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우리역사

우리나라 역사서

오늘의 쉼터 2008. 6. 15. 09:47

 우리나라 역사서

- 추적 : 한문수
- 추적내용 : "아래는 청장관전서에 나온 우리 역사서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추적 해 본 것입니다"
→ 지속 추적중으로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공동으로 추적작업을 계속할 것을

    희망합니다.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조선 후기 학자 이덕무(李德懋)의 저술총서.
<청장관>은 저자의 호이다.
1795년(정조 19) 내탕금(內帑金)을 받아 아들 광규가 편집, 간행하였다.

내용은
소년시절에 지은 시문을 모은 <영처고>, 《예기》의 자의(字義)를 고증·비판한 <예기억>, 각체의 시문을 모은 <아정유고(雅亭遺稿)>, 《송사(宋史)》를 산정(刪定)하여 보전(補傳)한 <편서잡고(編書雜稿)>, 조선·중국의 역대 편찬인 <기년아람(紀年兒覽)>, 선비·부녀자·아동의 예절과 수신 규범을 적은 <사소절(士小節)>, 중국 인물지인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 군서독초(群書讀抄)인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일종의 소논문집·소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앙엽기>, 일본의 세계(世系)·지도·풍속을 실은 <청정국지>, 황해도 기행문인 <서해여언(西海旅言)>, 중국 문사와의 왕래서간을 모은 <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 베이징[北京(북경)] 기행문인 <입연기(入燕記)>, 만록(漫錄)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 등으로 되어 있고 부록으로 <선고연보(先考年譜)>가 실려 있다.

여러 방면에 걸친 저자의 학식이 나타나 있는 이 책은 특히 당시 실학의 계몽적 사조를 엿볼 수 있다. 71권 25책. 인본. 규장각도서,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아사미문고>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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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留記)》

고구려가 처음 글을 사용할 때 어떤 사람이 사실 1백 권을 적고
책 이름을《유기》라 하였는데, 전해지지 않는다.
→ 소재 불가

《신집(新集)》

영양왕(嬰陽王)이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고사(古史)를 요약해서《신집》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전해지지 않는다.
→ 입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계림잡전(鷄林雜傳)》

신라 때 김대문(金大問)이 지었는데, 전해지지 않는다.
→ 소재 불가

《화랑세기(花郞世記)》

김대문이 지었는데, 고승전(高僧傳)과 한산기(漢山記)는 전해지지 않는다.
→ 입수, 한국사 연구 논문집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

최치원(崔致遠)이 지었다.
→확인, 신라이수전 소고 - 국립도서관 소장

《고금록(古今錄)》

고려 때 박인량(朴寅亮)이 지었다.
→ 소재 불가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 인종이 김부식(金富軾)에게 명하여 지어 바치게 하였다.
서사가(徐四佳)의《필원잡기(筆苑雜記》에 '《삼국사기》는《통감(通鑑》ㆍ《삼국지(三國志)》ㆍ《남사(南史)》ㆍ《북사(北史)》ㆍ《수서(隋書)》ㆍ《당서(唐書)》의 내용을 거두어 모아서 전(傳)ㆍ기(紀)ㆍ표(表)ㆍ지(志)를 만든 책이니, 믿음직한 것이 못된다. 사실을 적은 대문에 있어서는 매번 다른 책을 인용하였으니, 더욱 사기를 쓰는 체모가 아니다. 또 침벌(侵伐)ㆍ회맹(會盟) 등의 일과 같은 것은 한 사건을 신라기ㆍ고구려기ㆍ백제기에 중첩으로 적되 문체를 조금도 변경하지 않았으니 취할 것이 못된다.' 하였다.

《삼국사략(三國史略)》

하윤(河崙)ㆍ이첨(李詹)ㆍ권근(權近) 등이 《삼국사기》에 수정을 가하여 속된 것과 번잡스런 것을 삭제했다.
→ 소재 불가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서거정(徐居正)이 편집해 올린 것이다.
→ 盧思愼(朝鮮) 等奉命撰 13,14권만 존재, 179면 입수

《삼국유사(三國遺事)》

모두 5권인데 기이(記異)가 2권, 흥법(興法)ㆍ의해(義解)ㆍ신주(神呪)ㆍ감통(感通)을 병합하여 3권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제5권 머리에 '국존(國尊) 조계종(曺溪宗) 가지산(迦智山) 인각사(麟角寺) 주지(住持) 원경충조대선사(圓鏡冲照大禪師) 일연(一然)이 찬(撰)한다.'고 되어 있다. 그 말이 황당하고 허탄하다.

