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상고시대

치우능 탐사 & 답사기

오늘의 쉼터 2008. 8. 30. 21:08

 

 

백마디 말보다 한장의 사진이 말해주는 것이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안원전 선생님이 치우천자능을 찾아서 탐문 / 조사한 내용입니다
바로 동평군 수장현지에 소개되어 있는 치우천자능 말입니다

안원전 선생님의 노력에 다시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러한 노력들이 더더욱 배가되어 진실된 우리의 역사를 찾는 시기가 앞당겨지고
이러한 사이트들이 천개 / 만개 더많이 생겨나 자료의 보고로 활용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글쓴이 : 안원전  
- 출  처 : http://www.cheramia.net 

  
< 담론144 > 치우능 탐사 & 답사기 및 은나라의 주도핵심세력
치우천왕의 후예 묘족과 치우천왕



동평은 곡부 왼쪽 양산(수호지의 梁山泊으로 水泊이다)을 포함하는 구역이지만

지금은 양산박과 동평은 50여 킬로 이상 떨어진 별개의 도시다.

www.coo2.net(송준희, 문구일부 첨가)에는 치우천자 묘가 있는 동평과  치우천자의 부인

비의 묘가 있는 거야(鉅野:지금은 巨野)가 바로 이웃해 있고 헌원 출생지인 수구 역시

가까운데 헌원의 묘가 있는 위치는 막상  멀리 장안 북쪽인 것을 들어 환단고기의 기록을 내세워

제후의 아들인 헌원이 치우천자에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징벌, 황제는 태행산맥 북쪽으로
쫓겨나 지나족의 시조가 되었다는것 아니냐며 반문하고 동평군 수장현에 치우천자의 무덤

그 유적지가 중국민족에 의해 파괴 된지가 얼마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말한다.




- 동평 : 치우천자의 묘의 위치
- 거야 : 치우천자의 부인 견비의 묘의 위치
- 탁록 : 치우천자와 제후의 아들인 헌원과의 최초의 전쟁지역
- 수구 : 헌원 출생지
- 황릉 : 헌원의 묘가 있는 위치


필자는 이러한 궁굼증을 풀기 위해 2002년 4월 14대 자오지 환웅인 치우 천자 묘를 찾아 섰다.

잠시 여행기록을 보기로 한다.

- 공부(孔府), 공묘(孔廟), 공림(孔林)의 공자묘, 소호묘(小昊廟), 주공단묘(周公廟),안회묘(顔回廟)를

들러 30여 킬로 떨어진 동이족 은나라 유적지인 대문구 문화 유적지를 들러 태산(泰山)이 있는

태안(泰安)에 내려 다시 차를 바꾸어 타고 치우천자 왕릉이 있다는 동평(東平)으로 향했다.

은나라 유적지인 대문구 유적지가 곡부 바로 위, 우리로 말하면 상계동 정도에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이 말은 산동성이 바로 동이족의 근거지임을 역설하고 있는 증거로 새삼 다가 왔다.

소호묘가 곡부에 있다는 것도 그렇고 치우천자의 근거지가 바로 산동성이라는 것도 그렇다.

한국의 사학자들이 만주만 우리 민족의 근거지인 줄 알지 황하 중심권인 산동성, 산서성, 하남성,

하북성, 섬서성이나 양자강 유역의 오나라, 월나라, 초나라 근거지역인 강소성, 절강성, 호남성,

호북성, 강서성, 귀주성, 사천성, 감숙성이 우리 조상들의 안방이었음은 모른다.

태호복희씨와 신농씨 그리고 강태공이 누워 있는 자리와 전욱고양, 제곡 고신씨가 누워있는
자리와 우(禹), 순(舜)이 누워있는 곳이 어디고 한나라 유방을 절절 매게 했던 흉노 휴도왕이 웅거한

곳이 어딘가만 알아도 대륙사의 본 줄거리는 그냥 나온다. 여기에 9려국의 본질7과 묘족의 실체가

몽땅 뭉뚱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버스는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묘하게도 탄탄한 아스팔트 대로로 안가고 산 사이에 새로
공사중인 길을 택해 털털거리며 어렵게 간다. 공사중이라 막히면 다시 차를 되돌려 멀리 우회하며

