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지역
1)묵와(默窩) 古家
*위치 :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묵와고가(默窩古家)는 조선 선조 때에 선전관을 역임하고,
인조 때 영국원종일등공신(寧國原從一等功臣)에 봉작된 윤사성(尹思晟)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창건 당시부터 �었으며, 한 때 가세가 융성하여 모두 여덟채, 백여 칸 이상의 집이 들어서 있기도
하였다.
산기슭에 위치하여 대문채·사랑채·안채로 이루어진 고가는 마당보다 훨씬 높게 대(臺)를 모으고
내루(內樓)가 앞쪽으로 튀어나온 사랑채가 누의 역할을 한다.
현재 솟을대문 안의 경내에 안채, 사랑채, 행랑채, 문간채, 사당, 헛간 등의 건물만이 남아 있어
전통적인 양반가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2)고령 申씨 신성용(申成用) 묘
*위치 : 고령군 쌍림면 산주리 (무곡성의 7부능선에 조성)
檢校申成用墓 在縣西萬垈山 高靈申氏始祖
(검교신성용묘는 고령현 서쪽 만대산에 있으며 고령신씨 시조다)
시조 신성용(申成用)을 비롯하여 신덕인(申德隣), 신포시(申包翅), 신장(申檣), 신숙주 (申叔舟)등
십수명이 넘어 행적(行蹟)을 일일이 열거하기 조차 어렵다.
고령현읍지(高靈縣邑誌)에 없는 몇몇분 만을 보면 풍수지리 학인이라면 알고있는 실학(實學)을
바탕으로 한 고증학적(考證學的) 방법으로 한국의 지리학을 개척, 팔도지도(八道地圖),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를 완성, 그리고 산경표(山經表)등의 저서를 남긴 여암 신경준(旅庵 申景濬)과
조선후기의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 (蕙園 申潤福),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맺어 지던날 음독자결을 기도,
그 여파로 오른눈을 실명하여 예관(倪觀 : 눈흘겨 보는사람)이란 별호를 가진 신규식(申圭植),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선생등이 고령신문(高靈申門)이다.
3)김종직 선생 종택
*위치 : 고령 쌍림면 합가리(개실마을)
이 건물은 선산 김씨문충공파의 종택으로서 안채 1800년경에, 사랑채는 1812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은 고려 말 정몽주. 길재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 김숙자로부터
학문을 익히면서 조선시대 도학의 정맥을 계승하였다.
조선 성종때에는 도승지, 형조판서등을 역임하면서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연산군때 무오사화로 관직이 박탈되고 무덤이 파헤쳐지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 뒤 중종반정때 신원되었다.
개실마을에 위치하고 있는 종택은 1800년경에 건립되어 몇 차례 중수하였다.
건물은 마을 뒷산을 등지고 완만한 경사를 이룬 터에 남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안산(案山)의 문필봉(文筆峰)을 向하여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앞쪽의 사랑채와 뒤편의 안채,
좌우의 고방채와 중사랑채가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오른쪽 뒤편에 선생의
불천위 신주를 모신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건물 내에는 점필재 문적. 유품 및 종가문서가 보관되어 있다.
4 )기계유씨 묘
*위치 : 고령 금산재 좌측 下
화성지역
1 .思悼世子의 원찰 龍珠寺
용주사 정문의 대문 위에는 금강역사상이 그려져 외호의 책무를 담당하게 하였으며
그 위에 龍珠寺란 현판이 걸려 있고(죽농 안순환의 글씨) 네 기둥의 주련(柱聯) 에는 " 龍珠寺佛" 의
네 자를 첫 글자로 한 네귀의 柱聯이 관심을 끈다.
삼문 안에 들어서면 누각 형태의 천보루(天保樓) 건물이 나타나고, 天保樓 밑을 지나
안마당에 들어서니 天保樓 뒤편에 弘濟樓란 현판이 걸려 있고, 좌측 벽면에는 강대련(姜大連) 주지의
기념 휘호들을 판각해 놓은 목판이 걸려 있어 승려들에 의해서 명고출송(鳴鼓出送)까지 당했던 강대련
화상의 화려한 단면을 보는 듯하여 씁쓸하다.
이 절의 중심 전각인 大雄寶展 정면 계단 양쪽 대우석이 눈을 끌고, 계단 동쪽에 正祖 수식수라 전해주는 수령 300년 정도의 천연기념물 제10호가 있다.
大雄展 내부에는 조선후기의 대표적 화원 화가인 단원 김홍도가 그린 삼계여래 후불탱화가있다.
