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상고시대

오랑캐 천산문화/빗살무늬토기문명 예맥구려 사해 문화

오늘의 쉼터 2008. 9. 6. 18:09

신석기시대

오랑캐 천산문화 bc9600~bc6200

 

흥안령 산맥 서북의 화산지대인 우란카이 고원 호수 주변에서 신석기 시대 문명이 발견되었다. 그들이 남긴 100여점의 인물 조각상들을 분석하면 해부학적으로 아직 무릎이 곧게 펴지지 못한 고동북족(古東北族)이다. 이는 옥조상 중 2개인 “항아리를 머리에 인 여인상” 등으로 증거되는데, 항아리의 존재는 신석기 시대를 가리키고, 반면에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무게를 지탱하는 자세에서 무릎이 구부러진 것은 해부학적으로 침팬지 등의 영장류와 더욱 가까운 인류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후예로 보여지는 홍산 유적이나 우하량 유적지 석곽에서 발굴된 유골들도 이들처럼 무릎이 펴지지 못해 저절로 굴신장이 되어 있다.

이들 초고대 문명 유적지가 발견된 지역명 우란카이(烏蘭蓋)는 우리 민족의 고유어인 오랑캐다. 뒤에는 오환선비족 또는 월희족이라는 이름이 훗날 족속명으로 남았었다.

 

청나라 대에 쓰인 몽고유기《蒙古游記》에 의하면

아로과이심기현(阿로科이沁旗)현의  천산진(天山鎭) 서북 140리에 오환산이 있었다.

지금의 서한산(西罕山)이다. 이를 지도에 표기하였다.

아로과이심기 천산진은 거란족 요나라 황제가 환웅시대 전통대로 신단수를 심어놓고

제사 드리던 곳이다.

오환산은 본래 한산인데 흉노에게 패한 동호족 일부가 오환산으로 도망쳐서

오환선비라고도 하였고 지금은 서한산, 새한산.백산(西罕山=塞罕山=白山)이라고 한다.


이 흥안령산맥 서한산에서는 흑수(黑水)=(자칸무렌)가 발원하는데

그 최상류에 요나라 경주(慶州)가 있었다.

 

<요사>에서 이 지역은 경주(慶州), 현재 지명 소부리카소목(索夫里)에 속한 광제호(廣濟湖)였다. 

대염락(大鹽樂)이라고도 했는데 소금을 캐서 외부로 팔았다.

 

오랑캐호수 서편의 도시는 현재 지명 동오주목심기현인데 예로부터 울리아스타이(uli-astai)라고도

했고 이는 아사달이라고 보여진다.

 
동오주목심기현에서는 그들이 동호(東湖) 지역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또한 부여왕 해부루 정권이 곤연의 금와왕에게 넘어갔는데,

금와왕의 출신지였던 곤연(昆淵)으로도 해석된다.

 

 

[한단고기]에서 환인이 천해 동쪽의 파나류(波奈留) 산밑에 살았다고 하는데,

波奈留는 일본어에서 하나류로 읽고 이는 하늘의 연음에 해당하며, 즉 하늘산이다. 

천해 동쪽에 우리말로 하늘산, 한자로 천산이 있었던 것이다. 

 
천해는 대개 바이칼 호수로 보는데 우라카이 고원 호수일 수도 있다.

바이칼 호수의 동쪽이든 우라카이고원 호수의 동쪽이든 결국 환인의 천산은

지금의 새한산(塞罕山)이 된다.

오랑캐 고원에서 최근 석기시대 유물들, 특히 옥조각상이 함께 채집되고 있다.

이들이 남긴 옥기 문화는 홍산문화의 옥기 문화와 형식과 주제가 거의 같은데 홍산문화에서는

채색하지 않은 자연 색광의 옥이고, 이들이 남긴 것은 옥표면 위에 흑색을 착색하였다.

흑색의 원료는 철 등 광물성이었는데 현재까지는 어떤 방법으로 흑색칠이 이루어졌는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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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옥기 문화를 만들어 오랑캐 고원에서 번성한 문화는 현재 자취를 감추었고 유목민들의

초원만이 남아있다.

이 오랑캐 신석기인들의 문명 연대를 필자 나름으로 추적하면 bc6200년(지금부터 8200년전)

이전이다.
이들 흑색 옥기 문명을 만든 신석기인들이 바로 전설의 환인국의 선조인 나반과 아만이 만나서

이루었던 문명으로 고려된다.