요동치기를 세 시간 여 남짓하니 드디어 동평(東平)에 도착한다. 시 중심에 내려 우선 리어카 차를 잡았다.(중국의 대부분 지방 소도시에는 버스, 택시(소형 봉고)와 함께 앞에 리어카를 단 자전거 차와  리어카를

단 오토바이 차가 주요 교통수단으로 활동한다)

시골도시인지라 가장 좋아보았자 별 두 개 짜리 호텔이 전부인지라 가장 좋은 호텔로 가자
고 하니 겨우 100M 거리에 있는 호텔로 데려다 주고 10원(1600원)을 받는다. 속은 것 같아
다른 호텔은 없느냐 하니 100M를 더 가더니 보기에도 별로 안 좋은 여인숙 같은 곳으로 데
려다 준다. 하는 수 없이 처음 호텔로 가자 하여 체크인을 했다.

 

숙박비는 우리 돈 5000원 선. 방으로 들어가니

아주 형편없는 곳으로 어둠침침하고 퀴퀴한 냄새로 역해 도저히 있을 곳 같지가 않을 정도다.

우선 책을 점검한 뒤 치우릉(蚩尤陵) 위치를  탐문 탐색하기 시작했다.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4 차례에 걸친 배낭여행으로 전 유럽의 120여 개 도시를 휩쓸며 수 천 번의

탐문 탐색으로 모든 장소를 정확히 찾아낸 이력을 바탕으로 이번 중국 탐사여행 역시 갈고 닦은

기량으로 모든 것을 해 낼 수 있다는 각오로 임했다.

유럽 전역을 태을주 기운으로 모두 깔아놓겠다는 정신과 뱃짱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기도한
나였는데 중국 전역이 아무리 넓어도 유럽만 할쏘냐는 자신감이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건 마치 히틀러가 일망무제의 겨울 모스크바를 공격했다가

목표지에도 못가보고 대패를 했듯이 적지 않은 착각이었다.

산동성은 대한민국 지도(22만 평방KM)와 비교하면 약간 작아 보이지만(15만 평방KM)  

인구도 8800만에 일망무제의 평야가 97%로 70%가 산인 한반도와 대조를 이룬다.

그만큼 산동성의 논은 만주처럼 드넓고 비옥해 물산이 풍부하고 고래로 문물이 발전 할 수 밖

없는 천혜의 요지로 동이족이 웅거한 곳으로 국토의 활용도 면으로 보면 한반도의 세 배

해당되는 광활한 곳이다.

  사람들에게 탐문을 하다 안되겠다 싶어 우선 동평 문화국을 들러 얘기를 나누니

친절하게 맞이해 준다.

한참 자료를 보여주며 필담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그 곳을 찾으려면 양산(梁山:양산박)으로

가는게 좋겠다고 한다.

뿐 만 아니라 여행사의 특정인물과 전화번호까지 적어주며 양산박엘 가면 찾아 보라 알선해 준다.

양산박이 수호지의 고향으로 뭇 영웅들의 고향임을 알고 있어서 여행을 하면서

이번 답사 여행의 목적 아니라면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곳인데 묘하게도 나의 발걸음을

곳으로 몰고 가는 것 같아 무척 흥미로움을 느꼈다.

문득 일본 전국시대에 백제 무사도인 싸움아비 혹은 싸울아비의 영향을 받은 사무라이 양성

무술도장이 혼슈 관동지역에 무성했던 사실이 묘하게도 연상이 되었다.

치우천왕은 무신으로 받들어진 존재로 영웅들의 고장인 양산박과 모종의 관련성이 있다는
사실은 실마리를 푸는데 더욱 무언가 냄새를 풍기고 있어 양산박엘 가면 치우천자능묘에 대

소식을 들을 수 있겠구나 하는 무언의 확신이 섰다.

무모할 정도의 개척정신이 없으면 탐색작업은 할 수 없는 법인지라 시장바닥에 주차되어

님을 기다리는 수 십대의 고물 봉고택시들과 흥정을 했다.

80원에 양산박엘 가기로 흥정한 이 친구는 가는 도중 유치원에 들러 자기의 여아를 싣고는

어디선가 아기를 기다리는 애 엄마마저 싣는다.