재수가 좋으면 정조 어제 어필의 "花山 龍珠寺 奉佛 祈福偈"도보고,
채제공이 주황색 운문단에 짓고 쓴" 花山 龍珠寺 上樑文" 을 보는 것도 큰 福이라.
아마도 용주사의 창건은 오직 축성전의 존재 때문일 진데 축성전이 있던 지장전 부근을 거닐어 봄도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하는 뜻이 있을 것이다.
2 . 사도세자의 隆陵과 정조의 건릉
위치 : 경기도 화성시 태안면 안녕리 1-1
ㄱ . 莊祖와 妃 惠景宮洪氏 獻敬王后
ㄴ . 正祖와 王妃 孝懿王后 金氏
융릉은 사도세자가 고종 때 莊祖로 추존되면서 추봉된 陵號이고,
정조가 이장하여 올린 원호는 현륭원(顯隆園)이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부친의 원혼을 위안하기 위해 移葬을 결심하고,
평시에 思悼世子를 감싸고 돌던 고모였던 화평옹주의 부마 금성위 박명원(錦城尉 朴明源)이
묘소 移葬의 상소를 올리면서 移葬이 결정되었다.
수원부 진산인 화산 국릉 봉표처를 천정터로 확정 소위
" 서린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盤龍弄珠之形)" 의 福龍 大地라는 것이다.
이 터는 풍수의 시조인 도선 국사가 길지로 정하고, 영릉 봉릉시에는 풍수에 달통하였던 윤선도가 추천한
대지로 龍 穴 砂 水가 잘 되어 있는 최고의 명당이라는 것이 " 水原山論 " 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그러나 天下第一 明堂터라는 이곳이 어찌 그 혈손을 삼대밖에 더 이어가지 못하게 했을가? ......
우암 宋時烈이 이곳을 "五患之地"라 일컬으며 한사코 반대한 뜻은 부질없는 생각일가?. 씁쓸하다.
3 . 天使陵 白天藏 墓所
위치 :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기안리 산7 (고금산(86.6m)下)
水原白氏 시조는 중국 소주(蘇州) 출신인 송계(松溪) 백우경(白宇經)이다.
그는 인품이 고결하고 학문이 뛰어나 당나라 조정에 출사 벼슬이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올랐으나
간신들의 모함을 받고 선덕왕1년(780년)에 신라에 망명하였다.
신라에서 벼슬이 좌복야 사공 대사도(左僕射 司空 大司徒)에 이르렀고 그로부터 백씨(白氏)가
시작되었다.
우리 나라 거의 대부분 백씨는 백우경의 후손들인데 언제부터 수원을 관향(貫鄕)으로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고려 목종 때 백휘(白揮)가 수원군(水原君)으로 봉해졌고, 충선왕 때는 백천장(白天藏)이
수원백(水原伯)으로 봉해졌으므로 백씨들은 수원을 관향으로 삼지 않았나 짐작만 하고 있다.
수원(水原)은 원래 고구려의 매홀현(買忽縣)에 속했는데 신라 진흥왕이 신라에 귀속하여
수성(隋城)이라 칭하였다.
고려 태조 때 수주(水州)라 하였다가 조선 세종 때는 다시 수성군(隋城郡)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그래서 수원백씨 선영을 답사해보면 수성백씨(隋城白氏)로 적혀있는 비석들을 많이 볼 수 있다.
白天藏 선생은 고려 충렬왕 때 진사로 문과에 등과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으며 원나라에 유학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에 올라 국자진사(國子進士),
이부상서(吏部尙書), 우승상(右丞相)을 하였다.
연로하여 귀국 후 수원에서 거주하다가 85세로 졸(卒)하였는데 부음을 전해들은 고려 충선왕이 심히
애도하여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치르게 하고 시호를 文益이라하였다.
4 . 서거정 묘소
위치 :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왕림휴게소 앞산)
선생의 묘는 과천 봉담간 고속도로가 끝나는 지점 43번 국도가 지나가는 자리에
왕림 휴게소가 나오는데 그 휴게소 앞산에 위치하고 있다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
지금의 묘는 1975년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에 있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서 거정 선생은 성종 1년 1470년에는 左參贊(좌참찬)이 되었으며
이듬해 純誠明亮 佐理功臣(순성명량 좌리공신) 3등에 녹훈되고 達城君(달성군)에 봉해졌다
이 때에 夢村(몽촌) 일대를 賜牌地(사패지)로 하사 받았다
사패지로 하사 받은 夢村은 현재의 송파구 방이동 몽촌 토성 일대와 廣津(광진:현재의 성동구 광장동)인데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면서 당시의 서울 여러 곳을 다니며 풍경을 읊은 시가 많이 남겨져 있다
현재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의 신답사 거리에서 전농동 장안동과 중랑구 면목동을 동북으로 뻗어
용마산 길과 접하는 길을 선생의 호를 인용하여 그 곳에 살았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사가정길" 이라고
부르고 있다 .
