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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원공 김사형 후예 충.의.효.열.일화(忠.義.孝.烈.逸話)

오늘의 쉼터 2008. 7. 19. 17:25


익원공 김사형 후예 충.의.효.열.일화(忠.義.孝.烈.逸話)

 

 


 공의 호는 낙포(洛圃)이고 안동부인(安東府人)이다.

여조도원수 추충정란 정원공신 삼중대광, 도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 봉 상락군 개국공 김방경(金方慶)

시 충렬공의 현손, 대광상락군 김순(金恂) 문영공의 증손. 추성보절동덕익찬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수사도 첨의사사 좌정승 예문관 대제학 상주국 복창부원군, 상락후 김영후(金永煦) 정간공의 손(孫). 증 보국숭록대부 영삼사사 상락군 김천(金 )의 자(子). 고려 충렬왕 2년(1341년)에 출생하였다.

고려의 벼슬은 단성보리공신 삼사좌사 동판도평의사사사, 조선왕조에서는 순충분의좌명동덕개국공신.

추충협찬정란정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정승 겸 삼훈관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사. 상락백부원군. 식읍 1천호 식실봉 300호, 시호는 익원공이시다. 태종 7년(1407년) 7월 30일에 향년 67세로 서거하였다.




  조준과 더불어 8년동안 정승에 있었으며 처음 벼슬할 때부터 운명할 때까지 한번도 탄핵을 당하지 않았다.

강직하고 명확한 성품으로 백성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다.

고려조에 음보로 연계관직이 되고 감찰규정이 되었다.
공민왕 9년(1360년) 성균관 문과급제하여 고공산랑이 되어 고을에 조세를 공평하게 부과하여 엄하게  다스려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1377년 집의가 되어 동료 조준, 안익, 김주 등과 더불어 인물을 얻었다고 칭송이 있었다.
개성부윤이 되고 단성보리공신호를 받았다.

창왕 즉위년 1389년 가을 이성계가 집정하여 각 부처에 대개혁을 추진할 때 공을 중용하였다.

사전을 개혁하는 지방정치를 융성케 하고자 관백의 지위를 격상시켜 삼품 이상 관을 보임하고 안렴사를

도관찰출척사로 바꾸고 공은 교주 강릉도(交州 江陵道)를 맡아 공명하게 다스렸다.

공양왕 2년(1390년)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이 되고 승진되어 동지경연사가 되어 왕이 장차 천도하고자 함에

시위제사와 도위군관이 병졸을 거느리고 나아가 백성의 주식이 어렵고 조정이 극도로 혼란하므로 관에서

논쟁을 진정시켰다.

또 우현보, 권중화, 장하 경보의 죄를 탄핵하여 추방하고 이때 관공서가 양파로 나뉘어 서로 탄핵함으로써 관원이 텅비자 병중에도 관에 나아가 대사헌의 중임으로 정몽주, 당인 정우 이색, 최운사와 이훈 등을 파직시켜

물의를 진정시켰다.

 인하여 지문하부사가 되고 삼사좌사 동판도평의사사사에 올라 본 조정에 들어갔다.


1)<익원공 묘소>(경기도지방 문화재 107호.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 49번지)





         


                

                                       <묘소 전면>(경기도 양서면 목왕리 산49번지)

                  

                                                               <묘소후면>


 

2) <익원공 김사형 부조묘 사당>(전북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




               


 

3) 익원공 김사형 영정각(경남 함양군 안의면 초동리 매각)


          


 

4) 익원공 김사형 신도비 및 신도비각(익원공 묘소 입구. 2002. 3.1 항용(제) 제공)


           


           


 

5) 익원공 김사형 묘비문

           


 

 6) 익원공 김사형 낙포재(익원공 묘소 하단)


 

  




 




     <문화재도록> (함양군, 1996) 의 기록 내용




 낙포 김사형(1333∼1407)의 영정을 봉안한 영정각(影幀閣)이다. 김사형(金士衡)은 안동 김씨로

고려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 삼사우사(三司右使)까지 올랐다.

태조 이성계를 추대, 조선 개국공신이 되고 상락백(上洛佰)에 봉해졌다.

정종(正宗)의 즉위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定社功臣)이 되고 태종때 좌정승, 상락부원군으로 퇴사하였다.

시호는 익원공(翼元公)이다.


낙포의 영정은 원래 고창(高敞)의 종손가 김영필(金榮珌) 집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1936년에 17세손

참봉 김영주(金榮珠) 등이 종손과 상의하여 이곳에 옮겨와 1938년에 영정각을 세우고 봉안하였다. 
1938년 4월에 김영주가 이봉사실기를 지었고, 12월에 정도현(鄭道鉉)이 김익원공 영정각 상량문을

9월에 17세손 김영석(金榮錫)이 영정각서를 1955년에 최훈교(崔薰敎)가 영정각기를 지었다.


  익원공 부조묘와 영정 자료 종합(2005. 1. 19. 주회(안) 제공)   


가. 익원공 부조묘(불천위사당) 는


1872년 : (부조묘 이건) 전남 영암에 익원공의 사당인 부조묘(不?廟)를 충북 청원군 강내면 용실동으로 이전,


-1870년∼1872년 8월에 영정은 처음 황해도 평산 엽동에 봉안하였고,

 그후 영암으로 이전하기 이전의 사정은 사실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1900년 : 익원공 부조묘를 용실동에서 강내면 궁현리로 이건, 주창자 김영필,

간사 김태로, 김윤원, 김민상, 김재경, 이건기는 행주 기우만이 쓰다.


1916년 (부조묘 이관) : 익원공 부조묘를 궁현리에서 부여읍 저석리 석탄 이전,

신주, 익원공 김사형 회맹철권 보존


1934년 (부조묘 이건) : 익원공 부조묘를 부여읍 저석리에서 전북 고창읍 도산리로 이전,

상량문은 도산 김정회가 쓰다.


나. 익원공 영정은 원래 고창(高敞)의 종손가 김영필(金榮珌) 집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1936년에 

17세손 참봉 김영주(金榮珠) 등이 종손과 상의하여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초동리 매각마을

낙포영각(洛圃影閣)에 옮겨와 1938년에  영정각을 세우고 봉안하였다.

4월에 김영주가 이봉사실기를 지었고, 12월에 정도현(鄭道鉉)이 김익원공 영정각 상량문을,

9월에 17세손 김영석(金榮錫)이 영정각서를 지었다.


1955년에  최훈교(崔薰敎)가 영정각기를 지었다.


2000. 12. 6일, 익원공 영정을 고창종가 사당에서 목왕리 낙포재로 이송 봉안하였다. 
2005. 1. 18일, 새 익원공 영정을 제작하여 서울 영등포 익원공파 회관에 봉안하였다.  
 지난 9월 5일 익원공파종회는 익원공 휘士衡의 묘소가 문화재로 지정되었음을 고하는 고유제를 백여명의

 후손과 안동김씨대종회 임원 다수가 참석하여 파종회장 洙栢씨의 헌작으로 고유제를 봉행하였다.

 이날 평산신씨 제정공파 회장과 임원이 참석하고 경축 화환까지 증정해 주어 더욱 감사하였다.


