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우리역사

대동사강의 기록

오늘의 쉼터 2008. 6. 15. 10:24

대동사강의 기록

 

이 페이지는, 직접 참조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고, 그렇다고 해서 버리기에는 아까운 대동사강의

내용을 정리해 봅니다.

대동사강은 1929년 김광이 수 년 간 모아온 사서와 야승을 엮은 것이라고 3인의 학자가 각각 작성한

추천의 글에 적혀 있습니다.


▣ 출간경위

 1) 1929년, 대동사강 간행. 12권 2책. ‘건(乾)’과 ‘곤(坤)’의 두 책으로 출간되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단군관련 서적이 출간되었음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동사강의 경우는

      판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출간 직후 ‘을사 오적’에 대한 내용이 문제가 되어 총독부에 압수된 듯합니다.

 2) 1974년, 대동사강 재간행, 경문사. 간행본은 도서관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대동사강.

표지에 두번째 책임을 표시하는 ‘坤(곤)‘자와,

‘경무국 도서관, (소화) 4년 3월 13일’의 도장이

찍혀 있다.

 


 

 

 

▣ 열국시대(列國時代)

 

 이 시대는 중국 땅에는 여, 엄국, 서국, 선모국이, 만주에는 숙신, 부여가, 압록강 남쪽에는 옥저, 예, 청구의 삼한, 중국 변경 부근 발해만 또는 평안도 일대에는 기자조선이 있는 열국시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의 연대표는 그 중앙에 놓인 기자 조선의 남아 있는 역사입니다.

청구나 예, 부여의 역사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연대가  알려진 유적과 유물로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목할 점은, 대동사강의 기자조선은 주로 발해만 북쪽에 있었으며, 잠시 낙랑 지방으로 옮겼다가 마한 땅의 한 나라로서 정착했다는 것입니다.

  한반도와 만주 전역을 영역으로 했던 단군조선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 시대의 많은 역사서들이 설명했듯이, 열국 중의 한 나라이기는 했지만 분명 존재했고, 단군조선의 옛 도읍지에 도읍하였으며, 평양 또는 그 부근에 도읍지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한의 일원으로서 우리 민족으로 편입해 들어왔습니다.

 

 

 

동방의 열국시대 글만 있으면 설명이 안 될듯하여 지도 위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기자조선은 다소 앞서 있는 청동기 문명을 이용하여 ‘예’로 대표되는 한반도와 만주 일대의 세력과 타협하면서 성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천 년의 기간 동안 남국 터 -> 제·연·조의 유민들과 함께 청천강 이북(추정) -> 평안도의 세형동검 세력과  함께 마한으로 문화의 중심 계층을 이루는 집단이 이동했다고 추정됩니다.

마한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는 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기자조선이 해로를 통한 이동에 탁월한 점을 고려한다면,

토종 세력에 밀려 다시 이주했을 개연성은 충분합니다. 기록상으로는, 마한에서 신라로 그 후손이 일부 건너갔고, 그 후손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기원 전후의 시기에 신라 왕족(日槍)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백제가 마한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요서, 일본에 진출한 것은 이러한 경로와 무관하지 않을 듯합니다.

 

▣ 대동사강의 기록 (단군조선 ~ 마한)

 여기에, 기자조선의 치세 이후의 대동사강의 기록입니다.

 대동사강은 1929년 출간된 역사서입니다.

   이 책은 오랜 기간 우리 역사와 야승을 모아 하나의 역사서로 엮은 것으로서, 

   전 규장각 학사(궁중 서고의 비서를 관리하는 직책)였던 민경호가 서문을 썼으며, 정식 판권이 있습니다.

 이 책은 1929년 출간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974년에 출판된 판본이 서울 남산 도서관에 1부 있습니다.

 대동사강에는 규원사화에서 인용된 듯한 단군조선 47대의 역사와, 기자조선 41대, 마한 9대의 치세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숙신과 예, 부여, 맥, 삼한 등의 나라가 기록되지 않은 것이 아쉽습니다만, 어쨌든 아직은 진위가 확실하지 않으

   니까요 ...