 <환단고기-삼성기>에 환인족의 선조인 "나반(那盤)"과 "아만(阿曼)"과 아이사타에서 만나 

환인족의 조상이 되었다. 

이는 환인국의 형성 전이다.
"나반"의 "나"는 나르, 즉 태양의 의미를 가졌고 이는 쿠르드 언어에 남아있다.

 이집트의 태양신은 "라"이다. 

우리말에서는 "날. 낮"이 그 파생어다.

또한 드라비다어로서 누반은 기장쌀이다.

노란색의 어원이 태양 나일 것이고, 태양의 노란색과, 건조 기후에 적합한 기장쌀의

노란색 때문에 기장쌀은 태양빛 곡물로서 이름을 누반이라고 했을 것이다.
한편 "아만"은 몽고어로서 "하나"라는 의미다.

첫 번째라는 뜻도 된다. 

즉 나반과 아만의 만남은 O그룹의 드라비다어와 C그룹의 몽고어가 만난 것이고, 

한반도에서 올라간 만주의 농사족이 시베리아의 수렵족 중에서 에웬키족과 만나

그들을 농사족으로 바꾼 것이다.
이들 에웬키족의 유전자에 관한 추정은 앞에 있다.

 

당시 기후의 변화표를 그린랜드에서 채취한 얼음 시료로서 분석한 표를 보면 아래와 같다.

 

12700년전(bc10700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북극의 빙하가 녹고 천년의 혹한기가 찾아왔다.

이때 대륙의 동물과 식물 자원의 몰락은 인류의 급격한 감소를 초래하였다.

이후로 인류는 이동 채렵생활에 의존해서는 겨울에 살아남을 수가 없고, 농사를 지어 수확하고

저장하는 생활을 알았던 종족만 살아남게 된다.

한편 천년의 혹한기 끝에 단 10년 동안에 걸쳐서 무려 10도 이상의 급격한 기온 상승이 있었다.

지난 천년동안 해안 가까이 살면서 혹한에 적응했던 인류로서는 기온 상승도 적응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이때 더위를 피해 인류는 고원으로 피난하여 살았을 것이다.

그것이 11600년전(bc9600년)이 된다. 

그후 bc6200년경에 다시 200년의 혹한이 찾아왔다.

더워서 고원으로 향했던 인류는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고원에서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오랑캐고원 문명의 시기는 자연환경적으로 bc9600~bc6200년전으로 제한된다.

 

환인 하늘산 선홍산문화 bc4800~bc3898

 

       
                                                  환인 환웅시대 강역도

 

환인(桓因)에 대한 기록은 7세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는 기록이 발해 때에 만들어진

《조대기(朝代記)》라는 책에 있다고 전한다.


1대 안파견(安巴堅) 환인

2대  혁서(赫胥) 환인

3대 고시리(古是利) 환인

4대 주우양(朱于襄) 환인

5대 석제임(釋提壬) 환인

6대 구을리(邱乙利) 환인

7대 지위리(智爲利) 환인

 

이 이름들은 거의 지명이다.

 

안파견은 우리말로 속신과 같은 말로서 지금의 아로과이심기 천산 지역이고, 

혁서는 환웅의 신시(神市)에 해당하고 여기서 시(市)를 불(市)로 읽으면 신시는 우리말로 검불이 된다.

고시리는 요양이고, 주우양은 백제의 동계이니 한반도의 치양성이고,석제임은 압록강의 환인현

지역으로 추정되고, 구을리는 의무려산의 구려이고, 지위리는 장춘 서북쪽의 실위다.

환인 시대에 위에 소개된 7 지역을 정복하여 연방으로 삼은 것이다.

 

환인시대가 63182년이라는 기록은 당시 문명이나 언어의 발전 상태로 보아 믿기 어렵다.  

환웅의 개천이 bc3898년경이므로 환인시대를 3300년으로 잡으면 그 개시 시기가 bc7198경이 되는데

역시 믿기 어렵다.

고작 7분의 환인이 1000년 이상을 다스렸다는 주장이, 환웅시대 18분의 1565년에 비하여 터무니없는

것이다.  

문명은 소멸되기도 한다.

전국의 힘이 결집되어 건설되는 수도는 나라가 망하면 유지되지 않는다.

bc6200년의 200년 추위로 파나류산 아래 동서남북 사방으로 각각 흩어져 내려갔던 오랑캐족이 다시 

파나류산(한산)을 중심으로 결집한 것이 bc480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곳 시라무렌강(西遼河) 남북에서 밭농사가 활발해지고 증가하는 인구와 좋은 농토 확보싸움이

일어나기 시작해서 시라무렌강 북쪽의 환인세력이 시라무렌강 남쪽의 구려까지 포함하여 한반도까지

속방으로 삼은 것이다.

