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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桓檀古記)』라는 책

오늘의 쉼터 2008. 6. 1. 17:31

 

 

『환단고기(桓檀古記)』라는 책


   『환단고기』는 네 권의 책으로 이루어져있다.

 환인과 환웅의 역사를 기록한 「삼성기」, 단군조선의 역사가 담겨있는 「단군세기」,

 고구려의 전신인 북부여의 역사를 기록한 「북부여기」, 마지막으로 「태백일사」에는

 상고시대부터 고려까지의 역사가 담겨있다.
   그런데 이 책 속에는 놀라운 역사가 펼쳐진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반만년이 아니라

 일만년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단군조선 있기 이전에 5천 년의 역사가 더 있었다는 것이다. 최초에 환국이 있었고,

 환국의 뒤를 이어 신시라고 불리는 배달국이 있었다.

   그리고 단군조선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 후 고구려의 전신인 북부여, 북부여의 뒤를 이은

 고구려, 대진국이라고 하는 발해, 고려의 역사로 펼쳐진다.  
   특히 상고시대가 찬란하다. 일만년 전 탄생한 최초의 국가 환국. 환국은 3300년 동안

 일곱 명의 환인이 통치했다 한다.

   그 후 신시 배달국은 열 여덟 명의 환웅이 천 오백년 이상 다스렸다고 한다.

   환국과 신시 배달국이 오천년 정도 이어진 후, 마침내 단군조선이 탄생하는데,

 마흔 일곱 명의 단군이 통치했다고 한다.

   『환단고기』의 특징은 우리 민족의 위대성을 강조, 광활한 영토를 기술, 민족의 정체성을 자극한다.

 환단고기에 담겨있는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는 상상을 초월한다.

   삼성기에는 이런한 기록이 있다. '파내류산 아래 환인의 나라가 있는데 천해 동쪽 땅이다.

   그 땅의 넓이가 남북 5만리 동서 2만 여리에 이른다.

  ' 파내류산은 지금의 시베리아 중앙고원에 해당하고, 천해는 바이칼 호수를 나타낸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만년 전에 탄생한  환국의 영토는 아시아를 넘어선다.

    당시 환국은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자랑하던 나라였고,

    이 땅에서 열 두 개의 나라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 나라들 중에서 수밀이국라는 나라가 있다.

    일부에서는 이 수밀이국을 고대 수메르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 주장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켰던 수메르 민족이 우리 민족이었다는 것이다.

   광활한 영토 뿐만 아니라 환단고기에는 눈부신 영웅들이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영웅은 치우천황, 신라시대의 이 도깨비 기와는 치우천황의 얼굴이라고 전해진다.

   배달국의 14대 환웅인 치우천황은 5천 년 전에, 이미 철제무기를 사용했던 인물로 전쟁의 신으로

 전해지고 있다.

    머리는 구리로 두르고 이마를 쇠로 가린 모습이었으며 쇠로 무기를 만들어내니 온 천하가

 두려워하여 치우천황이라고 불렀다.

    중국의 헌원황제가 치우천황과 수십 번을 싸웠으나 단 한 번도 승리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환단고기』는 이런 치우와 싸웠던 중국의 역사도 우리 민족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5대 환웅의 막내아들은 태호복희라고 한다.

 태호복희는 삼황오제 중 첫 번째 인물로 우사라는 관직에 있다가 진으로 갔다.

 태호복희는 중국의 시조로 전해지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가 바로 환웅의 아들이라면 중국의 역사도 우리 민족에서 시작된 것이 된다.

 이렇게 환단고기에는 하늘의 백성인 우리 민족이광활한 대륙을 무대로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며

 활약했던 이야기가 담겨있다.
   『환단고기』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와는 전혀 다른 역사가 기록되어있다.

