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학이란 하늘과 땅의 자연현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여 인간의 발전과 행복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의 안전과 편리를 도모하는 학문이다. |
2. 풍수지리(風水地理) 원리(原理)
풍수지리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을 기초로 정리된 학문이다. 이것이 바로 풍수지리다. 따라서 풍수지리는 자연과학(自然科學)이라 할 수 있다. 풍수(風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풍수지리의 원리는 산과 물이 기본이다. 산은 움직이지 않고 정지(停止)해 있으므로, 음(陰)이라 한다. 물은 흐르는 것으로 움직여 운동(運動)하므로, 양(陽)이라 한다. 주지하듯이, 우주의 모든 만물은 음양의 조화로 이루어진다. 사람의 경우, 음에 해당하는 여자와 양에 해당하는 남자가 서로 만나야 자식을 낳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음에 해당하는 산과 양에 해당하는 물이 서로 어울려 배합되는 곳에서 혈(穴)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풍수지리의 간단한 원리다. |
3. 형기론(形氣論)과 이기론(理氣論)
산과 물 등 자연의 외적인 모양을 보고 길지를 찾는 것이 형기론이다. 반면에 이기론은 방위와 시간 등의 음양오행 작용을 살펴 길흉화복을 논하는 이론이다. 형기는 외적 형상인 체(體)이고, 이기는 작용인 용(用)으로, 별개일 수 없다. 예를 들어, 사람의 외모를 보고 사람 됨됨이를 판단하는 것을 형기라고 한다면 성격을 판단하여 사람을 보는 것은 이기라고 할 수 있다. 즉 형기는 용(龍), 혈(穴), 사(砂), 수(水) 등 풍수지리의 외적 변화 현상을 우선으로 보는 방법이다. 이기는 용, 혈, 사, 수의 방위를 측정한 다음, 음양오행법(陰陽五行法)을 따져 그 적법여부를 판단하는 방법이다. |
4. 양택풍수(陽宅風水)와 음택풍수(陰宅風水)
풍수지리학은 크게 집과 건물의 터를 잡는 양택풍수와 묘 자리를 잡는 음택풍수로 나뉜다. 양택(陽宅)은 산 사람의 거주지이며, 음택(陰宅)은 죽은 사람의 안장지(安葬地)이다. 양택지와 음택지를 선정하는 방법은 크게 다를 것이 없으나, 양택지가 음택지에 비해 대체로 보국(保局)이크다고 하겠다. 우리나라는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도읍지와 마을 터를 정해 집을 짓는 양택풍수가 발전하였다. 조선중기 이후로는 유교의 조상숭배 사상과 더불어 음택풍수가 성행하였다. 풍수지리하면 단순히 개인의 묘 자리나 잡는 것으로 인식하기 쉬운데, 결코 그렇지 않다. 현대사회에 접어들면서 음택풍수보다 양택풍수가 더 빠른 속도로 광범위하게 발전하고 있다. 특히 도시화된 지역에서는 터 잡기보다는 집의 형태와 구조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양택과 음택은 모두 지기(地氣)의 영향으로 발복(發福)이 나타난다. 음택은 발복의 속도가 느리지만, 여러 자손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준다. 반면에 양택은 그 집에서 태어나거나 성장한 사람, 그리고 현재 거주하는 사람에 한해서 매우 빠르게 영향을 준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
(1) 현대적 의미
묘의 좋고 나쁜 기운이 후손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발음(發蔭), 발복(發福) 또는 동기감응(同氣感應)이라고 한다. 조상과 후손은 같은 혈통관계로 같은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감응을 일으킨다는 이론이다. 동양철학에서는 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새로 생기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존재로, 불변형질(不變形質)이다.” 대략 5,000년전 이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법칙과 일치한다. 뉴우튼의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 발표된 지는 약 300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하면, 동양의 선진적인 우주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온 사람들도 이제 기의 정의에 반박하지 못한다. 현대 물리학과 비추어보면, 그 정의가 같기 때문이다. 각자 고유한 파장(波長)을 가지고 서로 반응하려는 작용을 한다. 작용전이나 작용 후 에너지의 양은 변함이 없다.” 결국 기의 정의와 같다. 