이에 익원공 묘소 문화재 지정에 관한 경과와 士衡의 약사를 다음과 같이 약기해 본다. 
2000. 10. 21 ---익원공파종회 회장단회의에서 익원공 묘소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기로 의결 
         10. 31 ---적격서류를 작성 구비 문화재 지정 신청서를 양평군 문화관광과에 제출

         12. 20 ---양평군 문화관광과 담당관이 묘소 자료 답사 
         12. 6  ---익원공 영정을 고창종가 사당에서 목왕리 낙포재로 이송 봉완 
         12. 10 ---양평군 문화관광과 담당관이 2차 묘소 답사
  2001. 3. 16 ---경기도 문화재 위원회 위원 2명과 경기도청 문화재 담당관 2명과 양평군

                       문화관광과 담당관 2명이 익원공 묘소를 답사


           6. 19 ---경기도 문화재 위원회에서 심의결과 경기도 문화재 묘소자료 제107호로 지정 
           9. 5 ---  안동김씨 익원공 묘소 문화재 지정 고유제 봉행


7)익원공 김사형 재실 관리사




     




        8) 익원공 김사형 구 재실




        




  익원공 김사형 제작 혼일강리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좌정승 김사형이 우정승 이무와 이회가 제작한 세계지도


조선 초기부터 두 갈래의 세계지도가 있었다. 하나는 세계의 지리적 지식을 과학적으로 수집 편집한 세계지도이고 다른 하나는 상상적인 세계관을 표현한 추상적인 세계지도이다. 전자는 혼일강리역대지도(길이 171cm×너비 164cm, 혼일강리도 라 약칭함)이고 후자는 원형 세계지도(wheel map)인 천하도이다.


혼일강리도는 지도하단에 기록된 양촌 권근의 발문(양촌집 22권 역대 제왕혼일강리도지)에 의하면 태종2년(1402년) 좌정승 김사형 우정승 이무와 이회가 만든 것으로 현재 그 원본은 미국 워싱턴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사본은 일본 경도의 용곡 대학과 도원시 본광사 등에 전해지고 있으며 그 외 복사본이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지도는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의 고지도일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는 최초로 그린 세계지도이기도 하다.


    




오대산(五臺山)의 강열한 힘이 중은산(中隱山)으로 숨어들어 증조산(曾祖山)인 용문산(龍門山)과 조산(祖山)인 중미산(中美山)에서 굽이치며 달려온 용(龍)이 주산(主山)인 청제산(靑帝山:청계산(淸溪山))에서 좌우로 분맥하여 봉황새가 날개를 펴고 있는 듯이 청룡과 백호를 만들어 청제산 아래로 주맥이 내려와 등을 걸어놓은 듯 산 중턱에 혈이 뭉쳤으니 괘등혈이다.

 혈판은 좁으면서 약간 길게 솟아올라 뚜렷하게 결응됨을 확연이 보여주니 누가 보아도 명혈이다. 혈은 등을 걸어 놓은 것과 같고 좌청룡, 우백호는 등불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쳐놓은 병풍과 같으니 만인에 빛을 밝혀 어둠을 몰아내는 형상이다.

그 불빛이 자손만대를 밝혀주니 명예가 가득하겠으며 후손대대로 귀인과 현자가 끊이지 않으며 건득수(乾得水)는 생궁거문성(生宮巨文星)이 되어 불의에 굴하지 않고 강직하고 용맹스러운 큰 인물이 배출되겠으며 경파구(庚破口)는 문곡성(文曲星)이 되어 문인이 많이 나오겠고 좌는 양궁(養宮)이 되어 만사가 형통하리라 보이며 안산인 노적봉은 후손의 풍요로움을 기약하며 멀리 조산(祖山)인 예봉산(禮峰山)은 정자관(程子冠)을 쓴것과 같이 청수하고 웅장하며 아름다우니 후손중 삼대정승을 기약하며 예봉산 좌측 배알미산(拜謁尾山)이 우측은 운길산(雲吉山)이 호위하니 주변의 도움을 받아 더욱 빛을 발하리니 많은 인물이 배출되리라 본다.
  
  영남대학교 지리풍속학 교수인 남우정(南玗廷) 대봉심기(代奉審記)이다.


      


 영모당 김질(孝子 永慕堂 金質)


 

공의 호는 영모당이고 부령공 김종한의 현손이고 좌랑공 김귀덕의 증손자이다.

공은 1496년(연산2년) 1월 15일 전북 고창군 공음면 갑촌에서 찬의공 김복중의 외아들로 출생, 공은 어려서부터 몸가짐을 바르게 다스리고 총명하여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부모에 효도하고 매사에 예의가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공은 벼슬에 뜻은 없었으나 어머니가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부러워 하니 어머니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진사시에 급제하고 사마벼슬에 올랐으나 공은 영모당을 따로 지어 부모에 효를 다하기 위하여 과업을 폐하려 하자 어진 선비들이 만류도 하고 또 벼슬에도 천거하였으나 끝까지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등창이 발병하자 밤에는 빌고 잇몸으로 빨아 신통한 효험을 얻고, 부모상을 당하였을 때는 인부를 쓰지 않고 몸소 묘소를 만들고 묽은 죽을 먹고 찬곳에서 시묘살이 하면서 매일 조석으로 성묘하며 곡을 하였다.

공은 제수로 쓸 술과 간장은 종노를 시키지 않고 손수 마련하여 봉제하며 부인을 멀리했다.

조부모의 상을 탈복하고서는 부안군 변산으로 가서 소나무를 캐어 배에 싣고 와서 선영인 제청산 산소 주변에 치산을 하고는 후손에게 나무를 함부로 베지 말라고 하였다.


 하루는 제수에 쓸 간장을 산쥐가 흐려놓아 공은 나의 정성이 부족하여 미물들을 감동시키지 못한 나의 죄라고 통곡하니 그 날밤 산쥐떼가 장독아래에 와서 다 죽었다고 하며, 공은 아버지가 돌아가심에 생전에 즐기시던 꿩을 구하러 저자에 가려 하였으나, 폭설로 인하여 가지 못해 통곡하니 꿩이 스스로 부엌으로 날아들어 제사에 쓰게 되었으며, 한겨울에 폭설이 내렸으나 묘소주변에 한점의 눈도 내리지 않아 향리 주민과 선비들은 이런 기이한 일은 공의 효감에 감복하여서라고 하며 그의 땅을 일러 제청산이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병이 연안을 샅샅이 훑어 사당 서원 모두가 잿더미가 되었는데 영모당 현판[효자 진사 김질지려]을 보고 감히 범하지 못했다고 한다.

공은 항상 예의가 두터운 풍속이라 하여 온갖 바른 행실을 몸에 익히고, 역, 시, 서, 춘추, 예, 탁, 중국의 6경과 소학, 가례, 효경, 경전과 사기 등을 즐겨 탐독하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항상지식이나 견문 또는 식견이 변변치 않은 선비가 되지 않으려고 인성과 천리를 논한 유교철학에도 속속들이 파고들어 연구하였으며, 후손들을 위하여 "영모록"과 "육사자책설"의 두권의 책을 지었다.

공은 쌍호(전라도, 충청도)에서 학문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감화되어 예경과 제의와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할 것을 강론하고 항상 근면하였으며, 학자인 하서 김인후는 공의 집에 편액하기를 「영모당」이라고 하였고 "차영모당"이란 시 한수가 영모당에 현판되어 있고, 미암 유희춘은 평소 공을 사모하다가 무장현감으로 와서 공과 서로 학문을 즐겼으며, 선정을 베풀고 떠날 때는 많은 백성들이 아쉬워하니 공은 이별의 시 한수를 적었고 유미암은 화답한 시한수가 현재 영모당에 현판되어 있다.


