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상고시대

치우는 우리의 위대한 조상

오늘의 쉼터 2008. 8. 30. 20:43


(특집대담) 치우는 우리의 위대한 조상


"치우천자의 역사"는 오재성 선생님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밝혀지게 되었으며

이제는 "치우학회"가 설립되고
중국 현지 유적 탐사를 통하여 치우천자 유물 유적을 직접 확인하는 쾌거를 이룩하는 등

실존의 역사가 증빙되고 있습니다

그 실증을 눈으로 보여주어도 이민족의 역사라 말하는 사람들은 대체 어느나라 사람인지 궁금합니다
그듭 말하고 싶은 것은 학자 본연의 자세인 공부하기를 제발 게을리 하지 말라는 부탁입니다

오늘 우리의 참역사를 찾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뜻있는 분들의 치우학회 설립당시 대담내용을 소개함으로써

단군이전 "치우천자의 실존역사"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 치우는 우리의 위대한 조상 >


- 일시 : 단기 4332년 10월 21일 목요일 오후 2시
- 장소 : (사) 한배달 사무국(02-738-6198, 738-7016)
- 사회 : 박정학(치우학회 회장)

(참석자)

강동민 : (주) 코메론 회장
김대성 : 한국문자학회 부회장
김바우 : 목동교연학원장
김종길 : (주)태백공영 대표이사
박정일 : 성형외과 원장
이일봉 : "실증한단고기"의 저자
이홍철 : 신구학회 부회장
전유선 : 한암당기념사업회 회장
조옥구 : (사)한배달 사무국장


(대담내용)


(사회)


요즘 기독교와 단학선원(한문화연구원)의 단군상 훼손을 둘러싼 논쟁이 시중의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간 우리 한배달에서는 단군의 실존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러한 논쟁 자체를 하지 않았으며,

단군이전의 민족시원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역사적 사실로 만들기 위한 나름대로 노력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 대상 중의 한사람이 치우천왕입니다

서지학적으로 보면 중국의 사서에 단군보다 훨씬 많이 등장하는 우리조상이 치우아닙니까 ?

그리고 우리민족이 중화족보다 먼저 청동무기를 사용했음을
"치우가 동두철액(銅頭鐵額)이었다"는 기록으로 확인해주는 책이 사마천의 "사기" 아닙니까 ?

그리고 최근에 북경을 비롯한 그 동북부 지역과 대동강 유역에서 4500년 내지 그 이전의 청동기 유물이 발굴되어

그간의 문명 발상지(이집트 약 5,000년전, 황하 약 4,500년전 등)에 대한 재검토 의견이 대두됨으로써

사마천의 기록이 사실로 확인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지난 5월의 탁록 답사에서 중국에서도 그 동안 "광폭했던", 그러나 싸움은 엄청 잘 했던, 이민족의 지도자로서

자기들의 "역신"으로까지 비하하던 치우를 중화족의 공동조상으로 모시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반면,

이번 치우 취재과정에서

우리나라 학계의 연구 및 의식수준이 위험한 수위에 있음을 확인 했으며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머지 않아 우리 민족의 위대한 조상인

치우천왕을 중국에 빼앗길 수도 있겠다

우려에서

"치우연구회" 발족을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지난번 탁록 답사를 다녀오신 김대성 님께서 당시의 정황을 설명해 주시지요



(김대성)

가기 전에 치우에 대한 한문자료를 첨부하고 치우의 이름도 한문으로 써서 유적지를 찾아달라고 여행사에 협조를 요청했으며

만반의 준비가 되었다는 자신감으로 출발했는데,막상 현지에 가보니까 전혀 상황이 달라요

실제로 현지에 가서 겪은 일인데, 우리가 한문으로 "蚩尤"라고 써 놓고 치우를 물어도 전혀 알아듣지를 못해요.
발음이 달라졌고, 가치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겨우 치우나무, 치우우물, 치우군의 야전사령부, 전투현장 사령부 등을 돌아본 후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만

한가지 큰 자극을 받은 것은,

그들은 벌써 "삼조당(三祖堂)"이란 사당을 지어 놓고 염제와 치우와 황제를 중화족의 공동조상으로 모시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조옥구)

기록으로 볼 때 그 세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


(김대성)

문자학에서는,
황제는 당시의 글자에 나타나지 않고 치우 역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금문신고"를 쓴 낙빈기 선생은 "치우는 사적, 전적에는 나오는데 문자(금문)로 나타나는 것은 없다.