청원군 지역
1. 보성(寶城) 吳氏 金鷄抱卵形 오숙동(吳叔仝) 묘소
위치 : 충북 청원군 현도면 달계1 리
寶城吳씨 始祖 현필(賢弼)의 字는 응남(應男), 號는 성재(醒齋).
1216년(고려高宗3) 契丹을 討伐한 功으로 賢弼은 寶城君에 封해져 本貫을 寶城으로 삼게되었다.
대종가, 중종가, 소종가로 구분되어 있는 보성 오씨 大宗家 齋室과 設壇 오른편 層層대를 오르면,
乙坐辛向의 蓮花浮水形. 金鷄抱卵形의 오숙동 墓가 있다.
2 .조선 8대明堂 鳳凰抱卵形 淸州韓氏 始祖 한난(韓蘭) 묘소
위치 : 충북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淸州韓氏 시조 한난(韓蘭,太尉公)은 高麗太祖가 견훤을 征伐하려고 軍卒을 이끌고
그의 집 앞을 지날 때 칼을 차고 나아가 從軍하여 용맹과 지혜로써 三韓統合의 功을 세워
三重大匡門下太尉가 되고 開國壁上功臣에 서훈되었다.
三韓統合功臣의 墓라 하기엔 너무 엄청난 규모와 주변의 형상이 鳳凰抱卵形 大明堂으로 손색이 없다.
淸州 韓氏家系에는 상신13명. 왕비6명. 공신24명.한명회. 한학 등.
3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사당 및 묘소(충북 기념물 제 90호)
위치 :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305번지
丹齋 申采浩(1880~1936) 선생은 1880년 12월 8일 충남 대덕에서 태어나
1887년 本鄕인 청원군 귀래리로 이사 이곳에서 수학하고 성장하여 성균관에 입교,
독립협회에 가입, 독립활동을 하다가 1936년 2월 21일 여순 감옥에서 순국한 신채호 선생을
기리기 위한 영당이 그의 묘소 앞에 세워져있다.
史學者며 抗日獨立運動家로 여순 감옥에서 순절함에 그가 어린시절 살던 서당터에 안장하였다.
사당은 정면 3칸,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단재영각 `이라는 편액을 걸었고,
정기문이라는 삼문을 세우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4 .운보 김기창 화백의 자택 및 묘소
위치 : 충북 청원군 내수면 형동리 428ㅡ2
東洋畵의 大家 운보 김기창(1914~2001)화백은 청각장애를 극복하고 불굴의 의지와 정신력으로
예술혼을 불태운 작가이며, 한국 근현대미술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화백의 자택인 한옥과 단아하게 꾸며진 정원,미술관, 그리고 뒷산 운보의 묘소는 단수하면서도
아담한, 보는 자에게 鄕愁에 빠져들게 한다.
5 . 品字形 文忠公 최명길(崔鳴吉) 묘소
위치 : 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
崔鳴吉은 全州 崔氏로 字 : 子謙, 號 : 遲川, 諡號 : 文忠이다.
1602년(宣祖35)에 성균관 儒生이 되고, 1612년(光海君4)에 兵曹正郞,
1623년 西人으로 仁祖反正에 가담 靖社功臣一等으로 完陵君에 封해진다.
1627년 丁卯胡亂때는 王을 江華로 護從, 講和를 主張하여 홍익한(洪翼漢) 등의 척화론(斥和論)에
대한 名分보다 現實的 政勢에 적응키위해 講和해야 한다고 主和論을 주장하였고, 항복이 결정되자
降書를 초안했다.
1637년 右議政을 거쳐 領議政에 올랐으며 1645년에는 完城府院君에 進封되었다.
文章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著書로는 遲川集, 丙子封事 등. 남구만의 碑文, 특이한 品字形 墓를 감상.