 고봉 기대승과 송천 양응정 등의 선비들과 학문을 교류하였으며, 선비들은 공을 일러 영모당 선생이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뒤에는 명나라에서 우리나라 충렬 효행을 물어오매 본도 안찰사 졸당 민성휘는 공이 효에 으뜸이라고 천거함에 1546년(명종원년) 명나라 황제가 친필로 [효자 진사 김질 지려 가정 병오 천조 정려]라고 사액하여 현재 봉안각에 현판되어 있고, 정문을 명하고 특별히 포상하였다.


 공의 효가 천하에 알려지자 도내 선비와 유림들이 사당 세울 것을 제청하였으며, 향중에서 도암사우를 일으켜 지금까지 유림이 향사하고 있다. 김하서, 유미암, 기고봉은 같은 당세의 제군자들에게 고증을 들어 참판인 포암 윤봉조가 "영모당 김선생 행장"을 지어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이재 황윤석이 비문을 찬술하고 해사 김성근이 "영모당" 현판을 썼다.

이글은 영모당 행장, 영가세적, 포암집, 한국사 대사전 등에서 간추린 내용임. 서기 1731년에 편찬한 "영모당 김선생 행장"을 1998년 4월 23일에 공의 16세손인 김만길이 국립 중앙 도서관에서 찾음,

도암사, 현존물 1.사당 2,사당삼문 3.영모당 4.동재 5.서재, 6.효자 현판 봉안각, 7.현무재 김익철 녹권 봉안각, 8.영모당 솟을대문, 9.홍살문 10.묘정비 11.하마비 12.관리사.



효자 영모당 김질 사당 도암사(전북 고창군 공음면 칠암리 갑촌)      효자사액현판과 봉안각



 도암사 전경(도암사 앞)                                         효자 영모당 김질 묘비(전북 고창군 공음면 칠암리 갑촌)



홍살문 및 효자 영모당 김질 하마비(도암사 입구 국도변)


    


 영모당 내 현판 및 편액-해사 김성근, 하서 김인후, 미암 유희춘


 


   <金質 行狀> : <圃巖集>(윤봉조 저. 1990년 복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2002. 7. 24. 항용(제) 사진 제공)


충신-충민공 김흠(忠愍公 金欽)


 1557년(명종12년)에 감찰공 김침의 5세손이며, 부위공 김승석(金承碩)의 아드님으로 출생. 공은 25세에 진사가 되고 1583년(선조16년) 별시문과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후 괴산 현감을 거쳐 청주목사를 지냈다.

재임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왕명으로 신립 장군의 휘하에서 군자감정으로 감군하면서 충주 싸움에서 항적하다가 전사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민공이다.

그리하여 공의 칼과 의북을 수습하여 황해도 금천에 초혼장을 하였으나 남북분단으로 충청남도 논산군 상월면 산성리에 설단하여 세일 향사하고 있다.


  


               충민공 김흠 묘소(충남 논산시 상월면 산성리)               


 


 


             <충민재>(재실.윤만(문). 2002. 6. 자료 조사 제공) <표충비>(윤만(문). 2002. 7. 6. 자료 조사 제공)


  충신(忠臣)-김숙현(金淑賢)


효소공 김작의 6세손이며 장령공 김식의 증손이고 김담(金談)의 장남. 공은 무과에 급제하고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참전하여 순절하였다.


효자-괴헌공 김몽상(孝子 槐軒公 金夢相)


공의 호는 괴헌이고 목사공 김적의 9세손이며, 통덕랑공 김필영(金必榮)의 장남, 공께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께서 병환에 계시면 연일 식사를 하지 않아 부모님께서도 그 정성에 못이겨 식사를 하셨고, 부모님이 식사를 드시는 것을 보고 자신도 식사를 들었다고 한다.

부친께서 병환으로 계실 때 평상시 붕어회를 좋아 하시었으나 때가 마침 엄동이라 집앞 작은 연못을 배회하면서 눈물을 훌리며 슬프게 소원하니 붕어 한 마리가 얼음위로 뛰어나와 그를 잡아서 부모님께 공양하였다.

이른봄에 또 고사리를 원하여 산에 올라가 애원하니 고사리가 나타나서 부모님을 공양하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생활이 검소하기 이를데 없었으나 만년에 가계가 풍요하게 되었다.

손자의 돌날 자손들이 좋은 옷과 반찬을 말하자 공께서 눈시울을 적시면서 내부모가 계실때 가난하여 입에 맞는 음식을 한번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여 드렸는데 우리가 어찌 입에 맞는 음식 찾으랴 하였다.

또한 공이 청렴공평하여 향리에서 쟁송이 있을 시는 관에 가기 전에 공과 먼저 협의 결정하였다. 이러한 훌륭한 효성을 가상히 여겨 순조께서 효자정려를 명하시어 현재 강릉시 교동에 세워져 있다.



                  안동김씨 3세3효2열지각(강릉시 교동 1247. 6성곡 고산치)


  열녀-강릉김씨(烈女 江陵 金氏)


부인은 목사공 김적의 9세손인 괴헌공 김몽상의 부인이다.

부인께서는 효성심과 우애하는 효도가 향도에서 현저하시었다.

부인께서 부군의 병환을 당하여 병환이 점점 위독함에 목욕재계하고 7주야를 울면서 기도하여 가로되,

 황천은 나의 정성을 살피소서 하면서 열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부군의 입에 넣어 드리니,

 차차 맥이 통하고 회생하여 5개월이나 연명하고 돌아가셨다.

부인께서는 3년간 조석으로 제사를 집례하고 탈상 후에도 스스로 죄인이라 자책하여 30여년간을 두문불출하다가 득병하니 회생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에 아들 3형제가 울면서 약을 잡수실 것을 애원하였으나 오히려 꾸짖으면서, 너희들 부친께서 돌아가실 때

같이 죽지 못하였음은 오직 너희들 때문이었는데 이제 내가 죽을 때가 되어서 아프거늘 어찌 약을 먹고 살길

바라겠느냐 하시며 끝내 약을 잡수시지 않고 세상을 떠나셨다.


이에 나라에서는 1807년(순조7년) 정려를 세워 열행을 현양하라 명하였다. 

효자-취은공 김석진(孝子 醉隱公 金錫晋)


공의 호는 취은이고 괴헌공 김몽상의 장남. 공은 성품이 유사하고 총명하고 이어오는 가훈에 따라 효성이 지극하고 부친이 득병하니 약으로서 인삼과 쑥이 있어야 함으로서 옷을 벗지 않으시고 뜬눈으로 밤을 세우면서 산에 올라 하늘에 기도하니, 신명이 감명하여 이튿날 아침에 삼팔이 행상이 �아와서 하는 말이 내가 어젯밤에 어느 여점에서 묵었는데 꿈에 신령님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모촌 김씨 집에서 인삼과 복령을 구하니 급히 가보라 하며 가는 길까지 가르쳐주는 고로 이곳에 �아 왔다고 하여 곧 삼과 복령을 구하여 부친께 공양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공의 효성이 지극한 소치라고 하였다. 부친께서 돌아가셨을 때 3년 동안은 두건과 요질을 벗지 않고 죽으로서 소식하고 모든 예의를 다하였다.

부모님의 병환으로 20여년간을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간병에 몰두하였다.

부모님상을 당하여도 애통한 마음은 언제나 같았고 상이 끝난 후에도 성묘를 하기 소홀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조정에서 알고 순조7년에 정려를 명하였다.


열녀-강릉최씨(烈女 江陵 崔氏)


부인은 목사공 김적의 10세손 취은공 김석진의 부인이다.

부인은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며 남편을 위한 열행이 갸륵하여 어느해 부군이 득병하여 위증하니 성의를 다해 치료를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였다.

