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풍수지리

풍수지리의 역사와 서적

오늘의 쉼터 2008. 5. 30. 08:14
 

* 풍수지리의 역사와 서적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또는 생활의 편리를 위해서 자기가 생활할 터전을 찾는 데서부터 풍수지리의 발생 동기가 되었습니다. 원시사회에서 좋은 자리를 찾으면 먹고 쉬고 자는데 편리했을 뿐만 아니라 적으로부터 자신과 동족을 보존하고 번창시키는데 용이했기 때문입니다. 풍수지리학의 기원은 상고시대까지 소급해 가지만 초기 형성 과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론 면이나 응용 면에서 체계를 갖추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약2000여 년 전 중국 후한(後漢) 때 음양이치에 통달한 청오자(靑烏子)라는 사람이 풍수지리의 원전(元典) 격인 '청오경(靑烏經)'을 저술하여 반포한 것이 풍수지리학의 역사적 기원입니다. 청오경의 내용은 음양이법과 생기와 산의 형상에 대해서 매우 간결하고 문장 한구 한구를 비결이나 격언처럼 열거해 놓아 읽는 것만으로는 뜻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최근에는 여러 학자들이 청오경을 해석해 놓은 책이 많이 있는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고서적: 최창조, 청오경.금낭경, 민음사)

그 뒤 400년 후 진나라 사람 곽박(郭撲)이 청오경을 인용하여 저술한 '장서(葬書)'가 나왔는데 풍수지리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을 내리고 풍수의 이론과 실천을 전체적으로 기술함으로서 풍수지리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이 장서를 '금낭경(錦囊經)'이라고도 합니다. 그 어원은 당나라 황제 현종이 지리를 잘 아는 홍사(泓師)라는 신하를 자주 불러서 산천의 형세를 물어보았는데 그 때마다 홍사는 장서를 인용하여 설명하였습니다. 현종이 홍에게 그 책을 요구하니 홍사는 책을 받치면서 이 책은 세상에서 귀한 책으로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비보서(秘寶書)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현종은 이 책을 비단으로 만든 보자기인 금낭(錦囊)에 넣고 다시 장롱 깊이 넣어 보관했다고 하는데서 유래되었습니다.(참고서적: 최장조, 청오경.금낭경, 민음사, 오상익 주해장경, 동학사)

그 후 우리나라 통일신라시대에 해당되는 당나라 때는 모든 문화가 찬란하게 꽃을 피웠는데 풍수지리학도 마찬가지로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이 때는 간단한 나경(패철)을 이용하여 방위와 좌향(坐向)을 측정하였고, 복응천(卜應天)은 설심부(雪心賦)를 구빈선생(救貧先生) 양균송(楊筠松)은 청낭경(靑囊經)을 지어 그때까지만해도 한낱 술법으로 전해 내려오던 풍수지리설을 정리하여 체계적인 학문으로 정립하였습니다. 특히 양균송은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을 정리하여 오늘날까지도 묘나 집의 좌향을 결정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시조인 도선국사의 스승이라고 알려진 장일행(張一行)은 곽박의 장경을 해석하면서 나라의 땅을 화식지지(貨殖之地: 재화가 많이 나는 땅), 용문지지(用文之地:문사가 많이 나오는 땅), 용무지지(用武之地: 무관이 많이 나오는 땅)등으로 나누어 자연 환경을 관찰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고려말과 조선 중기에 해당되는 명나라 때의 풍수지리학은 오늘날의 풍수지리 학계에 깊은 영향을 끼치었는데, 협소한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여 폭넓은 수용자세로 연구가 활발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구성법(九星法)'의 응용으로 이기론(理氣論) 분야에 새로운 학설을 개척하였습니다. 또 나경(패철)학설의 발전으로 더욱 세밀한 부분까지 묘 자리와 집터를 측정하여 시간과 공간을 서로 연관성 있게 다루었습니다. 이 당시 서선술(徐善述), 서선계(徐善繼) 쌍둥이 형제는 풍수에 관한 여러 책을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엮었는데 오늘날 모든 지리서의 지침서가 되고 있는 '인자수지(人子須知)'입니다. 이 책은 각 항목마다 적당한 실제 사례를 들어 놓은 것으로 유명한 사람들의 조상 묘를 직접 관찰하여 이론과 실제 상황과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면서 저술하였습니다. (참고 도서: 김동규 역, 인자수지, 명문당) 조구봉(趙九峯)은 고금의 여러 명저와 명록을 정리하여 풍수지리를 용(龍),혈(穴),사(砂),수(水),향(向)으로 정리한 '지리오결(地理五訣)'을 펴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조선중기 이후에 해당되는 청나라 때의 풍수지리학은 택일(擇日)에 의해서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조명택일(造命擇日) 방면을 중요시 여기면서 장택론(葬擇論)을 발전시켜 왔습니다.(참고도서: 천기대요, 명문당, 신광주 정통 풍수지리학 원전 제3권 장택론편) 이 당시 왕도형(王道亨)이 작성한 '나경투해(羅經透解)'는 나경패철의 사용 방법과 원리를 해석한 것으로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모든 나경패철의 지침서가 되고 있습니다.(참고도서:신평, 나경연구, 동학사, 신광주, 정통 풍수지리 원전 제1권 나경론편, 명당출판사)

