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상고시대

구려치우 용산문화

오늘의 쉼터 2008. 9. 7. 15:34

구려치우 용산문화 BC2800~BC2300

        

1. 소하연문화 부호문자  

2. 하가점 하층 청동문화  

3. 청동기 도입 용산문화

             

 

1.  소하연문화 부호문자

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는 내몽고 오한기(敖漢旗) 소하연향(小河沿鄕) 백시랑영자촌(白斯朗營子村)과

옹고트(翁牛特旗) 해방영자향(解放營子鄕) 석붕산(石棚山)의 77좌 고묘장에서 나타났는데

그 시기는 약 4900년 전이다.

즉 환웅시대 말기로서 치우가 치하(淄河)로 청구국을 옮겨가기 직전의 만기(晩期) 신석기문화다.

     

3000년전 하북성 중산국왕의 도끼에 나타난 부호글자와  4900년전 내몽고 옹고트 석붕산 도자기에

나타난 부호글자 적봉시와 가까운 옹고트 해방영자향 석붕산 고묘에서 원시적인 부호문자(符号文子)가

사슴 그림과 섞여서 출현한다.

그중 한 도기에서만 7글자의 부호가 나왔는데 부호로서 田, 卍 이외에 비(飛), 연(燕), 부(斧), 기(己), 을(乙)

등의 고어체가 있다.

 

만卍형 글자에 대하여 진혜(陳惠)는 [문물춘추(文物春秋), 1992]

<내몽고 석붕산 도문시석(內蒙古 石棚山 陶文試釋)>에서 백적(白翟)의 부족 족휘(族徽)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5000년전 환웅시대 내몽고의 도자기에 새겨진 부호와, 3000년전의 백적족 중산국(中山國)=

하북성 석가장시(石家莊市) 평산현(平山縣) 영수고성(靈壽古城) 도끼의 부호 문양이 일치한다.

 

부호 글은 상형문자 한자의 뿌리다.

백적족은 주(周)나라 때에 주나라 왕실과 통혼한 단군의 장수가 세운 나라다.

훗날에 적(翟)을 적(狄)으로 바꾸어서 북적(北狄)이라고도 했다.

(후단군조선은 동이족 영역에서 북적의 영역으로 진출하여 오르도스 고원에 진출했었다.)

이로서 신석기 말기에 환웅국이 문자를 이용한 기록이 증명된 것이다.

[한단고기]에 의하면 환웅시대는 녹서(鹿書), 치우시대는 화서(花書)가 있었다고 했다.

녹서(鹿書)는 백분하(百汾河) 계곡이나 음산 암각화에서 연구해야 할 것으로 보이고,

옹고트 석붕산의 질그릇에 새겨진 부호는 마치 꽃문양을 보는 것 같으니 화서(花書)로 고려된다.

홍산문화가 소하연문화로 발전할 때에 14세 환웅 치우가 산동으로 도읍을 옮겨갔다.

 

2.  하가점 하층 청동문화


하가점(夏家店) 문화지는 서요하(西遼河)의 남쪽 상류인 노합하(老哈河)의 중류에 있으며 적봉에서

동쪽 15km 지점이다.

하가점 문화지에서는 상층문화지에서 구리로 만든 송곳(銅錐) 4건, 동촉 2건 연주상 동식(連珠狀 銅飾)이 5건,

쌍미형 동식 2건 등이 있다.

하가점 문화지의 최하층에서도 구리 과립 4개가 나왔는데 이는 청동기물에서 떨어진 것으로 고려된다.

이것이 배달 청구 시대의 최초 구리 유물에 해당한다.

초기 구리 유물이 발굴되는 곳은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대성산유지(大成山遺址), 내몽고 적봉시

하가점유지(夏家店遺址), 적봉시 영성현(寧城縣) 소유수림자(小楡樹林子), 영성현 대전자(大甸子) 등이다.

(여기서 영성현 대전자 지역이 앞장에 소개된 청구국 수도 발한산 흑성 지역이다.)

당산시 대성산 유지에서는 초기 청동기시대의 붉은 색을 띤 순동(純銅) copper의 성질을 띤

홍동패식(紅銅牌飾) 2개가 발견되었는데, 대략 bc2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적봉시 하가점유지에서

발견된 4과의 동련사(銅練渣)=(제련덩어리)는 순동보다 한 단계 발전한 것으로 탄소 동위원소 C-14 절대

연대가 bc1900년전후의 유적에서 나왔으며, 대전자(大甸子)의 소형 동기(銅器)가 bc2000-bc1500년간의

유지에서 출토되었다.

 

<신시본기>에서 치우는 갈로산(葛盧山)의 쇠를 캐어서 옹호산(雍狐山)에서 야금을 하였다는데 옹호산이

옹고트(翁牛特旗) 옛이름으로 고려된다.

현 옹고트의 북쪽 지역인 임서현(林西縣)에서 구리를 캐던 고대 동광(銅鑛)이 발굴되었다.