 이에 부인께서 바깥마당에 단을 모아 눈물로 하늘에 기도하기를 남달리 뛰어난 효자를 살려줄 것을 애원하고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부군의 입에 넣으니 병세가 차도있어 수개월을 연명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조정에서 알고 순조께서 1807년에 정려를 세워 열행을 영세에 전하도록 명하였다.


효자-성재공 김구(孝子 省齋公 金坵)


공의 호는 성재이고 목사공 11세손으로 취은공 김석진의 아드님. 공께서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함은 타고난 성품이 그러하였다.

어린 몸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에 죽을 먹고 슬피통곡함으로 선고인 취은공께서 등을 어르만지며 가로되 상중에 죽을 먹는 것은 가규도 금하지 않았다.

 후일에 부친상을 당하였을 때는 3년간 슬퍼하고 오히려 초상때와 같은 예의를 갖추었다. 단장을 다하지 못하여 지내오다가 좋은 명당자리를 구산하여 비로소 안장하였다.

공께서 병고로 6년 동안에 위험한 고비를 넘기던 중 꿈에 노인과 선고께서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좋은 처방이 있으니 첫 번째는 잉어이고 두 번째는 소고기로 보하고 세 번째는 복어로 너의 목숨을 구하겠노라 하였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옷이 땀에 젖어 옷을 벗으니 신명이 느끼는 바라 다섯 사람이 또한 효행으로서 어버이를 모시듯이 깨어보니, 옷에 땀이 차있고 옷을 벗으니 신명이 느끼는 바라 공의 동생 5인이 또한 효행으로써 어버이를 모시듯이 형을 모시니 매사가 옳게 진행되어 집안 화목하더라.

 공이 돌아가며 조부 괴헌공 김몽상, 조비 강릉김씨, 고위 취은공 김석진, 비위 강릉 최씨와 공에 이르기까지 3세에 걸친 효와 열행이 지극함으로 1807년(순조7년) 나라에서 3세3효2열의 정려를 내려 강릉시 교동 성곡에 열효각을 세우다.


충신-증판서공 김유선(忠臣, 贈判書公 金有宣)


공은 감찰공의 11세손이며 통덕랑공 김덕문 장남, 천성이 강직하고 청렴 결백하고 불의에 굴할줄 모르는 사인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수학하여 사림에서 명망이 높으시더니 유생의 신분으로 1760년(영조36년)에 있었던 사도세자사건에 영조대왕께서 행하심이 윤리에 옳치 못하다고 1762년(영38년) 상소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이해 영남 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당년 6월 18일에 그곳에서 순절하였다.

 그후 정조가 즉위하자 공의 충의에 갸륵하게 여겨 장예원 주사 엄주원을 보내 치제한바 있다.


효자-삼성공 김훤(孝子 三省公 金糶)


공의 호는 삼성이고 효소공 13세손이며 김숭주의 차남, 청주 궁현에서 출생, 공은 천성이 온후 인자하여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교훈에 어긋하는 일이 없고 효성이 지극하여 하루의 식사를 부모님이 먼저 드신 후에야 하였다 한다. 이웃사람들은 반드시 대효를 이룰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급기야 장성함에 부모님의 구미에 맞는 식찬으로 성의를 다해 공양하였다 한다.

어느해 모친께서 병환이 나셔서 눕게 되시자 병간호에 정성을 다했으나 병세는 차도가 없이 위독하여 백약이

무효함을 아시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서 모친의 입에 넘겨드렸더니 마침내 회생하였으나

그후 만 하루만에 돌아가시니 슬퍼함이 보는 이 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3년상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성묘를 매일 3년 동안 빠짐없이 하셨다. 지방사림에서 효행을 조정에 추천하여

 순조 그해 효자 정려를 명하였고 지방사림들이 1958년 10월에 효자비를 세웠다.


5대 효자-김진태(五代 孝子 金鎭泰)


공은 대경공 김영의 14세손이며 5대째 효자 효부로 나라에서 정문을 세워 표창한 집안이다. 효자 김진태 공은 효를 몸소 행하여 효의 모범이 된 분이시다.

공의 고조모이신 경주정씨께서 효부로 나라에서 정려문을 하사하였고 증조모이신 전의 이씨께서도 효부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고, 조모이신 양조 함씨도 세상이 선망한 효부이시다.

아버지이신 김장년은 영조43년(1767년)에 나셨으니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도광 11년(1831년) 8월 예조입안에 보면 김장년은 아버지의 병이 깊어 여러해 고생하시니 약을 다려 주야로

 복용케 하고 하늘에 기도하고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입에 흘려 넣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향중에서 장례를 모시고 조석 성묘 통곡하니 효자가 분명하고, 어머니가 발병하시자

항상 편안하시게 간호하여 주민과 선비들의 칭송이 자자하여 「효자정문」을 1830년(순조30년) 5월4일

하사하였다.

공은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께서 발병하자 어머니의 대변을 달고 쓴맛을 보고 혼수 상태가 되니 손가락을

잘라 흘러 넣으니 하늘이 효감하여 회생하였다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조석으로 성묘하였다고 한다.

그후 대홍수로 전답이 산사태로 무너지고 주위 집들이 전파되는데 이집만은 대대로 내려오는 효성이

하늘이 감동하여 보호하였다는 향리주민들의 소리다.

 포천의 선비 이경한외 황종학 이석재가 1872년6월에 통문을 돌리고 그해 11월에 이경한 외 71명이 연명으로

 성주에게 효행표창 단자를 올렸다.

 그 이듬해 4월에 이경한외 105명의 연명으로 순찰사에게 단자를 다시 올렸다.

 나라에서 단자에 의하여 1887년(고종 24년) 4월 3일에 「효자정려」를 내렸다.

공의 5세손인 김재훈(金在勳)이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덕정리에 살고 있으며, 옛날에 대대로 내려온 정려는

 전란으로 없어지고 정려문, 효자표창, 단자, 순찰사의 동지문, 상언 등을 고히 간직하고 있다.


  


             5대효자 김진태 효자 표창 유품(5세손인 김재훈 소장)


 효자 증교관공 김성추·효부 김해김씨(孝子 贈 敎官公 金成秋·金海金氏)


공은 문정공의 14대손으로 통정랑공 김계묵의 아들이고 김희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4살 때

숙부 김계묵께서 부인 안동권씨를 남겨두고 17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시자 숙부님의 양자로 들어갔다.

양모께서 18세의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삶의 보람을 어린 아들의 성장에서 찾으려고 행동하고

관심을 기울여 엄한 교육을 시켜서 의젓한 선비의 자질을 갖추도록 키웠다.

공께서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순하고 지혜가 있어 어머니의 사랑을 피부로 느끼면서 가장으로써 도리를

 닦아 성년이 되어서 현모양처의 자질을 갖춘 김해김씨를 배필로 맞아 들였다.


두 부부는 효심이 지극하여 홀어머니의 마음을 편안하게 모시기 위해 언행에 더욱 조심을 하면서 외롭지 않도록 마음을 썼다. 비록 가난했지만 나들이를 하고 오면 반드시 보고들은 사실을 일일이 고해 올렸고 좋아하시는 반찬과 과일을 계절따라 수시로 사다가 대접해 드리는 등 항시 마음을 편안하게 극진히 모셨으며, 부부 화합하여 열심히 일하여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고 공의 나이 37세때 첫아들 규찬을 얻게 되니 집안에 경사였다.

 이듬해 공께서 우연히 병을 얻어 병석에 눕게 되자 부인이 백방으로 좋다는 약을 구하여 지성을 다해서 간호를 해드렸으나 백약이 무효하여 부인의 정성도 무심한채 세상을 떠나시니 고부의 대성 통곡하는 모습은 보는 이마다 슬프게 하였다 한다.