그러고도 양해를 구해야 할 일이 있는지 운전기사는 넘버 판이 없다고 양해를 구한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가 못 알아듣자  지식인인 듯한 애기 엄마가 신랑대신 나서서

영어로 설명해 준다.

엄마가 영어를 사용한 이후로는 엄마와 대화를 주로 할 수밖에 없었는데 신랑이 한 말의 뜻

아스팔트로는 넘버 판이 없어 차가 못 가고 논밭 사이로만 달려간다는 뜻이었다.

다시 한번 주위의 차를 보니 반 이상이 넘버 판이 없는 차들이어서 그러려니 하고 그냥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양산박이 20여 킬로 떨어진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60여 킬로 이상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나 양산박 너머까지도 치우 천왕 시절에는 동평군에 속한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한 시간밖에 안 걸릴 거리를 논밭 사이의 샛길로 덜컹거리며 세 시간 여를 달린 끝에 기사는 괜챦은

호텔이라며 모 호텔에 내려주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며 연락처 번호를 주고 가버렸다.

그런데 체크인을 하고 3층으로 올라가니 도저히 이게 아니올시다였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침침한 분위기에 퀴퀴한 냄새인데 중국의 고유한 이상한 냄새와
함께 방문 앞을 보니 왠 항아리들이 주욱 놓여있어 자세히 보니 화장실이 없는 룸 앞에 놓여진

일종의 요강이었고 냄새는 이 요강들이 주범역할을 했다.

게다가  그야말로 10와트 미만의 희미한 불빛이 냄새와 함께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난생 처음 보는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어주었다.

밖에는 한국의 서울로 이동할 황사와 바람이 봄철의 밤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하는 이국의 밤을

보여주는데 아무리 피곤해도 여기서 머물 수는 없다 생각이 스치면서 그래도 호기심에 방문을

열어보기나 하자 하고 문을 여니 왠 중국인 남성이 트윈침대의 한 쪽에 누워있다 벌떡 일어난다.

우왁! 본인이 제일 싫어하는 음산하고 기괴하고 어두운 분위기에 냄새까지 역겨운 판에 팬

바람의 냄새나는 중국인이라니. 요 근래 한국인 사업가가 중국 현지에서 중국인에게 살해
당하고 금품을 털리는 사례가 종종 벌어져 더욱 몸을 사리게 한다.

90년도에 중국을 방문하니 가이드가 이런 말을 해준 기억이 있다. 중국인과 한국인 일본인

돼지가 한 방에서 오래 버티기를 하는데 일본인이 제일 먼저 나가고 다음이 한국인이 나가고

그 다음에 돼지가 더러운 중국인 때문에 못살겠다고 나갔다는 우스갯 소리다.

기겁을 하고 나오며 생각하니 2인용 트윈침대 개념이 독방으로 혼자 쓰는게 아니라

이 도시는 남하고 같이 쓰는 개념인 모양이었다.

더 이상 볼 것 없이 수납대로 가 체크인 취소하고 호화빈관(豪華賓館)이 어디냐고 하니

수박(水泊:梁山의 옛이름)호텔이라 한다. 두 말 안하고 밖으로 나왔다.

양산박이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야경은 90년도에 들른 북경의 도심처럼 칠흙같은 어둠뿐이다.

중국이 아무리 현대화를 하고 있지만 문명의 손길이 이런 시골도시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둠 속에 자리잡은 가게에 진열된 장난감 소상(塑像)을 보니 양산박의 온갖 호걸들이 술병을 차고

호기를 부리는 모습들이다.

영락없는 소설 속의 양산박 분위기의 거리가 저절로 느껴졌다.

걸어가면서 왕바(罔 :PC방)가 있나 봤더니 왕바는 있었다.

중국도 한국의 PC방을 본받아 아무리 촌구석이라 해도 곳곳에 왕바가 침투해 있어 청소년들이 게임을

하느라 바글 바글한데 짐작컨대 수백만 군데의 왕바(罔 :PC방) 가 성업중인 것으로 보인다.