 실제 유적의 분포와 기자조선의 기록을 비교해 보면, 앞서의 지도에 표시된 것과 같이 역사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단군조선의 제후국의 유민이었을 기자는 고열가가 물러난 후 단군조선의 비어 있는 옛 땅에 도읍을 세운 듯합

   니다.

   실제로 이 지역은 하가점 상층문화와 하가점 하층문화 사이의 수백 년 간의 단절이 있습니다. 소위 기자조선은

   엄밀하게 말하면 단군조선을 계승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단군조선이 사라진 이후 처음으로 ‘조선’의 이름

   을 사용했고 ‘조선 왕’임을 자처했다고 여겨집니다.

   대동사강의 기록상으로 기자조선은 단군조선의 서쪽 끝 변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1) 단군조선

 최초의 기자조선의 위치는 단군조선의 서쪽 수백 리의 땅입니다. 즉, 대릉하 유역 서쪽 부분이 됩니다.

 단군조선 47세 고열가 32년 (B.C.1126), 은나라 사람 기자에 서쪽 변경의 수백 리의 땅을 나누어 주고 제기를

   받들고 당장경으로 피함. 단군조선 환씨(桓氏) 47대 1212년. 규원사화의 연대(B.C.1128)와는 약간 틀립니다.

   또한, 규원사화 단군기에는 기자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2) 기자조선 - 내용이 길어서 시대를 구분했습니다.

 1) 태동기

 이 시기 기자조선은 유주에 해당되는 요서 일대의 발해만 북쪽 연안의 동·서 2천 리로 세력을 확장합니다.

   이들은 발해 북쪽 어딘가에서 1백 년 간을 지내다가 건평 지방에 정착하여 차츰 세력을 넓히고, 하가점 상층문

   화로서 대릉하 유역을 중심으로 비파형동검으로 대표되는 청동기 문명을 발전시켰습니다.

 

   기자조선

 

   태조 문성왕 원년 (B.C.1126), 주나라를 피해 남녀 5천을 거느리고 동쪽 조선 땅으로 들어가니, 시서, 예악,

   의약, 음양, 복무, 백공기예의 무리가 모두 따랐다.

   요서 2천리의 땅을 조선으로부터 나누어 받아 정전을 구획하고 농업과 잠업을 권하였다.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도읍을 평양성(단군조선의 옛 도읍지인 요양성)에 정하였다. 재위 40년.

 

 고열가가 피신한 것과 기자의 동래,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규원사화의 연대를 따르면,

   피신한 쪽이 먼저입니다. 5천의 무리라면 작은 나라 정도의 인구입니다.

   요양성에 도읍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까지 발굴된 유적으로 보면, 실제로 정착한 지역은 요서 지방일

   듯합니다.
 조선 땅으로 이주한 이후 특별한 기록이 없는 1백 년 간은 나라로서의 기반이 확립되지 못한 듯합니다.

   하가점 상층문화  또 한 기원전 11세기 이전의 자취가 남아있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초기의 세력은

   매우 미약했다고 여겨집니다.

 

   4세 공정왕 즉위 (B.C.1030) 백관을 나누어 15품, 상하대부 관등을 두고, 관대의상의 제도를 정하였다.

   재위 30년.5세 문무왕 즉위 (B.C.1000) 인월(3번째 달)을 해의 시작으로 삼고, 율·도·량·형을 정하였다.

   시위군을 설치, 6부 59 부대를 창설하고, 깃발을 모두 푸른 색으로 하였다. 재위 28년.이는 하력(夏曆)인데,

   축월(음력 2월)을 해의 시작으로 삼는 은력을 동방의 기준에 맞추어 변경한 듯합니다.

 

   6세 경창왕 즉위 (B.C.968) 재위 11년.경창왕은 본래 ‘侄遼河伯(지요하백)’이었으며, 요하의 방비를 담당했던

   듯합니다. 또한 ‘儒州候(유주후)’로도 불리웠습니다.

 

   7세 흥평왕 즉위 (B.C.957) 큰 비와 천둥이 있어 소와 말이 많이 죽었다.

   처음으로 자모전(子母錢)을 주조하였다. 재위 14년.

   자모전은 자전과 모전 두 종류의 화폐였을 듯한데, ‘주조’로 미루어 볼 때, 도자기나 청동으로 제작되

    었을 듯합니다.