 부인은 노시모님이 마음 상할까 슬픔을 억누르고 아들을 잃고 시름에 잠겨 있는 노시모님을 위해 좋아하시는 고기반찬 등을 제때에 식사를 하시도록 봉양해 드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한편으로 어린 아들 양육에도 각별한 관심을 써서 성장해서 아비없는 호로자식이란 악담을 듣지 않도록 자애로움에서 엄격한 교육을 시켰다.

 이러던 중 시모님께서 고령으로 바깥출입이 부자유스럽게 되자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았고 옷을 깨끗하게 빨아서 수시로 갈아입히는 등 오히려 부군의 생전보다 더욱 극진히 모셨다. 이와 같은 두 부부의 효행을 본받아 후일에 아들부부 역시 큰효를 행하였다.

 이러한 두분의 효행이 인근 향리에 알려져 출천의 효자효부라고 여러 사람들로 부터 칭송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이 널리 전해져 조정에까지 알려지자 고종께서 이 부부의 효행을 가상히 여겨 1905년(고종광무9년)에 효자효부의 정려문을 내리고 공께서 증 종사랑 중학교 교관 벼슬을 내려서 후세인의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효자 교관공 김성추 효자각 편액(전남 곡성군 곡성읍 죽동리)


 


  


안동김씨 2세4효 정려문(전남 곡성군 곡성읍 죽동리)         안동김씨 2세4효 정려문비


.효자-증 교관공 김규찬·효부 전주최씨(孝子 贈 敎官公 金奎贊 孝婦 全州 崔氏)


공은 문정공 김질의 16세손이며 교관공 김성추의 아들이고 부인은 효부, 전주최씨는 자부이다.

 공은 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엄숙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후하고

총명하시며 남달리 효심이 많았다. 어머니의 효행을 지켜보고 부친께서 효성이 지극하였다는 말을 들어서

깨닫고 시전 육아편을 읽고 성현들의 가르침을 깨닫고 되새기며 스스로 채칙을 하면서 홀어머니를 지성껏

모셨다.

성년이 되어 인자하고 부덕을 겸비한 한 살 아래인 전주최씨와 결혼하였다. 이들 부부는 화합하여 양친께서

 행했던 효성을 본받아 홀어머니를 외롭지 않게 홀어머니의 방에 부인과 같이 들어가 잠자리를 보살피며

 편안히 주무세요 인사를 하고 새벽이 되면 세수물을 떠올린 후 문안 인사를 공손히 하기를 매일 잊지 않으셨다.


가난했지만 구미에 맞는 반찬으로 봉양해 드렸다.

 부인 최씨는 청춘에 홀로 되시어 윗대 어른들을 모시고 생활을 해와서 성품이 변해 괄괄하고 잔말이 많아 졌지만 불평 한마디 없이 어려운 살림에 종사하였다.

 1년 내내 여름철에도 하루 삼시 밥을 지어 공양하였다.

모친께서 62세때 타계하시니 공은 1년 동안 문밖 출입을 하지않고 비통해 하였고, 청춘에 홀로 되시어 어린

자식을 키운 어머님을 생각하면서 명복을 빌었다.

이처럼 김성추와 김규찬 부자와 두 부부의 효행이 널리 알려져 지방사림에서 2세에 걸친 이분들의 효행을 높이 찬양하고 2세 효자부부 발천문을 조정에 주선하여 나라에서 이들의 효행을 가상히 여겨 1905년(고종광무9년)에 효자효부의 정려문을 내리고 공의 부자에게는 종사랑 중학교 교관 벼슬의 교지를 내려 2세 2효자 2효부의 정려문이 현재 전남 곡성군 곡성읍 죽동리 242의 2번지에 세워져 있고 이곳에 안동김씨 2세4효 정려비를 세웠다.


열녀-고령신씨(烈女 高靈 申氏)


효소공 김작 16세손이며 김용규의 장자 김언명의 부인이다.

 신여사는 고령신씨의 가문에서 안동김씨 문중으로 출가후 어느해 우연히 부군이 득병하여 수년간

병고로

고생을 할 때 정성과 명의를 찾아다니며 좋은 약을 구해다 드려도 성심에 비하여 차도가 없자 최후의

수단으로 근처의 대천(홍천강)에서 백일동안을 정성껏 기도하였다.

그러나 조금도 차도가 없으매 백일기도가 끝나는 날 유서를 남기고 부군의 명을 대신하여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그후 남편은 병세가 스스로 차도있어 후일에 완쾌되어 재혼까지 하여 아들까지 낳았다 한다.

조정에서 알게 되어 1854년(철종5년)에 열녀문을 하사하였다.



                열녀 고령신씨 열녀각 편액


 박복식 여사는 1936년 11월 14일 선비의 집안 박영선의 따님으로 출생,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순하였고

품행이 단정하여 부모님의 말씀에 거역하는 법이 없는 훌륭한 가문에서 부도를 닦다가 22세때 문정공의

18세손인 김흥회씨에게 출가해왔다. 집요한 가정살림에 노시부모님을 모시는데 예의범절과 정성이

남과 달랐다.


 



 





영의정 낙흥부원군
김자점(領議政 洛興府院君 金自點)


공의 호는 낙서(洛西)이고 익원공 김사형 9세손이고 문정공 김질의 증손자, 관찰사공 김억령의 친손자, 현감공 김탁(金琢)의 차남. 이처럼 화려한 가문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벼슬은 음사로 등용되고 병조좌랑에 이르렀으나, 광해군 때에 인목대비의 폐비논의에 반대하는 등 대북 세력시 맞서다가 그들에 의하여 밀려나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도원수로서 북진을 지키는 책임을 맡아 강홍립, 최명길 등과 함께 친청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림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고 병자호란때 참패의 원인을 공에게 묻는 듯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공은 1623년에 있은 인조반정때 그의 주역으로서 정사 1등 공신이 되었다.

그리하여 서인이 집권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정의 논공 때문에 불평이 생겼으니 반정에 찬·반파로 인하여

공을 중심으로한 낙당과, 원두표를 중심으로한 원당으로 갈라졌으니 낙당을 공서, 원당을 훈서 또는 청서로

 칭하여 서인이 분열되고 서로 대립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공은 1627년 1월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하였고 순검사 임진수어사로

활약하였으며, 1630년 한성 판윤에 이르고 1633년에 도원수가 되었다.

이어서 1642년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공의 손자인 김세룡(金世龍)이 인조의 딸 효명옹주와 혼인함으로서 공서의 세력기반은 더욱 공고해졌다.

그 공으로 인하여 1643년에 판의금부사를 거처 우의정에 오르고 어영청도사도 겸했다.

1646년(인조24년)에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르고 낙흥부원군에 봉해졌다.

 사은사 겸 주청사로 청나라에도 다녀오기도 했다. 공은 정승재임시 선정을 베풀었다.

 특히 농업정책에 힘을 기울여 호남 충청지방에 보(洑)를 막고 저수지를 축조하여 지금도 그 이름이

자점보(自點洑)로 통하는 곳이 있으며, 황해도 재령은 배수가 되지 않아 갈대가 우거진 황무지였으나

수로를 개척하고 풍부한 수원을 이용하게 됨으로서 곡창지대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곳 향지에 실려있고,

 400여년 가까운 지금까지도 세인의 입에서 전설로 전해져 공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다고 한다.