 일만년 전까지 거슬러가는 역사, 아시아 대륙을 넘어서는 광활한 영토, 전설적인 영웅의  이야기까지,

 환단고기에 담겨있는 우리의 상고사는 눈부시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엔 우리가 전혀 들어보지 못한

 놀라운 일들이 담겨있다.
   한 가지 예를 살펴보면, 가림토 문자다. 왠지 낯이 익은 문자인데, 이것은 환단고기에만 나타나는

 문자로, 이 책에서는 가림토 문자라고 말하고 있다.

 환단고기에는 한글과 꼭 닮은 이 문자가 이미 4천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가림토 문자를 쓰기전에는 태고의 문자인 녹도문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녹도문자의 구체적인 형태는 『환단고기』에 적혀있지 않다.

 이런 내용이 실려있는 『환단고기』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문자를 만든 최초의 민족이 된다.

 더 크게는 최초로 문명국가를 세운 민족이자, 문명을 전파한 하늘의 민족이라고 한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믿기 어려운 내용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솔직히 믿고 싶은 내용이기도 하다.

 이렇게 상반된 마음은 『환단고기』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최근에 『환단고기』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고, 그 열기 또한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고 있다.  


■ 『환단고기』 열풍

   최근 그 어느 때보다도 상고사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대학마다 상고사 동아리가 생기고 있을 정도다.

그 중에서도 단연 최대 관심은 『환단고기』다. 한국사 동호회에서는 『환단고기』와 관련된 상고사에

대해서 토론하는 일이 많다.

  회원들이 자비를 들여 교재를 준비하고 강사에서부터 회원들까지 열띠게 토론에 참여한다.

  동호회의 수준을 넘어서 본격적으로 『환단고기』의 내용을 연구하는 모임들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환단고기』 열풍은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일반인에게도 알려지게 된 것이 1980년대 초반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대중적인 인기는 서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환단고기』를 번역한 책만 해도 열 종류가

 넘고 지금까지 100만 권 이상 팔린 것으로 추정된다.

   『환단고기』뿐만 아니라 몇 년 전부터 우리의 상고사, 고대사 관련서적이 활발하게 출판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책 중에서는 '삼국이 대륙에 있었다' '고려도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책들까지

 등장했다. 심지어는 '고구려·백제·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책들까지 등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환단고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환단고기』에 열광하는가.
   '한배달의 역사천문학회'는 『환단고기』에 기록된 천문현상을 통해서 그 시대의 역사를 새롭게

 밝혀내려고 하고 있다.

   이 학회 관계자에 따르면 "우리의 선조들은 하늘의 천문학에 아주 밝았다.

 그런 기록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환단고기』에 더 많다.

『환단고기』에 감성이란 직책이 나온다. 별자리를 관측하는 독특한 관직이 있었다.

 고구려 시대 천문관측이 있기 전에 우리 조상은 이미 하늘에 주목하였다.

 그런 기록들이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 『환단고기』의 미스테리

   『환단고기』는 『삼성기(三聖紀)』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 등 네 권의 책을 묶어서 한 권의 단행본으로 만든 책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서 삼성기는 상,하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다섯 권의 저자는 각각 다르고, 저자들이 살았던 시대도 신라와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틀린다.

 이 저자들 중에는 이암과 이맥, 범장처럼 다른 사료에서 행적이 확인되는 인물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단군세기』와 『북부여기』 『태백일사』를 썼는 지는 다른 사료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저자들 중에는 다른 사료에서 그 행적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도 있어서 실존 인물인지

 확실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저자들이 썼다는 책들이 남아있지 않는데 1911년에 네 권의 책을 한 권으로 묶여서

『환단고기』라는 단행본이 나왔다.
   이 책의 범례(凡例)에는 '신시개천 5808년 곧 광무 15년 신해 5월 광개절날에 태백 유도 선천 인경

 계연수가 묘향산 단굴암에서 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1911년 네 권의 책을 엮은 사람은 계연수(桂延壽)다.

 그리고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필사한 장소는 묘향산 단굴암이다.

 그런데 계연수가 펴냈다는 『환단고기』의 원본은 남아있지 않다.