   조선 시대에 같은 한자의 돈이 쓰였는데, 이 때에는 관에서 원금을 빌려주고 이자를 붙여 받는 대출금을 의미했

   던 듯합니다.

   주나라에서 청동제 화폐가 쓰이긴 하였으나, 만주와 요서 일대에서 발굴된 이 시대의 청동제 화폐는 아직 없습

    니다.

 

 10세 의양왕 즉위 (B.C.896) 후원에 청류각을 지어 여러 신하들에 잔치를 베풀었다. 역병이 크게 퍼졌다.

   재위 53년.

 

 11세 문혜왕 즉위 (B.C.843) 진대법(賑貸法; 구휼하여 빌리는 법)을 세워 가난한 백성을 돕게 하였다.

   주·군에 오교장 (5敎長)을 두었다. 재위 50년.

 처음으로 지방에 관리를 파견합니다. ‘子’氏 성 대신 ‘韓’ 또는 ‘鮮于’를 성으로 사용한 것이 이 즈음이라 합니다.

 조선시대의 쌀로 공물을 통일시킨 진대법과는 다릅니다.

 

 12세 위덕왕 즉위 (B.C.793) 원년 4월 여름, 가뭄에 백악에서 친히 제를 올리니, 큰 비가 내렸다.

   도성을 수축하였다. 재위 15년.

 

 2) 정립기

 청동기문화가 발달되면서, 마주 보이는 요동 지방과도 교역하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심양 지방으로부터 청동기 문화가 요동과 만주 지방에 전달됩니다.

 

 16세 무성왕 즉위 (B.C.748) 처음으로 수군을 두어 배와 함선을 고치고 만들었다.재위 26년.

 내륙으로부터 시작한 나라의 영토가 해변가에 도달했음을 의미합니다.

   우거왕 때에 해상전이 있었으므로 기자조선에는 해군이 있었어야 합니다.

   규원사화 단군기에는 함선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위만을 피해 달아날 때에도 해도를 통했으니, 기자조선은 배를 다수 보유했다고 여겨집니다.

 

 17세 정경왕 즉위 (B.C.722) 원년 여름 5월삭(朔)에 일식으로 낮이 어두웠다.

 B.C.722년은, 10월 9일에 일식이 있었습니다. 음력으로 세번째 달을 기준으로 했다면, 9 ~ 10월이 되어 비슷한

   시기가 되나, 여름은 아닙니다.

 

 17세 정경왕 13년 (B.C.709), 크게 가물어 상인들을 제나라, 노나라 말을 할 수 있는 자들을 데리고 배 1천 척으

    로 물고기, 소금, 동, 철을 싣고 바다를 건너 쌀 만여 곡(斛)을 바꾸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였다. 재위 19년.

  당시(춘추시대)곡식의 단위는 곡(斛)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기자조선은 한반도·만주와 중국의 중간에 위치

    한 잇점을 이용하여 중계무역을 했을 듯합니다.

    실제로, 요서 지방의 비파형 동검이 제나라가 위치했던 산뚱반도에 보이는 것이 이무렵부터이며, 수백 년 후에

    무역을 금지시킨 것도 대략의 연대가 일치합니다.

 

 18세 악성왕 즉위 (B.C.703) 원년, 왕이 군현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에게 아프고 괴로움을 물었다.

    왕이 친히 종묘악을지으니, 50장이 되었다. 재위 28년.

 

 19세 효종왕 즉위 (B.C.675) 원년, 대부 선우익을 제나라에 보내어 의를 맺었다.

 

 20세 정경왕 9년 (B.C.666), 8년 후, 제나라에서 공손각을 보내어 내빙하였다.

  12년 (B.C.663), 북적(北狄) 추장 액리도두가 내공하였다. 재위 17년.

 

 21세 천로왕 즉위 (B.C.658), 17년 (B.C.642), 제나라 환공이 죽자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재위 24년.

 

 24세 봉일왕 즉위 (B.C.594), 재위 16년. 대부 공손강이 봉일왕의 먼 친척인 화의후를 맞이하여 왕으로 세웠다.

 

 3) 기자 세력 확장기

 세력을 확장하여, 단군조선의 옛 도읍지였던 요하 상류 일대를 공략하는 시기입니다.