1시간에 1-2원(3-4백원)하는 왕바(罔 :PC방) 덕분에 민주당 경선에서 이인제가 중도 사퇴했다는 것도

수 있었고 한나라당에서 최병렬이 2등 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고 중국 민항기 김해참사 사건도

알 수 있었다.

양산박에서 가장 좋다는 수박호텔에 오니 그저 우리의 깨끗한 장급 여관 수준으로 별 두 개 짜리다.

밤 9시에 체크인을 하면서 안내원에게 치우천왕이 있다는 동평군 수장현(壽張縣)을 물으니

여기는 결코 아니라 한다.

10여 분 이상주거니 받거니 말하고 있는데 30대 말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한국인이 반갑다며 말을

걸어온다.

자신은 분당에 살며 사업차 청도를 통해 파견 나와 이 호텔에 장기투숙중인데 여기는 한국인이 없는

곳인데 한국말을 들어 무척 반갑다며....그리고는 어려움이 있으면 자신의 방을 찾아달라며 명함을 주고

중국인 동료 두 사람을 동시에 소개시킨다.

그 중 한 중국인이 이야기를 듣고 호텔 뒷 쪽에 있는 서점으로 안내해 양산박의 역사개요를 담은

책을 소개시켜 우선 <수박양산(水泊梁山)>이라는 책을 사 목차를 쭈욱 훑어보니 원하는 정보는 없었다.

밤 10시가 되어 호텔을 나가 어두운 거리를 배회하며 요기할 곳을 찾아 대충 때우고 왕바(罔 :PC방)를

찾아가 인터넷 검색을 하고 일찍 자리에 누웠다.

무슨 이런 호텔이 있는지 아침 8시 이전에 체크아웃 해달라 한다.

누워서 생각해 보니 이곳은 내가 올 것이 아니었다 보다 생각이 든다.

하여 새벽에 다시 동평으로 되돌아가 동평을 샅샅이 뒤져보기로 마음먹고 잠을 청했다.

어차피 치우능묘를 찾는 것이 호락호락 찾아지리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탐사
여행의 핵심은 뭐니뭐니해도 치우천자 능묘 탐사가 그 핵심인지라 초반부터 허물어질 수는 없다

생각되어 새벽에 눈뜨자마자 침대에 앉아 조용히 태을주를 외며 각오를 다졌다.

지도책을 두 권을 놓고 주위 지명들을 다시 한번 꼼꼼히 파악하고 우선 동평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챙겨들고 나섰다.

어제 밤과는 다르게 거리는 출근길의 인파로 붐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중국의 시골도시는 물론 대도시도 중국은행 본점 한군데에만 카드인출기가 설치되어 있는 데에다

대도시가 아니면 모든 숙박업계는 물론 카드가 통용이 안되어 애를 먹는데, 수중에 남은 돈이

7-8백 원(11-12만원)밖에 안되어 현금을 자칫 잘못 운용하면 치우 천왕묘 탐사도중 200여 킬로

떨어진 제남(濟南:산동성 수도인 省市)시로 돈을 뽑으러 갔다 와야 할 판국이었다.

여러 사람들의 말을 종합한 결과 치우능은 양산박(梁山)에 없다는 것이 결론인지라

서둘러 버스정류장인 기차참(汽車站)으로 갔다.

중국에서는 기차정거장은 화차참(火車站)이라 한다.
갈 때는 출근길이라 오히려 많이 다닐 줄 알았던 택시도 안보이고 버스도 안 다녀 1KM 거리를

걸어가야 했는데 짐이 책 두 박스여서 서둘러 황급히 뛰다 보니 어깨가 빠지는 줄 알았다.

이상한 나라의 고통받는 엘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역에 도착하니 두 시간마다 다니는 동평 행 버스가 막 출발하는지라 달리는 버스를 급하게
세워 타고 제일 뒷좌석에 앉아 옆 사람들에게 수장진(壽張鎭)을 묻는데 갑자기 앞자리에 있

한족(漢族)인 젊은 친구 하나가 자기가 안다며 내 자리로 오는 기적이 일어났다.

치우왕묘를 찾는다는 것이 한강에서 바늘 찾기 같이 어렵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체득한

뒤였으니까 그 때는 그게 기적으로 보였다.