《고려본사(高麗本史)》

김종서(金宗瑞)ㆍ정인지(鄭麟趾)가 지은 것이다. 처음 간행된 책은 중국(中國)에 성행(盛行)되고 있다.
→ 소재 불가

《고려국사(高麗國史)》

우리 태조가 정도전(鄭道傳)ㆍ정총(鄭摠) 등에게 명하여 지어 올리게 하였다.
정총의 서문에 '원왕(元王 원종) 이상부터 일이 참람되게 윗사람에 견준 것이 많으므로 그들이 종(宗)이라 칭한 것은 왕(王)이라 쓰고 절일(節日)이라 칭한 것은 생일(生日)이라 쓰며, 조(詔)라 한 것은 교(敎)라 쓰고 짐(朕)이라 한 것은 여(予)라 썼으니, 이것은 명분을 바루려는 것이다.' 하였다.
○ 각조(各朝)의 실록(實錄)과 민지(閔漬)의《강목(綱目)》, 이제현(李齊賢)의《사략(史略)》, 이색(李穡)의《금경록(金鏡錄)》에서 주워모아 좌씨(左氏)의 편년체(編年體)를 모방하였다. 3년 걸려 완성하였는데 모두 37권이다.
→ 東國李相國集에 있음

《교수고려사(校讐高麗史)》

우리 세종대왕이 정도전(鄭道傳) 등이 지은《고려사(高麗史)》중  원종(元宗) 이상 대의 고친 곳에 사실과 틀린 것이 있는 듯하다 하고 유관(柳觀)과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다시 원종 이상의 실록을 가지고 신사(新史)와 비교하게 하였는데, 종(宗)을 고쳐 왕(王)이라 하고 절일(節日)을 고쳐 생일(生日)이라 하고, 태후(太后)를 태비(太妣)라 하고 태자(太子)를 세자(世子)라 한 유(類)와 같은 것들을 다시 당시의 구사(舊史)대로 따르게 하였다.
→ 소재 불가

《고려사략(高麗史略)》

이제현(李齊賢)이 지었다. 《필원잡기(筆苑雜記)》에  '《고려본사(高麗本史)》장편(長編)은 본조(本朝)의 김종서(金宗瑞)ㆍ정인지(鄭麟趾)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일찍이 정총(鄭摠)의 서(序)를 보니 거기에「공민왕 때에 이제현(李齊賢)》이 지은《사략(史略)》은 숙종(肅宗)에서 끝났고, 이인복(李仁復)ㆍ이색(李穡)이 지은 《금경록(金鏡錄)》은 정종(靖宗)에서 끝났다.」하였다. 《사략》은 비록 전서(全書)를 다 볼 수는 없으나 이 제현의 의논이 세상에 행하고 있으며 《금경록》은 보이지 않으니 그 책이 이루어지지 못했는가 의심스럽다. 본조(本朝)에서 정도전과 정총에게 명하여《고려사(高麗史)》를 짓게 했고 정총이 서(序)를 했다 하나 그 책이 보이지 않으니, 그 책이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아니면 미진(未盡)한 곳이 있어서 전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하였다.
→ 정인지 본(鄭麟趾 本) 2권 입수 (乾 167면, 坤 141면)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이극감(李克堪) 등이《고려전사(高麗前史)》를 지어 올리고 또 세교(世敎)에 관계 있는 사적(事蹟)들을 모아 편집하되 연별로 표시하여 사실을 서술해서 참고하여 보기에 편하도록 하였다.

