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우리역사

《 화랑세기》

오늘의 쉼터 2008. 4. 17. 21:51

화랑세기

 

 <1>어떤 책인가


 한국사를 뒤흔드는 새로운 사서인가, 한 독학자의 희대의 위서인가. 한국고대사의 비밀을 해명해줄 「역사의 타임머신」인가,

한국사의 치부를 들춰내는 「판도라의 상자」인가. 화랑세기 필사본이 발견된지 11년. 오랜 진위논쟁에도 불구하고 「화랑세기」는 고대 한국인의 삶의 모습을 그려내는 귀중한 사료다. 본지는 화랑세기 필사본에 대한 학계의 연구성과를 소개하는 한편 이 사서에 담긴 고대신라의 사회와 풍속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지금으로부터 11년여전인 1989년 2월16일자 국제신문 1면 머릿기사. 「花郞世紀 필사본 발견」이라는 시커먼 헤드라인이 독자들의 시선을 단번에 잡아당겼다.「고대 신라사 다시 써야 할 획기적 사료」, 「전설의 사서 천3백년만에 「역사」로 확인」이라는 굵은 제목을 함께 단 이 특종기사가 지난 10년간 한국 사학계의 최대 쟁점이 돼온 「화랑세기 논쟁」의 시작이었다.
 당시 이영희기자가 쓴 그 기사는 「책이름만 전해 내려오던 국보급의 「화랑세기(花郞世紀)」 필사본이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화랑세기는 빈약한 고대사 자료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글 내용에 있어 기존의 신라사를 다시 써야할 만큼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자못 흥분에 찬 내용으로 시작된다.
 국제신문은 특종보도에 이어 재야사학자 이태길(81·광복회 부산지부장)씨의 번역으로 6회에 걸쳐 화랑세기 전문을 연재했다. 본사의 보도 이후 사학계는 큰 충격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 동안 화랑과 신라사에 대한 연구는 절대적으로 「삼국사기」 등 후대의 사서에 의존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화랑세기의 기사 중 삼국사기에 인용된 것은 겨우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이(화랑)에서 선발되었고 뛰어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에서 나왔다)」이라는 16자. 다시 말해 화랑세기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선 찾을 수 없는 고대신라 사회상과 화랑에 대한 정보가 그만큼 풍부하게 실렸다는 이야기다.
 화랑세기 필사본의 발견은 학계에 10년 동안의 치열한 진위논쟁을 몰고왔다. 한국 고대의 사회 및 풍속사를 해명해주는 「역사의 타임머신」이라는 찬사의 한편으론 이 책이 필사본이며 기존의 사서의 내용과는 일부 다르다는 점을 들어 후대의 위작일 것이라는 주장도 함께 제기됐던 것. 진위논쟁이 계속되던 중인 지난 95년 서울대 노태돈교수에 의해 이 화랑세기 보다 더 자세한 화랑세기(花郞世記)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본사가 보도했던 최초의 화랑세기는 「발췌본」으로, 95년에 새로 등장한 화랑세기는 「필사본」으로 불리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화랑세기는 1천3백여년이란 오랜 세월동안 묻혀있다 세상에 나온 것일까.