 이 책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9년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떻게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일까.
   재야 사학자 송호수씨는 줄곧 『환단고기』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데,

 1979년에 인쇄된 최초의 영인본을 가지고 있다. 20년 가까이 환단고기를 연구해온 그도

 원본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계연수에 대해서도 소문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계연수는 애국독립투사다. 왜정의 감시가 심하니까 약초꾼으로 위장하여 주로

 묘향산 단군굴에서 지냈다.

 일설에 의하면 1920년 왜놈들에게 잡혀 처형 당했는데 압록강에 그 시체를 던졌다고 한다."


■ 전설적인 인물인 계연수의 행적

   전설처럼 내려오는 계연수의 행적을 찾아보기 위해서 수안계씨 종친회를 찾았다.

족보를 샅샅이 뒤져서 계연수의 이름을 찾아보았지만 끝내 확인할 수 없었다.

종친회 회장에 의하면 "선대가 일찍 해외로 나갔거나, 족보를 만들 때 연락이 안되면 족보에

오르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현재로서 계연수의 행적을 더 이상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계연수가 펴냈다는

『환단고기』서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서 계연수가 어떤 사람인지 추정해보기로 했다.
   『환단고기』범례에는 '모두 해학 이기 선생의 감수를 거치고, 내가 정성을 다하여 옮겨 적었다.

 또 홍범도, 오동진 두 벗이 자금을 마련하여 인쇄에 부쳤다'고 기록 되어 있다.

 먼저 환단고기를 감수했다는 이기는 한말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애국계몽운동가였다.

 책을 인쇄하는데 자금을 댔다는 홍범도는 간도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했던 독립운동가였다.

 홍범도와 함께 자금을 댔다는 오동진 역시 간도에서 활약한 독립투사였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독립운동가들이자, 대종교와 관련있는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계연수도 대종교도이자 독립운동가였을 가능성이 높다.

 대종교는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망실된 나라를 회복하는 중심에 단군을 두고 역사관을 표출한 종교였다.

 그런 측면에서 『환단고기』『단기고사』등이 발행된 것으로 보여진다.


■ 계연수의 제자 이유립

   그러나 환단고기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70년 후. 이유립이란 인물이 공개한다.

 원본이 전하지 않는 점, 그리고 70년 후에야 책이 나타난 점 때문에 환단고기의 편자는 계연수가 아닌

 이유립이라는 의심이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그러나 이유립은 이미 사망한 상태다. 그는 어떻게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한 것일까.

 이유립은 단군사상을 연구하는 '단단학회'의 회장을 지냈다.

 단단학회에서는 계연수도 전임 회장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 인연 때문에 계연수의 『환단고기』를 제자인 이유립이 펴냈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유립의 부인이 단단학회를 지키고 있다. 부인은 이유립이 평생 책을 읽고 글을 썼던 학자였다

고 증언했다. "우리 뿌리와 역사를 찾자. 우리나라를 찾아서 우리 세상을 찾자는 뜻으로 살으신 분이다."

이처럼 우리의 뿌리, 역사찾기를 평생 소원했던 이유립은 생전에 많은 책을 썼다.

 그리고 그런 이유립의 글 중에는 『환단고기』와 비슷하거나 같은 내용이 많이 발견된다.
   실제로 이유립은 생전에 『환단고기』를 번역해서 자기 나름대로 책을 내려고 했다고 한다. 『환단고기 평주』라는 책은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풀이해 놓은 것으로, 이유립은 이것을 책으로 펴내기 직전에 사망했다고 한다. 취재 중에 또 한가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유립이 환단고기 원문을 직접 수정한 흔적이다. 1979년에 펴낸 『환단고기』 중에는 정오표(正誤表)가 달린 책이 있다. 정오표란 책에서 틀린 글자나 잘못된 내용을 고쳐서 추가한 것이다. 이 정오표의 글씨는 이유립의 글씨가 분명했다. 이것은 이유립이 환단고기의 내용을 어느 정도 수정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1979년, 이유립이 세상에 공개한 『환단고기』는 당시엔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환단고기』가 주목받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1982년에 일본에서 일본어 번역본이 나오면서부터였다.


