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우리역사

在世理化主義’

오늘의 쉼터 2008. 5. 15. 00:10
在世理化主義


 

1 한웅천왕시대의 국시國是, ‘천도를 그르치지 않는다’



재세이화在世理化는 홍익인간弘益人間과 함께 한웅천왕桓雄天王이 BC 3858년에 세운 배달나라倍達那羅의 국가이념이었다. 이를 구체화 하여 ‘제세이화의 도道’라고 하였다. 이러한 국가이념이 생성되기 시작한 때가 한인천제桓因天帝가 세운 한국桓國 말기였다. 당시를 <삼성기전三聖記全> 하편에서는 안파견安巴堅이 다스리던 때라고 하였다. 안파견은 나라의 경제가 궁핍했으므로 오가五加를 이끌고 홍익인간弘益人間할 데를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삼위三危와 태백太白 두 별이 조응하는 곳을 발견하고 이곳에 정착할 결심을 한다. 이러한 사정을 <태백일사太白逸史> 신시본기神市本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조대기朝代記>에서 말한다. ‘때에 사람은 많고 산업은 궁핍하여 그 살아갈 방법이 없어 걱정이었다. 서자부庶子部에 항웅이라는 대인大人이 있었는데, 여러 가지 사정을 살피더니, 하늘에서 내려가 땅위에 하나의 광명세계를 열려고 생각하였다. 때에 안파견이 두루 금악金岳· 삼위三危· 태백太白을 살피더니, 태백은 이로서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한웅에게 명하여, ...... 무리를 이끌고 하늘에서 내려가, 하계에 가서 하늘의 뜻을 펴 가르침을 베풀고, 천신에 제사지내는 것을 주관하라...... 가르침의 도를 세워 재세이화 하여 자손만세의 귀감이 되도록 할 지어다’ 하시며, 천부인天符印을 주시고 그를 보내어 이들을 다스리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 글에서 보면, 한웅천왕이 채택한 ‘제세이화’가 가르침의 도임을 알 수 있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에서, “재세이화· 홍익인간 함을 이를 신시가 단군조선에 전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한웅천왕이 개국한 신시 배달나라의 국시인 “재세이화· 홍익인간”을 배달나라가 멸망하면서 신생국가로 출현한 단군조선에게 전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어찌하여 배달나라에서 국시를 단군조선에 전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배달나라에 속했던 단국의 태자로 있었던 단군왕검이 무진년에 배달나라를 선포하고, 그로부터 22년 후에 배달나라를 조선으로 국명을 고치(<朝鮮紀>)면서 자연스럽게 배달나라의 국시가 단군조선에 승계된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태백은 배달나라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태백일사>는 배달나라의 역사라는 말이 된다.



역시 같은 책에서, “태백진교는 천부에 근원하여, 지전에 합치고, 또 사람의 일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있어 정사를 일으킴에 있어, 화백보다 앞섬이 없고, 덕을 다스림에 있어, 책화보다 선한 것이 없다. 제세이화의 도는 모두 천부에 준하여 거짓이 없다.”(太白眞敎源於天符 而合於地轉 又切於人事者也 是以發政莫先於和白 治德莫先於責禍 在世理化之道)고 하였다. 



마고시대를 지나 한웅천왕의 시대에 와서 한웅천왕은 나라에 종교가 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이 종교가 태백진교太白眞敎이다. 이 종교가 목표로 하는 사회는 덕이 실현되는 사회였다. 덕이 실현되는 사회는 유교가 보편화 되는 사회이다. 태백진교에서 이 점을 찾아보기로 한다.



태백진교는 천부에 근원을 두고, 지구가 자전하는 이치에 합치하도록 하고, 또 사람이 하는 일을 이에 맞도록 하였다. 여기에 있어서 정치를 함은 화백에 우선하는 것이 없고, 덕을 다스림에 있어 화를 꾸짖는 것 보다 착한 것이 없다.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대로 해나가는 도는 모두 천부에 준하였다.



태백진교는 근본을 천부에 둔다고 하였다. (太白眞敎源於天符) 천부는 마고가 후세에 전한 천부삼인天符三印을 말하는 것으로 ‘북두칠성과 해와 달’이다. 이는 마고가 후대에게 물려준 천부삼인이 한웅천왕 대에 와서 태백진교로 체계가 섰음을 뜻한다.