 이 책의 발췌본과 필사본은 충북 괴산출신으로 한학을 공부하다 81년 44세의 나이로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난 김종진(金鍾鎭)씨가 한문 스승이었던 박창화(朴昌和)씨에게 물려받은 것. 한학자인 박씨는 일제시대 일본 궁내성 도서료에 근무하면서 화랑세기 원본을 보고 필사한 것이며, 발췌본은 필사본의 내용중 문란한 성관계 등 유교적인 관점에서 껄끄러운 부분을 빼고 발췌해 쓴 것이란게 정설이다. 김종진씨가 오랜 세월 보관하던 것을 김씨의 사후 그의 아내인 김경자(56·부산 북구 모라동)씨가 89년초 당시 부산시 문화재 감정관이었던 양맹준씨에게 감정을 의뢰함으로써 세상에 나오게 된 것.
 화랑세기는 서기681~687년 사이에 신라시대 역사가 김대문이 쓴 책으로, 그동안은 이름만 전해졌을 뿐 그 내용이 전혀 전해지지 않아 역사가들 사이에 「신비의 사서」로 알려진 책이다. 「화랑세기」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처럼 후대인 고려시대에 쓰여진 사서가 아니라 당대인이 썼다는 점에서 사료적인 가치가 더욱 크다.
 이 책은 540년에서 681년까지 있었던 신라 화랑들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32명의 전기를 담은 책이다. 이 책에는 화랑들의 계보는 물론 신라시대의 왕위계승 방식, 왕실의 근친혼, 동성애 등 분방한 성풍속과 권력 쟁탈을 둘러싼 음모 등 당시 왕족들과 화랑들의 생활상, 그리고 당대 사회의 정치사와 풍속사가 거울처럼 훤히 드러나 있다.
 발췌본은 제1세 풍월주 위화랑(魏花郞)에서부터 15세 풍월주 김유신에 이르기까지 차례대로 기술돼 있으나 김유신 편은 중도에서 내용이 떨어져 나갔다. 필사본은 앞부분이 결락됐으나 15세 풍월주 김유신외에 16~32세 풍월주에 관한 기록이 더 포함돼 있다. 즉 발췌본과 필사본을 합치면 풍월주의계보가 모두 나오는 것이다.
 화랑세기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기존의 사서와도 다른 내용이 많다. 삼국사기가 신라의 골품제도를 성골과 진골로 구분하는 것과는 달리 화랑세기는 대원신통(大元神統)과 진골정통(眞骨正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김춘추의 아버지 용수와 13세 풍월주(風月主) 용춘을 이름만 다를뿐 동일인으로 보지만 화랑세기에서는 형제로 기록하는 등 400명이 넘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기록을 통해 당시 관직 관등제도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들을 밝히고 있다.
 화랑세기의 작자 김대문은 신라의 귀족 자제로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으며 「고승전」 「화랑세기」 「악본」 「한산기」 등 몇권의 전기를 썼다고 한다. 김대문의 가계를 보면 1세 풍월주 위화랑이 5대조이고 4세 풍월주 이화랑이 고조부, 12세 보리공이 증조부, 20세 예원공이 조부, 그리고 28세 오기공이 부친이었다. 김대문의 부친 오기공은 화랑의 세보를 「향음」으로 저술했으며 김대문은 이를 바탕으로 화랑세기를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기공은 27세 풍월주인 김흠돌의 난을 진압했는데 김대문은 난에 가담한 집단과 화랑세습가문으로써 난을 진압한 가계라는 사실을 역사에 남기려는 것이 화랑세기를 쓴 가장 큰 이유로 분석되고 있다.
 학계의 치열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화랑세기는 아직까지 진위여부가 확정되지는 않은 상태다. 그러나 진본이 맞을 것이라는 시각이 조금씩 설득력을더해가고 있다.