우리 나라에서는 언제부터 풍수사상이 전개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우리 고유의 자생적 풍수가 발생하였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4대 왕인 탈해왕이 집터를 잘 잡아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분 벽화에는 청룡(동), 백호(서), 주작(남), 현무(북)의 사신도가 그려져있으며, 당시 건설된 고찰의 지형지세 등으로 미루어 보아 삼국 초기부터 국가 경영과 국민의 생활 편리에 풍수가 실용화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국의 자생 풍수가 중국 풍수의 영향을 받은 것은 통일 신라 말기로 짐작되는데 왜냐하면 당시 선종 계통의 승려가 당나라에 유학을 하고 돌아오면서 풍수설을 배워와 일반 대중을 포교하는 방법으로 활용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도선은 이를 우리의 자생 풍수와 접목하여 풍수지리를 집대성 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와 풍수설 그리고 도참사상이 사회를 이끈 주도적 사상이었습니다. 태조의 훈요10조에는 풍수적 사고 관념이 잘 나타나고 있는데 "제2훈 절의 터는 도선이 산수의 순역을 보아 앞으로 일을 예견하고 자리를 잡은 것이니 다른 곳에 함부로 사찰을 창건치 말라" "제5훈 고려의 개국은 삼한산천의 음우를 받아 이룩된 것이며 서경(평양)은 수덕이 순조로워 나라 지맥의 근본이므로 왕이 수시로 순례하여 머물러야 나라의 안녕이 유지된다." "제8훈 금강 이남의 산형지세가 배역했으니 인심도 그러할 것이므로 그 쪽 사람들을 중용치 마라."하였습니다. 고려시대의 풍수설은 주로 승려들이 담당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도선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며 도선의 저술로 알려진 비기(秘記)에 의하여 자신의 주장을 하였습니다. 묘청은 서경천도설을 주장하였고, 공민왕 때 승 보우는 한양천도설을 주장하였고, 신돈은 충주 천도설을 주장했습니다. 후에 나옹선사와 제자 무학대사는 조선 개국을 도왔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불가에서뿐만 아니고 유가에서도 많은 풍수 명사들이 나왔으며 이성계가 역성 혁명에 성공하자 정권찬탈의 당위성과 민심수습을 위하여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였습니다.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내세웠던 조선조에도 풍수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져 음양과를 설치하여 과거시험을 통하여 지관을 뽑았습니다. 또한 사대부가에서는 풍수지리학을 모르고는 행세할 수 없었으며 선비나 승려들 사이에서도 기인이나 도사들이 많이 나왔으며 민간에서는 풍수설이 신앙화 되어 음택이 널리 유행되었습니다. 그러나 풍수지리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지나쳐 명당을 찾아 부모를 묻어 부귀영달 하려는 이기적인 방법이 팽배해졌기 때문에 묘지를 둘러싼 폐단이 심해져 정약용, 박제가 등의 실학자들은 그들의 저서를 통해 풍수의 폐단을 지적하였습니다.