또한 태백진교는 땅이 돌아가는 이치에 맞도록 한다고 하였다. (合於地轉) 이는 지축이 세차운동에 순응하듯이 나라를 운영하는 데에 있어 하늘과 땅의 섭리를 그르치지 않도록 하겠다는 말이다.



인사도 또한 천부와 지구의 세차운동에 맞게 한다 (切於人事) 고 했으니, 태백진교가 추구하는 종교적인 이념은 인사에 있어서도 천부로 표현되는 우주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것이다.



본문을 해석하면서 태백진교의 내용이 천부天符와 지전地轉과 인사人事로 구분됨을 알 수 있다. 이는 배달민족사상의 원천인 일석삼극의 원리에서 나온 천지인天地人 사상을 세부적으로 어떻게 구현하는가를 밝힌 것이다. 천지인 사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방법론이 본문에서는 발정發政과 치덕治德으로 설명이 된다. 발정은 정치를 시작하는 것이요, 치덕은 덕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발정은 순수민주주의인 화백으로 한다. (是以發政莫先於和白) 화백으로 한다는 것은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토론을 거쳐 100% 찬성으로 의사결정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수결이란 있을 수 없다. 100% 찬성만이 필요하다. 결국 이견異見 조정의 수단으로서 끊임없는 토론을 요구하는 것이 화백의 화和이다. 화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가 100% 찬성이다. 단 1%도 불찬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이 백白이다. 만약 다수결로서 소수를 무시하려 한다면 이는 화백이 아니다. 전원 찬성을 도출하기 위하여 대화와 이견조정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정치제도가 화백이다.



치덕은 책화責禍로 한다. (治德莫善於責禍) 치덕은 법률적인 책임을 묻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다. 국가적인 재해를 당했을 때, 그 책임을 개인에게 물어서 덕을 처벌로서 구현하겠다는 것인데, 재해에 대하여 무과실책임을 묻겠다는 점이 특징이다. 죄를 지은 자가 벌을 받는 것이 자기행위 책임의 원리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자기의 행위와는 무관하게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 행위책임이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격이 책임을 지는 것이지만, 자기가 행위 할 수 없는 자연재해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은, 자기가 행위 한 만큼 책임을 지는 행위책임을 원칙으로 하는 현대의 형법사상의 시각으로 볼 때, 원시적인 형법사상이라고 할 것이다.

책임이란 어떤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비난을 가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가치판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전혀 사정이 다르다. 홍수가 나고, 한발이 드는 것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이를 나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다. 임금이 자연재해를 당하여, "짐의 부덕의 소치로서 …운운" 하는 것이 이런 경우이다.



책화를 하는 목적은 선善을 구현하자는 것이다. 선은 도덕을 의미한다. 임금이 자연에 대하여 무한책임을 짐으로써 도덕이 실현된다고 보는 것이 태백진교의 도덕관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천지인사상을 근본으로 하여, 발정과 치덕으로 나라를 경영하는 것이 태백진교이다. 이를 재세이화의 도라고 하였다. 재세이화의 도는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천부에 맞추는 것이다. 태백진교가 추구하는 세계는 이렇게 우주의 섭리 안에 있다.



2 천부를 인으로 만들어 명두라 이름하고 후손에게 전수해 온 역사



한인이 한웅에게 천부삼인을 새긴 천부인을 주었다. 홍익인간하고 재세이화의 도를 실현하라고 준 증표가 천부인이다. 당시에는 종이가 없었음으로 천부삼인인 해· 달· 북두칠성을 돌에 새긴 것이다.



황해도무당은 신당에 명두明斗를 걸어 둔다. 야외에서 굿을 할 때에도 가설무대를 만들어 <무신도巫神圖-무당은 환이라고 한다>를 걸고 그 위에 명두를 걸거나 제단 중앙에 시루를 놓고 그 위에 세운다. 명두가 천부삼인임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천부삼인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신체로 모신다. 오늘날 명두가 의미 있게 쓰이는 때가 내림굿을 할 때이다. 신당에 걸거나 신대에 매어 하나님의 신을 받게 하는 것이다.