■ 일본 천황가의 뿌리를 밝히기 위해서 일본인이 『환단고기』를 일본어로 번역

   일본어 번역본은 신국민사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가지마 노보루가 펴낸 것이다. 이것이 국내에 역수입되면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가지마 노보루는 본래 변호사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환단고기를 번역하게 되었을까. 평소 한국과 중국에서 고서적을 수집해온 그는 1979년, 한국에서 『환단고기』 영인본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영인본을 입수한 경위나 그것을 번역한 이유에 대해서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다가, 잠깐 이런 대답을 했다.

   "나는 『환단고기』를 이해할 수 있다. 거짓이 아니고 진짜 책이기 때문이다. 진실의 역사를 아는 혼이 생기면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가지마 노보루가 이해한 진실은 『환단고기』가 일본 천황가의 뿌리를 밝히는 책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환단고기』를 통해서 동양 역사의 근원을 파악했는데, 일본의 신도가 본류이고 단군은 지류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책이 국내에 들어와서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그 후 한국에서는 가지마 노보루의 해석과는 다른 독자적인 번역본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 사료(史料)로 인정 받지 못하고 있지만 『환단고기』에는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실려있다.

   이처럼 『환단고기』가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수수께끼가 한 두가지가 아니다. 1911년 계연수가 처음 필사한 원본이 사라진 점, 그 후 70년이 지나서야 이유립에 의해서 세상에 공개되는 점, 그리고 1979년 이유립이 펴낼 당시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가 일본어로 출판하면서 국내에서 주목받게 된 점 등. 이런 미스테리한 부분 때문에 『환단고기』를 사료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이렇게 세상에 나오기까지 과정이 모호하기 때문에 책의 가치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지만, 『환단고기』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것은 이 책에 사료로서 검토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다. 환단고기에는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실려있습니다.
   단군에 대한 기록이 최초로 실려있는 책은 『삼국유사』로 알려져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단군에 대한 기록은 아주 짧고 압축적이다. 단군이 고조선을 통치한 기간이 1500년이며 수명은 1908세라고 나온다. 그런데 『환단고기』에는 2천 년이 넘게 지속된 고조선을 한 사람이 통치한 것이 아니라 47명의 단군이 통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47대 단군의 이름과 재위기간, 치적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구체적인 것까지 확인하기 어렵지만 단군을 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왕을 나타내는 호칭으로 바라본 점, 그리고 고조선을 수십 명의 단군들이 통치했다고 본 점은 눈여겨볼 만한 주장이다. 이렇게 환단고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근거가 발견되고 있다. 과연 어떤 것인지 살펴보겠다.


■ 『환단고기』에 나타나는 천문과 오성취루

   『환단고기』의 단군조선에 관한 기록에는 다양한 천문현상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오성취루 현상이다. 오성취루란 목성과 화성, 토성, 금성, 수성이 나란히 늘어선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이러한 장관이 단군조선 때 나타났다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있다. 최초로 이 기록에 주목한 사람은 서울대 천문학과의 박창범 교수. 그는 단군조선 시대의 천문현상을 과학적으로 검증한 논문을 발표했다. 천문현상을 추적해가면 그 현상이 나타나는 시기는 물론 관측자의 위치도 알 수 있기 때문에 연대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오성취루 현상은 서기전(BC) 1733년에 나타난다. 천문관측 프로그램에 입력해본 결과, 1년 전인 서기전(BC) 1734년 7월 13일 초저녁에 다섯 개의 별이 모이는 것을 볼 수 있다. 1년의 오차가 나지만 천문학계에서는 거의 정확한 것으로 보고 있다. 천문현상은 과학이다. 연도, 날짜를 입력하면 행성의 위치가 표시된다. 기록과 오차가 거의 안난다. 천문현상은 잘 짜여서 움직이는 시스템이므로 그 당시 기록이 맞는다.