 

 25세 창덕왕 즉위 (B.C.578), 왕이 군현을 순행하다가 요동 벌판에서 붕어하였다. 재위 18년.

 요동 세력과의 전쟁을 의미하는 듯한 기록입니다.

 

 26세 수성왕 즉위 (B.C.560), 원년, 하이도주(瑕夷都主)가 입공하였다. 재위 19년.

 ‘하이도’는 훗가이도를 의미하는 듯합니다. 북해도 쪽의 사람들은 예전에 ‘하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2대 왕의 시기에 해당되는데, 이 시기에 한반도와 왜의 교류가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27세 영궐왕 즉위 (B.C.519), 15년 (B.C.505), 북호가 침범하여 왕이 직접 3천 정병을 지휘하여 정벌하였는데,

    천여급의 머리를 베고 북쪽까지 추격하여 천여리를 개척하였다. 재위 16년.

  관련된 유적으로 볼 때에, 기자조선은 이 시기에 요하 유역을 차지한 듯합니다.

    기자의 도읍이라는 요양 지방을 차지한 것이 이 즈음이 됩니다.

    이 시기에 한반도의 여러 부족들이 한강 유역으로부터 동해안으로 피신한 듯한 자취가 있습니다.

 

  28세 일성왕 즉위 (B.C.560), 향헌장을 주군에 두어 효와 공경, 농업과 잠업을 권하였다. 재위 17년.

 

  29세 제세왕 즉위 (B.C.486), 동지 후 며칠이 지나 궁의 정원에 배꽃이 피었다. 재위 21년.

 

  31세 도국왕 즉위 (B.C.432), 7년 (B.C.426), 태안엽호 우문충이 스스로 장군을 칭하고 수만의 무리를 모아

    북방 36군을 공격하거늘, 왕이 병사를 보내어 토벌하였다.

    겨울에 우문충이 도읍을 포위하거늘 왕이 종묘사직을 받들어 해도에 피하였다.

    9년 (B.C.424), 왕사(王師)가 도성을 되찾고 우문충을 목베어 거가(車駕)가 도읍으로 돌아왔다.재위 19년.

  B.C.504 ~ B.C.423 사이에 1천리 개척 => 반란 => 진압의 과정이 진행되는 듯합니다.

 

  32세 혁성왕 (B.C.413), 11년 (B.C.403), 북호 추장 목수길강흑이 입공하였다. 연나라 희공이 사신을 보내어

    내빙하였다.재위 28년.

 

   4) 공방기

   이 시기는,작은 빙하기에 해당되며, 세계적으로 분쟁이 잦았습니다.

    전국시대의 문화가 요서 지방에 유입됩니다.

 

  33세 화나왕 (B.C.385), 6년 (B.C.380), 연나라 사람이 변경의 군을 침입하였는데, 군수(君守) 묘춘장이

    이를 격파하였다.재위 16년.

 

  34세 설문왕 (B.C.369), 5년(B.C.365), 연나라 사람이 2만 병사로 요서로 들어오거늘, 왕이 상대부 위문언에

    명하여 3만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문언이 강을 중간쯤 건널 때에 연나라 군대를 크게 깨뜨렸다.

    6년 (B.C.363), 연나라 장군이 패하여 연운도에 주둔하면서 바다를 건너 침입하기 위해 배를 만드니,

    위문언이 그 계략을 알고 추격하고 깨뜨려 장수의 목을 베었다. 재위 8년.

 

  35세 경순왕 (B.C.361), 5년 (B.C.357), 봄 정월에 지진이 있었다.

    12년 (B.C.350), 북호의 추장 액니거길한(汗)이 내조(來朝)하고 말 200필을 바치고 연을 정벌할 것을

    청하거늘, 왕이 이에 하대부 신불사로 장군을 삼아 2만병을 내어 보내니, 불사가 북호 1천 기로 더불어 연의

    상곡성을 공격하였다. 이 때부터 연이 해를 이어 침입하였다.

   19년 (B.C.343),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화해를 청하거늘 허락하였다. 재위 19년.

  36세 가덕왕 (B.C.343) 원년, 크게 가물었다.

    왕이 억울한 사람을 걱정하여 크게 사면하고, 또한 친히 제를 지냈다. 재위 27년.