1) 재세이화의 증표 천부옥새



음양서인 <연파록烟波錄>에 천부인은 하늘에서 임금에게 내려준 옥새玉璽라고 하였다. 천부인은 명두이자 옥새이다. 그런데 이 명두가 무당의 당집에 걸려 있고, 내림굿에서 하나님의 신을 받는 도구로 쓰고 있다. 무당이 옛날에 제관이었던 임금이 하던 일을 해 오고 있는 것이다.



천부인이 찍힌 문서를 천심황군직부지도天心皇君直符圖라고 한다. 천심은 하늘의 마음이고, 황군은 하나님이고, 직부지도는 하늘의 직인인 칠성이 찍힌 문서라는 뜻이다. 천심황군직부지도를 줄여서 천부天符라고 한다. 이 천부를 <칠성부七星符>라는 다른 말로 표현한다. 천부인은 북두칠성의 위명威名을 나타내는 옥새이므로 이 천부인이 찍힌 문서는 곧 하늘의 문서로 시행이 된다.



<연파록>에는 천부인에 무곡금성(武曲金星, 북두칠성의 6번째 별)과 다른 여섯별을 함께 그린다고 하였다. 천부인을 부적으로 그려 쓴다는 말이다. 북두칠성에서는 6번 째 별인 무곡금성武曲金星을 중요시한다. 무곡금성은 연년성延年星이라고 하여 생명을 연장延長하는 별이라고 한다. 개양성開陽星이라고도 하는데, 음양을 관장하는 별이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을 붙였다고 볼 수 있다. 양택陽宅에서는 팔괘방위에 연년성이 낙재落在하는 방위가 반드시 나타나는데, 이 방위에서 노인이 기거하면 건강하게 장수한다고 한다.



천부인에 새겨진 다른 여섯별도 별마다 이름이 있고, 특징이 있다. 이들이 모두 하늘에서 하는 일이 땅에서 정부를 이끌어 가는 행정부에 속한 각부의 장관들이 하는 일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북두칠성이 하는 일을 칠정七政이라고 하였다.



천부인은 단군조선의 마지막 왕검인 제 47세 고열가단군 때부터 황해도 구월산의 삼성당에서 명두와 부적의 형상으로 무당을 통하여 전해졌다. 고열가단군 대에 와서 단군조선의 제위가 끊어짐으로, 삼성당의 당주였던 여무를 통하여 내림굿을 하는 무당들에게 전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천부인을 시행하는 역사는 마고가 황궁에게 천부인을 내림으로써 시작되었다. 마고는 ‘해혹복본解惑復本’할 것을 명했고, 그 징표로 천부인을 주었다. 이 천부인이  유인· 한인· 한웅· 단군왕검에게 차례로 전해졌음이 <단군신화>에서 밝혀지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서, 해· 달· 북두칠성이라는 별의 이름이 이미 마고시대에 생겼다고 볼 수 있다.   



도교에서는 북두칠성을 칠원성군七元星君이라고 한다. 원성군元星君이란 별하나님이라는 뜻이고, 칠원성군은 일곱 분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은 천추성이다. 칠원성군은 천부삼인에 속한 칠성보다 훨씬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선교仙敎의 조종祖宗인 자부선인紫府仙人이 이름에 자부紫府라는 명칭이 들어갔는데, 자부가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을 의미하는 말이므로 북두칠성이라는 명칭이 단군조선의 국교였던 선교仙敎에서 썼다고 볼 수 있다. 북두칠성은 일곱 별 이외에 좌보우필左輔右弼이라는 천추성을 보좌하는 두 별이 더 있어서 이를 합하여 구성九星혹은 자미두紫微斗라고 하였다. 



2) 청동기문화의 상징 구리거울 명두



청동으로 만든 동경-구리거울의 역사를 더듬어 올라가면 구리를 캐어 처음 청동을 주조했던 치우蚩尤천왕과 곤오昆吾하백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BC 3,000년경이다. 이 시대에 청동거울을 만들었고, 이 거울에 천부삼인을 새겼다고 생각된다.



한웅천왕은 이미 천제로부터 천부삼인을 물려받았다. 이 천부삼인을 거울에 새겼다고 했으므로, 그것이 석경이나 동경의 형태의 의물儀物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의물이 해와 달과 북두칠성을 새긴 거울의 형상-오늘날의 명두明斗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부도지>에서, “황궁이 돌이 되었고, 그의 아들 유인이 이 돌을 발견하여 수증하였다”고 하였다. 천부인이 황궁의 비석에 새겨져 있었다는 말이다. <삼한관경본기>에는 한웅천왕시대에 천부삼인을 새긴 거울을 받들어 모시고 천제를 지내러 가는 광경을 기록으로 전했다. 천부삼인을 돌이나 청동에 새겨야 했던 이유는 그것이 종교적인 신표가 되기 때문이었다.



