즉 단군시대 평양이 두 개라는 것인데 하나는 해성이며 이는 지금의 조병산시인 것이다.

북부여시대에는 해성을 평양도사(平壤道使)에 속하게 하였다.

즉 또하나의 원래 평양이 부활한 것이다.

 

<단군세기>에서 4세 단군 오사구 때 평양성을 쌓은 기록이 있다.

이는 법고시 서북 한대산(韓大山)이 되며, 고구려 환도성(丸都城), 발해 환주(桓州)에 해당한다.

즉 법고시 서북 한대산이 4세 단군 오사구때 쌓은 새로운 평양성이고, 

왕검 려와 단웅, 왕검의 단목국 수도 평양은 뒤에 해성이라고 하던 조병산 위치다.

 

 

환도성 한대산 새 평양 위치와 단웅곡이었던 구도성 조병산 평양성 위치

 

 

환도성 평양과 해성 동천왕 평양과 단목국과 궁홀산금미달

 

 

 

단가구는 단목국성, 고려구는 동천왕평양성, 쇄룡구는 고국원왕증축성, 성자산이 해성 평양으로 고려된다.

 

 

2. 왕검의 궁홀산금미달과 고대산문화

구환을 통일하고, 환인의 신시 아사달에 가서 제천행사를 치르고 즉위하여 조선을 개국한 단군 왕검은

단목국 고향으로 돌아와 진한조선(辰韓朝鮮)의 첫 수도를 다시 만들었다.

 

<삼국유사>에서는 

조선의 평양에서 개국하였고, 다시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思達)로 옮겨 1500년을 지냈다고 전한다. 

이를 궁홀산 금미달 (弓忽山今彌達)이라고도 하였다.

여기서 평양성은 단목국 수도로서 앞에 이미 밝혔는데 법고시이다.

 

단군 왕검의 새 수도를 찾기 위해서

요나라지리의 동경도(東京道) 한주(韓州)와 상경도(上京道) 봉주(鳳州)에 주목한다.

[요사]에서 동경도 한주와 상경도 봉주는 고리국(藁離國) 고지라고 하였다.

이에 반하여 동경도 집주(集州)는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 하였다.

집주는 한나라 때 험독현(險瀆縣)이었고 고구려 때는 상암현(霜岩縣)이었다.

 

集州 懷衆軍下刺史 古陴離郡地 漢屬險瀆縣 高麗爲霜岩縣 渤海置州

 

비리의 비(陴)는 보좌의 의미가 있으므로 고리국의 속국인 것인데, 위만의 수도였으며

그 위치는 금주시(錦州市) 동북쪽 왕만구(王滿溝)이다.

왕만구는 목엽산에 의지하고 있다.

이를 요나라는 심양시 동남쪽으로 옮겼다.

[요사]의 비리군지(陴離郡地)가 서우여의 기자조선(奇子朝鮮)이었고 뒤에 중국 기자를 거쳐

위만의 수도가 되었으므로, 고리국(藁離國)은 단군왕검의 고조선 중 전단군조선(前檀君朝鮮)에 해당한다.

한편 [후한서-부여전]에 소개된 색리국(索離國)은 22세 단군 색불루(索弗婁) 이후의

후단군조선(後檀君朝鮮)에 해당한다.

 

즉 고리국(槀離國) 은 전단군조선, 색리국(索離國)은 후단군조선, 비리국(陴離郡)은 기자조선을 의미한다.

후단군조선을 무너뜨리고 색불루의 북부여를 차지한 해모수(解慕漱)는 본래 고리국인(藁離國人)이라고

하였으니, 역시 전단군조선의 후인이라는 뜻이다.

 

먼저 단군조선의 수도였던 고리국고지 한주와 봉주의 위치를 찾는데 [요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한주 동평군(東平軍)은 자사를 두었고 본래 고리국(왕검조선)의 옛 수도(治)였다.

한주 유하현(柳河縣)은 고구려 막힐부(鄚頡府)였고 고구려는 막(鄚), 힐(頡) 2주를 두었고 발해는

그대로 따랐다. 

 

韓州 東平軍下刺史 本 槀離國 舊治 柳河縣 高麗置 鄚頡府 都督 鄚頡二州 渤海因之。

今廢。太宗置 三河、榆河二州。聖宗 幷二州置。隸延昌宫,兵事属 北女直兵馬司。

統縣一: 柳河縣。本渤海粤喜縣地,幷萬安縣置。

 

이후 요나라 태종은 한주에 삼하, 유하 2현을 두었고, 성종은 다시 합쳐서 연창궁(요국 목종의 후예)에

식읍으로 주었고 군사제도는 북여직병마사(북여직병마사 본부는 요주, 당시 신민시 공주둔 요빈탑)에

속했고, 두 현을 통일하여 유하현을 두었다.