또 전국의 치산을 잘하여 서울 홍제원에 낮에도 범이 출몰한다는 소문에 인조께서 심히 걱정하고 공에게

명하사 대책을 강구하라 하심에 온돌방을 연구하여 장안 세도가는 물론 백성들에게 까지 권장함으로서

지금까지 우리는 세계 유례없는 온돌방 생활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1650년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김경려의 상소에 따라 송준길 등이 가세하여 김자점이 국정을

희롱하여 조정을 어지럽힌다고 탄핵을 올려 파직되어 강원도 홍천과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이로 인하여 정계는 다시 송시열, 김상헌, 송준길 등을 중심으로 개편되었고 그뒤 이어 해원령 영 과 진사 신호 등이 김자점이 역모를 도모하고 있음으로 그를 살려서는 안된다는 상소가 빗발치자 효종도 할 수 없이 1651년(효종2년) 역적의 누명을 씌워 처형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익원공 김사형의 후손들은 그 연류를 두려워하여 먼지방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고 심지어 족보와 조상의 문적까지도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우리 구안동 김씨 가문은 사양길에 접어들게 되고 말았다.


이로서 원당이 득세하여 신안동 김씨 선원 김상용, 청음 김상헌 형제가 상신에 올라 세도를 잡음으로서

이후 순조―헌종―철종대에까지 걸쳐 60년간 신안동 김문의 세도정치가 전개된 것이다.

그러나 이 대옥사를 신문한 사람이 원당 중심의 인물인 원두표였으니, 권력을 잡기 위한 치열했던 시대의

 정치세력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자점보 관련 자료 소개>(2002. 3.4. 영환(문) 조사 자료 제공)


장호원은 남쪽으로 해발 402m 의 우뚝 솟은 백족산이 있고 이 백족산 남단을 휘돌아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는 청미천이 길게 흐르고 있다. 


이 백족산 남단에 청미천 상류를 막아 만들어진 보가 자점보 인데 조선 인조 임금때 인조 반정의 공신으로 영의정까지 지내며 권세를 마음것 휘두르다 역적 사건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 김자점이 쌓았다하여 자점보라 불리워지고 있는데 거기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백족산에는 금반형이라는 묘자리가 있는데 풍수지리적으로 금반형은 묘자리중에 으뜸으로 김자점이 젊었을때 눈독을 들이다가 임금의 총애로 득세하자 부친의 묘를 그곳에 썼다. 그런데 금반형의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묘에서 내려 보이는 곳에 큰물이 있어야 되는데청미천만으로 부족하여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커다란 인공호수를 만들고 거기에 사시사철 푸른 물이 고여 있게 하여 부친의 묘를 명실상부한 금반형의 명당으로 만들었다.


그 덕에 가뭄이 들때에도 근처 양민들이 보의 물을 몰래뽑아 써서 근처 일대가 흉년을 모르는 고장이 되었고 미질이 좋아 임금님께 진상하는 쌀이 되었고 그 덕분에 김자점은 권세를 누릴수 있었다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보의 길이는 약5백미터 폭은 넓은 곳은 6미터 좁은 곳은 약 2미터 가량인데 자점보는 지금도 장호원일대의 중요한 농용수로 긴요하게 쓰여지고 있다.


이 전설로 보아 김자점공은 치수에도 많은 공이 있었음에도 역적으로 몰린 다음 이렇게 윤색되어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며 아울러 김자점공의 새로운 자료 발굴에도 관심을 갖을 필요가 있겠으며, 당쟁속에서 희생된 선조의 넋을  다시 한번 기려본다. 


<자점보의 모습>


 


<자점보>(경기도 장호원 소재. 2002. 11. 윤만(문) 제공)               <백족산>(경기도 장호원 소재. 2002. 11. 윤만(문) 제공)


<설화소개>


<설화-소식고개> (성산동) (2002. 3. 태서(익) 조사 제공)
마포구 성산동 지금의 신촌 농협지점 부근에 있던 고개를 소식고개라 하였다. 이 고개의 명칭 유래를 알려면 먼저 야동(冶洞)의 유래부터 살펴야 한다.
성산동은 1894년 갑오개혁 때 한성부 북부 연희방 성외 성산리계 중동·야지동·후동·무이동·야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야동 곧 풀무골은 현재 성산시영아파트∼불광천 건너 상암동으로 가는 길목 일대였다.
조선 효종 때 김자점(金自點)이 역모를 일으키기 위해 군사자금을 마련하고자 이 일대에 위조엽전을 만들던 사주전(私鑄錢)을 설치하고, 병기를 제작하기 위해 풀무간을 만들었으므로 여기를 풀무골이라 불렀다. 소식고개는 이 풀무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고개에 보초를 세워두고 도성 쪽을 바라보며 망을 보게 하였으므로 소식고개라 하였다 한다. 소식은 곧 오늘날의 정보를 뜻하는 것으로 ‘도성의 정보를 알고자 망을 보던 고개’라는 뜻이다. 소식고개와 풀무골 주변은 김자점이 역모죄로 처형당하면서 주변 일대에 대한 수색작전이 실시되어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기도 하였다. 1950년대 초만 하더라도 대부분 논·밭이었던 이 일대에서 녹슨 엽전이 적지 않게 발견되곤 하였다 한다.
여기서 감자점에 관련된 사실을 살펴보기로 한다. 광해군 14년(1622) 이귀(李貴)·김유(金) 등과 더불어 광해군과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주도한 김자점은 인조가 즉위하자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봉해졌으며, 집권 공서파(功西派)의 영수(領袖)가 되어 김상헌(金尙憲) 등 유림을 배경으로 한 청서파(淸西派)를 탄압하였다. 또한 그의 손자 김세룡(金世龍)을 인조의 후궁 조씨의 소생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혼인시켜 외척이 된 뒤 영의정에 올라 국권을 전횡하기에 이르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평소 김자점의 독주를 비판하던 대사간 김여경(金餘慶)과 집의 송준길(宋浚吉)·장령 이상일(李尙逸) 등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이에 앙심을 품은 김자점은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몰래 청나라에 보내 조선이 장차 청나라를 정벌할 계획임을 알리고, 아울러 김상헌과 김집(金集)이 청나라를 배척하는데 앞장서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명나라의 연호를 쓴 장릉(長陵)의 지문(誌文)을 청나라에 보내 양국 사이를 이간하였다. 이에 격분한 청나라는 즉시 군사를 국경선에 배치하고 사자를 보내 그 진부를 가리려 하였다. 효종의 기민한 수습으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조정에서는 그를 엄형에 처할 것을 상소하였으며, 그의 죄상이 드러나자 광양에 유배하였다.
이어 효종 2년(1651) 진사 신호(申壕) 등이 상소하여 김자점의 역모사실을 고하자 효종은 친국(親鞫) 끝에 김자점과 그의 아들 익()이 일부 정신(廷臣)과 각지의 수령 및 지방 장수들과 역모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곧 그들이 수어청 군사와 수원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김집·송시열·송준길 등을 제거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한 죄상이 드러났다. 김자점 및 그의 아들과 손자들은 사형에 처해졌으며 가산은 몰수되었다. 이에 따라 공서파는 몰락하고 그에 대신하여 청서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어쨌든 이곳 성산동에 김자점역모사건과 관련되는 고개이름과 전설이 남아 전해진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라 하겠다.