이후 예맥구려를 통합한 새로운 환인시대가 약 1000년동안 존재했을 것이다.

그때 신석기시대부터 예맥인들은 오랑캐를 두려워했고, 그것이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다.

 

적봉시(赤峰市)=(원이름은 울란우데) 오한기(敖漢旗) 조보구문화지(趙寶溝文化址)는

홍산문화보다 조금 빠른 bc-4800년전 유적이다. 

이들은 회갈색이나 홍갈색도자기 위에다가 오랑캐문명의 특징이었던 검은 칠을 가져다가 그림을

입혔는데 그 주제는 녹수신수(鹿首神獸), 돼지머리용(猪頭龍), 오수신금(烏首神禽), 우각거수(牛角巨獸)

등 4가지 영물 등이 있다.

그외 같은 시대 문화로 고려되는 봉황도자기가 있는데 옹우특기현 해방영자진에서 출토되었다.

 

회색 도자기의 아랫부분 검은칠 회화를 펼쳐보면 아래와 같이 영물들이 그려져 있다.

 

 

그후 bc 4000년에는 황해 바다의 해수면이 bc16000년경 이래로 가장 높아졌다.

당시 황해바다는 얕은 수심 때문에 대륙붕이 완전히 노출되어 육지의 상태였으며 털코끼리가

뛰어다녔고, 기후는 차고 건조했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빙하기가 끝나고 지구가 더워지기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135m나 높게 현재의

해수면처럼 서서히 차오른 것이다.

 

bc5000년에서 bc4000년 사이에만도 해수면은 6.5m가 차올랐다. 

(단, bc2000년과 ad0년경에는 지금보다 약 3 m 낮았다. 러시아 쿠르간 문화유적지

토양보고서에 의하면 bc2400년부터 약 400년간 심한 가뭄과 강풍으로 추운시기가 있었다.)


한편 bc4300년에는 일본 규슈(九州) 남부 앞바다에서 거대한 화산폭발이 있었다.

세인트헬레나 화산의 150배의 위력에 달하는 초화산(supervolcano)이었고, 지난 만년동안

단 세 번밖에 없었던 비슷한 규모의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 폭발 때를 보면 1년동안

여름이 없이 추웠고, 900km거리에 1cm의 화산재가 덮혔다. 

 
bc4300년의 규슈 남해안 키카이 화산 폭발 때는 1700km  떨어진 북해도에까지 화산재가 쌓였다.

규슈 폭발 때에 서요하 끝도 역시 북해도와 같은 1700km 거리다. 

편서풍 외에 바람 방향이 어떠했는지, 화산재가 한반도를 넘어 서요하에도 날아갔는지는 모른다.

이후로 규슈 남부는 생명체가 몰살하고 수백년 동안 불모지가 되었다.

 

이러한 해저 화산의 폭발이 11600년전에도 바다를 덥히고, 지구 기후를 급격히 올렸을 것이며, 

이때도 그러하여서 bc4000년에는 북극 빙산이 최고로 많이 녹아서 현재와 마찬가지인 해수면

높이로 상승되었던 것이다.


한편 해수면의 상승과 바다의 확장은 주변 연안의 기온을 떨어뜨렸을 것이다. 

즉 발해만 주변과 황해 주변은 오히려 바다 확장 전보다 기온이 떨어지고 내륙인 서요하변도

역시 울창한 숲에서 건조한 초원으로 환경이 변하여갔다. 

 

이때 환인국의 파나류산 위치는 천해의 동쪽인 바,

지금의 파림좌기(巴林左旗) 북쪽 부하진 (富河鎭)으로추정된다.

 



파나류산이 있던 부하진과 파림좌기(=임동, 거란국 요나라 수도)와 천산진(요나라 황제의 신단수)

북쪽의 부하진인데 인류 최초의 복골(卜骨)이 출현한 유적지가 있다.

 

 bc3300년의 유적이라고 밝혀졌으니 은나라의 복골은 이보다 1000년 뒤의 것이다.

또한 주변 고성터의 흔적을 보면 bc3300년 이전의 유물과 유적 발견도 기대된다. 

뒤에 흉노에 패망한 동호족이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오환산, 혹은 선비산이라고도 하였다.