 

한주는 네 번이나 옮겨서 결국 동북방으로 옮겨가서 사평시(四平市) 이수현(梨樹縣)에 귀착했으나

처음 생길 때는 북여직병마사가 있던 요주 부근이었던 것이다.

 

세 번째 한주 위치는 금나라 한주자사(韓州刺史) 동경(銅鏡)이 발굴된 창도현(昌圖縣) 팔면성(八面城)이다.

이는 중국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이 팔면성(八面城) 부근에는 금나라 때에 단군왕검의 단금상(檀金像)이 남아 있어서 [요동행부지]에서

단군상에 공양을 드렸다.

 

팔면성은 44세 단군 구물(丘勿)의 영지였던 백민성(白民城)의 현재 이름이다.

팔면성 서쪽 곡가점(曲家占)의 흑성자(黑城子)=(성둘레 2400m)가 바로 단군시대 백민성의 흔적이다.

흑성자와 팔면성 사이에 쌍성(雙城) 고성도 남아 있다.

단군 구물은 백민성(현재 팔면성)에서 기병하여 장당경을 차지하고 44세 단군이 되었다.

팔면성 동남쪽의 구가둔(丘家屯)은 그의 능터일 수 있다.

 

두 번째 한주는 내몽고 통료시(通遼市) 과이심좌익후기(科爾沁左瀷後旗) 호탄소목(浩坦蘇木)

격월성(格月城) 고성으로 주장되고 있다.  

 

아무튼 첫번째 한주 위치, 고리국 수도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같은 고리국 수도 위치인 봉주는 요나라 남왕부 오막이 통치했다.

 

 鳳州 槀離國故地 渤海之安寧郡境 南王府五幙分地  

 

요나라 남왕부오막의 땅은 수주(遂州)도 있었는데 수주는 발해 고주(高州)였으며

그 위치가 단주 서쪽 200리로 드러나 있다.

 

遂州.本高州地,南王府五帳放牧於此.在檀州西二百里,西北至上京一千里.戶五百.


<신당서>에 의하면 발해 막힐부에 막주와 고주 두 주가 있었으니, 

 

 鄚頡府 領 鄚、高二州

 

한주 유하현이 본래 고구려 막힐부였다는 설명과 다시 합치된다. 

단주(檀州)는 훗날 요나라 기주(祺州)로서 기록되었고

 

 祺州; 太祖以檀州俘於此建檀州,後更名.隸弘義宮,兵事屬北女直兵馬司

 

기주, 즉 단주는 요나라 소탑의 비문 해석으로 인해서 오늘날의 법고시(法庫市) 동쪽

화평향(和平鄕) 고성으로 확증되었다.

이에 수주(遂州)는 창무시(彰武市) 북쪽 사합성(四合城) 터로 중국학계에서 추정하고 있다.

 

위 지도에 정확한 기주성과 그로부터 항공거리 80Km지점이 표시되었다.

이 부근에서 1차 한주를 찾으면 창무시 동편에서 대덕향(大德鄕), 후신추(後新秋), 흥륭보(興隆堡)로

이루어지는 삼각형 안에 “한주(韓州)”의 이름 흔적이 “한가(韓家)”다.

그 아래 고가는 막힐부 고주의 후신인 고가(高家)이고

동쪽 봉황성이 봉주의 후신이고 마종산은 홀본성이 있었다. 

그 북쪽의 목두구가 막힐부 막주성터가 된다. 

단군 왕검의 수도 궁홀산금미달의 궁홀산은 위자구 서북쪽 일관수산이 되고 금미달은 봉황성이 된다.

 

 

봉황성이 봉주, 한가가 한주, 고가가 고주, 조양구가 횡주, 마종산이 마리산 홀본성, 목두구가

막힐부 막주 위치로 추정된다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 동북권(東北卷)]에서

명나라 홍주참(洪州站)이 있었는데 이곳 후신추(後新邱(秋) 남쪽 토성자로 비정했다.

대략 사합둔(四合屯) 토성이다. (지도에 밑줄 표시)

 

1차 한주는 명나라때 홍주참이 되었는데, 홍주는 홍범구주(洪範九州)의 모태가 된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처음으로 가르친 단군 왕검의 수도 궁홀산금미달이었던 것이다.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남긴 음양오행의 요체인 홍범구주가 사실은 단군의 아들 부루(扶婁)에게

도산(塗山)에서 배워서 홍익인간(弘益人間)을 그대로 베낀 것인데 이는 [서경(書經)]으로 알 수 있다.