 

   5) 퇴조기

 

   38세 현문왕 (B.C.290),9년 (B.C.282),백악에 홍성제묘(弘聖帝廟)를 세우고 계절마다 제를 지냈다. 재위 39년.

 홍성제는 단군왕검을 의미합니다.

   이 때에 비로소 단군의 묘를 세웠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기자의 나라가 조선’의 칭호를 사용한 것이 이 즈음

   이라고 여겨집니다.

 

 39세 장평왕 (B.C.251), 4년 (B.C.248), 겨울 10월 삭(朔)에 일식이 있었다.

   북호 추장 아리당부가 연나라를 정벌할 것을 청하거늘 왕이 불허하니, 북호가 이를 원망하여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19년 (B.C.232), 왕이 북호가 오랜 동안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치려 하였으나, 크게 패하여 돌아왔다.

     재위 19년.

  실제로는 B.C.248 4월 24일에 일식이 있었습니다.

    앞서의 기준에 따른다면, 1 ~ 2월이 되어 2 ~ 3달의 차이가 있습니다.

    북호의 땅은, 앞서 진압된 북쪽 1천리에 해당되는 지역인 듯한데, 기자조선에 큰 영향을 주는 듯합니다.

 

 40세 종통왕 (B.C.232) 원년, 크게 가물었다.

   4년 (B.C.229), 북호 추장 산지객융이 영주(寧州)를 습격하여 주수(州守) 목원등을 죽이고 마침내 크게 약탈

   하고 가니, 연나라가 그 틈을 타 장군 진개(秦開)를 보내어 서쪽 지방을 침범하여 만번한에 이르는 2천여리의

   땅을 얻었다.

   나라의 세력이 마침내 약해졌다. 재위 11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연대는 이보다 60년 정도 앞섭니다.

   비록 그 근거가 되는 《위략》은 송호정 교수가 ‘사료적 가치에 비해 신빙성이 미약하다’고 지적하는 사서이지

   만, 유적의 연대에 의해 기자조선과 그 시기·지역이 대체로 일치하는 하가점 상층문화의 시기를 B.C.1000 ~

    B.C.300 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대동사강의 연나라 진개의 침략은, 일식 → 북호 추장의 정벌 청원 →  불허  → 북호와 반목  → 북호의 약탈

    → 연나라 침략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연쇄적으로 진행되고 있어서, 전체 내용이 같이 묶여져 있습니다.

   두 건의 일식기록이 실제와 맞지 않는 것을 포함하여, 기자조선의 출처가 되는 기본자료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

   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평양에 기자가 머무를 수 있는 시기가 있다면 이 즈음 밖에는 없습니다.

    2천 리의 땅을 잃은 기자의 유민들은 평안북도 일대에 정착했을 것입니다.

   평양 부근에는 이미 낙랑의 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형동검은 기자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낙랑에 의해 개발된 듯합니다.

 

 41세 애왕 (B.C.222), 13년 (B.C.210), 진(秦)나라가 크게 난을 일으켜 연, 제, 조나라의 백성들 수만호가 망명

   하였다.

 명도전이 평안북도 청천강 일대, 대동강 상류에서 대량으로 발굴되는 것도 기록과 부합합니다.

   게다가, 명도전은 세 나라에서 널리 쓰여졌습니다.

   명도전의 분포로 보아 이들은 요동, 한반도에도 일부 망명한 듯합니다.

   중국의 사서를 참조한다면, 중국 동부에 거하던 동이족들이 이 시기에 축출되었으므로, 이들 또한 동이족일

   가능성이 큽니다.

   19년 (B.C.204) 한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거늘 병사 1만을 보내어 돕고 초나라를 깨뜨렸다.

 한나라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병사 1만으로 추정할 때, 당시 기자조선의 인구는 10만 이상이었을 듯합니다.

   27년 (B.C.196), 한연왕 노관이 흉노에 들어가 그 신하 위만이 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패수를 넘어 투항

   하거늘, 왕이 위만을 박사로 임명하고 서쪽 경계를 지키게 하였다.