<단군신화>에서 한웅천왕이 하강하는 장면이 <삼한관경본기>에서는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인 모습으로 기록되었다.



“크게 제사지내는 곳이 있으니, 곧 대일왕大日王이 제사지내는 곳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한웅이 여기까지 순수하여 사냥하였기 때문에, 그 제사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풍백은 천부를 거울에 새겨 앞서 가고, 우사는 북을 치면서 돌아가며 춤을 추고, 운사는 백검으로 호위하였으니, 대저 천제-한웅천왕이 산에 임하실 때의 의식이 이처럼 장중하였다.”



옛날에 한웅천왕의 행차행렬이 마치 오늘날의 지방축제 때 거리를 행진하는 군대가장행렬과 비슷하였다. 이 행렬은 풍백이 인솔하는 한 패, 우사가 거느리는 한 패, 운사가 거느리는 한 패 등 모두 세 패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거울을 받들고 가는 사람이 풍백이었다. 이는 그가 무당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무당의 우두머리가 거울을 들고 가는 의장행렬이 한웅천왕 때에 있었다.



풍백이 제관-무당이었으므로, 천부를 새긴 거울을 들고 가는 의장행렬이 이미 한웅천왕 때부터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우사가 북을 치며 돌아가며 춤을 추었으니, 풍이로부터 물려받은 문물文物인 길굿패가 그때에도 길굿을 하며 이동했다고 볼 수 있다.



초재 때 운사가 백검伯劒으로 호위한다는 기록이 있다. 백검은 풍백이 차는 검인데, 도교가 생겨나면서, 도사가 초재 때 쓰는 나무칼로 변했다.



백검은 후대에 와서, 운검雲劒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외국사신이 참석하는 궁중연회를 할 때, 판서 등 지체 높은 원로대신들로 운검을 세웠다.



단군신화에서, 한웅천왕이 천왕이 되기 전에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에 강림하였을 때에도 의장행렬이 이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3) 천부인에서 3의 의미



三이라는 수는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사유체계의 기본수이다. 우리는 三을 우리의 의식 속에 내장되어 있는 수리체계를 의미하는 수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리체계가 무엇이냐고 하는 물음에 대하여 三이라고 대답하면 되는 것이다. 서양 사람이나, 지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수리체계 2와는 다른 수리체계이다.



2라는 수리체계는 1과 1이 대립과 갈등이라는 결정과정을 거쳐서 투쟁과 소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1대 1이 대립하며 갈등을 일으킬 때, 다른 1이 중재를 나섬으로써 조화와 화해가 가능해진다. 이 세 번째의 1이 三이다.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三이라는 숫자를 우리가 선호하는 이유는 우리민족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집단무의식 가운데에 三이라는 수가 자리 잡고 있어서,우리의 생각을 통제하고 조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사결정에 삼세 번, 술을 마셔도 3배를 일상화 하고 있다. 三은 二가 갖는 극단적 대립과 갈등을 조정하는 조정의 수를 피하기 위하여 조상이 우리의 사유체계 안에 심어 놓은 놀라운 정신적 문화유산이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천부삼인은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식의 가시화이기도 하다. 상고시대의 사람들은 해와 달과 북두칠성을 가지고 이를 설명하였다. 해를 양으로 달을 음으로 본다. 북두칠성은 양두성 음두성의 둘로 나누어 북두칠성이 가지고 있는 음과 양의 성질이 해의 양과 달의 음의 대립을 조정하고 통제하여 조화를 이루게 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한다고 보는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인 해와 달과 북두칠성을 인간의 사유체계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키워드가 三이라는 숫자이다. 이 三이라는 숫자, 해와 달과 북두칠성을 천부왕인天符王印이라고 하였다. 천부왕인은 삼이라는 수, 해와 달과 북두칠성을 왕의 징표로 쓰기 위하여 도안하여 만든 일종의 도장이다. 이것이 천부삼인이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는 단군왕검의 태자 부루가 하나라를 세운 우사공을 만났을 때 천부왕인을 내보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한다.