 홍익(弘益)이 홍범(洪範), 弘範으로, 인간(人間)이 구주(九州)로 바뀐 것은 단지 제목만 비슷한 뜻의

글자로 바뀐 것이고 내용은 똑같은 음양오행의 치세원리인 것이다.

 

단군 왕검이 돌아가신 궁궐 이름도 유궐(柳闕)인데, 지금 그곳의 강물 이름이 또한 유하(柳河)다.

요나라의 한주 유하현(柳河縣)이 훗날에 멀리 옮겨갔지만 남아 있는 그 강물 이름은 옮기지 못했으니

유하는 오늘에도 옛이름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명나라 홍주참이자 고리국고지였던 조양구 일대가 단군왕검이 돌아가신

수도 궁홀산금미달로 비정된다.

 

이 궁홀산금미달의 서쪽에 창무시 흥륭산에 평안보(平安堡)에서 소위 고대산문화(高臺山文化)

유적지가 나타난다.

고대산 문화는 처음에 신민시 고대산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 문화로 인하여 이름붙여졌는데,

적봉시 하가점(夏家店)에서 유명한 신석기시대 홍산문화의 채도문화(彩陶文化)를 뒤엎어버리는

무문토기 홍도(紅陶), 갈도(褐陶) 등 미송리형 단지가 나타나는 청동기시대 문화다.

 

즉, 적봉 중심의 환웅 배달 홍산문화를 창무의 단군왕검의 고대산문화가 대체하는 것이다.

흥륭산 평안보는 신민시 고대산과 매우 가까우며 도기 형태로 보아서 똑같은 고대산문화에 속하지만,

신민시에서는 미처 나타나지 않은 청동귀걸이, 청동칼이 매장되어 더욱 뛰어난 문화였다.

 

고대산 문화 조기 유적의 연대는 발굴 결과 1990년대 기준으로 약 4355년전 전후로서

단군 왕검 조선의 시작 시대인 4338년전과 거의 일치하며,  문화적으로는 직복(直腹) 형식의

세발 솥을 만들어서 적봉 등지의 홍산문화와 조양시(朝陽市)의 위영자문화(魏營子文化) 속으로 퍼뜨렸다.

 

즉, 이 지역은 홍산문화로부터 채도문 문화를 받기만 하다가 거꾸로 간결한 무문토기 등의 문화를

홍산 쪽으로 퍼뜨린 중심이 된 것이다.

 

고대산문화는 신민시 고대산보다도 창무시 평안보유지에서 더 특징적인데

삼족기(三足器)와 골제(骨製) 무기, 석제 무기, 그리고 철치형 동도(凸齒銅刀)와 구리 귀걸이 등이

발굴되었다.

구리 귀걸이가 나온 유적지 시기는 평안보 제3기로서 bc1700년 정도로 분석되었고,

삼족기가 출현한 시기는 평안보 제2기로서 bc2355년 경이었다.

 

이곳이 바로 단군 왕검이 돌아가신 봉정(峯亭)의 유궐(柳闕) 부근인 것이며

단군왕검의 새수도 궁홀산금미달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고리국고지 고조선이 막힐부 막주(鄚州)가 되는 것은 후단군시대에 색불루 단군이 시라무렌강의

녹산 아사달로 천도하면서 이곳에 구도에는 막한(鄚韓)을 두어 다스렸기 때문이다.

그후 막힐부 막주가 된 것이며 막의 의미는 마리, 머리의 의미가 있으니 마립간이 그 파생어가 된다.

 

[규원사화(揆園史話)]에 인용된 [진역유기(震域遺記)]에 의하면

단군왕검은 아들 부소(夫蘇), 부우(夫虞), 부여(夫餘)에게 각각

서쪽 의 구려(句麗)와 진번(眞番), 부여(夫餘)를 주었다.

 

[규원사화] 기록은 [한단고기]에 비하여 연대가 정확하지 않으나, 지명이 풍부하다.

진번(眞番)은 신시였던 아로과이심기(阿魯科爾沁旗) 천산(天山) 백성자(白城子)다.

신시씨의 소발굽점 흔적이 오이길목륜강 상류 부하문화(富河文化) 유적지에 남아있다.

소발굽점에 의해 글을 발생시키고 거란의 선조가 된다.