부하진 동남에서 복골이 나왔는데, 그 남쪽으로 남산투, 해력도, 사방성, 호박구 등의 고성터가 의심된다.
복골은 사슴이나 양의 어깨뼈를 사용했다. 아래는 부하진 노야동(老爺洞)의 풍경이다.

 



환인의 하늘산은 지금 한산(罕山) 1929m, 혹은 서한산이라고 부른다.  

오환산이라고도 했다.
사이한산의 정상에는 평지가 있고, 그 중앙에는
홍지수(泓池水)라는 연못이 있는데

천지(天池)라고도 불렀다.

홍지수가 홍익인간의 뿌리런가?
태백산에는 조천지(朝天池)가 있다고 했는데 지금 백두산 천지로 생각할 수 없다.

백두산 천지는 기원전 200년의 폭발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사이한산(罕山), 1929m 환인의 파나류산 모습이다.
사이한산의 서남쪽에  흥안령 산맥의 남단 최고봉인 황룡강(黃龍岡), 2029m 이 있는데 

부근에 아사하도(阿斯哈圖)가 있고 이는 험산(險山)이라는 의미로 알려져 왔다.

단군 색불루의 녹산 아사달이었다.

환인 시대 12국이 있었다는 기록은 객현한국(客賢汗國)의 존재 때문에 인정하기 어렵다. 

객현은 중국에서온 손님인 기자를 가르키는 것이 명백하고 그가 있던 곳이 오늘날도 객라(客羅)

객좌현의 옛이름이다. 따라서 7분의 환인과 같이 7국 연방 정도로 고려된다.

 

 

 

 빗살무늬토기문명 예맥구려 사해 문화 bc6200~bc4000

 

1. 예맥구려穢貊九黎의 발생지 사해문화   

2. 동아시아 최초 촌락유적지 흥륭와문화

         

우리 민족의 선조는 예맥(濊貊) 민족이며, 지금부터 8000년전 신석기시대에 만주와 시베리아, 한반도,

산동반도 등지에서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석기 예술의 정수인 옥기 문화를 오랑캐문화로부터 받아서

이어갔다.
“예(穢)”라는 글자는 이십사절기를 알고 농사를 짓는 민족이라는 의미가 있고, 맥(貊)은 호랑이나

표범 꼬리를 머리에 매고 다녀서 얻어진 이름인데 예인은 호랑이를 숭상했다.

곰이 아니다.

단군왕검 신화에서 환웅에게 밀려난 민족이 바로 예족이기도 한데 한반도의 토템이 역시 호랑이,

산군(山君)이다.

 

[후한서(後漢書)]와 [위지(魏志)]의 <예전(濊傳)>에서 기자조선(箕子朝鮮)이 언급되는데,

마지막 왕 조선후(朝鮮侯) 기준(箕準)까지 무려 40여세를 전한 국가로 적고 있다.

비록 고조선(古朝鮮)을 언급하지 않고, 고작 고조선의 변방인 중국계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기록했지만, 이 고조선이나 기자조선의 중심 민족도 바로 예맥족이다.

[후한서]에, 예국(濊國)에서는 현재 압록강(鴨綠江)가의 궁간목弓(幹木)에 의한 강력한 활인

낙랑단궁(樂浪檀弓)이 만들어졌고, 조기(班魚)가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설문(說文)]에서는 예야두국(?耶頭國)에서 참조기(?魚)를 수출한다고 했다.

조기는 발해 연안에 알을 낳고 회귀하는 물고기이다.

이로 인해, 낙랑군 동쪽 예국 위치는 한반도 동해안이 아니라, 요동반도 동해안으로 고증된다.

 

한편 [후한서]에서는 부여국에 대해서 본래 예의 땅(本濊地也)이라고 기록하였고, 예성(濊城)도 있고,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는 국새(國璽)가 있었다.

 

[진서(晋書)]에서 벼 화(禾)변의 예(穢)자가 출현하며, 만주를 다스리던 백제 담로제의 지방관직으로

추정되는 임예태수(臨穢太守) 관인(官印)이 요동반도 신금시(新金市)에서 발견되었다.

신금시는 백제 국모 소서노가 세웠던 어하라(於瑕羅) 영역이고 뒷날 대방백제의 영역이다.

 

[위서(魏書)-두막루전(豆莫婁傳)]에서도 송화강 북쪽 두막루땅이 구북부여(舊北夫餘)의 후손이고

본래 예(穢)의 땅이라고 했다.