“나는 북극수정의 아들이라…천부왕인을 내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을 패용하면 능히 위험한 곳을 다녀도 위험이 없을 것이며’…”라고 하였다. 천부삼인을 제왕의 부작으로 쓴 경우라고 하겠다.



우리 무당은 굿을 할 때 칠성거리를 구연한다. 칠성거리는 달리 심신거리라고도 하는데, 칠성거리는 천부삼인을 굿거리로 만들어 구연해 온 대단히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천상옥경 옥황전에 성명 삼자 기록하고, 오른 어깨에 일광패요, 왼 어깨에 월광패라, 오른손에 복끈 들고 왼손에 명끈 잡아 인간세상 환송하여 보낼 적에…”



무가 칠성거리에서 북두칠성을 하나님의 기운으로 친다. 북두칠성의 조정하고 통제하는 능력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는 것이다. 위 무가에서 일광패는 인간이 세상에 태어날 때 타고나는 해로부터 받는 기운의 표시요, 월광패는 인간이 세상에 태어날 때 달로부터 받는 기운의 표시이다. 무당이 신당에 걸어두는 명두가 이렇게 무가로 만들어져 불리고 있다.



천부삼인의 철학적 변형은 일석삼극一析三極으로 불리는 <천부경天符經> 논리의 발생이다. 일석삼극은 씨가 발아할 때 떡잎 2개가 나오고, 그 뒤를 이어서 본 잎이 나오는데, 이러한 자연의 현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일석삼극은 1 다음에 2가 나오지 않고 3이 나온다는 뜻이다. 



또한 우주를 운행하는 힘이 일석삼극의 원리에서 나온다고 보는 것이 <천부경> 해석자의 생각일 수 있다. 이 원리를 삼태극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터넷을 통하여 우리의 상고시대 역사를 공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인터넷 카페에 역사카페를 가지고 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쓴 글을 서로 공유하며 이견을 조정하기도 하고, 목소리를 하나로 내기도 한다.



강단사학에서는 이러한 공유가 불가능하므로, 인터넷 사가들이 자신들이 스스로 우리 역사학계를 주도할 수 있는 모임을 결성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역사를 공유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고 본다.



필자가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에게 三이라는 사유체계가 있고, 이 사유체계가 다수의 이견을 조정하고 통제하고 조화하는 기운이 있기 때문이다.



3 在天, 在世, 在家의 三合을 이루어야 在世理化의 道를 실현해



재세在世에서 세世는 인간들이 사는 나라를 의미한다. 배달나라로 볼 수 있다. 하늘을 부父라고 한다면, 世는 모母라고 할 수 있다. 부모가 있으니, 자손이 재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 모· 자손이 천지인이 되어 삼합을 이루면, 천지인이 합일하여 재세이화의 도를 실현했다고 할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도를 실현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서, 도道가 지전地轉에 합치한다(而合於地轉)고 했으므로, 도가 천도天道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지전地轉이 지도地道를 행行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지도는 황도黃道를 행하는 것이고, 황도는 천도天道를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도는 무엇인가? 천도는 12진辰을 따라가는 것이다. 12진은 칠성이 행하는 길이므로, 칠성을 따라가는 것이다.



천도에는 태양의 도인 황도黃道의 근원이 되고, 달의 도인 백도白道의 근원이 된다. 아울려 지도地道의 근원이 된다. 이렇게 천도에는 황도· 백도· 지도가 포함되어 있다. 황도는 태양의 길인 태양의 궤도를 의미하고, 백도는 달의 길인 달의 궤도를 의미하고, 지도는 지구의 길인 지구의 궤도를 의미한다.



지구가 지도를 따라 황도를 도는 것을 공전公轉이라고 하고, 스스로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을 자전自傳이라고 한다. 공전과 자전이 있음으로써 사계절이 생겨난다. 사계절은 원형이정이다. 사계절은 재세에 영향을 미친다.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자들을 살린다. 재세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 안에 있다. 그러므로 지전에 합치한다고 한 것이다.  



재세가 있으므로 재천在天이 있을 수 있고, 재가在家가 있을 수 있다. 재세가 천天 의 안에 있으므로 재천이 되고, 재가가 재세에 있으므로 재가가 된다.