근대 개화기 들어 계몽파 들은 풍수지리설을 크게 비난하였으며, 일제 점령기에는 미신으로까지 규정되었습니다. 일제는 풍수지리가 미신이라고 언급하면서도 그들의 식민지 통치를 위해 철저하게 풍수를 이용하였습니다. 총독부가 중심이 되어 전국의 풍수 자료를 수집하여 명혈의 지맥을 자르고 정기 맺힌 명산에 쇠말뚝을 박는 등 조선 민중들로 하여금 패배의식에 젖도록 하였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환경 문제가 대두되면서 다시 풍수지리가 활발하게 연구되고 도시 계획 등에 응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발간 된 풍수 서적은 학문적으로 체계가 정립된 것은 없고 산서나 결록, 비기 등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실제로 산천을 돌아보고 전국 각지의 풍수적 길흉을 기술한 '도선비결' '옥룡자 결록' '답산가' '무학결' '남사고결' '박상희결' 등이 전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지방 사대부가나 객사 사랑방에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비결, 결록, 답산가, 산도 등이 많이 있는데 황당무계한 것이 적지 않아 여기에 현혹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한편 일제 때 조선 총독부는 그들의 식민지 통치 자료를 얻고자 전국적인 행정력을 동원하여 총독부 촉탁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이 보고서 형식으로 조선 풍수설에 대한 방대한 자료집을 책으로 엮은 '조선의 풍수'가 있습니다. 이 책은 비록 순수한 연구 목적의 책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최초의 풍수설에 대한 전국적인 조사로 오늘날 한국풍수지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1) 한(漢)나라 시대와 『청오경(靑烏經)』


중국 한(漢)나라 시대는 조상의 묘지가 후손에게 영향을 준다고 믿어왔다. 후한 장사가 효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우리나라 부족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부족연맹체 중 가장 고도의 문화수준을 가진 부여(夫餘)는 조상숭배와 영혼불멸을 믿어 장례식을 후하게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그들은 여러 달에 걸친 장례식을 영광으로 알았고 많은 부장품(副葬品)과 심지어는 순장(殉葬)까지도 행하였다. B.C. 37년 경 주몽(朱蒙)이 이끄는 부여의 일족이 건국한 고구려(高句麗) 역시 후장(厚葬)이 행해졌고 금과 은 등 보배를 부장(副葬)하여 적석총(積石塚)을 만들었다. 옥저(沃沮)에서는 온 가족을 한 곽(槨)에 매장하고 곽 주위에다 미곡(米穀)을 두어 사자(死者)의 식량으로 하는 등 영혼불멸의 사상에 근거한 가족공동 묘지가 행해졌다.
『청오경』은 작자미상의 책으로 후한 때 저술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후대의 위작(僞作)이라는 설도 있다. 『청오경』이라는 책이름에서 편의상 작자를 청오자(靑烏子)라고 부른다. 청오자는 백살을 넘게 살다 신선이 되었다고 하는 반인반신(半人半神)의 선인(仙人)이라고 전해진다.
『청오경』의 내용은 음양 이법과 생기 그리고 산의 형상에 대해서 매우 간결하게 기술하였다. 문장 한 구 한 구를 비결이나 격언처럼 열거해 놓아, 읽는 것만으로는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난해함으로 인하여 후세의 학자들에게 자유로운 해석의 여지를 제공하였는데, 가장 오래된 책이므로 장경(葬經)으로 존중되었다. 그 후 당나라 사람 양균송(楊筠松)이 주석(註釋)을 달아 해석을 하였다. 원문은 편(篇)이나 장절(章節) 구분 없이 사자일구(四字一句)의 한 문장으로 연속되어 있다.
조선시대 지리과(地理科) 과거시험에는 『청오경(靑烏經)』 『금낭경(錦囊經)』 『호순신(胡舜申)』 『명산론(明山論)』이 4대 필수과목이었다. 그 중에서 『청오경』과 『금낭경』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2) 진(晉)나라 시대와 금낭경(錦囊經)


지금으로부터 약 1700년전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즈음하는 중국의 진(晉)나라 때 사람 곽박(郭撲, 276-324년)이 『청오경(靑烏經)』을 인용하여 『금낭경(錦囊經)』을 저술하였다. 그는 책 곳곳에 ‘경왈(經曰)’하면서 『청오경(靑烏經)』을 인용하였다. 이 때문에 『청오경』을 장경(葬經)이라 하고, 『금낭경』은 장서(葬書)라고 부른다.
『금낭경』은 상하(上下) 2권 8편으로 되어 있다. 전체 내용이 간략하고 짧아 모두 2000 여자(字)에 불과하지만, 간결하면서도 군더더기가 없다. 또 다루고 있는 범위가 매우 넓어 풍수고전 중에서 최고로 친다.