 

[후한서-구려전(句麗傳)]의 구려는 맥궁(貊弓)을 사용하던 일명 맥이족(貊夷族), 소수맥족(小水麥族)인데,

고구려의 기저 바닥 세력이고  이 역시 예맥인이다.

구려(句麗)는 구려(九黎)이기도 하다.

맥(麥)은 보리, 려(黎)는 좁쌀을 의미하는데 좁쌀이 먼저 재배되었다.

 

[신당서(新唐書)-발해전(渤海傳)]에서는 모란강 동경성 일대가 예맥고지다.

 

[삼국사기]에서 신라 남해왕 때에 북명(北溟)=( 강원도 강릉) 사람이 예왕(濊王) 도장을 주워서 바쳤다.

 위만(衛滿) 침략 때에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의 이십만호는 서남으로 이주하여

중국 천진시(天津市) 남쪽의 창해군(蒼海郡)에 옮겨갔다. 

 

이 모두를 종합하면 예맥인의 영역은 만리장성 동쪽의 요녕지방, 길림지방, 흑룡강지방과 한반도가

다 포함되고 일본 열도의 원주민도 되며 이는 빗살무늬토기문화권과 같다.

 

지금부터 8000년전, 신석기시대에 예맥인은 황해 연안을 따라서 만주와 시베리아, 한반도, 산동반도,

중국 동남해안에서 빗살무늬토기 문화권을 일으켰다.

북방 지역은 기장쌀(黍)에 의한 농경이 발달하였고 화북 지방은 지금보다 따뜻하여 벼(禾)농사를 지었고,

양자강 이남은 오늘날의 아프리카 열대림처럼 미개척지였다.

그 당시 만주는 따뜻했으며, 마지막 남은 털코끼리와 코뿔소를 사냥했다.

예맥인은 돼지나 개 가죽 옷을 입고, 코뿔소 가죽은 귀족들의 전투용 갑옷卒이었으며,

호랑이나 표범 꼬리로 머리를 장식했다.

이때 부족 사회가 연합한 왕권 체제가 생겨났는데,

이 예맥 문화의 모습은 내몽고 적봉시(赤峯市) 오한기(敖漢旗) 흥륭와문화(興隆窪文化)와

요녕성(遼寧省) 부신시(阜新市) 사해문화(査海文化)에서 보이는 선홍산문화(先紅山文化)다.

두 유적지 중에서 화려한 것은 부신시 사해문화인데 왕권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사해문화에서는 왕권의 상징인 용토템이 출현하는데,

이 지역을 고대에 구려(句麗) =(九黎)라고도 하였다.

 

[전한서]에서 중국이 현도군을 설치하고 이를 구려의 서북이라고 하였는데 당시 현도군은 

부신시 북쪽에 있었고, 그 동남의 사해 문화 유적지가 바로 고대 구려로서 구려(九黎)의 중심이었다.

 

[사기]에서는 청동무기로서 중국에 진출한 치우천왕을 구려(九黎)의 왕이라고 하였다.

아홉 부족을 의미하는 구려에는 창려, 옥려, 부려, 무려 등이 속했었다.

 


예라고 불리운 곳 종합

 

부신시(阜新市) 사라향(沙拉鄕) 사해촌(査海村) 천수구(泉水溝)에서 방유적지(房址)가 발굴되었고 지금부터 8000년전 유물이다. 사해문화의 도기는 황갈색이고 지자문(之字問)이 많고 뱀과 두꺼비를 숭상했는데 용과 함께 농경문화를 의미한다. 도기에서 용(龍)무늬가 발견되었고 또한 2003년에는 바위에 새겨진 20 미터 길이의 대형 용조각이 발굴되었다.농사를 짓는 민족은 비를 뿌려주는 용(龍)과 한발(旱魃)=(가뭄의신)을 잡아먹었다는 전설의 호랑이를 숭상한다. 그중에서 용은 이 시대에 왕권(王權)의 출현을 의미한다. 아울러서 20여건의 옥기가 발굴되었고 옥비(玉匕), 옥부(玉斧), 옥분(玉?), 옥관(玉管), 옥주(玉珠) 등이다.


용조각 빗살무늬토기

 


19.7m에 달하는 용의 조각

옥부와 옥환



빗살무늬토기와 생활 도구


 

빗살무늬 토기는 bc6000년전에 시작되었다.