6 .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선생 유허지 (충북 기념물 제 30호 )
위치 :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 385ㅡ2
義庵 孫秉熙(1861~1922)선생은 1861년 4월 8일 북이면 금암리에서 청주목 서리 손의조 공의 서자로 태어나
1882년 22세에 동학에 입교하여 제2대 교조 해월 최시형 선생의 수제자가되고,
1897년 12월 24일 교통을 이어받아 제3대 교조에 오른 선생은 " 한울의 마음은 곧 사람의 마음 "이라는
인간 본위를 중시하는 " 人乃天 " 思相을 중심으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
결국 1922년 5월 19일 서울 상춘원에서 요양하다 62세로 순국하였다.
이곳은 민족대표 33인의 대표자이신 손병희 선생이 태어나 22세까지 살았던 生家를 중심으로 聖域化한 곳으로
목조 초가, 영당, 기념관, 태극문양 연못 등.
안산지역
1.강징(姜澄,1466-1536)선생 묘(향토유적 제3호)
위치 : 안산시 상록구 양상동 산16-3
호는 소재(少齋),심재(深齋),본관은 진주, 증 이조판서 이행(利行)의자,
성종25(1494)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별시에 병과로 급제,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연산10(1504) 우부승지로 왕에게 사냥을 삼가 할 것을 말 했다.
낙안(樂安)에 유배 연산12(1506)복세암의 의견을 반대하다 투옥,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석방 ,
강원 관찰사, 중종3(1508)과 중종16(1521)에 각각 성절사(聖節使)진하사(進賀使)로 명에 다녀왔다.
전주부윤, 경주 부윤을 거쳐 예조참판. 중종이 제작한 병풍의 글씨와 명신(名臣)들의 시문,
홍문관(弘文館)에서 올린 정명도(程明道)의 잠(箴)을 쓰니 당대 명필이란 칭송을 들었다.
이 밖에 글씨로` 정 익혜공 난종 신도비명(鄭翼惠公蘭宗神道碑銘),이 있다.
2 .정언벽(丁彦璧)선생 묘
위치 : 안산시 상록구 양상동 산7
조선 후기의 문신 . 본관 나주(羅州) . 자 계홍(季弘) 관찰사 호선(好善)의 아들이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5대 조부이다.
인조22년(1644) 생원(生員)으로 문과(文科)에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박사(博士)를 지내고
예문관봉교겸 세자시강원설서(藝文館奉敎兼世子侍講院設書)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예조,
병조좌랑(兵曹佐郞),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홍문관 교리(校理)등을 역임하였다.
헌납 때 왕자 징(徵)의 죄가 논의되자 이를 변호하여 무사케 하였다.
3 .유석(柳碩)선생 묘
위치 :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산5-1
조선 후기의 문신 . 본관 진주(晋州) . 자 덕보(德甫) .호 개산(皆山) 사옹원정(司饔院正) 시회(詩會)의 아들로서
조부 격(格)은 정언(正言)을 지냈고,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인조 3년(1625) 별시문과에 급제, 정자(正字)직에 있을 때 선조의 제7자 곧 인조의 삼촌인 인성군(仁城君) 공(珙)의 모역(謀逆)사건이 일어나자 무고임을 알고, 한무제(漢武帝)의 포속요(布粟謠)에 비유한 상소를 올려 그를 구출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부분의 중신들이 도망가고 이듬해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하니, 당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을 탄핵하였다.
그는 삼사(三司)의 요직을 두루거쳐 벼슬이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4 .정정옹주(貞正翁主)묘
위치 :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산50-40
선조의 후궁 정빈(貞嬪) 홍씨(洪氏)의 소생으로 선조의 아홉번째 딸이다.
선조 37년(1604) 정정 옹주로 봉해지고 광해군 2년 진안위(晋安尉) 유적에게 출가하였다.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이 강화도에서 증살(蒸殺)되었고 이어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繼妃)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모하려 하자 지아비와 더불어 이를 반대하였다.
후에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인조는 광해군 치하에서 진안위가 정의롭게 처신하였다 하여
통헌대부에 추증하고 정정 옹주에게도 두터운 예로 대우하였다.
후사가 없어 시동생 영(潁)의 아들 명전(命全)을 양자로 삼았으나 명전도 문과에 급제한지 2년만에 요절하였다.
이후 2년만에 옹주도 타계하니 현종은 정사를 폐하고 장례비용을 후사하였으며 스스로 빈소에 나아가
진안위묘에 합장토록 하였다.
5 .성호(星湖) 이익(李瀷)선생 묘역
위치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55.
실학의 대가 성호(星湖) 이익(李瀷)선생은 평안도 운산에서 1681년(숙종7년)부친 이하진(李夏鎭)이
유배 길에 운산에 와 있을 때 태어났다.