오늘날까지 과학분야 전체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성과를 거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측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정량적인 데이터에 기초를 두고 있다. 1808년에 발표한 그의 원자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이론과 동양의 기(氣)를 비교해보면 의미가 모두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너지의 전달은 파장(波長)에 의해 일어나는데, 파장의 크기는 질량에 따라 각기 다르다. 같은 원소(유골)라도 질량(유전인자)에 따라 파장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크기의 파장끼리만 서로 감응을 일으킨다. 마찬가지로 조상의 유골도 자신과 동일한 파장의 유전인자를 가진 자손에게만 전달된다. 이것이 동기감응론의 현대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성인 남자 3명의 정액을 채취하여 3개의 시험관에 넣고 정밀한 전압계를 각각 설치하였다. 그 다음에 이들 남자 3명을 옆방으로 데려가 차례로 전기쇼크를 가했다. 그러자 전기쇼크를 받는 사람의 정액에 부착된 시험관의 바늘도 동일한 시간에 움직였으며, 미세한 전위 차가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전자기적 공명현상이 일어난다고 해석하였다. 이 실험은 텔레비전에도 방영되었다. 이는 풍수지리에서 논하는 동기감응론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실험이라 하겠다. 나쁜 기를 발산하여 자손이 나쁜 기를 받는다는 것이 동기감응론이다. 감수성 예민한 어린이들은 어른들 보다 사물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빠르고 양도 많다. 염색체인 정자나 난자는 거의 100% 조상에너지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어릴수록 많이 받고, 나이가 들면 적게 받는다. 이것이 발음론(發蔭論)의 구체적 해석이다. 그러므로 묘를 쓰고 태어난 자손이 조상에너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고 하겠다. 좋은 기운이든 나쁜 기운이든 자손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 오늘날 좋은 혈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나쁜 자리에 모실 바에야 차라리 화장을 하는 것이 조상유골이나 자손에게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혹자는 풍수지리가 매장을 선호하므로 묘지 난을 가중시킨다고 비판한다. 이는 풍수를 제대로 이해 못하고 하는 소리다. |
(2) 고전적 의미
『청오경(靑烏經)』과 함께 풍수지리 최고의 고전(古典)이라 할 수 있는 『금낭경(錦囊經)』은 진(晉)나라 사람 곽박(郭璞, 276-324년)이 쓴 책이다. 곽박은 천문(天文), 오행(五行), 점서(占筮)에 능한 사람으로, 진나라 사마예(司馬睿)가 황제가 되었을 때 복지(卜地)와 점택(占宅)을 담당한 고위 관리였다. 그는 생전에 풍수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을 내려 풍수지리의 기초를 확립한 인물로 오늘날까지 풍수의 비조(鼻祖) 또는 종사(宗師)로 불려지고 있다. 설명하고 있다. 오기행호지중 발이생호만물(五氣行乎地中 發而生乎萬物 ) 인수체어부모(人受體於父母) 본해득기 유체수음(本骸得氣 遺體受蔭) 경왈 기감이응 귀복급인(經曰 氣感而應 鬼福及人) 시이 동산서붕 영종동응(是而 銅山西崩 靈鐘東應) 그 중 장설의 동기감응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未幾 西蜀秦銅山崩 以日揆之 正未央鐘鳴之日 이 날짜를 헤아려보니, 바로 미앙궁 종이 스스로 울던 그 날이었다. 그러자 동방삭이가 대답하기를 “무릇 구리는 동산(구리 광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기는 서로 감응하기 때문에, 마치 사람이 그 부모로부터 몸을 받는 거와 같은 이치입니다.”라고 하였다. 하물며 귀신에 있어서야 어떠하겠는가!”하였다. 마치 부모의 유해[本骸]가 기가 같은 자손에게 복을 입히는[蒙福] 것과 같은 것이니, 이것이 자연지리의 이치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
(3) 동기감응의 전달 체계와 길흉화복