■ 『환단고기』에 나타난 고조선의 영역

   또 한가지 『환단고기』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고조선의 영역이다. 『환단고기』의 기록을 토대로 고조선의 영역을 추정해보면 지금의 북경에서부터 만주의 전지역과 한반도 전체를 포함한다. 한 시대의 영토를 추정하는 방법 중에는 문헌에 나타나는 기록과 함께 그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는 지역을 참고로 추정하는 방법이 있다.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의 대표적인 무기로,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지역을 살펴보면 고조선의 영역도 좀 더 확실하게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비파형동검은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됐다. 고조선의 대표적인 청동무기인 비파형동검이 지금의 북경근처에서부터 만주 전지역, 한반도 남부해안까지 출토되었다.
   청동기 시대 청동 무기는 당시 지배층의 독점물이다. 그래서 중앙에서 만들어서 공급했기 때문에 같은 청동기가 통치되는 지역은한 통치집단에 의해서 통치됐다는 것을 말해준다.이런 자료를 보면 고조선의 영토는 지금의 북경에서 만주 전지역과 한반도 전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비파형 동검의 출토지역과 『환단고기』의 고조선 기록을 비교해보면, 지금의 북경에서부터 만주, 한반도 전체를 포함하고 있어 상당부분이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

   『환단고기』의 사료적인 가치를 알려주는 또 하나의 근거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단서는 바로 수서령이다. 수서령이란 조선시대 세조와 예종, 성종 때 8도 관찰사에게 명령해서 옛부터 전해져온 희귀서적을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일이다. 지금 이 서적들은 전하지 않지만, 우리 역사의 자부심을 담고있는 책들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러한  수서령이 내려진 책들 중에서 『환단고기』에 실려있는 책과 제목이 일치하는 것이 발견된다. 『삼성기』가 바로 그것이다. 조선시대, 당시 이러한 책들은 왜 거두어들였을까. 그대로 두면 역사관이 문제가 되고 중국에서 의의를 제기할 우려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를 생각해서 이런 책을 비밀리에 가두어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수서령의 대상이었던 책들 중에서 『환단고기』에 실려있는 책 제목이 나타나는 것은 1911년,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펴낼 당시, 옛부터 전해지는 책들을 있었고 그것을 참고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볼 때 『환단고기』는 그냥 무시하거나 버려둘 수 없는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대부분 『환단고기』를 사료로서 가치가 없다고 평가한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책의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먼저 『환단고기』를 이루는 다섯 권의 책의 저자들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사료에서 이름이나 행적이 발견되는 저자들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환단고기』 말고는 그 책을 썼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1911년에 다섯 권의 책을 묶어서 『환단고기』라는 단행본으로 펴냈다는 계연수에 대해서도 그가 펴낸 원본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마지막으로 70년 후에 계연수의 제자인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공개한 것도 납득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책의 출처가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사료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또한 『환단고기』에서는 찬란한 역사를 강조하다보니 지금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기록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단군조선 시대의 인구다. '호구를 조사해보니 모두 1억 8천만 구였다. ' 『환단고기』에는 단군조선시대 호구가 1억 8천만구, 인구는 약 9억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3세기에 편찬된 『삼국지 동이전』에는 만주부터 한반도 남쪽까지 당시 인구가 140만 명이라는 통계가 있다. 고구려, 백제 두 나라 인구가 725만명이다. 조선시대 각종 인구통계를 보면 천만을 넘지 못했다.
   『환단고기』가 사료적인 가치가 없다고 보는 또 하나의 근거는 이 책이 역사책보다는 경전에 가깝다는 것이다. 특히 『태백일사』의 <삼신오제본기>와 <소도경전본훈>에서는 종교적인 경전의 색채가 강한 대목이 많다. <소도경전본훈>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천제님이 가라사대 너희 5가와 중생들아! 저 푸른 것이 하늘이 아니며, 저 까마득한 것이 하늘이 아니니라. 하늘은 얼굴도 바탕도 없고 처음도 끝도 없으며, 위아래 사방도 없고 겉도 비고 속도 비어서, 어디나 있지 않은 데가 없으며 무엇 하나 싸지 않은 데가 없느니라.'
   이 『태백일사』의 <소도경전본훈>에는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실려있다. 이러한 천부경는 대종교의 핵심교리이고 삼일신고는 대종교의 경전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단고기』를 역사책으로 보기에는 종교적인 색채가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환단고기는 내용 하나하나까지 검토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편찬자가 가필한 흔적이 나타나는 점, 다른 문헌과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점, 책의 성격이 불분명하다는 점 등 때문에 사료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 단군을 신화로 볼 것인가 역사로 볼 것인가.