이 젊은 양산박 친구는 치우능은 몰라도 수장진(壽張鎭)은 안다며 얼마전 자기가

그 곳을 찾는 사람을 데려다 주었다고 말한다.

이 친구 여자 차장과 중국말로 뭐라 하더니 차는 커브를 돌자마자 정차했고 차장은 고개를 돌려

그 친구와 함께 빨리 내리라 콰이 콰이하며 손짓한다.

뭐가 뭔지 모르게 얼렁뚱땅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내려서 잠시 그냥 동평으로 갔더라면 헛수고만 잔뜩 하고 결론은 다시 양산박으로 되돌아 올 뻔

했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이제 이 양산박 젊은이가 나의 현지 가이드가 되었다.
우선 아침을 안 먹었으므로 구멍가게에 들러 우유팩을 하나 따서 마시고 이 친구와 필담을 시작했다.

수장진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양산박에 있다는 것이 그 친구의 주장이었고 분명히 찾아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예의 소형 중고 봉고 택시를 대절해 양산박 교외로 나가니 7-8KM를 갔을까 수장진(壽張鎭)이라는

행정구역 경계판이 곧 들어왔고 그 친구는 한 껀 했다는 듯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다왔다며 미소짓는다. 포기하고 동평으로 되돌아가던 중이었던 나는 너무너무 반가왔다.

얼마 안가 수장진 문화국에 도착해 일단 탐문을 해 보기로 했다. 그 곳이 다음의 사진이다.





그런데 호사(好事)는 다마(多魔)요 도고십장(道高十丈)이면 마고십장(魔高十丈)이라고 ,

곳 문화국 담당자의 말을 들으니 양산박 교외의 이곳 수장진은 고대의 수장진을 본떠 새로

이름을 지은 행정구역에 불과하다는 말뿐이었다.

대신 ��하며 절실해 하는 눈빛을 감지한 담당자는 벽 위에 붙여놓은 지도책에도 없는 아주 자세한

거대지도를 가리키며 양산박 위쪽 30-40KM지점에 고대의 수장진(壽張鎭)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소파에 올라서 깨알같은 글씨를 확인하니 "壽張鎭" 세 글자가 분명히 있었다.

반가움과 황당함이 교차하면서도 감사의 말을 전하고 다시 차를 돌려 예의 수장진을 향하는데

이 양산박 가이드 친구, 상점만 나타나면 무조건 들어가 상점 전화로 이곳 저곳에 전화문의를 해댄다.

전화비는 물론 본인이 사후 뒷처리를 하는 가이드 역할로 뒤바꾸어야 했고....

다시 그 곳을 향해  농로 사이를 덜컹거리며 두어 시간을 간 끝에 문제의 그 곳에 도착해
치우능묘 위치를 수많은 사람에게 묻고 또 묻기를 수 십 차례. 본인은 물론 가이드와 운전수도

지칠대로 지쳐 찾기 힘든 것 같으니 되돌아가자고 한다.

하기는 중국인 가이드는 수장진 데려다 준다고 했지 치우 능묘 찾아준다고는 안 했으니.

지금까지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가기에는 너무나 아쉬워 가이드를 달래어 설득했다.

꼭 30 여명 만 물어보고 그 안에 결론이 안 나면 오늘은 일단 숙박할 수 있는 인근 양곡(陽谷)이란

도시로 철수하기로 서로 양해를 했다.

길거리 차를 세우고 행인에게 묻기를 20여 번 하다 보니 한 노인네가 황제헌원과 치우는 몰라도

황제헌원의 장군이었던 왕령관(王靈官)을 모시는 사당은 안다며 소개해준다.





왕령관은 치우(비)를 잡아죽였다는 황제의 좌장군이었는데 왕령관 사당을 찾으니

지극히 초라한 사당으로 할머니 몇이서 사당을 지키고 있다.

신당 좌우에는 곡부 위 태산(泰山)이 주거지라고 하는 황제가 곡부아래 연주( 州)가 터전인

묘족의 추장 치우를 잡아서 죽였다는 벽화와 황제가 악을 제거하고 착한 일을 했다는 칭찬일변도의

조악한 벽화가 그려져 있고 사당 앞에는 사당의 유래를 알리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사진 참조)










우선 사진을 찍고 주변을 샅샅이 탐문하지만 좌를 가리키는 놈, 우를 가리키는 놈,

모른다는 놈 등 10인 10색으로 다 달라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오늘은 일단 철수하기로 했다.