이익 선생은 그가 평생토록 떠나지 않고 거주하며 학문의 커다란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경기도 안산군 첨성리(瞻星里: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일동)라는 지명에서 『星(성)』자를 따라 그의 호를 지었다.
이익선생은 1705년(숙종 31년) 증광문과(增光文科)를 보았으나 낙방하고 이듬해 형 잠(潛)이 당쟁으로
희생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안산 첨성촌(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 머물며 일생을 학문에 전념하였다.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실학자의 중조(中祖)가 되었으며 그의 학풍은
그 후 안정복, 이가환, 이중환, 정약용 등에게 계승되었다.
이익선생은 학문을 깊이 연구하는 데에만 몰두하여 천문, 지리, 의학, 재정지방제도, 과거제도, 학제, 병제,
관제 등 현실적인 문제에 비판과 이상 및 사상을 널리 써놓은 성호사설(星湖僿說)을 비롯한 곽우록(藿憂錄),
성호문집(星湖文集)을 남겼으며 조정에서는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학덕을 높이 평가하여 이조판서에 추서
하였다.
6 .최용신(崔容信,1909-1935.)묘
위치 :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879-4
농촌 운동가. 본관 경주(慶州) . 누씨고녀(樓氏高女)를 나와 서울여자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1년,YWCA 농촌사업부에서 경기 화성군 샘골에 파견되어 농촌교육을 시작하였다.
부락민의 협조를 얻어 스스로 교사(校舍)를 신축, 매일 10리 길을 걸어다니며 어린이를 가르쳤다.
1934년 일본 고베신학교[神戶神學校]에 유학하였다가 신병으로 귀국, 샘골에서 요양하면서도
농촌계몽운동을 계속하던 중, 장중적증(腸重積症)으로 죽었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는 1964년 용신봉사상(容信奉仕賞)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해 오고 있다.
심훈의 상록수에 나오는 주인공 채영신은 실제 인물이다.
상록수의 청석골은 현재의 본오동으로 1935년 1월 23일 최용신은 26세의 꽃다운 나이로 죽었다.
상주지역
1)退齊 권찰도 및 파조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권척(權倜) 墓
위치 : 상주시 공검면 율곡2리(능골)
본관 안동(安東), 호 퇴제(退齊) 안동권씨 10세손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권척(權倜)을 파조로 하는
검교공파, 조선 연산군때 대사헌을 지냄.
퇴제선생묘는 잉어명당으로 유명한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무학이라는 지관이 현재의 잉어명당
자리를 가리키며 무덤을 두자이상 파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퇴제의 자손들은 지관의 당부를 무시하고 깊이 파내려갔는데,
석자쯤 팟을 때 갑자기 큰 잉어한마리가 부쑥 튀어나와서 앞에 있는 연못에 들어가 버렸다.
놀란 자손들이 지관의 말을 듣지않은 것을 후회하고 이미 잉어가 튀어나갔기 때문에 명당으로서의 가치가
상실된 줄 알았지만 퇴제의 아들은 후에 호조판서까지 지냈고 손자는 이조 판서의 벼슬에 올랐으며 손녀는
중종의 며느리가 되었고 그후 8대손까지 줄곧 높은 관직에 올랐다고 한다.
2)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선생墓
위치: 상주시 공검면 부곡리 ( 묘소와 신도비)
정경세(1563~1633) 는 본관 진주(晉州). 자 경임(景任). 호 우복(愚伏)·일묵(一默)·하거(荷渠).
초시(初諡) 문숙(文肅).개시(改諡) 문장(文莊). 경상북도 상주(尙州)에서 출생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82년(선조 15) 진사를 거쳐 1586년 알성(謁聖)문과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로 등용된 뒤 검열·봉교(奉敎)를 거쳐 1589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수찬(修撰)이 되고 정언·교리·정랑·사간(司諫)에
이어 1598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광해군 때 정인홍(鄭仁弘)과 반목 끝에 삭직(削職)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제학에 발탁되고, 전라도관찰사·대사헌을 거쳐 1629년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이르렀다.
이듬해 겸 춘추관지사로서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편찬을 담당하였다.
성리학에 밝았고 이기설(理氣說)에서 이황(李混)의 학설에 반대, 이이(李珥)에 동조하였으며 특히 예론(禮論)에 밝아서 김장생(金長生) 등과 함께 예학파(禮學派)로 불렸다.
시문(詩文)과 서예에도 뛰어났다.