<설화-김자점 탄생 전설>(2002. 3. 태서(익) 조사. 제공)


예로부터 낙안에 전하여 오는 전설에 의하면 김자점에 대한 전설이 많으나 그 중 몇 편을 옮겨 본다.
옛날 낙안 고을에 해마다 15살 가량의 처녀를 제물로 받쳐야만 고을이 무사하다 하여 제를 지내 오고 있었다. 감자점의 부친이 낙안 고을 사또로 부임하여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제물을 바치던 당(堂)집을 헐어 버렸다. 이때 찬바람이 일어나며 커다란 지네란 놈이 대들보에 메달려 있었다.「이놈의 조화 로고」하면서 사또가 칼을 빼어 지네를 마디마디 토막을 내어 버렸다. 본시 지네란 놈은 몸이 끊어져도 다시 살아나는 놈이라 하여 후환을 없엘 요량으로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고 끓이게 하여 죽여 버렸다.
그런데 지네를 토막 낼때 사또의 두 눈 사이에 지네 피가 튀어 얼룩져 있었다. 아무리 씻어도 지워 지지 않아 몹시 불쾌하였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지네 피의 얼룩이 자연이 없어졌다. 그런데 어느날 부인이 수태를 갖었다고 들었다. 아이를 낳으니 사내 아이였다. 기상이 출중하고 늠름한데다 총명하기 이를 때가 없었다. 그런데 아이의 미간에 점이 하나 박혀 있었다. 지네 핏자국의 얼룩 그대로 였다. 이것이 과연 좋은일 인지 불길한 징조인지 몰라 궁금해하면서도 아이가 너무나 영특하므로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지냈다. 스스로 생긴 점이라 하여 자점(自點)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후에 자점은 일국의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결국 역모를 꾀하다 처형되었다. 그의 집이 있었던 곳은 역적의 집이라 하여 소(沼)로 만들어 버렸다. 지금은 저수지로 개축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이 마을을 못 등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낙안땅이었으나 지금은 벌교읍에 속해 있다.(구전)


<설화-김낙치 전설>(2002. 2. 28. 태서(익) 조사. 제공)


점낙치는 장성읍 매화동 장성여중에서 충무동으로 넘어가는 장성여중 앞 고갯길을 말하는데 김자점(金自點)이 죽은 자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곳에 전해오는 말로는 자점이 역모로 몰리자 몸을 피하여 고향이자 처가인 장성에 은신하려다 관군에 �기어 점락치에서 3질 낭떠러지로 떨어져 잡혔다고 한다. 그는 8시를 당하여 죽었는데 시신을 8도에 각각 효시토록 하였다. 전라도 운반책이 어느 산골에 이르러 갈림길을 만나 망설이고 있으니 뒤에서 "이놈아, 아랫길로 가거라 " 하는 소리가 들려 아랫길로 갔다. 조금 가다가 '뒤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뒤를 돌아보니, 윗길 바위위에 큰 호랑이가 으르렁거리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 이 양반 유명하다더니 토막난 시신도 사람을 살리네 ."라고 감탄하여 단광리 앞산 좋은 자리를 잡아 장사지냈다고 한다. 김자점의 생년은 정확히 전하지 않고 대략 1580년(선조13) 무렵으로 보며, 관향은 안동이며 혈통은 사육신을 고변하여 유명해진 김질(金瓆)의 5대손이다. 우리 장성에 생가터라고 전하는 곳이 장성읍 안평리 장동 116-1번지(비적골)와 서삼면 한실 등 두 곳이 있는데, 승주군 낙안면 못 등을 비롯한 전국 여러 곳에 출생 전설이 있다고 한다.


김자점은 1622년(광해14)인조반정 때 1등공신이 되어 동부승지를 거쳐 도원수가 되고 영의정까지 되었다. 자점이 동부승지로 있을 때 망암 변이 중의 큰 사위가 되는데 이와 관련하여 일화가 잇다. 정혼한 뒤 큰 딸이 자점이 관상을 보고는 "얼굴은 잘 보셨는데, 뒤가 반공상이옵니다."하고 말하는 것이엇다. 그러나 걱정하는 아버지에게 딸은 "이미 정혼한 터이온데, 어찌하겠습니까? 소녀에게 비책이 있사오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는 것이 있다. 자점이 훗날 역적으로 몰려 죽을 때 처가도 조사를 받았는데 암하필법(手製紙粉校, 병풍처럼 접은 종이 속에 가루로 글씨를 써서 읽은 후 천을 떠들면 지워지는 서찰)을 써 근거인멸로 화를 면하였다 한다. 장성읍 안평 2리에는 대마등이 있는데 이 곳은 자점이 도원수 영의정으로 있을 때, 고향에 내려오면 수많은 배알객들의 말을 메어 놓은 자리라 하며, 서삼면 태봉산에는 그가 친구들과 말을 달리며 무예를 길렀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부천시 원통이고개 전설>(2002. 11. 28. 주회(안) 제공)


★김자점(金自點)이 ♠황해와 김포쪽의 한강을 연결하는 운하를 파다가 이 고개에 이르러 "이 고개만 아니면 수로를 낼텐데 원통하구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는 내용
*부천시 인터넷 검색 결과
원통이 고개: 부평구의 경인국도상에 있는 고개. 앞에서도 언급되었던 지명으로 원래 이곳에는 원통사(圓通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는데, "원통하다"는 말에서 변형된 전설이 여러 가지 있다.
첫째는 수로를 못내어 원통하다는 이이야기이다.

인조반정의 공신인 ★김자점(金自點)이 황해와 김포쪽의 한강을 연결하는

♠운하를 파다가 이 고개에 이르러 "이 고개만 아니면 수로를 낼텐데 원통하구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실제 수로를 파다가 실패했던 이는 김안로(金安老)였지만 전설에는 ★김자점이 등장한다.

<황해도 사리원의 수리사업과 자점보>(2002. 11. 28. 주회(안) 제공)


인조21년(서기1643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김자점에 의해

♠재령강 연변에 방조제를 축조하여 농지화하고 관?배수까지 갖춘 기록이 있다.

공은 정승재임시 선정을 베풀었다.

특히 농업정책에 힘을 기울여

♠호남지방에 보(洑)를 막고 저수지를 축조하여 지금도 그 이름이 자점보(自點洑)로 통하는 곳이 있으며,

♠황해도 재령은 배수가 되지 않아 갈대가 우거진 황무지였으나 수로를 개척하고 풍부한 수원을 이용하게

  됨으로써 곡창지대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곳 향지에 실려있고, 400여년 가까운 지금까지도 세인의 입에서

  전설로 전해져 공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다고 한다.
<인터넷 검색>간척지 사료작물 재배기술 및 문제점 (축산기술연구소 초지사료과 연구관 임영철)
<우리나라의 간척 역사>
우리 조상들이 간척지 영농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1600여년전 신라시대부터 였으며, 간척 자원개발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관심을 기울여 온 것은 고려조 고종22년(서기1235년)에 몽고병 침입으로 강화파천 후에 강화를 방어하기 위하여 연안의 제방축조가 고려사에 최초로 기록되어 있고, 그 후에 간척농지 개발에 대한 것은 고종35년(서기1248년)에 병마판관 ★김방경이

♠안북촌(현 평북안주) 용도에 축조하여 간척농지를 경작하므로서 몽고 병란시 식량을 조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256년에는 군량미 확보책으로

♠강화도내 제포, 와포, 초포, 이포에 제방을 축조하였다.

이조에 와서는 태종14년(서기1414년)에 경기 통진지구(현김포)에 간척지 약 200여석 직이를 사축하였던 기록이 있고, 인조21년(서기1643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김자점에 의해

♠재령강 연변에 방조제를 축조하여 농지화하고 관개배수까지 갖춘 기록이 있다.