   『환단고기』를 둘러싸고 진위논쟁, 가치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최근 상고사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우리 상고사의 화두는 단연, 단군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이 단군을 둘러싸고 신화로 볼 것인가, 역사로 볼 것인가라는 논란이 새롭게 일고 있다. 이렇게 단군에 대해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하는 것은 『환단고기』를 둘러싼 논쟁과도 비슷한 면이 많다. 이러한 환단고기 논쟁의 바탕에도, 상고사 열풍의 핵심에도 단군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단군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인식이 나타난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교정에 세워진 단군상의 목이 잘리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표면적으로 이 사건은 종교계의 갈등으로 비쳐졌다. 그러나 이 사건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은 단군에 대한 혼란된 인식 때문이다. 단군상을 세운 단체는 민족정신을 회복하고 통일을 기원하는 목표로 전국의 학교에 단군상을 건립하는 운동을 펼쳐왔다. 그러나 단군상을 건립하는 것에 대해서 우려하는 목소리도 컸다. 단군이 역사적인 인물로 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단군상을 건립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단군에 대해서 이렇게 신화와 역사라는 두 가지 시각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단군을 바라보는 시각이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금세기 초만 해도 단군에 대한 인식은 비교적 통일되어 있었다. 그것은 1900년대 초반에 발행된 역사 교과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교과서에는 고조선을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로, 단군을 국조로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고조선 역사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이 교과서에는 단군의 초상화는 비롯해서, 고조선과 삼한의 지도가 실려있다. 1900년대 초까지 단군에 대해 뚜렷한 역사의식이 나타나는 것은, 조선시대까지 단군은 역사적인 실존인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조선의 역대 왕들이 단군을 국조로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단군을 모신 성전은 평양 숭령전이 있었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단군을 모셨다.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 강화도 마니산 첨성단의 제천행사. 태백산에서의 제사 등 조선왕조는 명백하게 단군조선의 후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단군을 모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일제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우리의 상고사를 말살했다.

   조선까지만 해도 역사적인 존재였던 단군이 신화로 바뀌는 결정적인 계기는 일제의 상고사 말살 정책 때문이다.

일제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우리의 역사를 축소하는 일이었다. 일본의 역사가 기원 2600년으로 되어있는데 우리는 5-6천년이다. 반도 안되는 역사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무리다. 후대에 역사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자신들 역사의 우수성을 확보해야 했다. 그를 위해선 우리 역사의 우수성을 말살해야하므로 그에 관련된 기록을 다 없애 버렸다. 일본에서는 우리 역사, 단군조선 생략하고 바로 상고 삼한으로 들어간다. 그 뒤를 삼국시대, 고려, 조선시대, 그리고 일본의 식민정책사로 역사를 꿰어맞춘다.
   이렇게 우리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서 일제는 조선사편수회 사업이란 이름으로 서적을 색출한다. 1910년 11월부터 14개월 동안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책이 무려 51종 20만권이 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 거두어들인 책은 모두 사라졌다. 그 후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인식은 신화로 축소됐고 아직까지 완전하게 역사로 인정받고 있지 못한 상태다.