이 토기는 산동반도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bc5000 -3000년)와 한반도, 압록강 집안,

요동의 대련반도 소주산문화(素珠山文化) 심양의 신락문화(新樂文化)=(bc5500년) 길림시(吉林市)

서단산문화(西丹山文化)와 장춘시(長春市) 좌가산문화(左家山文化), 그리고 서요하西遼河 상류,

내몽고 적봉시 홍산문화(紅山文化)=(bc5500년)까지 고루 발견된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바다가 훨씬 작았던 황해를 둘러싸고 예맥의 문화가 퍼져나간 흔적이다.

그러나 11600년전 이후의 더운 날씨로 인해 내륙은 사막화가 되고,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발해 바다가 50m 이상 차오르고, 바다 주변은 차오른 물로 인하여 예전보다 더 추워졌다.

8200년전에 일어난 지구 냉각기 200년의 사건이다.

그중 중심이 되는 bc6000년의 부신시 사해문화(査海文化)와 오한기 흥륭와문화(興隆窪文化)는

심양의 신락문화(新樂文化)보다 1000년 이상 빠르고, 적봉의 홍산문화(紅山文化)보다도 2000년 정도

 이르므로 선홍산문화(先紅山文化)라고 한다.

옥도끼(玉斧)는 석병(石兵) 시대에 신권(神權)을 상징하는 새로운 옥병(玉兵) 시대를 열었다.

더욱이 옥도끼는 빛을 발함으로써 당시의 어떤 무기보다 무서운 역병을 일으키는 귀신들을

내쫓는 효험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월절서(越絶書)]에 신농, 혁서 때에는 석병(石兵)을 쓰고, 황제시대(bc2700년)에는 옥병(玉兵)을 쓰고,

하우(夏禹)=(bc2100년) 시대에는 동병(銅兵)을 쓰고, 그 후에 철병(鐵兵)을 썼다고 한다.

예맥 문명에서 옥병의 출현은 중원보다 빠른 bc6000년이다. 

중원의 옥기 문화는 흥륭와문화, 사해문화로부터 대문구문화를 거쳐 태호(太湖)의 양저문화(良渚文化)

에서 가장 꽃피는데 bc3000년 이후다.

 

2절 촌락유적지 흥륭와문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촌락은 내몽고 오한기 흥륭와(興隆窪) 지역으로서 지금부터 8200년전의

촌락이고 사각형의 반지혈식(半地穴式) 방이 150개, 묘장이 10개, 탄갱이 12개가 있으며, 촌락 주위에

방어호(圍壕)가 만들어져 있다.

신석기 시대의 정주(定住) 민족의 모습이다.

따라서 유목 기마 민족의 도래 이전이다.

 이와 같이 성을 쌓고 혈거하는 것은 축성혈거(築城穴居)라 하여서 [위서(魏書)-물길전(勿吉傳)]에

소개되어 있는데, 당시 장춘시長春市 동북방 송화강가 유수시(楡樹市) 부근에 있던 물길국은

본래 숙신(肅愼)의 후예라고 했다.

마한(馬韓) 말갈(靺鞨), 물길(勿吉), 숙신(肅愼), 여진(女眞)이 결국 모두 같은 뿌리이다.

  

흥륭와 유적지에서는 소형 옥기장식 3개 귀걸이 등(아래 사해문화의 옥기 사진 중 오른쪽 옥결 귀걸이와 거의 비슷)이 발굴되었으며 이는 중국 최초의 옥기이다. 그외 화강암으로 만든 67cm, 40cm의 돌조각 여인상 2개도 발굴되었다.

질그릇은 회색이 많고, 기하문 토기의 모든 것이 나타나는데 주로 요현문(凹弦紋)=(회전시키면서 파내어 새기는 줄무늬)이 기본적으로 있고, 더하여 물결무늬나, 돗자리무늬를 덧새기기도 했다.

 

우리 한반도인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는 이들 예맥인들은 모계사회 농경민족이었으며,

이미 개와 돼지 등의 가축을 길렀고 흙과 함께 살고 죽었다.

산군山君 호랑이를 섬기는 한반도의 풍속은 예맥인들의 고유한 것이다.

환웅의 도래로 웅족, 즉 부여족에게 밀려난 적도 있지만 결국은 융합한다.

이 예맥문명은 황해 주변의 모든 신석기 문화지에 펼쳐져 양자강 아래 광동성까지 퍼져나갔다.  

오래된 때를 가리키는 우리말 “옛-날”은 바로 신석기시대 우리나라 “예”의 “날”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옛날옛날 고리적에”라는 말은 즉 “예의 날”, “고구려의 날” 등 오래된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