 

부여는 오르도스 고원으로부터 알유인(猰猶人)들의 침범을 자주 받는데

임서현(林西縣)의 쌍정점(雙井店) 아래 요주성(饒州城) 부근이다.

신석기시대 환웅-웅녀의 전설이 발굴된 나리사대 유적지와 부여신으로 추정되는

생육여신상이 발굴된 곳이다.

고대에 금속을 캐던 동광(銅鑛)도 발견되었다.

 

구려(句麗)는 [전한서]에서 현도의 동남쪽인데 오늘날의 부신시 사해문화 지역이다.

한편 노합하(老哈河) 중류에 위치한 오한기(敖漢旗) 고로판호(古魯板蒿) 부근에서

도기에 �글자로 새겨진 “구택도(狗澤都)”라는 명문이 발견되었다.

 

오한기는 고구려 신성이 있던 곳이고 요나라 신주가 있던 곳이고 이곳에는

개몰리수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개몰리수가 바로 구택과 관련되고 개모성과 관련된다.

 

따라서 교래하(敎來河)가 구려의 중심물이고 동쪽으로는 유하 상류, 서쪽으로는 노합하까지가

옛 구려 영역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두 개의 구려가 나타났는데 오한기 구려는 후단군시대에 부신시 구려가 옮겨간 곳으로 보인다.

 

단군 왕검은 40년 뒤 왕자 부여를 북쪽 우수홀(牛首忽)로 보내고,

태자 부루를 임검성(任儉城)={임나(任那)=장무시(彰武市)}에 살게 하고,

부소는 낙랑홀(樂浪忽)={적봉시(赤峰市) 팔리한진(八里罕鎭)}을 다스리게 했다.

이는 34세 단군 오루문의 수도였다.

부우에게 장당경(藏唐京)을 감독하게 하였다.

 

단군왕검은 웅씨족장 웅백다로 마한(馬韓)에 책봉하고,

치우의 후손 치두남으로 번한(番韓) 험독부(險瀆府)={흥성시(興城市) 홍애자(紅涯子)}에 책봉했다.

별도로 치우씨 후손에게는 남서쪽 남국(藍國)={난하(灤河)}을 주고,

신지씨 후손에게는 동북쪽 숙신肅愼(=장춘長春)을 주고

고시씨 후손에게는 청구靑邱(=적봉赤峰)을 주고,

주인씨에게는 개마蓋馬(=길림성 매하구梅河口)를 주었다.

 

2세 단군 부루(扶婁)는 유주(幽洲)와 영주(營洲)를 복속시켰다.

유주는 북경시北京 계현(薊縣), 영주는 하북성 무녕현(撫寧縣) 부근이다.

 

3세 단군 가륵嘉勒은 서울을 구월산(九月山)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

이때 동생 가록을 신시에 봉하여 사달왕이라고도 하였다.

그래서 가록산이 아로과이심기 천산진 북쪽에 생겨났다.

 

상춘의 구월산 장당경은 뒤에 44세 단군 구물에 의해 대부여조선의 수도가 되었고 그 뒤에는

 고주몽의 수도가 되었다.

고력산(古歷山)이라고도 했는데 고대 역사가 남겨져 있는 곳이고, 장당경은 고대 역사를

돌에 기록하여 보관하던(藏-唐) 곳으로 고려된다.

 

<대변경(大辯經)>에서 44세 단군 구물의 장당경은 개원(開原)이고, 평양(平壤)으로도 불렀다고 했다.

 (藏唐京 今爲開原 亦稱平壤)

 

[한단고기-번한세가]에서 구월산 삼성묘를 상춘 주가성자(朱家城子)라고 하였다.

구월산은 지금의 창도현(昌圖縣) 하이대자향(下二臺子鄕) 광정자산(光頂子山)=(532m)이다.

산 입구에 삼선묘(三仙墓)라는 것이 실제로 전해온다.

즉 삼성묘다. 하이대자향에는 고구려 석성도 남아 있었다.

 

[한단고기-고구려국본기]에서 고주몽의 도읍지 눌현(訥見)도 상춘 주가성자(朱家城子)라고 했다.

따라서 눌현과 장당경은 같은 곳이다.

주가성자는 지금의 천두진(泉頭鎭) 초가구(肖家口)다.

고두막한의  졸본성과 고주몽의 졸본성(눌현성), 그리고 고국원왕의 동황성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소수림왕의 초문사도 있었다.