옹고트 서쪽 이웃인 케스케덴(克什克騰旗)의 천보동(天寶洞)과 용두산(龍頭山) 문화지에서는

초기 청동기물이 많이 발굴되었다.

일반적으로 하가점하층문화를 용산문화 이후로 분류하지만 하가점하층문화가 치우 용산문화의

배경이 되는 구리 도입 문화이기 때문에 먼저 소개했다.

 

3.  청동기 도입 용산문화

메소포타미아의 슈메르족이 6000년전에 청동기문화와 청동무기를 개발했다.

천년 뒤에 치우가 청동기를 중앙아시아에서 수입해와서 14세 자오지 환웅이 되고, 중국 내지로 들어가

황제 헌원을 밀어낸 뒤에 치하(淄河)변에 청구국을 세워 용산문화(龍山文化)를 퍼뜨렸다.

치우의 치(蚩)에서 치하(淄河)가 비롯된다.

치(淄)가 검다는 뜻이 있는데 용산문화에는 검은색 질그릇이 등장하고 옥기에도 청동기 도구로서

귀신무늬가 새겨진다.

옥기에 새겨진 수면문(獸面文)도 정교하게 수면문을 새긴 도구로서 청동기 도구의 존재를 시사한다.


그림 4)  용산문화  수면문 옥규와 삼태극 옥기

용산문화 수면문 방정

 

용산문화가 최초로 발견된 것은 산동성 제남시(齊南市) 동쪽 용산진(龍山鎭)이다.

용산문화는 bc2800-bc2000년 사이에 하남, 섬서, 산동, 하북에 근거했다.

반월형 석도가 출현했으며, 돌삽, 돌낫 등의 출현으로 농업 기술이 혁신되었다.

가축 사육면에서 중국 앙소문화(仰韶文化)보다 수량도 많을 뿐 아니라,

개나 돼지 외에, 소와 양 등이 추가되었고 닭과 말도 사육되었다.

 

예맥, 숙신, 물길족은 양을 기르지 않았다.

환웅의 부여족이 닭과 말, 양을 가지고 온 것이다.

질그릇에서 채도는 줄고, 회색, 흑색 토기가 주로 되며 손잡이 달린 세발솥(三足器)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빗살무늬 대문구문화 말기인 태산 동남쪽 거현(莒縣) 유적에서는 원시 한자(漢字)가 질그릇에 새겨져 출현한다.

조早, 朝의 원형이 되는 상형 글자이다.

용산문화의 옥기는 옥면에 짐승이나 매 또는 독수리의 그림을 새기고 삼태극(三太極)형 옥환이 나타난다.

종래에는 bc2100년에 세워진 하(夏)나라 조기에 중국 최초의 청동기 문화가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언사(偃師) 이리두(二里頭) 문화가 바로 그 하(夏)나라 청동문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리두 문화보다 이른 앙소문화(bc5000- 3000년)에 속하는 서안(西安) 반파(半坡) 유적지에서

황동편(黃銅片)이 발견되고, 황하 상류 마가요문화(馬家窯文化)에 속하는 감숙성에서 청동도(靑銅刀)가 나오고,

청해성에서 동경(銅鏡)이 나왔다.

또한 용산문화(龍山文化)에 이르러서 잔동추(殘銅錐), 동련사(銅煉渣), 공작석(孔雀石)=(구리와 탄소 결합 보석) 등등의 동편(銅片)이나 동액(銅液) 흔적, 동령(銅鈴),등 다양한 청동문화 흔적이 잇달아 발굴되고 나타나서

이제는 용산문화를 하나라에 앞선 중국 최초 청동기문화의 서막으로 보게 되었다.

이 청동기가 발굴되는 용산문화 유적지의 분포는 산동성의 교현, 유하현, 장도현, 일조현 등과 하남성의 정주,

임여현, 등봉현, 산서성의 양분현 등이다.

 

[사기]에서 치우환웅은 동두철액(銅頭鐵額)의 투구 무장을 하고 탁록(啄鹿)에서 웅씨의 후예인

황제(黃帝) 공손헌원(公孫軒轅)과 싸웠다.

치우가 처음으로 청동 창과 방패(干戈)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동두철액하는 수준이면 투구를 주조하는 기술도 상당하고, 또 철편을 두드려 펴는 기술도 있어야 한다.

치우환웅은 황제 헌원과 탁록에서 결전하여 이기고 남쪽으로 내려가 새로운 청구국을 열었다.

[중국전사(中國全史)]에서는 하남, 하북, 산동, 산서에는 치우환웅, 섬서성 장안은 황제가 있었고

황제가 치우를 죽였다고 하는데 역사 왜곡이다.