《동국통감(東國通鑑)》

모두 2부(部)인데 1부는 지은 사람의 이름이 빠져 있다.
삼조선(三朝鮮)ㆍ사군(四郡)ㆍ이부(二部)ㆍ삼한(三韓)ㆍ삼국(三國)ㆍ신라(新羅)의 기(紀)를 합하여 4권, 고려기(高麗紀) 12권 모두 16권으로 되어 있다. ○또 1부(部)는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처음에 세조(世祖)가 문국(文局)에 명하여 《동국통감》을 짓게 했는데 끝내지 못했고 나머지는 성종 때 서거정이 계진(啓陳)하고 계속해서 찬술하여 책이 이루어졌다. 모두 57편으로, 삼국기(三國紀) 8권, 신라기(新羅紀) 4권, 고려기(高麗紀) 44권이고, 삼국(三國) 이전은 두루 여러 책에서 채집하여 외기(外紀)라 일컬어 1편(編)을 만들었다. 그리고 함께 지은 여러 유신(儒臣)은 정효항(鄭孝恒)ㆍ손비장(孫比長)ㆍ이숙감(李淑瑊)ㆍ김쉬(金淬)ㆍ이승녕(李承寧)ㆍ표연말(表沿沫)ㆍ최보(崔溥)ㆍ유인홍(柳仁洪)ㆍ이극돈(李克墩)이다. 극돈이 서문(序文)을 지었다.
→ 서거정 찬(徐居正 撰) ;  임백수 훈점(林白水 訓點) 30면 입수

《동국사략(東國史略)》

모두 5부(部)이다.
○1부는 권근(權近)이 지었다.
○1부는 박상(朴祥)이 지었다.
삼조선(三朝鮮)ㆍ사군(四郡)ㆍ이부(二部)ㆍ삼한(三韓)ㆍ삼국(三國)의 기(紀) 1권, 신라기(新羅紀) 1권, 고려기(高麗紀) 4권이다. ○1부는 이우(李㙖)가 지었다.

○1부는 유희령(柳希齡)이 지었다.
모두 12권으로 먼저 강(綱)을 제시하고 뒤에 그 사실을 서술하였으며 중국의 동국전수총도(東國傳授摠圖)와 역대(歷代)의 국도분리세계(國都分理世系) 등 도표(圖表)와 세년가(世年歌)를 그 앞머리에 배치하였다.
○1부는 민제인(閔齊仁)이 지었는데 3권이다.
→ 입수, 2권(乾 125면, 坤 159면)

《동사찬요(東史纂要)》

오운(吳澐)이 지었다. 삼조선(三朝鮮)ㆍ사군(四郡)ㆍ이부(二部)ㆍ삼한(三韓)ㆍ삼국(三國)ㆍ고려(高麗)의 사실을 기록한 것인데, 삼국 시대에 소국(小國)이 나라라고 참칭한 것은 대략 그 국도(國都)와 연대(年代)를 기록하여 1권을 만들고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 5권, 반역 권흉전(叛逆權凶傳) 1권으로 되어 있다.

○ 자서(自敍)에 '《삼국사절요》와《동국통감》등의 책을 가지고 그 요점만을 모아 그 나라의 국도ㆍ연대와 명신(名臣)들의 행적(行迹)을 대략 기록하고, 두루 여러 책에서 뽑아내어 그 빠진 것을 보충했으며, 반역(叛逆)과 권흉(權凶)들은 따로 아래에 기록하여 8권으로 나누어 만들어서 인쇄해 반포하였다. 그러나 기록이 소략하여 완전한 책을 만들 수 없으므로 다시 원사(原史)에서 신라 시조 갑자년(서기전 57)부터 고려 공양왕(恭讓王) 임신년(1392)까지 1천 4백 49년 동안의 사적 가운데 쓸데없는 것을 깎아내고 요약하여 군왕기(君王紀)를 편찬 집성하되 전에 인각(印刻)한 것을 깎아버리고, 제1권 이후는 기(紀)를 짓되《훈의강목(訓義綱目)》의 예에 의하여 상ㆍ중ㆍ하로 분작하고  4권을 추각(追刻)하여 편 머리에 두었다.' 하였다.
→ 입수, 총 7권 중, 1 - 2권 없음

《편년통록(編年通錄)》

고려(高麗) 김관의(金寬毅)가 지었다.  관의는 의종(毅宗) 때 사람으로 벼슬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이었으며
《고려사(高麗史)》에 인용(引用)되었다.