위와 같은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동기감응은 반드시 일어난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동기감응을 부정한다면 현대 과학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이상 무언가에 반응하려는 속성이 있다. 그 대상은 그와 원자번호와 질량이 같은 동위원소다. 유골도 물질로 존재하는 이상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과 원자번호와 질량이 같은 동기(同氣)의 자손에게 반응한다. 만약 유골이 좋은 환경에서 양질의 지기(地氣)를 받고 있다면 좋은 기를 발산하여 자손에게 전달해준다. 나쁜 환경에 있다면 나쁜 기를 발산하여 자손이 이를 받을 수밖에 없다. 조상 유골을 명당길지(明堂吉地)에 모시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체의 뇌(腦)와 배꼽아래 단전(丹田)이라고 한다. 뇌에 전달되는 기는 판단력, 기억력 등을 정확하게 하게 해준다. 단전에 전달되는 기는 후손을 잇기 위한 생식(生息)에너지로 일부가 쓰인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 장기(臟器)들은 산소와 음식물의 순환계통으로 보면 된다. 그래서 단전에 있는 호르몬을 공급받아 보충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단전의 호르몬이 부족하여 성적인 욕구가 적어질 뿐만 아니라, 성생활이 원만하게 이루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 정자(精子)가 부실하여 아이 갖기가 힘든 경우도 있다. 또 아이를 낳더라도 정신박약아가 나올 수 있다. 자연에는 음파(音波), 광파(光波), 라디오파, 전자기파(電磁氣波) 등 수없이 많은 파동이 있으며, 이에 관련된 에너지를 파동에너지라 한다. 그런데 파동을 전달하는 매체가 힘(F)이 강하면 질량(m)이 많아지고 속도(v)가 빨라진다. 즉 F=mv라는 힘의 법칙이 성립한다. 이로 미루어보면, 조상 유골이 지기(地氣)를 많이 받아 힘이 강해질수록 많은 양의 주변 정보를 가지고 빠르게 동기의 자손에게 전달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파장의 동위원소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소리가 크고 말을 빠르게 하면, 목소리가 작고 말을 느리게 하는 사람보다 파장에 실린 무게 즉 질량(m)이 크고 속도(v)가 빠르다. 기운(F)이 넘치는 사람은 큰소리로 많은 말을 빠르게 할 수 있지만, 기운이 없는 사람은 목소리도 작고 느릴 뿐만 아니라 많은 말을 하기가 곤란하다. 등의 좋은 정보를 가득 담아 빠르게 후손에게 전달해준다. 지기가 약한 비혈지의 경우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를 인력(引力) 또는 중력(重力)이라고 한다. 인력은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이다. 그런데 질량이 큰 물체가 작은 물체의 인력을 흡수한다. 즉 질량이 큰 중심점을 향하여 질량이 작은 것들이 일정한 축을 형성하면서 회전운동을 한다. 마치 지구, 화성 등이 질량이 큰 태양 주위를 회전하는 것과 같다. 이 핵을 중심으로 주변 모든 산과 물의 기운이 모인다. 혈은 그 기운을 흡수한다. 따라서 혈 주변에 길한 사격이나 물이 있으면 혈의 발복도 길해지고, 흉한 사격이나 물이 있으면 혈의 발복도 흉해진다고 보는 것이 풍수지리의 길흉화복론(吉凶禍福論)이다. |
6. 풍수지리의 역사와 서적
예로부터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또는 생활의 편리를 위해서 자기가 생활할 터전을 찾아왔다. 원시사회에서는 좋은 자리를 찾으면 먹고 쉬고 자는데 편리했다. 뿐만 아니라, 적으로부터 자신과 동족을 보존하고 번창시키는데 용이했다. 이렇게 풍수지리는 안전편리하면서 발전 가능한 땅을 찾는데서 발생하였다. 때문에 이론이나 응용면에서 체계를 갖추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2000여 년 전 중국 후한(後漢) 때 음양이치에 통달한 청오자(靑烏子)라는 사람이 풍수지리의 원전(元典) 격인『청오경(靑烏經)』을 저술하여 반포한 것이 풍수지리학의 역사적 기원이 되었다. |
(1) 한(漢)나라 시대와 『청오경(靑烏經)』
중국 한(漢)나라 시대는 조상의 묘지가 후손에게 영향을 준다고 믿어왔다. 후한 장사가 효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우리나라 부족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여러 달에 걸친 장례식을 영광으로 알았고 많은 부장품(副葬品)과 심지어는 순장(殉葬)까지도 행하였다. B.C. 37년 경 주몽(朱蒙)이 이끄는 부여의 일족이 건국한 고구려(高句麗) 역시 후장(厚葬)이 행해졌고 금과 은 등 보배를 부장(副葬)하여 적석총(積石塚)을 만들었다. 옥저(沃沮)에서는 온 가족을 한 곽(槨)에 매장하고 곽 주위에다 미곡(米穀)을 두어 사자(死者)의 식량으로 하는 등 영혼불멸의 사상에 근거한 가족공동 묘지가 행해졌다. 신선이 되었다고 하는 반인반신(半人半神)의 선인(仙人)이라고 전해진다. 문장 한 구 한 구를 비결이나 격언처럼 열거해 놓아, 읽는 것만으로는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난해함으로 인하여 후세의 학자들에게 자유로운 해석의 여지를 제공하였는데, 가장 오래된 책이므로 장경(葬經)으로 존중되었다. 그 후 당나라 사람 양균송(楊筠松)이 주석(註釋)을 달아 해석을 하였다. 원문은 편(篇)이나 장절(章節) 구분 없이 사자일구(四字一句)의 한 문장으로 연속되어 있다. 조선시대 지리과(地理科) 과거시험에는 『청오경(靑烏經)』 『금낭경(錦囊經)』 『호순신(胡舜申)』 『명산론(明山論)』이 4대 필수과목이었다. 그 중에서 『청오경』과 『금낭경』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