   28년 (B.C.195), 위만이 사람을 보내어 왕에게 호위할 것을 고하니 왕이 허락한대, 위만이 병사를 이끌고

   도읍에 이르러 왕을 위협하거늘, 왕이 대적하지 않고 좌우궁인과 무리 수천을 이끌고 남쪽으로 배를 타고

   달아났다. 즉위 28년.

 일부 왕실만 망명하였고, 실제로 태원선우씨의 집성촌이 평안남·북도 일대에 분포합니다.

   이는 이들이 먼저 평안북도에 이주하였다가 위만이 평양에 도읍하면서 평안남도로 이주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때에는 연·제·조에서 망명한 수만의 사람들의 영향이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기자조선자씨(子氏) 41대 929년.

 연나라에 요서 2천 리를 잃고 그 일부가 현재의 평양 부근으로 이주합니다.

   평양에서 30여 년, 다시 위만에 쫓겨 익산 지방으로 피신합니다.


(3) 위만조선, 사군(四郡)

 위만조선 위만 (B.C.194) 원년,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왕검성(평양)에 도읍. 부여, 예, 숙신 등 스스로 독립.

   위만이 요동태수와 한나라의 외신(外臣)이 되기로 약속하고, 진새외(鎭塞外)로 이름하니,

   이로써 군대의 위세와 재물을 얻었다.

   백성을 위로하고, 이웃 읍을 침범하니, 진번과 임둔이 모두 복속하여 지방이 수천 리에 이르렀다.

 일찌기 알려져 있지 않던 내용입니다.

   결국 위만조선은 요동과의 연맹이었다는 것이며, 낙랑의 위만, 요동을 중심으로 진번과 임둔이 연합하였다는

   것입니다.

 3세 우거왕, 한나라를 항상 침입하고 진한(辰韓)과 한나라의 교역로를 막아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정벌,

   수 년 간의 싸움 끝에 대신들이 우거왕을 죽이고 항복, 위만조선 멸망, 제후들 분열. (B.C.108) 위만조선

   위씨(衛氏) 3세 87년. 위만조선이 일대를 통합한 후 패배한 탓에 사방 수천 리의 영역이 한나라의 간섭을 받게

   됩니다.


 B.C.81, 사군의 백성이 한나라의 령을 존중하지 않고 한나라 관리를 위협하니, 한소제가 이를 우려하여
토착민

   으로 나누어 봉하여 사군을 평주도독부와 동부도독부의 2부로 바꾸었다. 허나, 백성들이 한나라의 영을 존중

   하지 않아 스스로 군장을 세우니, 동북옥저, 개마, 구차, 량맥, 황룡 등의 나라가 다시 일어나 나뉘어졌다.


 예는 4년 후 한나라로부터 돌아섰으며, 요양, 한강 북부에 책정되었던 한사군이 존속된 기간은 27년에
불과

   합니다.

 이들 나라에 앞서 독립한 부여, 숙신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이들이 아예 위만조선, 한사군에 포함되지 않았음

   을 의미할 것입니다.

   개편된 한나라 2부의 영역은 구려와 낙랑의 평양성 일대였습니다.

 주목할 만한 나라가 예(濊)인데, 인구는 28만이었습니다. 당시 삼한 소국의 큰 나라가 만여 명이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변진에 대응될 만큼 큰 나라였습니다.

   삼한의 인구가 백만 정도로 예상되므로, 부여와 숙신, 옥저 등을 포함한 당시 동방의 인구는 2 ~ 3백만은 될

   것으로 추측 됩니다.

   예는 위만조선에 속해 있다가 그 군주 남여가 한나라에 항복하여 창해군이 됩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돌아서 수 년 내에 예가 다시 독립하게 됩니다.

   이들이 단군조선에 이어 한반도와 만주에 남아 있던 실체였을 것이나, 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점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위만이 평양 일대에서 조선을 계승하고, 요동 지방의 예와 연합하여 중계 무역을 독점합니다.


(4) 마한, 신라, 고구려, 백제

 마한의 기록에는 삼국이 나라를 세우는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마한은 삼국시대 초기까지 존재하지만,

   기원 이전까지만 정리해 보기로 합니다.


 마한 애왕 (B.C.194), 위만의 습격을 받아 월지국(月支國) 금마군 용화산성에 도읍하여 국호를 마한(馬韓)

   이라 하였다.