《편년강목(編年綱目)》
충선왕(忠宣王)이 민지(閔漬)에게 명(命)하여 수찬(修撰)하게 하였다.
→ 일본 영인 본 입수

《왕대종록(王代宗錄)》

김관의(金寬毅)가 지었다.
서거정(徐居正)이 '김관의ㆍ민 지가 고려세계(高麗世系)를《용손(龍孫)이다.
당(唐)의 귀성(貴姓)이다.》 한 것은 다 허탄하고 망령된 말이며 진실성이 없다.
현종조(顯宗朝)의 황주량(黃周亮)이 지은 태조(太祖) 이하 7대(代) 실록(實錄)에는 이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한 것이 없다.
만약 이 말과 같다면 고려는 증조(曾祖)를 버려 조상으로 여기지 않고 반대로 증조모(曾祖母)의 아버지를 조상으로 여기는 셈이다.
그러나 그 뒤에《고려사》를 지은 자가 그것을 취(取)하여 외기(外紀)에 붙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 소재 불가

《세대편년(世代編年)》

충목왕(忠穆王)이 민지가 지은《편년강목》에 빠진 것이 많이 있다는 이유로 이제현(李齊賢) 등에게 명하여 다시《세대편년》을 지어 올리라 하였다.
→ 소재 불가

《편년통재(編年通載)》

예종(叡宗)이 홍관(洪灌)에게 명하여 삼한(三韓)이래의 사적(事蹟)을 찬집(撰集)해 올리게 하였다.
→ 소재 불가

《고금금경록(古今金鏡錄)》

이색(李穡)ㆍ이인복(李仁復)이 지었다.
→ 소재 불가

《금경록(金鏡錄)》

정가신(鄭可臣)이 지었다.
→  소재 불가

《제왕운기(帝王韻紀)》

이승휴(李承休)가 지었다.
상권(上卷)은 중국 제왕(帝王)들의 전수(傳受)와 흥망을 논하였으며,
하권(下卷)은 우리나라 군왕(君王)들의 개국(開國)한 연대(年代)의 사실을 논하였는데 중국에 대하여는 칠언시(七言詩)로,
우리나라에 대하여는 오언시(五言詩)로 운(韻)을 붙여 기록하였다.
→  입수 (266면)

《치평요람(治平要覽)》

영조(英祖)가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지은 것이다.
중국은 주(周) 나라에서 원(元) 나라까지, 우리나라는 기자(箕子)에서부터 고려대(高麗代)에 이르러서 끝났다.
이 책에 국가의 흥망, 군신의 사성(邪正), 풍속(風俗)의 성쇠, 정교(正敎)의 선악에 대해 모든 이륜(彝倫)에 관련된 것은 싣지 않은 것이 없다.
→  소재 불가

《역대세기(歷代世紀)》

지은 사람의 이름이 빠져 있다.
→  소재 불가

《역대연표(歷代年表)》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위로 제곡(帝嚳) 갑자년부터 아래로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무술년(성종 9, 1478)까지 이르고,  우리나라는 단군(檀君) 무진년(서기전 2333)부터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 무릇 3천 8백 11년 간에 이르는데, 위에는 갑자(甲子)로 나열하고 아래에는 연대(年代)를 대었다
→ 지나역대연표(支那歷代年表).1,226면 齊召南 著 1928. 입수


《역대연기(歷代年紀)》

김시습(金時習)이 지었다.
→  소재 불가

《역대제왕기(歷代帝王紀)》

지은 사람의 이름이 빠져 있다.
어숙권(魚叔權)의 《고사촬요(攷事撮要)》서(序)에 '기록된 것이  너무 소략하고 자못 국사(國史)보다 소루하다.' 하였다.
→  소재 불가

《역대가(歷代歌)》

오세문(吳世文)이 지었다.
금(金) 나라 정우(貞祐 금 선종(金宣宗)의 연호) 7년(고종 6, 1219) 기묘부터 역수(逆數)하여 4만 9천 6백여 세(歲)에 이르면 반고(盤古)가
개벽(開闢)한 무인년이 된다고 하였다.
→ 을미원월십팔일대사동신간(乙未元月十八日大寺洞新刊). 한글체 103면 입수

《역대세년가(歷代世年歌)》

영조(英祖) 18년(1742)에 증선지(曾先之)의《역대세년가》를 표창(表彰)하고 대제학(大提學) 윤준(尹準)에게 명하여 참작하여 주석을 내게 했는데, 유독 원조(元朝)만이 빠져 있으므로 장미화(長美和)의 시로써 보충하였고, 우리나라의 연대를 몰라서는 안 된다 하고 판서(判書) 권도(權蹈)에게 명하여 차서대로 짓되 주해(注解)를 내라 하고 친히 재결을 더하였으므로 아주 분명하게 갖추어졌다.
→ 소재 불가