 

<2> 학계의 진위논쟁


 박창화씨(1889∼1962)가 일본 궁내성 도서료(현 서릉부)에서 한국 관련문헌자료 담당 촉탁사서로 근무할 당시 필사했다는 「화랑세기」는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 원본을 베낀 것일까, 아니면 박씨가 다른 책들을 참고로 해 창작한 것일까?
 89년 본지에 의해 처음 세상에 나온 발췌본 「화랑세기」는 한국 고대사학계에 이 책의 사료적 가치를 둘러싼 논쟁을 불러왔고 95년 필사본 「화랑세기」가 다시 알려짐으로써 한국고대사학계는 본격적인 논쟁에 돌입했다.
지금은 국문학계까지 가세해 논란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89년이후 지금까지 「화랑세기」관련 논문은 모두 50여편이나 된다. 어떤 학자는 이런 현상을 두고 『「화랑세기」가 마치 한국고대사 연구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을 불러일으킨 느낌을 받았을 정도』라고 밝히고 있다.

 「화랑세기」가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대표 학자는 노태돈교수(서울대 국사학과), 진본의 필사본이 맞다고 주장하는 선두주자는 이종욱교수(서강대사학과). 그 전까지는 조심스럽게 논쟁이 진행됐으나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격돌(?)한 것은 1995년 역사학회세미나에서였다.
 이종욱교수가 이 해 4월 제325회 세미나에서 발췌본 「화랑세기」의 가치를 공식적으로 처음 인정하는 발표를 하자 노태돈교수가 두달 후 열린 한국고대사연구회 월례발표회에서 이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며 발췌본과 필사본「화랑세기」는 1930년대 이후 1945년 이전에 박창화씨에 의해 만들어진 위서로 단정지었던 것. 여기에 여러 학자들이 가세해 진위논쟁에 불을 지폈다.

 우선 위서를 주장하는 학자들의 견해.
 노교수는 97년 「한국사연구」에 발표한 또 다른 글에서 박씨가 지은「도홍기(桃紅記)」 「홍수동기(紅樹洞記)」 「어을우동기(於乙于同記)」등 한문소설의 주요 모티브가 남녀간의 애정과 성관계이며 박씨의 「화랑세기」도 그런 창작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노교수는 『박씨의 「화랑세기」가 진본을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박씨가 쓴 다른 책들을 검토하지도 않는 등 학자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할 자료파악과 실증 문제에 소홀했다』며 『지금의 진위논란이 학문연구에서의 상식과 규칙이 지닌 의미를 한번쯤 되씹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권덕영교수(부산외국어대 사학과)는 95년 「필사본 「화랑세기」의 사료적 검토」주제의 논문을 통해 이 책은 위작인 듯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듯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며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으나 최근 나온 「한국학보」 2000년 여름호에선 위서로 보는 견해에 동조하고 있다.
 권교수는 박창화씨가 필사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적어도 두차례 이상 수정과 가필, 그리고 삭제를 가한 흔적이 있으며 이러한 글자가 무려 332자나된다고 밝혔다.
 이기동교수(동국대 사학과)도 박씨의 「화랑세기」에는 여러 화랑집단의 인적구성의 차이라든가 혹은 기질상의 차이가 상세히 기술된 점에 대해 이처럼 화랑단체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기술한다는 사고양식 자체가 이미 근대인의 것이므로 틀림없는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위서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박창화씨가 필사본 「화랑세기」를 좀 더 신빙성 있게 보이기 위해 불필요한 부분을 빼거나 필요에 따라 글자를 새로 더하거나 고치고 문장의 순서를 바꾸어 발췌본 「화랑세기」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진본의 필사본임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반론은 이렇다.
 이종욱교수는 위서를 주장하는 쪽은 박씨가 필사본을 만든 후 그것을 기초로 발췌본을 다듬어 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은 발췌본이 필사본에 비해 오히려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 이를테면 필사본에는 사다함이 「귀당비장(貴幢裨將)」이 된 것으로 나오고 있으나 발췌본에는 「귀당(貴幢)」이된 것으로 나오는 등 발췌본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또 위서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박씨의 창작품으로 보고 있는 필사본의 향가 「풍랑가」와 「청조가」에 대해서도 이교수는 박씨가 필사했던 1930~40년대엔 향가연구가 태동단계였으므로 박씨가 현실적으로 창작할 능력이 없었을 것이라는 반론을 편다. 이 2수의 향가는 김완진 서울대 명예교수와 정연찬 서강대 명예교수등 국문학자들 사이에서도 위작이라는 설과 현존 최고의 향가라는 주장이 대립되고 있다.
 이종욱교수는 신라의 사회체제를 현장중계하듯이 쓴 「화랑세기」를 현재의 관점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신라인의 시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교수는 최근 기자에게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본을 보고 베꼈다는 주장의 근거를 더 확보, 곧 단행본으로 발간하려고 출판사에 원고를 넘긴 상태』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재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객원교수도 이미 89년에 「화랑세기의 사료적가치-최근 발견된 필사본에 대한 검토」주제의 논문에서 김대문이 아니고는 화랑의 세보를 이렇게 소상히 기술할 수 없으며 신라사회의 다른 문제도 연구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며 발췌본 「화랑세기」의 가치를 주장했다.
 「화랑세기」의 가치를 인정하는 다른 학자들도 그 책에 나오는 인명 숫자 지명 관명 및 화랑관계 용어들은 「삼국유사」와 「삼국사절요」 등에 나오며 진본 「화랑세기」에도 오탈자가 없다고 보기 어려운데다 필사과정에서 다시 오탈자가 생겼고 문체도 다소 변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사학자인 이도학 정재훈 장지훈 이태길씨 등이 발췌본 「화랑세기」의 신빙성을 지지하는 글을 발표했고 최광식(고려대 한국사학과) 이강래교수(전남대 사학과) 등도 「화랑세기」의 사료적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있다.
 국문학자인 김학성교수(성균관대 국문학과)와 이종학씨(서라벌군사문제연구소장)도 이종욱교수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또 북한 학계도 1991년 펴낸 「조선전사」 제4권에서 필사본 「화랑세기」의 내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등 사료로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같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의 목적이 화랑세기의 진위여부를 가리려는 것은 아니다. 논쟁은 학자들의 몫으로 일단 넘겨두고, 이 시리즈는 발췌본과 필사본 「화랑세기」를 통해 신라시대의 사회상을 조명해보고자 하는 목적에 충실하려고 한다.
 

