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음택지

현대 풍수지리가 청오 지창룡(1922-1999년)

오늘의 쉼터 2008. 6. 1. 16:11

현대 풍수지리가 청오 지창룡(1922-1999년)

< 이 내용은 경기도 시흥시청 홈페이지(www.shcity.net) "시흥의 인물"에서 퍼온 글>

풍수지리가. 호는 청오(靑奧),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아버지는 지태현(池泰賢)이며,

어머니는 김해 김씨로 김간난(金干蘭)이다. 시흥시 군자동 354 구지정마을에서 출생했다.

구지정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선생은 군자공립보통학교(현 군자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 본으로 건너가

동경에서 공업계통의 학교를 졸업하자 가와사끼에 있던 일본 강관 주식회사 공장의 용광로 책임자로 취직했다.

그곳 공장에서 능력이 인정되어 24세의 젊은 나이로 평 양제철소의 전권 소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어느 일요일 오후 공원 에 나가 산책하던 선생은 자신의 일생을 결정짓게 만든

동포와의 우연한 만남을 갖게 된다.

 모모야마(桃山) 공원의 명치릉(明治陵)을 지나던 선생은 어떤 노인이 능 부근에서 이상한 패철을 들고서

주위 형세를 살펴보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뜻밖에도 그 노인은 한국인이 어서 동포인 선생에게 아주 흥분된 어조로 자신이 느낀 천리(天理)를 말하기

시작했다.

 "이 일본제국주의는 곧 망하게 돼. 이것은 천명(天命)이야. 세상을 거역하려 들었으니

망하는 것은 당연한 거지.지군, 일본 황실이 이곳에 명치릉을 묘터로 썼기 때문에 3대째를 못 넘기고

한번 주저앉게 될 운명이야. 전쟁에서 패할 날이 멀지 않았어."

선생은 노인의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러한 기억을 지닌채 선생은 24세 때인 1945년 5월 평양제철소 전권 소장으로 부임하기 위해

관부 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부산에 도착하자 평양으로 가지 았고 곧장 합천 해인사로 갔다.

그곳 스님의 도움으로 해인사에 소속된 깊은 암자에 칩거할 수 있었다.

선생은 이곳에서 역리학(易理學) 공부에만 전념했다.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읽어 나갔다.

특히 역리학과 관계되는 서적이면 이를 몇번이고 되풀 이해서 읽고 또 읽고 하여 거의 욀 정도가 되었다.

당시에는 누구의 가르침도 없었다.

되풀 이하여 반복되는 독서를 통해 이처럼 하나 둘씩 스스로 깨닫기 시작했다.

선생의 암자생활은 1백 15일 만에 끝이 났다.

 우리 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암자에 있는 동안 어려운 한학을 독학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갔다.

바로 이 시기가 선생이 역리학에 관한 이론적 철학적 기초를 확립하는 중요한 기간이었다.

암자에서 나온 선생은 경북 봉화에서 공부하다 1년 뒤 경기도 이천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한동안 농사일에 종사했다.

29세가 되던 해(1950) 3월, 조만간 큰 변란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감한 선생은 부인과 함께

이천에서 밀양으로 옮겼다.

휴전(1953) 뒤 서울시 중구 을지로 7가 18에 사무실("지 청오")를 열고 사망 직전까지

그곳에서 활동을 하였다.

선생이 풍수지리를 터득한후 관계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한국전쟁 직후였다.

당시 정부에서는 예기치 않았던 동족상잔간의 한국전쟁으로 전몰한 국군장병들이 때로는

이름없는 넋이 되어 전국 곳곳에 산재하였던 것을 한 곳에 안장하기 위해 국군묘지 설립에 대해

후보지를 물색, 선정키로 계획을 세웠다.

당시 후보지로는 서울 우이동, 덕소, 말죽거리, 소사(현 부천시), 팔당댐 주변 등이었다.

전국에 내노라하는 풍수지리가들이 동원되었다.

이때 선생은 세밀한 풍수학적 고찰, 거리상 여건 등을 참고로 하여 지금의 위치인 동작동(안)을

제안하여 최종 결정되었다.

5ㆍ16쿠데타 거사일을 앞두고 초조해진 박정희 장군이 선생을 찾은 것은 1961년 5월 14 일이었다.

 "난 박정희라는 사람입니다. 육군소장으로 있습니다."

선생은 박정희라는 이름을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났다.

박 장군의 말이 계속됐다.
"비밀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적어도 며칠간은 ???. 그럴 자신이 있습니까?"
"손님의 신상 기밀을 남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 지관들에겐 천기를 누설하는 것과 같은 것 입니다"

비로서 박 장군의 입이 열렸다.

 "그럼 말하겠습니다. 성공할 수 있겠는가, 실패할 것인가만 말씀해 주십시오."

묵묵히 박 장군의 말을 듣고 있던 선생은 결연한 표정으로 "성공합니다." 긴 말이 필요 없었다.

 "고맙습니다." 선생은 중간에 박 장군의 말을 가로막으며 "이젠 박 장군과 저는 같은 운명입니다.

성공할 것인즉 안심하십시오. 내가 비밀을 발설해 장군의 성공을 거스르지는 않겠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이틀이 지난 5월 16일 선생은 5 ㆍ16군사 쿠데타 소식을 들었다.

주변에서는 갑작스러운 정치정세 변화에 모두들 놀랬지만 선생은 평정심 그대로였다.

박 장군의 집권은 선생으로 하여금 역술과 지관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5ㆍ16쿠데타의 성공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 선생은 그 후 1970년대 중반까지

공적인 일이나 사적인 일 등으로 청와대 내에서나 밖에서 박 대통령을 자주 만날 기회 를 갖게 되었다.