찬성(贊成)에 추증되고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 강릉의 퇴곡서원(退谷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우복집(愚伏集)》《상례참고(喪體參考)》《주문작해(朱文酌解)》 등이 있다.
3) 정기룡(鄭起龍) 將軍 墓
위치 : 상주 사벌면 금흔리
정기룡(鄭起龍) (1562∼1622)은 조선 명종에서 광해군 때의 무신이며 곤양 정씨의 시조이다.
본래 이름은 무수였으나 1586년 무과에 급제한 뒤 왕명에 따라 '기룡'으로 이름을 고쳤다.
1590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립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으로 승진하여 경상우도 방어사 조경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거창싸움에서 왜군 500여명을 격파하고 錦山싸움에서 포로로 된 조경을 구출한 뒤 곤양 수성장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았다.
상주목사 김해(金?)의 요청으로 상주판관이 되어 왜군과 대치, 격전 끝에 상주성을 탈환하였다.
1593년 전쟁의 공으로 회령부사에 승진되고 이듬해 상주목사가 되어 통정대부에 올랐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토왜대장(討倭大將)이 되어 고령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적장을 생포하는 한편
파죽지세로 진격, 성주, 합천, 초계, 의령 등을 탈환하고 절충장군으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승진하여
경주, 울산을 수복하였다.
1598년 명나라 군대의 총병(총兵)직을 대행하여 경상도 방면에 있던 왜적의 잔적을 소탕하고 용양위 부호군이
되고 이듬해 다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재임되었다.
1601년 임진왜란이 끝난 뒤 다시 경상도 방어사가 되어 다시 침입하여 올지 모르는 왜군에 대치하였고,
다음해 김해부사, 밀양부사, 중도(中道)방어사를 역임하였다.
그 뒤 용양위 부호군 겸 오위도 총부총관,경상좌도 병마절도사 겸 울산부사가 되었다.
1610년(광해군2) 상호군에 승진하고 그 뒤 보국숭록대부로서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의 직을
맡다가 1922년 통영 진중에서 순직하였다. 상주 충렬사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4)사벌국 왕릉(沙伐國 王陵)
위치 : 상주 사벌면 금흔리
5)개암 김우굉(開巖 金宇宏) 묘
위치 : 상주시 중동면 회상리 매골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인 金宇宏(1524~1590)의 본관은 의성이다.
자는 敬夫, 호는 開岩이다. 경상북도 星州 출신이다. 아버지는 府使 希參이며, 어머니는 郭氏이다.
李滉의 문인으로 19세때인 1542년(중종37) 鄕試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1552년 (명종7) 進士試에도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1565년 경상도 유생을 대표하여 여덟차례에 걸쳐 普雨의 주살을 상소하였다.
年譜에도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실려있다.
이듬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注書·待敎·奉敎·典籍 예조와 병조좌랑·정랑, 知製敎·正言·獻納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내다가
1573년(선조6) 부수찬, 1578년 司僕寺正을 거쳐 동부승지·대사간·대사성 등을 지내고 이듬해
병조참의·승지에 이르렀으나 李銖의 옥사로 파직되었다.
1582년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형조참의·장례원판결사·홍문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유생 朴濟로부터 음흉하다는 탄핵을 받아 외직으로 물러나 靑松府使·光州牧使 등을 지냈다.
1589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星州로 돌아갔다.
그 해에 동생 宇 이 정여립의 옥사에 연좌되어 안동의 임지에서 회령으로 귀양가게 되었는데,
그는 영천으로 달려가 동생을 만나 갓과 옷을 벗어주고 시 한수를 지어주며 이별하였다 한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사사로이 獄訟을 결정한 형조판서를 당당히 탄핵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644년(인조22) 李埈이 撰한 碣石을 세웠으며, 1730년(영조6)에 상주 速水書院에 배향되었다.
경산.청도지역
1 . 임당리 김씨고택(林塘里 金氏古宅) 및 墓所 : <궁중내시고택>
*위치 : 청도 금천면 임당리 631
고택--巽坐乾向. 大門 : 乾方. 中門 : 兌方
묘소--子坐午向 左水到右로 丁未破, 自旺向
2 . 密陽 朴氏 경산 入鄕祖 박근손(朴謹遜) 묘소
성균관 생원, 선비 (경북 8명당)
* 위치 : 경산시 진량면 마구리 산23-7.