(2) 진(晉)나라 시대와 금낭경(錦囊經)
지금으로부터 약 1700년전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즈음하는 중국의 진(晉)나라 때 사람 곽박(郭撲, 276-324년)이 『청오경(靑烏經)』을 인용하여 『금낭경(錦囊經)』을 저술하였다. 그는 책 곳곳에 ‘경왈(經曰)’하면서 『청오경(靑烏經)』을 인용하였다. 이 때문에 『청오경』을 장경(葬經)이라 하고, 『금낭경』은 장서(葬書)라고 부른다. 전체 내용이 간략하고 짧아 모두 2000 여자(字)에 불과하지만, 간결하면서도 군더더기가 없다. 또 다루고 있는 범위가 매우 넓어 풍수고전 중에서 최고로 친다. 풍수의 이론과 실천을 전체적으로 기술함으로서 풍수지리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 장서를 『금낭경(錦囊經)』이라고 하는 어원은 다음과 같다. 그 때마다 홍사는 장서를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어느날 현종이 홍사에게 그 책을 요구하였다. 홍사는 책을 받치면서, 이 책은 세상에서 귀한 책으로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비보서(秘寶書)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현종은 이 책을 비단으로 만든 보자기 즉 금낭(錦囊)에 넣고 다시 장롱 깊이 넣어 보관했다. 이때부터 『금낭경』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주석을 달아 설명한 판본(板本)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지리과(地理科) 과거시험에서 청오경과 함께 배강(背講, 암기)의 필수과목이었다. |
(3) 당(唐)나라 시대
우리나라의 통일신라시대에 해당되는 당나라 때는 모든 문화가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풍수지리학도 마찬가지로 크게 발전하였다. 이 때는 간단한 나경패철(羅經佩鐵)을 이용하여 방위와 좌향(坐向)을 측정하기 시작하였다. 양균송(楊筠松), 장설(張說), 홍사(泓師), 장일행(張一行), 증문적(曾文迪), 요금정(寥金精), 복응천(卜應天) 등 풍수지리학 방면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사대혈법(四大穴法)』, 『도장법(倒杖法)』 등을 지어, 그때까지만 해도 한낱 술법으로 전해 내려오던 풍수지리설을 체계적인 학문으로 정립하였다. 특히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론은 묘나 집의 좌향(坐向)을 결정하는데 사용해왔는데, 오늘날의 풍수지리학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곽박의 장경을 해석하면서 나라의 땅을 화식지지(貨殖之地: 재화가 많이 나는 땅), 용문지지(用文之地: 문사가 많이 나오는 땅), 용무지지(用武之地: 무관이 많이 나오는 땅) 등으로 나누어 자연 환경을 관찰하였다. 또 『대연역분도(大衍曆分度)』를 저술하였다. 이를 청나라 사람 맹천기(孟天其) 등이 주석을 달아 설명하였다. |
(4) 송(宋)나라 시대
우리나라의 고려시대에 해당되는 송나라 때의 풍수지리학은 이기론(理氣論) 방면에 크게 발전하였다. 소강절(邵康節, 1011-1077년)은 하도와 낙서의 도수를 응용한 『방원육십사괘도진(方圓六十四卦圖陳)』을 만들어 산수(山水)의 방향을 측정하여 길흉(吉凶)의 연도를 계산하였다. 이는 이기(理氣) 분야를 하나의 독립된 계통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음(陰).양(陽).강(剛).유(柔)의 4원(四元)을 근본으로 하여, 4의 배수(倍數)로서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풍수지리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송나라 황제 효종이 죽자, 능 선정과 관련하여 후임 황제 영종(寧宗)에게「산릉의장(山陵議狀)」을 보냈다. 조선 풍수지리에 일종의 지침서가 되었는데, 조정(朝廷)에서 풍수를 논할 때 그 내용이 자주 언급되었다. 역시 남송국사이며 전백통의 제자인 추중용(鄒仲容)은 『대리가(大理歌)』를 지었다. |
(5) 명(明)나라 시대
우리나라의 고려 말과 조선 중기에 해당되는 명나라 때의 풍수지리학은 오늘날의 풍수지리학계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에는 협소한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여 폭넓은 수용자세로 연구가 활발하였다. 그 중에서도 구성법(九星法)의 응용으로, 이기론(理氣論) 분야에 새로운 학설이 개척되었다. 또 나경 학설의 발전으로 더욱 세밀한 부분까지 묘 자리와 집터를 측정하여 시간과 공간을 서로 연관성 있게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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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청(靑)나라 시대