재가의 주체는 인人이다. 그러므로 재세의 주체도 인이 될 수 있고, 재천의 주체도 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이치理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이치를 그르치지 않는 것이 재세의 도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도리에 합치하려고 하는 것을 이화理化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모두 재세이화의 도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재세이화세계 멸망의 역사



재세이화세계는 한웅천왕이 세운 배달나라가 다스리던 시대를 의미한다. 배달나라는 9구려黎族이 모여 중원中原 땅에서 동서남북 4극체제極體制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배달나라에 속한 청구국靑邱國의 치우천왕蚩尤天王 때에 와서 황제黃帝가 4극체제에 도전하기 시작하면서 유망· 황제· 치우천왕으로 대표되던 패권주의가 무너질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결국 탁록의 기주冀州에서 탁록대전涿鹿大戰으로 불리는 10년 전쟁에서 치우천왕(배달나라의 14세 자오지 한웅)이 황제에게 패하여 전사함으로써 천하는 황제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황제는 한웅천왕 때 농관農官을 지낸 고시高矢의 후예인 소전少典의 배다른 차자次子였고, 아직도 소전의 적자嫡子이자 장자長子인 유망楡罔(배달나라의 15세 치액특 한웅일 가능성이 있다)의 후예인 전욱고양顓頊高陽가 건재했다.



전욱고양이 제위帝位에 있을 때 황제의 후예인 제곡고신帝嚳高辛이 그의 측실의 아들 지摯를 데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전욱고양(배달나라의 16세 축다리 한웅일 가능성이 있다)은 무너졌고, 제곡고신의 천하가 되었다. 이때 치우천왕의 후예인 천일태제天一太帝 한인桓仁(배달나라의 17세 혁다세 한웅)이 BC 2457년에 단국檀國을 세웠다. 단국은 2세 홍제洪帝 단웅檀雄(배달나라의 18세 거불단 단웅)을 거쳐서 3세 태일성제太一聖帝 단검檀儉이 대를 이었다. 그는 무진년 BC 2333년에 태일상제太一上帝로 즉위하고 나라 이름을 배달나라倍達那羅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22년 후인 BC 2311년에 나라이름 배달나라를 조선으로 고쳤다. 

 

치우천왕과 황제와의 전쟁, 전욱고양과 제곡고신의 전쟁을 반영한 신화가 중국의 창조신화로 전해 오는 “여와와 복희의 우주창소신화(보천신화)”이다. 



이 ’보천補天신화’에 대하여, 이제는 지금까지 이 신화를 보아온 중국인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동이족의  관점에서 달리 보고, 새롭게 우리 해석을 해야 할 때라고 본다. 우리가 단군신화를 잘못 보고 잘못 해석해 온 오류가 이 신화 해석에서도 그대로 답습이 되고 있다.



요즈음 신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단군신화 해석의 오류를 신랄하게 지적하기 시작하였고, 단군신화 해석을 업그레이드함으로써, 단군신화가 인류 최고最古의 신화임을 입증하려 하고자 한다. 상당한 성과가 인터넷의 카페·블로그·홈페이지 상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보천신화’에서도 단군신화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와 같은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우리 조상이 현재의 중국대륙에서 역사를 시작하였고, 그 역사가 무려 12000년 이상이나 되기 때문에, 신화재해석의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여성신화>(집문당 2003.9.26.간행)에는 ‘동아시아고대 학회 편’으로 ‘여와신화’  35쪽 분량의 글이 실려 있다. 이 글 ‘2. 여와 그 우주의 아르케 1) 왜 보천신화인가 서두에서 ‘여와보천신화’를 인용한다. 이 신화해석에서 오류를 지적해 냄으로써 이 신화가 우리 조상의 신화를 중국의 신화로 둔갑시킨 것임을 아울러 지적해 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우리의 신화와 역사를 올바로 살려낸다는 의미가 있고, 왜곡되어 화하족의 신화로 잘못 알려진 창조신화를 우리의 신화로 되돌린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재세이화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아주 오랜 옛날 우주의 사극(四極)이 무너지고, 온 천하의 별들이 갈라져서, 하늘은 대지를 제대로 덮을 수가 없었고, 땅 또한 만물을 두루 안아서 실을 수가 없었다. 온 세상은 활활 타는 불길이 치솟아 꺼지지 않았으며, 질펀하게 넘치는 강물과 홍수는 그칠 줄 몰랐다. 맹수들은 선량한 백성들을 잡아먹었으며, 사나운 새들은 늙고 연약한 것들을 낚아채갔다.