(진량에서--자인방향 저수지 우측)
辛坐乙向, 右水到左로 艮寅破,正養向
3 . 박재호(朴在鎬) 墓와 栗山書院
*위치 : 경산시 진량면 신문리 (진량--자인방향)
신라섬유 박성영 회장 부모묘
酉坐卯向,左水到右로 乙辰破, 自旺向
성남지역
1) 全州李氏 태안군파 묘역
위치 : 성남 분당 정자동 산34(정자공원 ㅡ한국토지공사부근)
태안군 李彭壽와 그의 증손인 李敬仁을 모신 묘역이다.
태안군은 성종의 제12남인 무산군의 다섯째 아들로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왕을 호위한
공을 인정 받아 호성공신에 봉해졌다.
이경인은 태안군의 증손으로 이천도호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2개의 봉분으로 부인 안산 김씨와의 합장묘이며, 두 봉분의 중앙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좌우로 문인석이 배열되어 있다. 묘비는 선조 30년(1597)에 세운 것이다.
이 묘역은 원래 정자동 산 11-1에 있었으나 1991년 발굴 조사를 거쳐 정자동 34-4로 이장한 것이다.
이경인은 태안군의 증손으로 이천도호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2) 韓山李氏 묘역 (艮坐)
위치 : 성남 분당 수내동산1(영장산)(중앙공원내)
*수내동가옥
중앙 공원 내에는 한산 이씨 묘역과 宗家宅이 있어서 동시에 陽宅과 陰宅을 踏査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한산 이씨 묘역은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목은 이색의 4대손인 이 장윤의 묘를 손자인 토정 이 지함이
영장산(해발88m) 자락에 자리잡은 이진봉(중앙 공원의 봉우리)이 마치 거북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자리를 잡으면서 한산 이씨의 종산으로 400여년간 지속되고 集成村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경기도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되었으며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묘역을 보존하고 종가의 초가 한 채를
복원하였다.
연못은 인위적으로 경주의 안압지를 모방하여 파게 된 것이다
작은 섬을 세 곳에 만들어 토정 이 지함 선생의 동양적인 이상의 세계를표현하였고 아치형 돌다리를
만들어 이 지역 사람들이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게 하였다
(韓平君 李之菽墓, 懿簡公 李增墓, 韓原君 李長潤墓, 韓成君 李秩墓, 李潗墓 등등)
3) 淸州韓氏 문정공파 묘역 및 신도비
위치 : 성남 분당 율동 산2 (율동공원부근)
이곳은 성종이 하사한 사패지로써 문정공 한계희를 중심으로한 청주한씨 문정공파 묘역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 한계희[韓繼禧] 왕실과 관계가 깊은 명문 거족 출신으로 기내훈구파(畿內勳舊派)의
유학자이자 원상(院相) 세력의 주요인물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순(子順). 아버지는 관찰사 혜(惠)이며, 어머니는 성달생(成達生)의 딸이다.
신도비문은 서거정(1420∼1488)이 찬하고 안침이 전과 글씨를 썼다. 건립년대는 1483년(성종 14)이다.
*韓斯文(1446∼1507)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시호는 공간이며
대사헌, 병조참판, 공조참판, 공조판서,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
하였고 중종반정에 공을 세웠으며 신도비는 총고 231㎝의
규모로 기대의 하부 앞.뒷면에는 각 4개와 2개의 구획을 나누어
그안에 안상문이 조각되어 있고 상부에는 연당초문이 조각되어
있다. 1508년(중종 3)에 세웠으며 신용개(1463∼1519)가 찬
하였고 신흠(1566∼1628)이 전과 글씨를 썼다. (한계희의 長男)
*韓士介(1453∼1521)는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시호는 영흥이며
영흥부사와 해주, 광주, 진주 등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신도비
총고는 206.5㎝이고 관석의 전면에는 운문과 상단 중앙부에
초승달이 조각되어 있는데 신도비에 해와 달이 조각된 경우는
드물다. 김안로가 찬 하였으며 1521년(중종 16)에 건립하였다.
(한계희의 4男)
4) 경헌 조몽정 묘역
위치 : 성남 분당 서현동- (서현동맛고울부근)
敬軒 曺夢禎(1535~1595)선생은 효자로 본관은 창녕, 자 응진,
호 경헌으로 僉知中樞府事 등의 증손이며 강원도 관찰사 漢弼의
손이며, 호조좌랑을 지낸 彦博의 아들이다.