아마도 신농의 외삼촌 인 것 같다"고 말합니다

어떤 기록에는 신농과 치우는 배다른 형제라고도 하며, 우리측 기록에는 형제간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사람이며, 매우 격렬한 싸움을 벌였던 관계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사회)

탁록의 전투에서 누가 이겼느냐 하는 것도 서로 팽팽하게 대립하는 기록인데요


(김대성)

중국사람들은 한사코 "황제가 이겼다"고 주장하지만, 이겼다고 하면 자기 아들인 소호금천에게 주었던

왕위를 "왜 7년 만에 내어 놓았겠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당시의 정세를 살펴보면, 황제가 신농을 괴롭히자 치우가 나서서 본때를 보여줌으로써 황제측이 왕위를

내어놓은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사서에는 "구려의 난"이라 하여 계속된 당시의 혼란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잘못 전해진

사실(史實)이 있다는 것만 확인합시다

예를 들면, 중국의 장수들 가운데 한고조 유방도 그렇고, 항우도 그랬듯이 싸움터에 나갈때면 치우사당에

가서 이기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합니다

무슨 이런경우가 다 있습니까 ?
싸움에 패한 장수에게 이기게 해달라고 비는 건 무슨 경우입니까 ?
비는 사람들이 모두 치우계라면 모르겠지만.........


(김대성)


그것은 전쟁에 관한 것이지요. 전쟁에서 왕이 죽었으면 그 나라는 끝난 것이지 어떻게 수도를 그 패한 지역으로 옮겨서

 밝고 빛나는 새 나라를 엽니까 ?

청구로 수도를 옮긴 것 역시 치우가 승리했다는 사실의 반증이기도 합니다.


(김바우)

기록상으로 치우의 연대는 언제입니까?


(김대성)


금문학자 낙빈기 선생은 청동기에 나타난 기록을 바탕으로 B.C. 2517년의 기년을 계산해내고 이를 상원갑자(上元甲子)로 하여

신농 즉위 원년으로 하였습니다

다른 기록에는 치우의 한웅 즉위를 B.C 2707년, 황제의 출생을 B.C. 2692년 등으로도 기록되어 있어 정확하지는 않으나

단군보다는 300여 년 앞선 시대의 사람들로 볼 수 있습니다


(김종길)

치우를 찾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회)


최근 발굴되는 청동기 유물들과 비교하여 '동두철액'이라는 치우에 대한 기록들이 사실인 것으로 확인된다면 문명의 발상이

중국보다 우리가 앞서게 되며,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가 단군조선이 아니고 그 이전인 배달국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 배달민족이라고 하는 이유도 분명해질 것이며, 치우천왕의 자질이 그 후손인 우리 민족의 핏속에 흐르고 있어

현재에도 활을 잘 쏘고, 씨름과 유사한 레슬링을 비롯하여 권투 등 격투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를 알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며,

치우가 황제를 무찌를 때 얘기한 '신시의 법통을 이은 것'과 '선(仙)으로서 법을 만든 것' 등에서 21세기에 대비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민족의 뿌리를 세우는 의미가 있게 됩니다.


(김대성)


낙 선생이 연구한 금문의 문자로 보면 요시대에 오면 이미 청동기가 끝나고 철기로 진입하게 되며, 따라서 순임금 때는

 벌써 철기시대에 진입해 있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연구된 자료를 모으고 분야별로 나누어 이제라도 시작합시다.


(강동민)


염제와 황제 그리고 치우는 같은 시대에 서로 관련을 맺은 사람들인데, 기록상 20~30년은

몰라도 100년 이상 차이가 나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요?


(김대성)


낙 선생은 청동기에 나타난 기년만 가지고 따진다는 면에서 신뢰할 만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는 솔직하게 "치우는 문자에 나오지 않으므로 나는 모르겠다.

단지 이때의 정황으로 보아서 신농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것이다"라고만 말합니다.

탁록을 발굴하여 어떤 유물이 나올지는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이일봉)

우리가 치우를 연구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김대성)


우리의 전통문화에도 도깨비 문화가 있는데 이 도깨비가 왜 우리한테 남아 있습니까?

기와집을 지어도 치미를 세우고 그 치미 기와에 치우의 모습을 그리는 까닭은 무엇이며,
벽돌에도 치우의 모습을 새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도깨비와 우리와 관계가 없다면 우리의 장군들이 쓰던 투구에 온통 도깨비를 붙여 논 이유는 무엇일까요?

거기다가 치우가 변해서 도깨비로 되었다는 말이 있고 보면,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치우를 찾아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봅니다.

도깨비가 치우라는 것을 똑떨어지게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이 우리 문화의 뿌리에 남아 내려오는 것을 보면

우리가 탐구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강동민)

구라파나 서구 쪽에는 도깨비가 없습니까?


(김대성)


제가 찾아본 바로는 도깨비는 우리에게만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치우의 후손에게만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도깨비는 호랑이와 비슷한 모습이 특징입니다.

눈이 째지고 양쪽에 뿔이 있고 씩 웃는 모습이 영락없이 호랑이 인상입니다.
특히, 코 같은 데서 그 특징이 두드러지지요.
다른 나라에도 비슷한게 있지만 형상과 역할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렇지만 '도깨비는 치우다', '우리의 수호신이다'라고 단정은 하지 말고
우리 핏속에 남아 있고, 우리 문화의 뿌리에 남아 있는 도깨비를 찾다 보면 치우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도 모르는 이 치우를 찾아 우리 민속에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밝힌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며 연구단체를 만들면 아주 재미있는 것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전유선)

치우라는 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여러 설이 있다는데요?