이에 여와는 다섯 빛깔의 아름다운 돌을 다듬고 구워서 하늘의 터진 틈을 깁고, 커다란 자라의 다리를 잘라서 무너진 우주의 사방에 기둥을 세워 하늘을 떠받쳤다. 흑룡(黑龍)을 잡아 죽임으로써 천하의 백성들을 구제하고, 갈대를 태워 그 재를 지상에 쌓음으로써 넘치는 홍수를 그치게 하였다. 마침내 푸른 하늘은 기워졌고, 우주의 사극도 바르게 되었으며, 홍수도 마르고, 천하도 평안해졌다. 흉악한 맹수들은 죽었으며, 착한 백성들은 살아났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대지를 등에 대고, 하늘을 품에 안을 수 있게 되었다.”

往古之時 四極廢 九州裂 天下兼覆 地不周載 火爁焱而不滅 水浩洋而不息 猛獸食顓民 鷙鳥攫老弱 於是女媧鍊五色石以補蒼天 斷鼇足以立四極 殺黑龍以濟冀州 積蘆灰止淫水 蒼天補 四極正 淫水凅 冀州平 狡蟲死 顓民生 背方州 抱圓天



위에 인용한 글은 역사를 신화로 바꾸어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이지 신화가 아니다. 약간의 신화성을 가미하여 신화로 보이게 했을 뿐이다.



이 글을 왜 역사로 보아야 하는가? 상고시대에 우리 조상이 주로 활동했던 역사무대가 그대로 본문에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의 지명과 인명과 전쟁이 그대로 기술되어 있다. 위 글을 신화로 볼 수 없게 하는 단서 몇 가지를 간추려 보기로 한다.



이 글에는 중요한 지명 기주가 나온다. 기주는 지금도 중국에 있는 지명이다. 이곳에 탁록이 있고,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에 청구靑丘의 치우천왕과 헌원軒轅의 황제가 치열하게 전쟁을 벌인 곳이다. 전쟁의 결과에 대하여 우리 쪽의 기록은 불분명하고, 황제 쪽의 기록은 치우천왕이 황제에게 패하여 살해당했다고 하였다.



구주九州는 9900년 전에 한인천제桓因天帝가 한국桓國을 세우고 한국을 九州로 분할하여 통치하였고(<부소보서扶蘇譜序>), 이후로 역대 나라들이 구주체제를 변경하지 않아서 그대로 유지되어 온 것이다. 탁록이 있는 그곳을 달리 귀주鬼州라고도 하였다.



다음은 인명이다. 본문에서 전민顓民이라고 하였는데, 전민은 전욱고양 顓頊高陽의 백성이라는 뜻이다. 전욱고양이 제위帝位에 있었으므로 백성을 전민이라고 하였다. 전욱고양 이후에 백성을 여민黎民이라고 하였는데, 여민은 전욱고양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도록 내정되어 있었던 중여곤衆艅鯀의 백성을 의미하였다.



맹수가 전민을 잡아먹었다고 했는데, 맹수는 전민의 적대세력인 황제黃帝를 의미한다. 황제의 군대가 전욱고양의 백성을 공격하여 무차별로 죽였음을 표현한 말이다. 또한 지조鷙鳥가 노약자를 잡았다고 했는데, 지조鷙鳥(매)는 전욱고양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제곡고신帝嚳高辛의 아들 지摯를 의미한다.



여와女媧는 배달나라 초기의 사람이다. 그는 복희伏羲의 누이로서 복희의 부인이 된 사람이다. 여와가 오색의 돌을 갈았다고 한 것은 다섯 방위, 다시 말해서 동서남북중앙에 퍼져 있었던 오가五加를 상징한다. 여와의 후예가 그들을 모아서 멸망해가는 배달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웠음을 나타낸 것이다.