상권(上卷)은 제일(第一) 「기감편(氣感篇)」, 제이(第二) 「인세편(因勢篇)」, 제삼(第三) 「평지편(平支篇)」, 제사(第四) 「산세편(山勢篇)」, 제오(第五) 「사세편(四勢篇)」이다.
하권(下卷)은 제육(第六) 「귀혈편(貴穴篇)」, 제칠(第七) 「형세편(形勢篇)」, 제팔(第八) 「취류편(取類篇)」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풍수지리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을 내리고, 풍수의 이론과 실천을 전체적으로 기술함으로서 풍수지리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 장서를 『금낭경(錦囊經)』이라고 하는 어원은 다음과 같다.
당나라 황제 현종이 지리를 잘 아는 홍사(泓師)라는 신하를 자주 불러서 산천의 형세를 물어보았다. 그 때마다 홍사는 장서를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어느날 현종이 홍사에게 그 책을 요구하였다. 홍사는 책을 받치면서, 이 책은 세상에서 귀한 책으로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비보서(秘寶書)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현종은 이 책을 비단으로 만든 보자기 즉 금낭(錦囊)에 넣고 다시 장롱 깊이 넣어 보관했다. 이때부터 『금낭경』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금낭경』은 당나라 연국공(燕國公) 장설(張說)과 승려인 홍사(泓師), 역시 승려인 일행(一行) 등이 주석을 달아 설명한 판본(板本)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지리과(地理科) 과거시험에서 청오경과 함께 배강(背講, 암기)의 필수과목이었다.


 (3) 당(唐)나라 시대


우리나라의 통일신라시대에 해당되는 당나라 때는 모든 문화가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풍수지리학도 마찬가지로 크게 발전하였다. 이 때는 간단한 나경패철(羅經佩鐵)을 이용하여 방위와 좌향(坐向)을 측정하기 시작하였다. 양균송(楊筠松), 장설(張說), 홍사(泓師), 장일행(張一行), 증문적(曾文迪), 요금정(寥金精), 복응천(卜應天) 등 풍수지리학 방면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별호가 구빈선생(救貧先生)인 양균송은 『청낭경(靑囊經)』, 『감용경(?龍經)』, 『의용경(疑龍經)』, 『사대혈법(四大穴法)』, 『도장법(倒杖法)』 등을 지어, 그때까지만 해도 한낱 술법으로 전해 내려오던 풍수지리설을 체계적인 학문으로 정립하였다. 특히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론은 묘나 집의 좌향(坐向)을 결정하는데 사용해왔는데, 오늘날의 풍수지리학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시조인 도선국사의 스승이라고 알려진 일행선사(一行禪師) 장일행(張一行)은 곽박의 장경을 해석하면서 나라의 땅을 화식지지(貨殖之地: 재화가 많이 나는 땅), 용문지지(用文之地: 문사가 많이 나오는 땅), 용무지지(用武之地: 무관이 많이 나오는 땅) 등으로 나누어 자연 환경을 관찰하였다. 또 『대연역분도(大衍曆分度)』를 저술하였다.
소문관학사(昭文館學士)를 지낸 복칙외(卜則巍)는 『설심부(雪心賦)』를 저술하였는데, 문장이 간결한 형기학(形氣學) 위주의 책이다. 이를 청나라 사람 맹천기(孟天其) 등이 주석을 달아 설명하였다.