<3>풍월주의 계보

 

 1세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 위화랑(魏花郞)의 딸인 옥진공주는 어느 날 칠색조가 가슴에 안기는 꿈을 꾸었다. 그녀는 법흥왕과 영실공이 축구를 하고 있는 내정으로 들어가 법흥왕의 손을 끌어당겼다. 졸립고 헝클어진 머리를 한 그녀는 법흥왕에게 『좋은 꿈을 꾸었는데 귀한 아들을 낳을 징조이니 잠자리를 함께 하자』고 은근히 말했다. 그러자 법흥왕은『7색은 섞인 색이고 새는 여자다. 이는 빈첩(嬪妾)의 징조이니 네 지아비와 함께 하라. 대신 아들을 낳으면 태자로 삼고 딸을 낳으면 빈(嬪)으로 삼을 것이다』고 말했다.
 법흥왕과 내연의 관계(?)였던 옥진공주의 지아비는 법흥왕의 누이 보현공주의 아들인 영실공이었다. 다시말해 외삼촌이 조카며느리와 정분이 난 셈이다. 이에 옥진과 영실공은 관계를 하여 딸인 묘도(妙道)를 낳았다. 묘도가 자라자 법흥왕은 약속한 대로 그녀를 빈으로 삼고 사랑을 나누었다. 법흥왕은 생질의 딸과 다시 내연의 관계를 맺었던 것. 그런데 법흥왕은 양기가 너무 강했으나 묘도는 작고 좁아 그를 맞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밤이 되면 그녀는 괴로워 했다.
 「화랑세기」 11세 풍월주 하종(夏宗)조에 나오는 내용이다. 옥진공주는 골품이 없었으나 법흥왕의 후궁이 돼 비대공(比臺公)을 낳았으며 진골정통(眞骨正統)과 대립했던 대원신통(大元神統)의 시원이 된다.
 이 책에는 이처럼 왕실과 풍월주들의 복잡한 근친혼과 출생관계가 얽혀있다. 묘도는 남편인 2세 풍월주 미진부공과 사랑을 나누어 신라최대의 자유부인(?) 미실을 낳았다. 「화랑세기」에서 보이는 신라는 오늘날의 잣대로서도 이해되지않을 만큼 근친혼이 성행했고, 문란한(?) 성풍속을 가진 사회였다. 이같은 기록이 한국사의 순수성을 깎아내리려는 일제의 음모가 아니냐는 시각에서 위작 주장의 한 근거가 되고 있기도 하지만 당대의 신라를 유교적 시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어쨌든 신라사회는 완전한 의미에서의 일부일처제 사회는 아니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화랑세기」에는 풍월주의 출생배경과 각 풍월주들의 성격, 외모, 혼인과 남녀관계, 활동, 임명과 퇴임, 화랑도의 조직, 파맥 등 다양한 내용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이 책에는 이러한 내용 외에 풍월주들에 대한 찬(贊)과 세계(世系)가 나온다. 그런데 26세 진공(眞功)조부터는 찬과 세계가 없고 27세 흠돌(欽突)조부터는 몇 세 풍월주인지도 표시하지 않고 기록 분량도 적다. 원본 「화랑세기」를 쓴 김대문의 아버지인 28세 오기공(吳起公)에 대한 기록도 마찬가지로 자세하지 않다.
 「화랑세기」가 풍월주의 전기인 만큼 풍월주의 기원에 대해 알아보면 1세 풍월주 위화랑조에는 지소태후가 국정을 맡자 위화랑을 사랑해 그를 풍월주로 삼았다고 한다. 지소태후는 법흥왕과 보도부인 사이에서 난 딸로, 작은 아버지인 입종공(立宗公)의 부인이 되어 아들인 진흥왕이 7세에 등극하자 섭정을 했다.
 이 책의 서문과 2세 풍월주 미진부공조에는 지소태후가 원화(源花)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해 국민들로 하여금 받들게 했으며 그 무리를 풍월이라했고 우두머리를 풍월주라 했다고 적혀있다. 원화는 옛날 중국 연나라 부인들이 미인을 많이 모아 이름하기를 국화(國花)라 했는데 이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 우리나라에서도 여자로써 원화를 삼게 되었다는 기록 역시 서문에 나온다.
 원화를 폐지한 시기가 「삼국사기」엔 진흥왕 37년(576년)으로 기록돼 있으나 진흥왕 원년(540년)에 풍월주를 설치한 것으로 나오는 「삼국사절요」「동사강목」 「동국통감」 등은 「화랑세기」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풍월주의 부인들은 선모(仙母) 또는 화주(花主)라는 지위를 차지했다.
 다음은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1세부터 32세까지 풍월주의 이름이다.
 △1세 위화랑(魏花郞) △2세 미진부(未珍夫) △3세 모랑(毛郞) △4세 이화랑(二花郞) △5세 사다함(斯多含) △6세 세종(世宗) △7세 설원랑(薛原郞) △8세 문노(文弩) △9세 비보랑(秘寶郞) △10세 미생(美生) △11세 하종(夏宗) △12세 보리(菩利) △13세 용춘(龍春) △14세 호림(虎林) △15세 유신(庾信) △16세 보종(寶宗) △17세 염장(廉長) △18세 춘추(春秋) △19세 흠순(欽純) △20세 예원(禮元) △21세 선품(善品) △22세 양도(良圖) △23세 군관(軍官) △24세 천광(天光) △25세 춘장(春長) △26세 진공(眞功) △27세 흠돌(欽突) △28세 오기(吳起) △29세 원보(元寶) △30세 천관(天官) △31세 흠언(欽言) △32세 신공(信功).