그 뒤 영부인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접한 선생은 술집 에서 정신없이 취해가지고는

곧장 고향인 시흥시 군자동 구지정으로 향했다.

이때 청와대에 서는 국장 준비 때문에 관계자들이 선생을 찾기 위해 선생의 사무실과 서울전역에 수소문을 했다.

 다음날 새벽에야 고향집으로 연락이 닿아 아침 일찍 선생은 부랴부랴 청와대로 들 어갔다.

박대통령은 김종필(金種泌), 육인수(陸寅修, 육영수여사 오빠)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묘지선정과 장례절차에

대해 몇 마디를 물었다. "지선생, 고인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명당에 안장해 주십시오."

이야기를 끝낸 선생은 그 길로 동작동 국립묘지로가 육여사를 안장할 명당자리를 찾았고 하관할 계획까지

세워 놓았다.

본래 계획으로는 대전 부근에 또 하나의 국립묘지를 만들어서 두 사람의 묘터를 그곳에 만들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계획만 수립해 놓은 상태여서 생각보다 먼저 육여사가 운명하여 어쩔 수 없이 동작동 국립묘지를 택했다고 한다.

육여사가 서거한지 5년 뒤인 1979년 10월 26일에 박대통령의 비보를 들은 선생은

그 충격으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다음날 새벽에 청와대에서 찾아온 사람과 집에서 만났다.

차디찬 새벽 공기를 마시며 청와대에 들어간 선생은 김계원 비서실장과 김종필, 육인수씨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다.

김종필, 육인수씨와 장례절차를 협의하고 오후에는 동작동 국립묘지 를 찾아갔다.

이미 묘자리 토질검사를 마치고 육여사 곁으로 모시기로 한 상태였다.

선생이 보기에는 현위치 오른쪽에 절이 있었는데, 그 뒷편에 자리가 있었으나

그쪽이 더 명당이라고 주장을 하면 육여사묘를 이장하든지 두 분을 따로 모셔야 했다고 한다.

정부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도 선생은 묘터를 잘 잡는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져

경무대 출입을 하며 이승만 대통령과도 면담한 일이 있었다.

1965년 7월 19일에 이승만 대통 령이 90세를 일기로 하와이에서 서거하여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 대통령의 묘지도 선생이 잡아준 것이다.

이 묘터는 한강물을 눈앞에 굽어보는 양지바른 언덕에 위치해 있다.

뒤로는 명산인 관악산 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앞의 시계가 툭틔어 있는 곳에 위치한,

좌청룡 우백호를 제대로 갖춘 자리로 알려졌다.

선생은 이처럼 대통령의 묘자리를 잡아준 외에도 지난 40여년간 수많은 유명.무명인사들의 묘터를 잡아주었다. 전 연세대 총장 백낙준(白樂濬) 박사와도 오랜 교분을 유지하며 묘터를 잡아 주었으며,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이병철(李秉喆) 묘, 이병철의 차남인 새한미디어 회장 이창희(李昌熙) 묘, 전 법무장관 홍진기(洪璡基) 묘,

전 국무충리 이범석(李範奭) 묘,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 부친 묘, 전 국회의장 이재형(李載灐) 묘,

버마 랭군 사태 때 희생된 장관들의 묘터도 잡아주었다.

선생은 비록 유명인사들의 묘터만을 선정해 준것이 아니었다.

동작동 국립묘지 외에도 대전 국립묘지를 비롯하여 대전 정부청사, 한강종합 개발도 자문에 응했다고 하나

실제는 선생의 영향력이 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밖에도 고속도로를 내거나 공단입지를 선정할 때도 선생이 풍수지리에 따른 역리학적 접근의 의견을 제시해

줬다고 한다.

1945년 `풍수`에 입문한 선생은 한편으로는 학업에 연마하여 이 해 일본 W.U.M 정치대 를 졸업한 뒤

1980년에 UNION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밖에도 기관ㆍ 단체 등에서 많은 사회활동을 했다.

즉 47세에 한국역리인협의회 부회장을 시작으로 2년 뒤 한국역리학회 부회장,

51세에 국방부 국립묘지 자문위원, 한국역술인협의회 회장겸 한국 역리학회 창립회장,

54세에 월간 『역우지』 발행인, 이듬해 국방부 국립묘지 고문,

58세에 일본 유니온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 취득,

59세에 평화통일협의회 운영위원, 한일문 화친선협회 상임고문,

63세에 동경 W. U. M 정치대학 객원교수, 국제역학학술대회 창립회장,

64세에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중앙이사,

67세에 시흥군지 집필위원,

69세에 남북코리아미술교 류협의회 이사,

70세에 안양시지 집필위원,

71세에 충주지씨 중앙총친회 회장겸 족보편찬위 위회장 등을 역임했다.

상훈으로는 1985년에 국민포장을 수상했다.
저서에 『한국지리총람(1977)』과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이여(1998)』가 있다.

여가에 취미로 익힌 글씨와 그림 솜씨가 이미 아마츄어의 경지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들을 만큼

서화에 일가를 이루었다.

선생은 슬하에 4남 3녀를 남겨둔 채 후두암으로 인하여 78세를 일기로 1999년 11월 10 일 건국대

서울병원에서 운명하여 5일장으로 이 해 11월 14일 고향의 후배인 군자동 구지 정마을 주민들에 의해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옥계리 군자봉 아래에 `옥녀가 군자에게 진상을 바치는 형상(옥녀봉반형)`에 안장되었다.

그런데 선생의 묘터는 `지씨(池氏)들이 머물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지정골인데 묘 작업을 했을 때

이곳 묘터에서 다섯 빛깔을 지닌 오색 골토가 나왔다고 할 만큼 명당 중에 명당으로 알려지고 있다.

【참고문헌】 지창룡, 『한국지리총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