 (4) 송(宋)나라 시대


우리나라의 고려시대에 해당되는 송나라 때의 풍수지리학은 이기론(理氣論) 방면에 크게 발전하였다. 소강절(邵康節, 1011-1077년)은 하도와 낙서의 도수를 응용한 『방원육십사괘도진(方圓六十四卦圖陳)』을 만들어 산수(山水)의 방향을 측정하여 길흉(吉凶)의 연도를 계산하였다. 이는 이기(理氣) 분야를 하나의 독립된 계통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소강절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아 유교의 역철학(易哲學)을 발전시켜 특이한 수리철학(數理哲學)을 만들었다. 즉, 『주역(周易)』이 음과 양의 2원(二元)으로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있음에 대하여, 그는 음(陰).양(陽).강(剛).유(柔)의 4원(四元)을 근본으로 하여, 4의 배수(倍數)로서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하여 조선의 유학과 정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주자(朱子, 1130-1200년)도 풍수지리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송나라 황제 효종이 죽자, 능 선정과 관련하여 후임 황제 영종(寧宗)에게 「산릉의장(山陵議狀)」을 보냈다.
주자는 ‘풍수의 핵심은 산세의 아름답고 추함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주자의 「산릉의장」은 조선 풍수지리에 일종의 지침서가 되었는데, 조정(朝廷)에서 풍수를 논할 때 그 내용이 자주 언급되었다.
이 밖에 남송국사(南宋國師) 덕흥(德興) 전백통(傳伯通)은 『감여요약(堪輿要約)』을 저술하였고, 역시 남송국사이며 전백통의 제자인 추중용(鄒仲容)은 『대리가(大理歌)』를 지었다.


 (5) 명(明)나라 시대


우리나라의 고려 말과 조선 중기에 해당되는 명나라 때의 풍수지리학은 오늘날의 풍수지리학계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에는 협소한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여 폭넓은 수용자세로 연구가 활발하였다. 그 중에서도 구성법(九星法)의 응용으로, 이기론(理氣論) 분야에 새로운 학설이 개척되었다. 또 나경 학설의 발전으로 더욱 세밀한 부분까지 묘 자리와 집터를 측정하여 시간과 공간을 서로 연관성 있게 다루었다.
이때 호순신(胡舜申)의 『지리신법(地理新法)』, 북암노인(北巖老人) 채성우(蔡成禹)의 『명산론(明山論)』, 서선술(徐善述), 서선계(徐善繼) 쌍둥이 형제의 『인자수지(人子須知)』, 추정유(鄒廷猷)의 『지리대전(地理大典)』, 조정동(趙廷棟)의 『지리오결(地理五訣)』 등이 저술되었다.

1) 호순신(胡舜申)의 『지리신법(地理新法)』 조선조 지리과 과거시험에 임문(臨文)의 필수과목 중 하나였다. 호순신은 명나라 봉의랑 통판 서주군주 주관학사(奉議郞 通判 徐州軍州 主管學士)라는 관리다. 『호순신(胡舜申)』이라고도 불리는 『지리신법(地理新法)』을 편찬하였는데, 상하(上下) 2권 23장으로 되어 있다. 그 목차는 다음과 같다.

상권(上卷)은
서문(序文), 오행산도(五行山圖), 1) 오행도(五行圖) 2) 오행론(五行論) 3) 산론(山論) 4) 수론(水論) 5) 탐랑론(貪狼論) 6)문곡론(文曲論) 7) 무곡론(武曲論) 8) 보필거문론(輔弼巨門論) 9) 염정론(廉貞論) 10) 파군론(破軍論) 11) 녹존론(祿存論) 12) 형세론(形勢論) 13) 택지론(擇地論) 이고

하권(下卷)은
14) 삼십육룡론(三十六龍論) 15) 주산론(主山論) 16) 용호론(龍虎論) 17) 기혈론(基穴論) 18) 좌향론(坐向論) 19) 방수론(放水論) 20) 연월론(年月論) 21) 조작론(造作論) 22) 상지론(相地論) 23) 변속론(辨俗論), 결론(結論)이다.