철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금이 얼마 없고 카드는 안되고 하여 여비마저 바닥나면 중국천지에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것 같은 절박함과 제약된 시간이 그 원인이었다.

따라서 우선 수호지에서 무대와 무송이 활동한 근거지 배경으로 등장하는 양곡(陽谷)이라는

도시로 가서 허기를 채우기로 했다.

두 명 모두 양산박에서 온 사람인지라 돌아가야 한다기에 기사는 100원, 가이드는 200원을
주고 나니 수중의 현금은 하루 호텔비도 안되는 단 300원. 300원으로 치우천왕묘를 찾고

도시까지 가야하는 절박한 상황이 드디어 왔다.

배수진을 치고 찾아야 하는 전투적 개념으로 상황에 임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탐사의 중단을 의미했고 일단 산동성 수도 성시(省市)인 제남(濟南)으로

갔다가 돈을 뽑아 내일 저녁 다시 와야 함을 의미했다. 그것도 제남(濟南)으로 바로 가는 버스가

양곡(陽谷)에는 없어 여러 도시를 돌면서 갔다가 다시 돌면서 와야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너무 억울하고 아쉬워 기사와 중국인 가이드를 다시 한번 설득했다.

둘 다 돈을 받아서 신났는지 흔쾌히 OK하여 다시 그곳으로 갔다.

꼬치꼬치 캐물으니 왕령관 신당 할머니가 용산문화유적지 쪽을 가르쳐 준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치우천왕 유적지인 이 곳부터 산동성 동쪽 위인 황하 하류 임치 까지

용산유적지는 띠처럼 포진하고 있었다.

논두렁 위 농로를 따라 한 참 들어가며 지나가는 농부들에게 치우묘가 있다는 우방(尤坊)을
물으니 안 쪽으로 더 들어가라 한다.

한 참을 더 들어가 지나가는 농부에게 물으니 이곳에 그런 곳은 없다고 한다.

현지인이 없다는 데에야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서너 군데의 길을 들어갔다 차를 빼서 나오며 헛탕치기를 여러 번, 다들 그냥 돌아가기로 하는

분위기로 돌아서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이 번에는 전혀 다른 둑 반대쪽으로 한 번 들어가 보고

돌아가자는 마음으로 좁은 농로를 따라 차를 몰았다.

차를 세우게 하고 차창을 열어 지명을 보여주며 지나가는 농부마다 묻기를 여러 번,

이 곳에도 그런 곳은 없다고 한다. 기사가 상황을 눈치챘는지 차를 돌린다.  

그냥 가면 낭패일 것 같아 다시 차를 돌려 길 끝까지 한번 가보자고 고집해 좁은 농로에서 어렵게

낑낑거리며 차를 돌려 끝 쪽에 붙어 있는 곳엘 가니 유방(油坊)이라는 마을 표지석이 나타난다.

순간 바로 이거다! 하는 생각에 다소 희망의 불꽃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 표지석에는 제갈량이 묘족의 수장인 치우를 정벌했다는 꽤나 엉터리같은 이야기
가 적혀 있었다.

엉터리지만 묘족의 수장인 치우이야기가 나와 뭔가 포카스가 맞아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가이드는 이것으로 만족하고 가자는 표정이다.

더 욕심이 생겨 이 근처를 한번 더 뒤져보자고 고집하니 가이드도  더 이상 말은 안하고

를 가다 서다 반복하며 주위 사람에게 탐문을 계속했고 나는 그 때마다 차에서 내려

미리 써놓은 지명과 사료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짓을 세 시간 가량을 하니 안 지칠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양산박 가이드가 문화국을 찾아가 보자고 한다.

기사에게 문화국을 가자고 했더니 기사는 다행이 자신이 길을 안다고 한다.

농로를 이리저리 돌아 허름한 문화국 2층에 도착하니 6-7명의 직원이 가득한 담배연기로

올빼미 굴을 만들어 놓고 인사를 한다.