*또 다른 자료([새천년을 여는 전북] 2000년 봄호 水利의 고장 - 전라북도.문경민, 새전북신문 정치부장)에 인조21년(1643년)에는 ★김자점(金自點)이 황해도 봉산군에

♠어지둔보(於之屯洑)를 축조하여 약 500정보의 논을 관개하고, 경기 장호원에

♠김자점보를 축조했다는 기록이 있다.

<자점보 및 온돌방>(2002. 10. 30. 태서(익) 제공)
<전 략>
 공은 정승재임시 선정을 베풀었다. 특히 농업정책에 힘을 기울여

♠호남지방에 보(洑)를 막고 저수지를 축조하여 지금도 그 이름이 자점보(自點洑)로 통하는 곳이 있으며,

♠황해도 재령은 배수가 되지 않아 갈대가 우거진 황무지였으나 수로를 개척하고 풍부한 수원을 이용하게

됨으로써 곡창지대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곳 향지에 실려있고,400여년 가까운 지금까지도 세인의 입에서

전설로 전해져 공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다고 한다.
 또 전국의 치산을 잘하여 서울 홍제원에 낮에도 범이 출모한다는 소문에 인조께서 심히 걱정을 하고 공에게

명하여 대책을 강구하라 하심에 백성을 편안케하였다.
 또 온돌방을 연구하여 장안 세도가는 물론 백성들에게 까지 권장함으로써 지금까지 우리는 세계 유례없는

온돌방 생활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白
凡 金九先生) 
(1876년 고종13년∼1949년. 74세) 
김구선생은 초명이 창수(昌洙)(會), 호는 백범이고 익원공 김사형의 21세손이며, 참의공 김황의 18세손으로

전 교통부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김신(金信)의 선친이다.


   
선생은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본명재하, 在夏)과 어머니 현풍곽씨 곽낙원(郭樂園)의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배웠고, 17세에 과거보러 갔다가 풍기가 문란하여 분개하여 돌아와

18세에 동학에 들어가 접주가 되어 교도 700명을 끌고서 탐관오리들과 싸우다가, 안중근의사의 부친인 안태훈 공에게 가서 고능선 선생의 지도를 받으니 그의 나이 20세였다. 
 그해 8월 명성황후가 일본인의 손에 시해되자 울분한 생각을 참지 못하고, 표연히 길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만주 각처를 유랑하다가 국내에서 의병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그 이듬해 2월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군사간첩 육군중위 토전양란이란 자를 죽임으로서 지난해 국모를 시해한 원한을 풀기는 하였으나, 그로 인해 내부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인천감옥에 옥살이를 하는동안 어머니가 식모살이를 해가며 옥바라지를 한 것은 특기할 일이거니와 선생은 사형결정 혹은 집행 보류 등 앞날이 확정되지 않은 채로 23세인 해 3월 7일밤에 탈옥을 감행하여 방랑하다가 공주마곡사에서 스님이 된 것도 또한 기구한 운명이다.





백범 김구선생 존영(백범기념관 내)                     백범 김구선생 묘소(서울시 용산구 효창공원내)





백범 김구선생 동상(서울시 남산)               백범 김구선생의 <나의 소원>(동상 뒷면)


   몇 년 후에 속세로 돌아와 아버지를 여의고, 예수를 믿고 해주 최준례와 결혼하니 29세였다. 30세에 을사 매국조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올라와 이준 등과 함께 조약 철회를 상소했으나, 여의치않자 이동영,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일으켰다. 
  36세때 사내총독 암살사건에 앞서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또 다시 체포되어 17년 징역 판결을 받고 옥에 있을 때, 왜경은 선생을 새로 산 밭의 돌맹이 같은 자라 했으나, 어머님이 찾아와 네가 경기 감사가 된것 보다 더 기쁘다고 했으며, 선생은 항상 눈물로 구국 기도를 하되 우리나라가 독립되어 우리 정부청사를 쓸고 닦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해주소서 하고 기원하였으며, 차츰 형기가 줄어 39세 7월에 가석방되어 몇해동안 교육에 전념하였다. 
  44세때 3.1만세 운동이 일어나 분연히 결심하고서 조국을 떠나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에 취임하면서부터 조국 광복을 위한 해외 활동이 시작되었다.

51세에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니 국내에서 민족단일전선으로 신간회가 결성된 해이다.

그 이듬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니 광주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독립의 목적을 달성키 위하여 파괴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어 56세 되던 해 겨울 이봉창 의사를 일본에 보내어

일본천황 히로히토를 저격하는데 쓸 자금과 수류탄을 주어 동경으로 보내어 이듬해 1932년 1월 8일 왜왕을

저격케 하였으나 불행이도 적중하지 못하고, 이봉창 의사는 체포되어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10월 10일에 32세로 순국하였다. 
 선생은 계속하여 다시 윤봉길 의사로 하여금 같은해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만주침략의 괴수 시라카와

대장을 폭살케하여 우리민족의 애국투쟁 정신을 크게 떨쳤으나, 윤봉길 의사는 왜놈의 형장에서 12월 19일

25세 나이로 순국하였다.

 선생으로 인하여 국제적인 신임을 얻게 되어 중국 장개석 총동과 서로 만나 낙양군관학교에 독립군 특별반을 두어 한중합작으로 항일투쟁에 대처할 것을 합의했으며, 63세때 임시정부 주석이 되고 그해 5월 일본 특무기관의 꼭두각시가 된 반역자의 총탄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가 소생하니 줄기찬 뜻은 꺾일 수가 없었다. 

다음해에 임시정부를 중경으로 옮기고, 각 정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에 취임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이집트 카이로 회담에서도 독립보장을 받았으나 70세되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으로서 역사는 하루아침에 바뀌어졌다.

그러나 세상을 여윈 동지들, 어머니, 그리고 부인과 맏아들 인(仁)이 광복의 기쁨을 같이 누리지 못한 것이 슬펐다.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11월 23일, 망명생활 27년만에 조국땅을 밟으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온 직후 모스코바 삼상 회의에서 발표한 한국 신탁 통치안에 대대적인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듬해 71세에는 민주의원 총리가 되고 다음해에는 국민의회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남한만의 선거를 실시하게 되자 조국의 분단이 영구화 될 것을 걱정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73세 되던해

4월 19일에는 통일을 위하여 남북협상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족적 의무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통일은 차츰 멀어만 갔건마는 선생은 변함도 굽힘도 없이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말과 글로 외치며, 무릇 역사 행진이란 그 방향을 출발점으로부터 바로잡지 않으면 안됨을

애타게 부르짖다가, 그 이듬해 1949년 6월 26일 정오 경교장에서 흉한 안두희의 저격을 받아 숨을 거두시니,

국민은 큰 지도자를 잃었고 통일과업은 역사의 숙제로 남게 되었고, 드디어는 6.25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는 등 날이 갈수록 앞길이 어두어져만 갔다.

그러나 우리 가슴속에 새긴 선생의 뜻과 정신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더욱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한 현시점에서 감회가 깊지 않을 수 없다. 매년 양력 6월 26일 효창공원 묘소에서 추모제

  (신미보 1권 78쪽, 기미대보 8권 48쪽).


 

                백범 김구선생 기념관(서울시 용산구 효창공원내)




 백범 김구 선생 기념관은 효창운동장 옆에 대지면적 5,552평, 건물 연건평 2,929평, 지하층 지하1층 주차장,

사무실, 자료실, 전기기계실 등 지상층 1,844평, 지상 2층 전시실, 전시홀, 다목적실, 회의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사기간은 2001.5.12∼2002.10.5(17개월) 총 사업비는 180억원(국고보조금 160억, 모금 20억)이 소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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