2) 『명산론(明山論)』
이 책도 조선조 과거 음양과 지리학 중에서 『청오경』, 『금낭경』 다음으로 나오는 책으로 임문(臨文)의 1위에 놓여져 있는 책이다. 북암노인(北巖老人) 채성우(蔡成禹)가 지리에 통달했던 어느 선인(先人)의 저작인 『명산록(明山錄)』을 교정하고 보충해서 개정한 것이다.
책 내용은 서문, 본론, 발췌문 3부로 되어 있는데, 서문과 발췌문은 채성우가 쓴 것이고, 본문은 전해져온 『명산록』의 내용이다. 본문은 모두 13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1) 대역(大易) 2) 이기(二氣) 3) 십이명산(十二明山) 4) 절목(節目) 5) 혈법(穴法) 6) 입향(立向) 7) 명당(明堂) 8) 영맥(永脈) 9) 길흉사형(吉凶砂形) 10) 진룡(眞龍) 11) 귀겁(鬼劫) 12) 길귀(吉鬼) 13) 삼십육용순회(三十六龍順會)


3) 『지리인자수지(地理人子須知)』
명나라 세종 43년(1564년) 서선술(徐善述), 서선계(徐善繼) 쌍둥이 형제는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250여 종에 달하는 풍수 관련 책을 모아 이를 집대성한 다음,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오늘날 모든 풍수지리서의 지침서가 되고 있는 『지리인자수지(地理人子須知)』다.
이들 형제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장사(葬事)를 잘못 치른 것을 후회하였다. 그들은 부모의 유체(遺體)를 타인의 손에 맡기지 않고 자기 손으로 직접 하기 위해, 20세 전에 지리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60세 후에야 책으로 엮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책은 지리를 형상(形象)과 이기(理氣)로 분류하여 조화있게 설명하였다. 내용은 용(龍), 혈(穴), 사(砂), 수(水), 명당(明堂)으로 세분하였고, 각 내용마다 그림을 그려 넣었다. 또 각 집(集), 각 책(冊)마다 유명한 사람들의 조상 묘를 답사한 예를 부가해 이론과 실제 상황이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모두 8집(集) 39책(冊)으로 되어 있다. 당시 중국에서 목판(木版)으로 간행되었다. 명대(明代)의 풍수지리 서적으로는 유일하게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과 ‘사고전서제요(四庫全書提要)’에 수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발행되는 풍수 책들 대부분이 이를 토대로 하고 있다.
『지리인자수지(地理人子須知)』란 책제목은 ‘지리는 사람의 자식이라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책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집(乾集) : 6책
제1책(第一冊) 범례(凡例) 및 인용한 감여서(堪輿書) 목록 등
제2책(第二冊) 용법(龍法), 중국의 산, 대간룡(大幹龍) 맥락(脈絡) 등
제3책(第三冊) 논제도(論帝都), 역대 도읍지 등
제4책(第四冊) 간룡(幹龍)과 지룡(枝龍) 등
제5책(第五冊) 지룡(支龍)과 농룡(壟龍), 지룡(枝龍) 등
제6책(第六冊) 태조산(太祖山), 소조산(小祖山) 부모태식잉육(父母胎息孕育) 등

감집(坎集) : 5책
제7책 용출신(龍出身), 개장(開?), 박환(剝換), 과협(過峽), 지각(地脚), 호송(護送)
제8책 방룡(傍龍) 정룡(正龍), 용의 노눈(老嫩), 장단(長短), 진가(眞假), 귀천(貴賤)
제9책 용의 주필(駐?), 행지(行止), 분벽(分擘), 면배(面背), 여기(餘氣) 등
제10책 용의 삼세(三勢), 삼락(三落), 입수오격(入首五格), 입혈12맥(入穴十二脈) 등
제11책 오성(五星)과 목화토금수 오성체(五星體) 등 설명

간집(艮集) : 4책
제12책 혈법총론(穴法總論), 와혈(窩穴), 겸혈(鉗穴), 유혈(乳穴), 돌혈(突穴)
제13책 혈성삼대격(穴星三大格), 혈성제형(穴星諸形), 불결혈(不結穴) 등
제14책 조산증혈(朝山證穴), 명당(明堂)증혈, 수세(水勢)증혈, 낙산(樂山)증혈 등
제15책 혈기론(穴忌論)에 대한 종류 및 설명

진집(震集) : 3책
제16책 정혈(定穴) 방법 및 종류 설명
제17책 양균송, 정자, 주자 등 옛 선사들의 혈기론(穴忌論) 설명
제18책 괴혈론(怪穴論) 설명