아마 가장 연장자인 듯한 사람이 자신을 마광김(馬廣金)이라 소개하며 치우능 유적지를

고 있다며 환하게 웃는다.

그러면서 자신이 정리해 둔 자료들을 보여주었다.(사진 참조)




- 가운데가 필자인 안원전 선생님 !

마선생은 자료 복사를 해가라고 허락해 주고 한국 사람이 치우묘에 처음 찾아왔다는

말을 해 주었다.

양산박 가이드가 밖에 나가서 자료를 복사해 오자 우리는 마선생과 함께 치우능이 있는 곳으로 갔다.

마선생은 치우능의 봉분이 잘려나갔다는 의미로 봉분을 그리고 자르는 표시를 하고 지금은 유적지만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는 아마 봉분이 훼손된 것이 얼마 안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들렸다.

더불어 그는 비석도 만들었는데 기초석이 훼손되어 지금 제작하고 있는 중이라 했다.

내가 비석을 보자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벌써 차가 도착해 내리니 돌을 깎는 석수장이 집이었다.

그 곳에 내리니 석공들이 나와 집 앞에 늘어놓은 수많은 돌 중에서 뽀얗게 먼지를 덮어쓰고
있는 돌을 빗자루로 쓸어낸다.

먼지를 쓸어내니 치우총(蚩尤塚)이라는 놀라운 비문글자가 나타났다. 실로 감개무량이다.




- (운영자)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일개 무덤이라 한 비석을 보고 돈을 모아 치우왕릉 유적지라는 비문으로 바꿔 드려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우선 사진촬영을 하고 유적지를 향해 달렸다.

막상 비문을 세웠던 치우왕릉 유적지에 도착하니 드넓은 논 한가운데에 서있는 두 그루의 나무아래였다. 주변 경관을 보니 불과 일 이십 년 내에 용산유적지로 개발되면서 파헤쳐서 논으로 일궈진 것 같은
분위기다.

나는 논이랑 사이를 걸어 항주 밑 월나라 구천의 수도이자 우(禹)가 사천성에서 와서 월나라 습관대로

흑치(이빨을 검게 칠함), 조제(이마에 문신)를 한 채 치수사업을 하고 순을 이어 제위에 올랐다가

병들어 묻힌 샤오싱(紹興)의 명주 황주(黃酒:2500년 전통 명주로 "회계산"이라는 브랜드)를 부어드리고

사배로 예우해 심고해 드렸다.

(2002년 4월18일,19일 기록)-



- 예의를 표하는 필자





    

지금의 묘요는 곧 춘추 이후의 남만(南蠻)으로, 한(漢)나라 시절에는 무릉만(武陵蠻),

육조 시절에는 형옹주만(荊雍州蠻) 등의 칭호가 있었다.

송나라 시절 처음 요( )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원나라 시절에 또한 묘(苗)라 칭하기 시작했다.

청대에 이르러 묘족으로 서남 각 성(省)의 토착민족을 통괄했다.

현대학자는 서남민족을 셋으로 분석하는 이가 많다.

생각건대, 명칭 및 소 지파는 한결같이 이견이 있다.

묘(苗)와 요( )는 마땅히 한 족속이 되므로 이를 합해 묘요로 칭한다.

그 주거지는 옛날에 장강(長江:양자강) 유역이었으며 또한 지금은 이들이 호남, 귀주, 광서, 광동

산지에 퇴거해 살고 있다.

청(淸)대에 땅을 바꾸어 옮겨 몸을 의탁했다. 후에 수없이 거듭 반항했으나 점차 한(漢)족에게 동화되었다. 이 계열은 라라면전계 및 북탄계와 서로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자연히 또한 혈통상 서로 관계가 있다.

이에 대해 약간 부연하면 장강(長江:양자강)의 상류라 할 수 있는 사천성 만 본다 하더라도
현재 묘족(苗族)은 사천성에 있는 강족(羌族:동이족;성도 왼쪽에 포진), 장족(藏族)과 함께 3대 민족

자치주 중 하나로 특히 중경(重慶)에는 묘족의 토가족 자치주가 3개나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시 거론하겠지만 일반 한족(漢族)의 음식과는 유별나게 사천성의 매운 음식 맛은 우리 동

겨레의 음식문화에서 비롯한 것이다.  