 

 

1125년에 기록된 [허항종행정록(許亢宗行程錄)]에서

당시 개원인 함주의 바로 북쪽에 평양이 실재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허항종이 함주를 떠나 북으로 향하는데

그곳이 평양이라면서 동쪽으로 천산을 바라보았다고 하였다.

 

離咸州 卽北行 州地平壤 居民所在成聚落 新稼始遍 地宜穄黍 東望天山, 金人云彩 此新羅山

 

즉 장당경의 별칭인 평양이 개원 북쪽에 존재한 것이 고증되는 것이다.

여기서 천산은 광정자산의 의미다.

 

한편 왕적의 [요동행부지]에서는

 함주(咸州)=개원(開原)의 함평현 함평숙부에 이르러서 주변의 산아래에서 심대한

고구려 폐성을 발견하고 고구려의 망국 천년한을 읊어대며 함원전(含元殿)을 바라본다.

폐성터의 함원전은 궁전의 흔적이니 고구려 도성 자리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고

이는 고주몽의 눌현성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개원시(開原市) 북쪽 창도현(昌圖縣)의 옛이름은 몽고어로 상달(常達-額勒克)였는데

이는 녹색 초원의 의미다.

한민족 고대의 “상춘”이 몽고시대 “상춘달”로 변했던 것이다.

중국발음으로는 창(昌), 장(長), 상(常)이 모두 "chang"이다.

 

4세 단군 오사구(烏斯丘)가 살수(薩水)에 조선소를 세우고

또 새로 평양성(平壤城)과 건청궁(乾淸宮)을 세웠다.

살수는 사리수수(薩爾滸水)가 있는 심양시 혼하(渾河)다.

그곳에는 살수대첩을 직접 지휘한 을지문덕 장군의 직속 상관이었던

병마도원수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묘인 원수림(元帥林)이 남아있다.

 

4세 단군 오사구의 평양성은 앞에서 단목국 고증 때에 환도산 평양성으로 밝혔다.

4세 단군 오사구 때에 처음으로 동전을 만들었다.

 

5세 단군 구을은 처음으로 60갑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들었다.

단군 구을은 남쪽으로 순행하다가 서거하였는데 지금 대동강 평양시 동쪽 대박산에 묻혔다.

북한에서 자랑하는 단군묘다.

 

왕검의 어머니 나라인 웅씨국은 왕검이 태어났다는 평안북도 영변의 묘향산 단군굴 주변을 고려한다.

묘향산은 마한산이고 그 아래 대동강에 마한을 세우고 웅백다(熊伯多)로 마한왕을 세웠다.

왕검이 부인으로 삼은 비서갑(斐西岬) 하백녀(河伯女)는 수신(水神)의 상징으로 본다.

비서갑이 의미하는 서쪽 산줄기와 큰 물의 의미, 그리고 태백산 부근이라는 기록을 고려하면

서요하(西遼河)가 흐르는 케스케덴(克什克騰旗) 부근이 된다.

달리호변의 달리한산(達里罕山)이 중심이다.

 

단군의 중신으로 고시(高矢)가 있고 그는 청구국(淸丘國)을 맡았다고 한다. 

청구는 적봉시 동북의 청구성이다.

즉 영금하와 노합하가 만나는 요나라 고주(高州) 위치다.

단군 시대에 고시씨는 동쪽으로 분가했다.

고시의 동생은 고수(高搜)라고 하는데 고수성(姑嫂城)이 요양시(遼陽市) 동쪽 교외에 있다.

고수의 아들이 요순시대 순(舜)임금이라 전한다.

 

고대산문화와 같은 수준의 초기 청동기 문화가 흥성시(興城市) 서쪽 선령사(仙靈寺)에서 발굴되어

동북 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기 흔적이라고 자랑한다.  

이는 단군 왕검 때에 치우의 후손 치두남에 의해 건설된 초기 번한 수도 흔적으로 고려된다.

부근에 도하현 대극성이 있다.

 

<통지씨족략>에서 치우씨 후손들이 대극성에 살았다고 한다.

 

<전한서>에서는 도하에 당취수라는 물이 있었는데 번한의 수도인 탕지산(湯地山)에서 

당취수(唐就水)라는 이름이 비롯된 것이다.

 

 <전한서>의 도하현(徒河縣)은 수도의 물이라는 뜻의 도하(都河)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청산 대극성은 번한 수도 탕지산 안덕향이었다.

 

 

 

[규원사화]에서 단군의 영역을 북으로 대황몽고(大荒蒙古), 서로는 알유(猰猶) 즉 오르도스 고원,

동으로 창해, 남으로 해대(海岱)=(양자강 유역)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