손집(巽集) : 5책
제19책 사법총론(砂法總論), 청룡(靑龍) 백호(白虎), 안산(案山) 조산(朝山) 등
제20책 사격의 전응후조(前應後照), 나성(羅城), 원국(垣局), 좌보우필(左輔右弼) 등
제21책 낙산(樂山), 하수사(下水砂), 수구사(水口砂) 등
제22책 관성(官星), 귀성(鬼星), 요성(曜星) 등
제23책 사도(砂圖) 및 사례 설명

이집(離集) : 8책
제24책 수법총론(水法總論), 득수, 취수, 거수, 수구(水口), 조수(朝水) 등
제25책 강호수(江湖水), 지당수(池塘水) 등 물의 종류 설명
제26책 명당론(明堂論), 길격명당과 흉격명당
제27책 수성론(水城論), 물의 오성(五星)에 대한 설명
제28책 구곡수(九曲水), 암공수(暗拱水), 창판수(倉板水) 등 수세(水勢) 설명
제29책 양기론(陽基論) 설명
제30책 설천기제입식가(泄天機諸入式歌) 등
제31책 풍수요역(風水要逆) 등 장사에서 피해야 할 방법 설명

곤집(坤集) : 2책
제32책 구성(九星) 이법 설명
제33책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음양(陰陽), 팔괘(八卦) 등

태집(兌集) : 6책
제34책 음양(陰陽) 활용방법, 24룡의 길흉, 쌍산의 길흉 등 설명
제35책 24룡과 길혈(吉穴)
제36책 이기론(理氣論)에 의한 길사(吉砂) 종류, 흉사(凶砂) 종류
제37책 24방위와 수법의 길흉
제38책 이기론(理氣論)에 의한 수법(水法) 설명
제39책 만년도(萬年圖)

4) 『지리대전(地理大典)』
추정유(鄒廷猷)의 『지리대전(地理大典)』의 본래 이름은 『지리대전입문요결(地理大典入門要訣)』이며 『인자수지(人子須知)』를 비롯한 많은 풍수서를 요약한 책이다. 대체로 『인자수지』의 축소판 같은 느낌을 준다. 『인자수지』 보다 내용은 간략하지만 읽거나 휴대하기에 간편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용했다고 한다. 모두 7권으로 된 책으로, 목록은 다음과 같다.

권수(卷首), 총론(總論), 권1 용법(龍法), 권2 혈법(穴法), 권3 사법(砂法), 권4 수법(水法), 권5 양택(陽宅), 권6 오행(五行), 권7 나경(羅經)


5) 『지리오결(地理五訣)』
조정동(趙廷棟)이 저술한 책으로 용혈사수(龍穴砂水)에 향법(向法)을 강조하여 오결(五訣)을 만들었다. 물의 흐름에 따라 용혈사수향 이기법(理氣法)을 잘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구빈 양균송의 남긴 뜻을 근본으로 했다고 범례에 적고 있다.