11세 어린 나이에 부친상을 당했으나 어른들처럼 묘 아래에
제실을 짓고 수묘의 정성을 다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에 사당의 신위를 받들고 피난하였는데
난 중이라도 어머니를 위하여 계절에 맞는 음식과 의복을 준비해 드릴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향시에 응시하여 여러차례 추천되었으나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관직에 나가지 않는다는 지조를 지켜 벼슬하지 않았다
안동지역
1. 겸암 류운룡 묘 (화회마을 입구 花山자락)
2 . 김계권의 묘 (소산리 뒷마을인 역골)
소산리의 신안동김씨 종택 삼소재, 학조대사가 소점한
아버지 김계권(창평부수)의 묘
3 . 의성김씨 鶴峰 金誠一 종택
4 . 安東張氏敬堂 宗宅 및 張太師(장정필) 墓
5 . 안동권씨 陵東齋舍 및 시조 權太師 (권행)墓
현재 이 묘역에는 권태사묘, 후손 옹(雍)의 묘,
서애의 아버지 류중영의 묘.
6 . 안동김씨 台粧齋舍 및 시조 金太師(김선평) 묘단.
임실.진안지역
1. 전북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 : 의암 주논개 생가 . 사당 . 논개 부모묘.
2. 전북 진안군 진안읍 (거북바위) : 黃蛇出林
괴혈로서 石中穴: 30여전에 쓰고 명당발복
3. 전북 임실 성수면 양지리 : 長蛇출림형
앞의 안산의 개구리 바위로서 100여년전에 쌀 20가마를 주고 그 바위만 샀음.
남원양씨 소유로서 전주의 명문을 이룸
4. 전북 임실 성수면 삼봉리 : 의병장군 이석용 생가. 사당 및 묘소.
5. 전북 순창 동계 신흥 마을 : 子巳出世(어린 뱀이 세상을 나오다)
어린 새끼 뱀이 신기한 눈으로 세상을 구경하는 모습(정기호)
논두렁 명당으로 전국에서 가장 예쁜 명당(홍성담)
고창지역
1) . 여흥민씨(麗興閔氏) 할머니 묘(울산김씨 중시조인 김온(金穩)의 부인)
위치 : 전남 장성군 북이면 명정 마을
묘는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 같은 형국인 복부혈(覆釜穴)
울산 김씨(金氏) 발복지로 하서 김인후 선생을 배출한 명당으로 알려진 여흥민씨(麗興閔氏) 할머니 묘.
달성저수지가 나오고 주유소 앞 삼거리에서 명정 마을로 가는 도로표지판이 보인다.
묘 좌측에는 남편 김온(金穩)의 단(壇)이 있다.(左水到右.甲破.坤坐艮向. 文庫消水)
2 ). 인촌의 조부 김요협묘
위치 : 전북 고창군 아산면 도슬산 선운사 뒤
일주문 앞에서 계곡 길을 따라 150m쯤 에서 오른쪽 산길 따라오르면
옛 백련암 뒷편 우측 산위에 묘소(左水도右,巽破. 辛坐乙向..正墓向). (伏雉穴)
3 ). 인촌의 조모 영일정씨(迎日鄭氏) 묘.
위치 : 전북 고창군 흥덕면 반암리 호암(壺岩)마을
선인(仙人)이 잔칫날에 술에 취해 누워있다는 선인취와형(仙人醉臥形)으로 유명하다.
주산은 일자문성으로 천막인 차일봉이고, 안산은 술병을 엎어놓은 것 같은 병바위다.
주변에는 술잔 같은 옥배사(玉杯砂)가 있다.
또 잔칫날 초대된 손님들인 귀인봉이 있으며, 그들이 타고 온 말과 가마 같은 사격이 있다.
그야말로 신비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곳이다.
영일정씨는 정진사의 고명딸로 인촌가를 명문으로 일으킨 장본인이다.
( 艮坐坤向.右水到左,丁未破口.自生向.) . 선인취와형(仙人醉臥形)
4). 인촌 김성수선생 生家 및 미당 서정주선생 生家 및 문학관
위치 : 전북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437
< 인촌생가>
주산 : 소요산(444.2m).
안채: 丁坐癸向(북향). 乾亥破. 正養向.
주건물안채 중심방위 辰 巽 巳 己, 巽방위다.
동사택 : 대문 ㅡ 북, 감방. 안방 ㅡ 이방. 부억 ㅡ 손방. 兩宅三要의 吉방이다.
조산은 화성체인 변산연봉 중간 바닷물 (화)
5) . 증조부 김명환묘 .
위치 : 전북 부안군 변산면 변산해수욕장 뒤(부안군 변산면 대흥리)
( 卯坐 酉向).(飛龍昇天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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