우리나라의 조선중기 이후에 해당되는 청나라 때의 풍수지리학은 택일(擇日)에 의해서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조명택일(造命擇日)을 중요시 여기면서 장택론(葬擇論)을 발전시켰다. 원리를 해석한 것으로,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모든 나경패철의 지침서가 되고 있다. 최초의 나경패철은 단지 8개 방위로만 간단하게 사용되다가, 점점 발전되어 24 방위까지 세분되어 명나라 중엽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다 청나라 때에 이르러서 나경(羅經)에 여러 학설을 도입되어 더욱 세밀하고 복잡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
(7)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역사와 서적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풍수사상이 전개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우리 고유의 자생적 풍수와 관련해서, 『삼국유사』에는 신라 4대 왕인 탈해왕(80년)이 집터를 잘 잡아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는 청룡[동], 백호[서], 주작[남], 현무[북]의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다. 현존하는 사찰 등의 지형지세를 미루어 보면, 삼국 초기부터 국가 경영과 국민의 생활 편리에 풍수가 실용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 승려들이 당나라에 유학을 하고 돌아오면서 풍수설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반 대중을 포교하는 방법으로 풍수설을 활용했다. 그 중에서도 도선은 이를 우리의 자생 풍수와 접목하여 풍수지리를 집대성한 것으로 미루어진다. 태조의 「훈요10조」에는 풍수적 사고 관념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2훈, 5훈, 8훈이다. 이들은 대부분 도선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도선의 저술로 알려진「비기(秘記)」에 따라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다. 묘청은 서경천도설을 주장하였고, 공민왕 때 승 보우는 한양천도설을 주장하였다. 신돈은 충주 천도설을 주장했으며, 훗날 나옹선사와 그의 제자 무학대사는 조선 개국을 도왔다. 이성계는 역성 혁명에 성공하자, 정권찬탈의 당위성과 민심수습을 위하여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였다. 이에 음양과를 설치하여 과거시험을 통하여 지관을 뽑았다. 또한 사대부가에서는 풍수지리학을 모르고 행세할 수가 없었다. 선비나 승려들 사이에서도 기인이나 도사들이 많이 나왔다. 민간에서는 풍수설이 신앙화되어 음택이 널리 유행되기도 하였다. 명당을 찾아 부모를 묻어 부귀영달하려는 이기적인 방법이 팽배해졌기 때문에, 묘지를 둘러싼 폐단이 심해졌다. 그리하여 정약용, 박제가 등의 실학자들은 그들의 저서를 통해 풍수의 폐단을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총독부가 중심이 되어 전국의 풍수 자료를 수집하여, 명혈의 지맥을 자르고 정기 맺힌 명산에 쇠말뚝을 박는 등 조선 민중들로 하여금 패배의식에 젖도록 하였다. 그 중에서도 실제로 산천을 돌아보고 전국 각지의 풍수적 길흉을 기술한 『도선비결(道詵秘訣)』, 『옥룡자결록(玉龍子訣錄)』, 『답산가(踏山歌)』, 『무학결(無學訣)』, 『남사고결(南師古訣)』, 『박상희결(朴相熙訣)』, 『나학천비기(羅鶴天秘記)』, 『일지유산록(一指遊山錄)』, 『일이답산가(一耳踏山歌)』, 『두사충결(杜師忠訣)』 등이 대표적이다. 답산가(踏山歌), 만산도(萬山圖) 등 산서비기(山書秘記)가 많이 있다. 이들 중에는 황당무계한 것도 적지 않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관련된 조사를 하였다. 총독부 촉탁 ‘무라야마지쥰(村山智順)’이 보고서 형식으로 조선 풍수설에 대한 방대한 자료집을 책으로 엮은 『조선의 풍수』가 있다. 이 책은 비록 순수한 연구 목적의 책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최초의 풍수설에 대한 전국적인 조사로 오늘날 한국풍수지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서적 또한 많은 주제와 내용으로 발간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