■ 잃어버린 상고사 회복운동

   최근 잃어버린 상고사를 회복하고 신화로 머물러 있는 단군을 역사로 받아들이려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의 중심에 시인 김지하씨가 있다. 김지하 시인은 "기초적인 상고사, 고조선사를 열어야 그 안에 들어있는 문화적인 자산, 신시, 화백, 풍류, 유목문화의 첫 고대국가 등 상고사에 대한 비젼, 꿈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초입에 단군조선을 막아버리니까 상상력을 자극할 수 없다. 그것을 열자는 것이다."
   이런 상고사회복 운동에 대해 한쪽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민족주의, 국수주의라는 비판이 일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도 사실이다.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그리고 학문적인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단군은 역사와 신화 사이에서 끊임없이 표류할 것이다. 마니산 참성단은 개천절 때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렇게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단군을 모셨던 곳은 여러 곳이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단군은 실재했던 역사로 살아있었던 것이다.
   최근 일고 있는 『환단고기』 열풍의 이면에는 이처럼 단군과 고조선을 역사로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의 열망이 잠재해있다. 그렇기 때문에 1980년대 『환단고기』가 알려진 이후,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며 끊임없이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 『환단고기』 열풍  

   일반인들의 이런 관심과는 달리 학계에서 『환단고기』를 대하는 반응은 냉담하다.

사실 『환단고기』에 대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학자들의 의견을 듣기가 어려웠다. 학문적인 접근이 불가능하다거나 접근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렇게 환호와 비난이 엇갈리는 책, 『환단고기』를 둘러싼 이런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지 생각해봤다.
   『환단고기』를 취재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학계의 도움을 받기가 힘들었다. 그동안 도움을 주었던 학자에게서 제작을 우려하는 팩스가 날라들기도 했다. 학계에서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학자들이 『환단고기』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였다.
   『환단고기』를 신봉하는 재야사학계에서는 이 책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기존 학계에 대해서 불만을 감추지 않는다. 『환단고기』를 부정하려면 육하원칙을 제시해야지 자기 종교성이나 학파와 안맞는다고 부정하는 것은 학자다운 자세가 아니다라고 비판한다.
   이런 학계와 재야사학계 간의 대립은 이미 1970년대 상고사 파동에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재야사학계에서는 단군을 역사상의 인물로 규정하고 기존의 국사학계를 일제 식민주의 사관파로 비난한다. 일명 단군파동이라고 하는 이 사건은 1978년에 법정으로까지 비화된다.그리고 1980년대 『환단고기』가 등장하면서 양쪽의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다.
   『환단고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학자들에게 몇차례나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했고 전화상으로 간단하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은 전화 녹취 내용이다.
   "환단고기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인사들의 태도, 이런 것도 하나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주장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비판하지 않고 식민사관에 물들었다고 매도하고 심지어는 인신공격까지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학계에서 환단고기를 본격적으로 연구하지 못하는 것은, 이 책에 대해서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연구와 학문적인 접근이 어렵다고 대답했다. 다음은 정영훈 교수와 노태돈 교수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환단고기는 성립되고 공개되기까지 과정이 매우 문제가 많은 책이다. 국사연구와 국사교육이 우리사회 구성원에게  민족적인 정체성과 자긍심을 심어주어야한다는 논리는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가치가 검증되지 않은 자료를 가지고 그런 목적에 접근하는 것은 기초공사없이 고층빌딩을 세우는 것처럼 위험하고 무모한 태도다. - 정연훈"
   "환단고기는 한마디로 우리 상고사를 복원하는데는 자료적인 의미가 없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후에 쓰여진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 책을 통해서 우리의 상고사를 복원할 수 없다. 단 이 책이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후에 우리 선인들이 우리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려고 했는가라는 당시인들의 역사인식을 파악하는데는 유효한 자료가 될 수 있다. - 노태돈"

   『환단고기』에 대해 학계에서는 학문적으로 접근하는데 어려움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그러나 『환단고기』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그들이 열광하는 것은 실증적인 역사가 아니라 믿고 싶은 역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상고사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상황에서 나타난 갈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환단고기 열풍은 학계와 재야사학계 양쪽에 상고사 연구라는 과제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 지금 이 책의 의미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고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지금 바로 환단고기를 사료로서 채택하는 것은 어려울 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 책은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참고가 되거나,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고사를 연구하고, 역사의 지평을 넓히는 적극적인 자세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일본만 해도, 신화로 알려진 그들의 상고사를 연구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도 학계나 재야 구별없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서 끊임없이 역사로 확인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상고사는 민족의 보고이다. 어쩌면 미래의 씨앗이 될 값진 자신이 아직 완전하게 개척하지 못한 그 영역에 숨어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환단고기』가 촉발시킨 상고사에 대한 뜨거운 관심만큼은 되새겨 봐야 하겠다. 그런 관심이야말로 상고사에 대한 대장정의 출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대한 자료