   재위 반 년. 위만조선이 멸망하기 전까지의 마한의 기록은 재위기간 외에는 없습니다.

   이는, 마한의 역사가 삼국의 기록을 참조하여 재구성되었기 때문일 듯합니다.

 

 7세 양왕 (B.C.73), 5년 (B.C.69), 부여 공주 동신성모 파소(婆蘇)가 아비 없이 아이를 배어 부모가 쫓아내니,

   성모가 진한에 들어가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이다. 고허촌장 소벌도리가 거두어 길렀다.

   15년 (B.C.59) 여름 4월, 해모수가 나라를 세웠다.

    이에 앞서 부여왕 해부루가 금와로 태자를 삼았는데, 종실인 해모수가 이를 탓하여 도읍에서 난을 일으키니,

    왕이 대적하지 못하고 동해 가의 가섭원으로 도읍을 옮겨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였다.

   해모수가 부여의 도성을 점령하고 국호를 북부여라 하였다. 재위 15년.

 부여로부터 동부여와 북부여가 갈라져 나온 연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8세 원왕 (B.C.58), 원년, 동부여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2년 (B.C.57) 신라 시조가 나라를 세웠다. 6부장이 더불어 박혁거세를 임금으로 추대하니, 나이가 13살이었다.

   도읍을 임성(林城)에 정하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이라 하고, 스스로를 거세간(居世干)이라 불렀다.

   22년 (B.C.37) 신라가 도읍에 성을 쌓고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졸본부여왕이 후임자가 없이 죽었다.

   주몽이 즉위하여 도읍을 졸본천으로 하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였다.

   스스로 햇빛을 받들어 태어났다고 하여 ‘고(高)’로써 성을 삼았다.

   25년 (B.C.34), 고구려가 성곽과 영실을 갖추었다.재위 26년.

 주몽 이야기는 삼국사기의 내용과 같은데, 금와가 아들이 일곱이었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신라의 건국도 삼국사기에 설명된 대로입니다. 고구려왕이 비류왕 송양과 겨룬 이야기가 약간 다른데,

   대동사강에서는 고구려왕이 무예시합에서 졌으나 하늘에 빌어 7일간 비가 내려 비류성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비류는 기자조선의 기록(비류하)에도 등장하는데, 그 위치가 요서 지방으로 추정되어 그 상류에 있던 나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9세 계왕 (B.C.33) 원년 10월, 고구려왕이 오이, 부분노를 보내어 행인국을 멸하였다.

   6년 (B.C.27), 겨울 11월에 고구려에서 북옥저를 쳐 멸하였다. 또한 읍루를 정벌하여, 읍루가 항복하였다.

 읍루는 숙신-말갈과 같습니다. 신지씨의 후예에 해당됩니다.

   9년 (B.C.24),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이 왜국에 들어가 단마국(但馬國)의 왕이 되었다.

   15년 (B.C.18) 봄, 백제 시조가 위례성에 나라를 세우고 부여를 성으로 하였다. 이에 앞서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로 부터 10인을 이끌고 남쪽 마한으로 달아나 번신이 되기를 청하거늘, 마한왕이 한강 남쪽 수백리에

   봉하였다. 온조는 10인으로 보위하게 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고 스스로를 ‘나가(羅瑕)’라 불렀다.

   미추홀의 백성이 모두 돌아오니, 국호를 백제(百濟)라 하였다. 재위 16년.

   이상한 점은, 함께 내려온 10인이 비류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미 위례성이 있는데 어째서 비류왕자는바닷가를 향했던 것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백제의 초기 성읍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은 10인으로는 도저히 쌓을수 없는 성이라는 것도 수수께끼

   입니다.

   10인은 분명 10부족을 의미할 것입니다.

 10세 학왕 (B.C.17), 재위 25년. A.D.9년, 마한 멸망. 마한 10대 202년.

 멸망한 마한은 그 중심국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로써 단군조선으로부터 시작된 각 나라들과, 한반도와 만주를

   중심으로 흩어져 마을을 이루던 예, 맥이 세 나라로서 정리됩니다.

 

  대동사강의 기록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아직은 모르겠으나, 이른 시기에 씌여졌음에도 비교적 잘 구성된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