 

14세 치우 환웅 이래 청구국 영역은 황하 남쪽 하남성으로부터 산동반도 일대, 양자강 북쪽의

회(淮)-대(代) 등지로 추정되는데, 서요하(西遼河) 남단의 청구국에서 중원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치우가 옮겨간 새로운 청구국의 중심은 하남성 개봉시 진류에서 시작하여 산동성 제하(濟河), 치하(淄河)

유역의 임제(臨濟), 임치(臨淄), 임구(臨丘), 청구(靑丘), 안구(安丘) 등으로 옮겨왔을 것이다.

치우환웅이 불함산에서 옮겨간 새로운 청구국(靑丘國)은 산동반도 태산(泰山) 아래였다.

<대변경(大辯經)>에서 "치우환웅은 천하를 평정하고 회대(淮岱)를 점령한 바 있는데,

그의 능이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에 있다."고 했다.

[진서(晉書)-지리지(地理志)]에서도 동평국(東平國) 수장현(壽張縣)에 치우사(蚩尤祠)가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치우능이 있다고 하는 동평군 수장현은 오늘날 산동성의 황하 남쪽 운성(鄆城) 수장집(壽張集)이라는 고장이다.

 현재 흔적도 없다.

같은 책에서 임제(臨齊)에도 치우사가 있었다.

한편 [규원사화(揆園史話)]에서는 치우환웅이 공상(空桑)에서 제위에 올랐다고 하는데 이 공상은

오늘날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다.

개봉시 동남쪽 교외에 진류(陳留)라는 곳이 치우가 즉위한 공상의 정확한 위치다.

고고학적으로 용산문화의 시작과 [사기]에 기록된 치우의 시대는 일치한다.

치우 환웅은 bc2700년에 배달 신시 문화로부터 산동반도의 빗살무늬 예맥 문명지의 하나인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에 옮겨 들어가서 용산문화를 일으킨 것이다.

훗날 상(商).은(殷), 제(齊)나라로 이어진다.

치우가 공상에서 즉위했어도 치우가 옮겨간 청구국의 새 도읍지는

현재의 치하변(淄河邊) 임치(臨淄), 우산(牛山) 부근으로 고려된다.

임치는 과거에 영구(營丘)라고 하였다.

임치 주변에 제나라 도읍성, 제나라 왕이었던 환공대(桓公臺), 관중묘(管仲墓) 등이 있는데

본래 삼황오제중 첫째인 태호복희(太昊伏犧)가 이미 임치에 살았다고 전한다.

태호복희는 18환웅 중의 5째인 태우의환웅의 12번째 아들인데 신시에서 태어나서 팔괘를 만들어

복희역점을 만들었는데 청구 낙랑을 거쳐 임치에 살았고 그의 능도 산동성에 있다고 한다.

복희가 태어난 천산의 신시 북쪽 부하문화에서는 가장 오래된 복골이 나왔다.

치우도 검다는 뜻이고 치하의 치(淄)도 검다는 뜻이다.

제도(齊都)의 서쪽의 치천(淄川)은 흑산(黑山)에서 나오고, 치하는 밝산(博山)에서 나오는데

그 사이에 제나라 도읍이 있다.

 이곳이 치우의 수도 청구국의 위치로 확실하다.

 

치우환웅을 자오지(慈烏支)천황이라고도 부르는데 자오(慈烏)는 까마귀다.

태양신의 아들, 삼족오 까마귀 토템이 형상화된 것이다.

명나라는 북경(北京)에 천단(天亶)을 세우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 천단에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와 더불어 뇌사(雷師),

즉 전쟁신이었던 치우 환웅이 모셔져 있다.

 

여기서 풍백, 우사, 운사 등은 단군의 부하인 삼신과도 동일한 것이다.

즉 하북의 백성들이 모두 치우 환웅의 신전을 모시고 치우 환웅이 3신을 데리고

북경으로 와서 탁록의 벌판에서 황제 헌원을 물리친 전설을 기린 것이다.

용산문화를 발굴하고서 이때에 중국 최초로 말을 사육한 것이 보고되었다.

 

슈메르에서는 bc4000년에 청동기시대를 열었다.

bc3100년에 슈메르에서 만들어진 사자머리 독수리와 사슴이 새겨진 동패식(銅牌飾)은 고구려,

발해의 동물문양 동패식과 형식적으로 비슷한데 그 출현이 치우시대보다 무려 4-500년 앞선다.

 따라서 치우의 청동기는 슈메르에서 전파된 것으로 본다.

수면문, 짐승 혹은 귀신 얼굴을 유행시킨 치우는 또한 처용과 같은 아랍계 외래인인가?

슈메르의 언어는 왜 한국어와 비슷한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인종의 섬과 같은 민족인 슈메르인의 상투는 또 무엇인가?

앙소문화에서부터 상투의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슈메르인이 동쪽으로 전진해 왔으면 응당 함께 따라와야 하는 점토판 문자가 동방에 없다.

아마도 점토판 문자 발생 전에, 바이칼호에서 서쪽으로 간 동방족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청동기를 발생시키고

그 일부가 다시 말을 타고 실위를 거쳐 돌아와서 청동기 기술을 배달국에 전달한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