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勝地에 웅지튼 공주마곡사] | ||
◎걸출한 畵僧 줄잇는 “불교예술 첨봉”/「춘마곡 추갑사」 봄의 절경 빼어나/절 이름 「마」 화두 수행 많아 유래/독립운동가 김구 선생 한 때 은신/청석 오층석탑 날아갈듯한 자태/금호보응일섭 등 명화백 배출/
섬세한 조각 대광보전 조선 걸작
[春麻谷 秋甲寺]춘마곡 추갑사 라는 말이 있다.
북풍한설을 견디고 대지를 감도는 춘풍의 정취.생명 이 움트는 창조의 신비가 언제나 사람들을 설레게 한다.
마곡사는 수려한 산세와 함께 그 봄기운을 진하게 느끼게 하는 곳이다.
충남 공주의 泰和山(태화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원래 풍수의 명당으로 꼽힌다.
이른바 태극형이라고 하여 十勝地(십승지)의 한 군데로 손꼽혀 왔던 것이다.
절의 창건에 관해서는 엇갈리는 기록들이 있다.
서기640 년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신라 하대 때의 선승인 無禪(무선)스님이 지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자장이 창건했다는 640년은 백제가 통치하던 시기다.
마지막 임금 의자왕의 등극 연대이기 때문에 전자는 신빙성이 없다.
절 이름 「마곡」에 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자장스님의 설법을 듣고자 찾아온 이들이 「삼대와 같이 무성했다고 해서」 마곡이라고 했다는 설,
또는 무선스님의 중국스승이 麻谷普澈(마곡보철)이 었기 때문에 그 호를 땄다는 설,
심지어 이곳에 원래 麻氏(마씨)성을 가진 이들이 많아서 붙인 이름이라는 설 등이다.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첫번째와 세번째 주장은 설득력이 빈약하다고 본다.
중국 선종의 화등 가운데 「麻三斤」(마삼근)이라는 것이 있다.
어느날 제자가 물었다.
[도대체 부처란 무엇입니까?]
스승은 잠자코 손에 쥐고 있던 麻(마)를 치켜들었다.
[마 서근이라네] 부처에 대해서 진지한 물음을 던지는 제자에게는 主知主義(주지주의)의 냄새가 짙다.
합리적이고 철학적으로 부처의 본질에 접근하려 한다.
그러나 스승은 태연히 동문서답을 한다.
만약 스승의 손에 막대기가 들려 있었다면 막대기라고 대답했을 터이고.
고구마가 들려 있으면 고구마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는 초논리의 세계를 열어 보이고 있다.
합리와 분석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이 佛 道(불도)의 세계다.
오직 진실한 마음,구도의 집념만이 요구된다.
따라서 먼저 그 합리주의의 틀을 깨어버린 것이다.
이 은유와 상징 때문에 [마]라는 화두는 유행처럼 선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아마 마곡사에는 그 멋드러진 화두를 지니고 사는 스님들이 많았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고려초기까지의 2백여년 동안은 마곡사가 상당히 피폐해져 있었던 듯하다.
고려 중기의 명승 보조국사가 이곳을 다시 중건하였다.
이에 대해서도 佛日(불일) 보조국사(1158~1210)가 아니라
신라의 普照體澄(보조체징.804∼880)이 아닐까 의심하는 학자들도 있다.
임진왜란때 가람이 모두 불타 버렸던 것을 1651년 覺淳(각순) 스님이 중창하였다.
이때 세워진 대웅전영산전 대적광전 등은 지금까지 그 중후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일제 때에는 독립운동가 金九(김구)선생이 은신한 곳이 바로 마곡사다.
현재 남아있는 유물유적들은 대부분 조선 중후기의 작품들이다.
다만 대적광전 앞의 5층석탑은 고려후기의 작품임에 분명하다.
고려탑은 탑신에 비해 지붕돌이 짧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중후한 느낌보다는 날렵하다 는 인상을 준다.
특히 이 탑은 상륜부에 風磨銅(풍마동)이라는 청동제를 얹어놓았다.
마치 밥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장식은 통상의 일자형 장식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이와같은 양식은 라마(Lama)불교의 강한 영향 때문인데 그렇기 때문에 탑의 건립 연대를
고려후기로 파악하는 것이다.
보물 제799호,전체 높이는 8.4이다.
탑의 재질은 흔치 않은 靑石(청석)으로 만들었으며 일명 다보탑이라고도 한다.
또 이곳에는 수려한 銅鐘(동종)이 남아있다.
종을 만든 때는 1654년,충남 대흥에 있는 安谷寺(안곡사)라는 절에서 조성하였다.
언제 옮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련된 기법의 秀作(수작)이다.
윗부 분에는 두마리 용을 새겼고 鐘身(종신)의 중앙부분에 보살상을 陽刻(양각) 하였다.
아랫부분에는 연꽃과 ▦相花文(보상화문)을 새겼다.
이와 같은 양식을 唐草文(당초문)이라고 하는데 매우 정교하고 세련된 조각수법이다.
건물로서 가장 빼어난 것은 대웅보전과 大光寶殿(대광보전)이 있다.
대웅보전은 정면 5칸,측면 4칸이다.
2층의 구조는 정면으로 빛이 통할 수 있는 빗살창을 달았을뿐 전체를 판벽으로 막았다.
특히 내부의 용머리조각이나 연꽃 봉오리는 매우 아름다운 형태다.
조선의 일반건축 양식처럼 공포형식이다.
보물 제801호.대광보전은 마곡 사의 본전이다.
다포형의 팔작지붕 형태다.
1787년 중수하였고 조선 후기의 건물로는 걸작에 속한다.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셨는데 불단이 서쪽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東向(동향)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내부 공간의 섬세한 조각들과 화려한 데커레이션(장식)이 돋보인다.
현재까지 이 불상에 관해서는 건물 중건연대인 조선후기 작품 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옷의 처리기법이나 相好(상호)등으로 보아서 낙산사 보살상,청양 장곡사의
약사여래상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에 고려중기의 작품이리라는 주장도 있다.
이 문제는 보다 심도있는 논의가 있어야 할 줄 안다.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이곳 마곡사에서 뛰어난 畵僧(화승)들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불교는 선종 을 표방해왔기 때문에 범패 회화 조각 등 불교미술의 분야에서는 공백이 없지 않다.
신라때만 해도 釋良志(석양지) 등 뛰어난 조각가의 이야 기,
忠談(충담) 등 음유시인들에 대한 설화가 많다.
그러나 고려 말엽 에 이르면 이른바 풍류승들에 대한 기록은 격감한다.
다만 뛰어난 선승들이 한국의 지성계를 대표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 음악미술 등 예술분야는 거의 그 맥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마곡사에는 근대 의 불교명화백이랄 수 있는 錦湖(금호),寶應(보응),日燮(일섭),石鼎(석장)등이
잇따라 배출되었다.
마곡사의 본당에 비로자나불이 안치되 었다는 것은 이 절이 화엄종의 영향을 입었다는 증거다.
즉 창건 당시에는 선종적 특징이 강했지만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엄학 계통의 사찰로 성격이 바뀌어
졌으리라 본다.
그때 화엄의 변상도 등에 재질있는 畵 僧들이 출현하였고 그 맥이 오늘에까지 이어지는 것이리라 짐작한다.
편안한 햇살을 머금은 산자락에는 어느덧 봄기운이 완연하였다.
두둥실 떠다니는 무심한 구름을 보며 잠시나마 脫俗(탈속)이 여유를 느껴본다.
< 鄭柄朝 동국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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