《역대요록(歷代要錄)》

내편과 외편 2편으로, 유희춘(柳希春)이 편(編)하였다.
자제(自題)하기를 '옛날에 사마공(司馬公 사마 광(司馬光)을 말한다)은 《계고록(稽古錄)》을 지었다. 이것이 내가《역대요록》을 편집하게 된 뜻이다. 삼가 선유(先儒)들의 긴요한 의논을 취하여 대강 자세하고 적절함을 더하였고 상고(上古)에서 시작하여 원(元) 나라에 이르러 끝났다.' 하였다.
→ 소재 불가

《국조보감(國朝寶鑑)》

세조조(世祖朝)에 신숙주(申叔舟) 등에게 명하여  태조(太祖)ㆍ태종(太宗)ㆍ세종(世宗)ㆍ문종(文宗)의 보감(寶鑑)을 짓게 하고 명목을 《국조보감》이라 하였다. 숙종조(肅宗朝)에서는 이 단하(李端夏)에게 명하여 《선묘보감(宣廟寶鑑》을 지었고 영종조(英宗朝)에는 이덕수(李德壽) 등에게 명하여 《숙묘보감(肅廟寶鑑)》을 지었다. 그리고 금상(今上 정조(正祖)를 말한다)5년(1781)에 육조(六朝 태조ㆍ태종ㆍ세종ㆍ문종ㆍ선조ㆍ숙종을 말한다.) 이외 13조(朝)는 보감이 갖추어 있지 않으므로 조준(趙㻐)에 명하여정종(定宗)ㆍ단종(端宗)ㆍ예종(睿宗)ㆍ인종(仁宗)ㆍ경종(景宗) 조(朝)의 사실을 짓게 하고, 정창성(鄭昌聖)에게 명하여 세조조(世祖朝)의 사실을 짓게 하고, 김 노진(金魯鎭)에게 명하여 성종조(成宗朝)의 사실을 짓게 하고 홍양호(洪良浩)에게 명하여 중종조(中宗朝)의 사실을 짓게 했으며, 서유린(徐有隣)에게는 명종조(明宗朝)의 사실을 짓게 하고, 민종현(閔種顯)에게는 인조조(仁祖朝)의 사실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김익(金熤)에게는 효종조(孝宗朝)의 사실을, 이명식(李命植)에게는 현종조(顯宗朝)의 사실을 짓게 하였고, 조준(趙㻐)ㆍ이명식(李明植)ㆍ김익(金熤)에게는 영종조(英祖朝)의 사실을 짓게 하고, 전의 세 보감(寶鑑)과 합하여 인쇄해서 19조(朝)의 보감을 만들고《국조보감》이라 일컬으니, 모두 68권이다. 그리고 또 별편(別篇)을 두어 인조(仁祖)ㆍ효종(孝宗)ㆍ현종(顯宗)ㆍ숙종(肅宗)ㆍ영종(英宗)의 5조(朝)의 사실을 기록한 것은 황은(皇恩)에 보답하는 대의(大義)이다.
→ 신숙주 등수명편(申叔舟 等受命編) 7권. 418면 입수

《동해야언(東海野言)》

허봉(許篈)이 제가(諸家)들의 소설(小說)을 모아 기록하여 이 책을 편집하였다.
→ 소재 불가

《석담일기(石潭日記)》

이이(李珥)가 지었다. 일명《경연일기(經筵日記)》라고도 한다.
→ 유기일 편(柳基一 編) 1879년. 110면 입수

《야사초본(野史初本)》

6권이며 이식(李植)이 지었다.