    『환단고기』는 1911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0년 일본인에게 피살된 계연수(桂延壽)가 기존의 『삼성기(三聖紀)』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의 4종류 책을 하나로 묶은 다음 이기(李沂)의 감수를 받아 1911년 편찬한 책이다.

계연수는 제자 이유립에게 다음 경신년(1980)에 이 책을 세상에 공개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삼성기』신라 진평왕 때 안함로와 원동중이 각기 지은 책으로 단군시대 이전 즉 한민족의 기원부터 단군조선의 건국과 역사를 다루었다. 『단군세기』는 단군시대의 연대기로서 1363년 이암이 쓴 책이다. 『북부여기』는 단군계의 한 갈래인 북부여의 연대기로서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이 저술한 것이다. 『태백일사』는 단군시대 이전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평론적 연대기를 기록한 것으로 『환단고기』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환단고기』와 내용이 일치하는 『규원사화(揆園史話)』는 고려 공민왕 때 이명(李茗)이 쓴 『진역유기(震域遺記)』를 보고 쓴 책이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한국의 역사는 인류의 4대문명 이전까지, 그 영역은 터키와 발트해안까지 넓어지며, 동양사에서 중국 한족에 대한 조선족의 우월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학계 일각에서는 이를 위서(僞書)라고 매도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측에서는 이런 비뚤어진 역사인식 태도는 식민사관과 다를 것이 없다고 비판한다. 고대사에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현실에서 그나마 남아있는 사료나 자료를 비판만 할 일이 아니다.


■ 신화없는 민족은 없다. 

   역사는 신화로부터 비롯된다.

어떤 국가나 민족을 막론하고 역사의 시작은 신화나 전설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도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신화로부터 서술되고 있다. 2004년 올림픽이 열렸던 아테네는 신화의 도시다. 고대 올림픽을 신들의 제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고대사(古代史)의 기점은 신화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통례다. 그러므로 신화 연구는 곧 고대사 연구가 된다.
   고대사가 신화로 시작되는 것은 당시의 과학문명으로 천지가 생성되고 삼라만상이 존재하게 되는 이유를 근본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오늘 날의 첨단 과학도 마찬가지다. 우주만물의 생성에 대한 것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어쩌면 우리 인간들에게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신비일지도 모른다.
   신화란 우주 만물에 대한 가장 원초적이며 기본적인 설명이라 할 수 있다. 내용이 허무맹랑하고 황당무계하다고해서 부정하면 곤란하다. 신화의 본질적인 속성이 본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용이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라면 이는 이미 신화가 아니다. 신화없는 민족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 신화는 인정하면서도 우리나라의 신화는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10월3일을 개천절(開天節)로 정하고 국가공휴일로 지정했음에도 단군신화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천지 만물이 생성되어 기록으로 남겨지기 시작하는 시대까지를 신화의 시대라고 한다. 문자가 생겨 기록으로 남겨지는 시대를 역사의 시대라고 한다. 신화는 실재로로 존재했던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일 수 있다. 왜냐하면 사건이 발생했던 지점이 구체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문자가 없는 상태에서 오랫동안 구전된 것을 후에 기록했다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최근 중국은 고구려사를 자기들의 역사로 만들려고 한다. 이에 격분하여 감정적으로만 대처할 일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상고사를 부정하면 그들의 논리에 대응할 수 없다. 없는 상고사도 만들어 자국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판에 우리는 있는 상고사도 부정해서는 안되겠다. 이러한 측면에서 『환단고기』는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항하기 위한 중요한 사료로 활용할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