(김대성)


박현 씨의 고 한어를 바탕으로 한 해석에 따르면,
치우의 이름인 '자오지(慈烏支)'에서 '자오'는 새 '조(鳥)'와 통하는 말로서
새는 곧 해(太陽)을 의미하고, 큰 어른 또는 지도자를 상징하는 '지', '치'와 결합하여
'해아버지'로서 '영토를 확대한다, 넓힌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박희준 선생은 '치우다'에서 왔다고도 얘기하고 있으나
이를 규명해 보는 것 자체가 재미있고 이것이야말로 새 천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적절한 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사회)


맞습니다.
새 천년을 맞으며 우리가 우선적으로 밝혀야 할 상징적인 인물이 바로 치우입니다.
단군보다 더 쉬울지 모릅니다.
그래서 치우에 대하여 더 깊이 연구해야 하는데 어떻습니까,
치우와 도깨비, 도깨비와 수호신 이런 등식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김대성)


지금은 허깨비로 만들어 놓았으니까 수호신은 아니지만 여기서 단정을 짓지는 맙시다.
도깨비가 어떻게 우리의 수호신이 되었는지는 계속 알아봐야 합니다


(김종길)


중국에서는 이미 '삼조문화연구회'라는 단체가 결성되어 치우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했는데

우리도 이 단체와 교류를 시도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김대성)


일단 탁록의 치우성에 가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서 직접 느껴 보아야 합니다.
처음 볼 때 느껴지는 그 기분, 내용을 모르는데도 눈에 익은 것 같고 피부에 와 닿는 것 같은

그 어떤 감이라는 그것을 직접 느껴봐야 합니다
  
치우가 이겼느니 졌느니 하는 것도 치우성이라고 하는 곳에 가서 보면 직감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곳은 난공불락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치우가 졌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성을 빙 둘러 협곡이 있어 외부에서 쳐들어온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이일봉)


그래서 황제는 귀신을 동원해서 치우를 잡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김대성)


'백문이불여일견'입니다.
아무소리 말고 가서 보자는 말입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물도 마셔 보고....


(강동민)


중국에 있는 우리 회원들의 도움을 받도록 하지요


(김대성)

탁록에 가면 경주 김씨의 선조인 김안상의 묘도 같이 보고 옵시다.


(사회)


서두에 얘기했지만 혹시 치우의 후손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소질 같은 것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치우가 활을 만들고 잘 쏘았다고 하니 양궁을 잘하는 것이라든지,
싸움을 잘했고 투지가 강했기에 우리 민족이 레슬링이나 권투 같은 격투기를 잘한다든지 하는 쪽으로 설명이 가능할까요?


(김대성)


일본을 비롯한 대부분 민족의 경우 대장끼리 싸움에서 진 편은 모두 항복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삼별초나 독립군, 의병들처럼 아무리 임금이 항복을 했다고 해도 우리 민족이 항복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어디선가 나와서 내 나라 내 고장을 위한 국민들의 저항이 계속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치우의 기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회)


이상으로 치우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간단히 나눈 얘기만 가지고도 아직 우리가 밝히지 못한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치우를 찾는다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에 논란이 되고 있는 단군의 실사 여부에 관한 문제라든지,
우리 민족의 청동기 사용 연대라든지,
단군 이전의 배달나라가 배달민족이란 말이 나온 근거가 된다든지 하는 우리의 고대사에 대한 인식을 일거에 혁신시킬수 있는

중요한 과제입니다.
  
강단의 역사학들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으므로
우리라도 나서서 이러한 다양한 연구주제에 대해 자료를 모으고, 2차원적인 연구라도 전개하며, 어려 분야에서 더 많은 연구를

하기 위해 지난번에 의견이 모아진 대로 '치우연구회' 창립키로 합시다.

오늘 모임 '발기인회'로 하고, 여기 참여하신 분들을 발기인으로 모시겠습니다.


(사회)


그러면 우리 '치우연구회'의 창립시까지 제반 사항을 이끌어갈 준비위원장 한분을 뽑아야 하니까 적당한 분을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대성)


여기 오신 분 중에서 도깨비 같은 사람이 치우회의 회장을 맡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박 소장밖에 더 있겠습니까?(모두 박수로 찬성하다)


(사회)


여러분들의 뜻에 따라 연구회의멋진 출범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사실 13년 전 한배달에서 제 별명을 '치우천왕'이라고 지어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외모에서부터 치우천왕의 모습이 연상되고, 군인이면서 역사의식이 투철하기 때문이라면서 붙여준 별명인데 이렇게 연결이 되네요.
감개가 무량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도깨비, 장승, 막새기와, 무속, 탈 등 치우와 관련된 분야의 여러 전문가들과 손잡고 학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그 결과를 우리 사회에 알리는 일에 뜻을 같이 할 분들이 규합되는 대로 조만간 길일을 잡아 '치우연구회 창립대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완)


(운영자 주)

현재 치우학회가 결성(박정학 회장)되어 중국 현지 탐사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음을 부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