《여사제강(麗史提綱)》

유계(兪棨)가 지었다.
→ 1667년 14권. 2,160면 입수
→ <고려사, 동국통감, 동국사략, 동국병감, 동국찬요, 익재난고, 낙옹비설, 목은집, 파한집, 보한집, 금난집, 용재총화, 청파극담, 필원잡기, 여지승람이 수록되어 있음>

《동사회강(東史會綱)》

임상덕(林象德)이 지었다.
상덕이 약관(弱冠) 때에 찬집하다가 완성하지 못한 채 나이 겨우 30에 졸(卒)하였다. 부인 박씨(朴氏)는 판서(判書) 박사수(朴師洙)의 매씨(妹氏)였는데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였었으므로 계속 찬집하여 완성시켜 세상에 간행되어 나오게 되었다.
→ 1674년 13권 1,834면 입수

《동사강목(東史綱目)》

안정복(安鼎福)이 지었다.
→ 975면 중 385면은 원문 손상, 입수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

홍만종(洪萬宗)이 지었다.
→ 소화시평(小華詩評) 118면 입수

《역대제왕전세도(歷代帝王傳世圖)》

박율(朴繘)이 지었다.
→ 소재 불가

《경세지장(經世指掌)》

홍계희(洪啓禧)가 지었다.
→ 1758년 2권 1,699면 입수

《황극일원도(皇極一元圖)》

서명응(徐命膺)이 지었다.
《경세지장》은 당요 (唐堯)부터 시작되었지만 이 책은 복희(伏羲) 때부터 시작하였다.
→ 소재 불가

《동사촬요(東史撮要)》

지은 사람의 이름은 빠져 있다.
자못 상세하고 긴요하다.
→ 1건 53면 입수

《춘파일월록(春坡日月錄)》이성령(李星齡)이 지었다.

→ 소재 불가


《청야만집(靑野漫輯)》

이진수(李震秀)가 지었다.
→ 조선총독부고서부 古朝56 4권 301면 입수

《진승기요(震乘記要)》

지은 사람의 이름이 빠져 있다. 자못 한만(汗漫)하다.
→ 소재 불가

《동포휘언(東圃彙言)》

김시위(金時煒)가 지었다.
국조(國朝)의 전장(典章)에 대해 극히 정밀하고 긴요하여 사가(史家)들에게 도움이 있다.
→ 소재 불가

《기년아람(紀年兒覽)》

이만운(李萬運)이 지었다.
중국(中國)은 태고 때부터 청(淸) 나라까지 이르렀고, 우리나라는 단군 때부터 본조(本朝)까지 이르도록 연기(年紀)를
자세히 계산해 놓았는데 대략 서법(書法)을 따랐다. 중국과 우리나라 밑에 또 각각 역대(歷代)의 지계(地界)ㆍ군읍(郡邑)의 총수(總數)를 붙여서 제가들의 기년(紀年)과 비교하면 가장 정밀하면서도 간결하다. 내가 정보(訂補)한 것도 모두 7편(編)이다.
→ 4권, 635면 (홍사와 유사. 단군, 역대 수도지역 기록 있음) 입수

《동현사적(東賢事蹟)》

권근(權近)이 우리나라 명현(名賢)의 행적을 편집한 것이다.
→ 소재 불가

《동국명신행적(東國名臣行蹟)》

지은 사람의 이름이 빠져 있다.
→ 소재 불가

《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

2부(部)가 있다. 1부는 주 세붕(周世鵬)이 지었고, 1부는 유성룡(柳成龍)이 지었다. 혹은 지은이를 자세히 알 수 없다고도 한다.
→ 소재 불가

《동국명신록(東國名臣錄)》

김육(金堉)이 지었다.
→ 118면, 각 성씨별 입수

《동명신록(東名臣錄)》

여광헌(呂光憲)이 편집한 것으로 삼국 시대부터 고려(高麗)에 이르기까지
가장 빼어난 사람만 모아서 편집한 것이다.
→ 金堉 著, 1권, 178면(고대 - 조선) 입수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

송성명(宋成明)이 편집하였다.
등재 인물은 4백 1인으로 효묘조(孝廟朝)까지 이르렀고 신후(申)가 참교(參校)하였다.
→ 1권, 69면 입수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박세채(朴世采)가 편집하였다.
→ 2권, 246면(箕子 설명도 있음) 입수

《속동유사우록(續東儒師友錄)》

이세환(李世煥)이 편집하였다.
이 밖에도 야사(野史)의 유로는《조야첨재(朝野僉載)》ㆍ《조야기문(朝野記聞)》ㆍ《해동야승(海東野乘)》과 같은 등속이 있지만 다 기록할 수 없다. 이상에 기록한 바는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에 지나지 않는데, 어떤 것은 전해지고 어떤 것은 전해지지 않으며 어떤 것은 간행(刊行)되지 않은 것도 있다. 사가(史家)의 종류가 이것에 그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 소재 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