상주(商周)시기, 양자강(장강) 중 하류지역에 “삼묘국(三苗國)”을 세우고 묘족(苗族), 유묘(幼苗),

삼묘(三苗)라고도 하는 묘족(苗族), 농업에 종사했던 정통 동이 묘족(苗族) 후예의 인구는

현재 7백 50만 정도로 귀주(貴州), 호남(湖南), 운남(雲南), 광서(廣西)등지의 성(省)의 검동남(黔東南)과

상악천검(湘鄂川黔)의 연접지대, 광서 대묘산(廣西大苗山), 전검계와 천금전 연접지대, 그리고

해남도(海南島)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그 중 51%이상의 묘족이 귀주에 거주하며 주로 묘령산맥과

무릉산맥에서 살고 있는데 검동남(黔東南) 묘족 뚱족(dong)자치주 가 가장 넓은 거주지역이다.

그외는 호남상서 투지아족, 이마오족 자치주, 운남 문산 장족(월나라 후예) 묘족 자치주, 사천 배륙,

의보지역, 호북 악서 토가 묘족 자치주 등지에 상당주의 묘족 인구가 살고 있다.

묘족은 자칭 "목(牧)", "몽(蒙)", "모(毛)", "과웅(果雄)"이라 부르며, 한 때는 지역에 따라 "묘(苗)" 자

앞에 다른 명칭은 붙여서 "장군묘(長裙苗:긴 치마를 즐겨 입는 苗)",

"단군묘(短裙苗:짧은 치마를 즐겨입는 苗)", "홍묘(紅苗)", "흑묘(黑苗)" 등으로 불리다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묘족 자신들의 뜻에 따라 '苗族'이라 불리게 되었다.

지금도 묘족은 고유언어를 가지고 있는데 분류하면 한장어계(漢藏語系) 묘요어족(苗요語族)
묘어지(苗語支)에 속한다. 현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백화문(漢文)을 사용한다.




묘족의 음악과 춤은 그 역사가 오래되었으므로 비록 지금은 한족에게 침식당하여 자취조차
찾기 힘들지만 예로부터 10월 상달을 정해 소도보본의 천제를 지내고 음주가무를 즐긴 수두
신앙의 후예답게 그 정서가 우리와 아주 비슷하다.

묘족사람 들이 무척 좋아하는 생황무(蘆笙舞)는 기예가 무척 높다.

묘족의 복숭화꽃 자수 그림이 있는 견직물 밀량(蠟梁;벌꿀집을 끓여 만든 기름으로 하는 염색법)

장신구제작 등의 공예미술은 매우 아름답고 다채로와서 세계에서도 그 명성이 나있다.

묘족의 명절은 비교적 많은 편인데, 비교적 중요한 명절은 “묘년(苗年)” “사월팔(四月八)”

“용선(龍船)”등이다.




- 현란한 은장신구와 자수로 전통복장을 완벽하게 갖춘 묘족들의 축제모습.

   (자료:phototour인용)

묘족(苗族 먀오주)은 여자들의 목을 감싸고 있는 은(銀) 장식품이 이색적인 민족이다.

은장식은 무게가 평균 10∼12㎏에 달하며 무거울수록 신분이 높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정교한 주름치마와 갈대로 만든 현악기 또한 묘족임을 나타내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요족(瑤族 야오주)은 검은 바지와 흰 바지만을 입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은 대개 고산지대에 살고 있으며, 예로부터 징 소리로 마을과 마을 사이의 소식을 알렸다.

요족은 커다란 물통에 약초를 풀어 목욕하는 독특한 풍습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류마티즘을

비롯한 여러 질병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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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을 마치면서 !

이것이 바로 제가 바라던 방향입니다
한가지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면 공동노력을 하여 새로운 증거들을 찾는일 ~

우리역사 복원은 어느한 개인의 힘으로 절대 이룰수 없는 부분입니다

더 좋은 자료들이 소개될 것입니다

인용을 허락하여 주신 안원전 선생님께 다시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운영자 송준희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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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