여와가 기주로 건너가 흑룡을 죽였다고 했는데, 이 말은 말이 되지 않는 말이다. 여와는 배달나라 초기 때 사람이고, 흑룡으로 표현된 사람은 여와보다 8대나 후대의 사람 치우천왕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같은 시대에 놓고 여와가 치우천왕을 죽였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치우천왕시대에 기주로 건너가서 흑룡(치우천왕)을 죽인 사람은 여와가 아니라 황제이다. 황제는 치우천왕(흑룡)을 죽이고 나서 스스로 황룡黃龍이라고 하였다.



치우천왕과 황제는 모두 풍이족 출신이다. 교충狡蟲을 죽이니 전민이 살아났다고 했는데, 교충은 간교한 풍이족風夷族이라는 뜻이다. 풍이족이 뱀(살모사)을 인종의 아이콘으로 쓰고 있었다. 같은 풍이족 출신으로서 치우천왕 쪽을 비하하여 교충이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어느 쪽이 교충인가를 알 수 있다.



사극을 폐지하여 구주가 갈라졌다고 한 것은 황제黃帝-소호금천少昊金天-제곡고신帝嚳高辛-지摯로 이어지는 황제와 황제의 후예들이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는 우주구성원리를 건국建國의 기초로 삼은 배달나라로부터 이탈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원형이정이라는 우주구성원리를 건국의 기초로 한 사람이 한웅천왕이었고, 그는 원형이정을 기초로 하여 재세이화在世理化라는 국가이념을 확립하였다. 재세이화는 화백和白·치덕治德·책화責禍를 내용으로 한다.



황제가 배달나라체제에 반기를 들고 이탈하였으므로, 사극이 폐지되고 구주가 갈라졌다. 사극四極은 배달나라에 속한 유백국楡伯國(유망의 나라), 헌원국軒轅國(황제의 나라), 청구국靑丘國(치우천왕의 나라)체제를 의미한다. 사극은 방위方位의 개념인데, 동쪽을 창룡, 서쪽을 백호, 남쪽을 주작, 북쪽을 현무라고 하였다.



치우천왕을 흑룡이라고 했는데, 흑룡은 현무방위에 있다. 치우천왕이 다스리는 풍이족을  나타낸 그림이 고구려벽화 사신현무도四神玄武圖이다.



이상의 역사 자료를 가지고 본문을 재해석하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나온다.



“아주 오랜 옛날에 전쟁이 일어나 배달나라를 지탱해 온 나라의 기둥들이 다 무너지고, 구주九州의 체제 또한 분열하여 나뉘어졌다. 나라가 망하니, 땅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여기저기 불길이 치솟아 꺼지지 않았으며, 물이 넘쳐 바다를 이루기를 그치지 않았다. 황제의  후손인 제곡고신의 군대가 유망으로부터 유백국의 적통을 계승한 전욱고양의 백성을 학살했다. 제곡고신의 아들 지가 늙고 약한 백성을 납치해갔다.



이에 배달나라시대에 여와국을 창설한 여와의 후예들이 나타나 흩어진 오가의 백성들을 끌어 모아 다시 배달나라를 보수하여 일으켜 세우고, 남방의 별국鼈國의 백성들을 데려다가 다시금 원형이정 재세이화의 사극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황제가 기주로 건너가 치우천왕을 살해하여 그 이후로 전국에 물이 넘치는 홍수가 끊이지 않았으나, 갈대를 모아 태워 그 재를 비방으로 써서 홍수를 잠재우고, 나라의 형상을 다시 보완하니, 나라의 원형이정이 바로 섰고, 홍수가 말랐으며, 홍수에 시달리던 기주가 편안해졌다. 또한 풍이족의 상징인 뱀을 잡아 제사지내니 전란에 시달리던 백성이 생기를 되찾았다. 이로써 방주-방형의 땅의 배후에 둥근 하늘을 껴안을 수 있었다.”   



이상으로 여와의 후손이 망한 배달나라의 후손들을 끌어 모아 보천, 즉 나라를 보수하였듯이, 왜곡된 신화를 여와의 후손이 보천 하듯 바로잡아 보았다. 이로써 여와의 보천신화는 배달나라 말기에 생성된 구려족의 역사로 해석이 되는 것이다. 



5 오늘날 재세이화 실현의 의미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패러다임 쉬프트의 관점에서 재세이화는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히 한다는 점에서 필수이다. 낡은 민족주의를 내세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판 중원의 시대에 나의 본색을 밝혀야 한다는 관점에서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