 (6) 청(靑)나라 시대


우리나라의 조선중기 이후에 해당되는 청나라 때의 풍수지리학은 택일(擇日)에 의해서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조명택일(造命擇日)을 중요시 여기면서 장택론(葬擇論)을 발전시켰다.
이 당시 왕도형(王道亨)이 작성한 『나경투해(羅經透解)』는 나경패철(羅經佩鐵)의 사용 방법과 원리를 해석한 것으로,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모든 나경패철의 지침서가 되고 있다. 최초의 나경패철은 단지 8개 방위로만 간단하게 사용되다가, 점점 발전되어 24 방위까지 세분되어 명나라 중엽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다 청나라 때에 이르러서 나경(羅經)에 여러 학설을 도입되어 더욱 세밀하고 복잡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나라 때는 세간에 많은 풍수지리학 문헌들이 난립하여 위서(僞書)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7)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역사와 서적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풍수사상이 전개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우리 고유의 자생적 풍수와 관련해서, 『삼국유사』에는 신라 4대 왕인 탈해왕(80년)이 집터를 잘 잡아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는 청룡[동], 백호[서], 주작[남], 현무[북]의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다. 현존하는 사찰 등의 지형지세를 미루어 보면, 삼국 초기부터 국가 경영과 국민의 생활 편리에 풍수가 실용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자생 풍수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은 통일 신라 말기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당시 선종 계통의 승려들이 당나라에 유학을 하고 돌아오면서 풍수설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반 대중을 포교하는 방법으로 풍수설을 활용했다. 그 중에서도 도선은 이를 우리의 자생 풍수와 접목하여 풍수지리를 집대성한 것으로 미루어진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와 풍수설 그리고 도참사상이 사회를 이끈 주도적 사상이었다. 태조의 「훈요10조」에는 풍수적 사고 관념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2훈, 5훈, 8훈이다.
고려시대의 풍수설은 주로 승려들이 담당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도선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도선의 저술로 알려진 「비기(秘記)」에 따라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다. 묘청은 서경천도설을 주장하였고, 공민왕 때 승 보우는 한양천도설을 주장하였다. 신돈은 충주 천도설을 주장했으며, 훗날 나옹선사와 그의 제자 무학대사는 조선 개국을 도왔다.


조선시대에는 불가에서뿐만 아니고, 유가에서도 많은 풍수 명사들이 나왔다. 이성계는 역성 혁명에 성공하자, 정권찬탈의 당위성과 민심수습을 위하여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였다.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내세웠던 조선조에도 풍수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이에 음양과를 설치하여 과거시험을 통하여 지관을 뽑았다. 또한 사대부가에서는 풍수지리학을 모르고 행세할 수가 없었다. 선비나 승려들 사이에서도 기인이나 도사들이 많이 나왔다. 민간에서는 풍수설이 신앙화되어 음택이 널리 유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풍수지리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지나쳐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명당을 찾아 부모를 묻어 부귀영달하려는 이기적인 방법이 팽배해졌기 때문에, 묘지를 둘러싼 폐단이 심해졌다. 그리하여 정약용, 박제가 등의 실학자들은 그들의 저서를 통해 풍수의 폐단을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근대 개화기 들어 계몽파들은 풍수지리설을 크게 비난하였으며, 일제 점령기에는 미신으로까지 규정되었다. 일제는 풍수지리가 미신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의 식민지 통치에 철저하게 풍수를 이용하였다. 총독부가 중심이 되어 전국의 풍수 자료를 수집하여, 명혈의 지맥을 자르고 정기 맺힌 명산에 쇠말뚝을 박는 등 조선 민중들로 하여금 패배의식에 젖도록 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환경 문제가 대두되면서 다시 풍수지리가 활발하게 연구되고 도시 계획 등에 응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풍수 서적은 학문적으로 체계가 정립된 것은 없고 산서나 결록, 비기 등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실제로 산천을 돌아보고 전국 각지의 풍수적 길흉을 기술한 『도선비결(道詵秘訣)』, 『옥룡자결록(玉龍子訣錄)』, 『답산가(踏山歌)』, 『무학결(無學訣)』, 『남사고결(南師古訣)』, 『박상희결(朴相熙訣)』, 『나학천비기(羅鶴天秘記)』, 『일지유산록(一指遊山錄)』, 『일이답산가(一耳踏山歌)』, 『두사충결(杜師忠訣)』 등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지방의 사대부가나 객사 사랑방에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비결(秘訣), 결록(訣錄), 비록(秘錄), 답산가(踏山歌), 만산도(萬山圖) 등 산서비기(山書秘記)가 많이 있다. 이들 중에는 황당무계한 것도 적지 않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한편 일제 때 조선 총독부는 그들의 식민지 통치 자료를 얻고자 전국적인 행정력을 동원하여 풍수에 관련된 조사를 하였다. 총독부 촉탁 ‘무라야마지쥰(村山智順)’이 보고서 형식으로 조선 풍수설에 대한 방대한 자료집을 책으로 엮은 『조선의 풍수』가 있다. 이 책은 비록 순수한 연구 목적의 책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최초의 풍수설에 대한 전국적인 조사로 오늘날 한국풍수지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풍수지리학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연구 자료가 발표되고 있다. 서적 또한 많은 주제와 내용으로 발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