신문왕 원년(681년)에 그의 장인이자 김유신의 딸 진광(晋光)의 남편인 27세 흠돌이 일으킨 반란에 퇴역 및 현역 화랑이 다수 가담하는 바람에 반란이 진압된 직후 화랑제도가 폐지됐기 때문에 풍월주는 32세가 마지막이다.
 그후 화랑제도가 부활되지만 그 기능은 무사(武事)와는 거리가 먼 득도(得道)로 변질되었다. 또 「화랑세기」가 687년 이전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그 후의 일은 김대문 자신으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화랑세기」에는 남자 238명, 여자 180명 합해서 418명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풍월주와 일정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풍월주를 중심으로 한 화랑들은 계파가 있었다. 예컨대 7세 풍월주 설원랑조를 보면 8세 문노의 호국선(護國仙)파와 설원랑의 운상인(雲上人)파로 계파가 나뉜 것을 알 수 있다. 또 10세 풍월주 미생조에는 통합원류(통합파) 실파 문노파 이화류 가야파 등 5개파로 갈린 것이 확인된다. 이는 신라의 정치가 화랑의 계파를 통한 일종의 붕당체제로 운영됐음을 추정케 하는 대목이다.
 또 김대문의 3대조인 12세 풍월주 보리공이 화랑을 세습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관직을 원치 않은 것으로 봐서 신라사회에서의 화랑의 높은 지위도 알수 있다.
 「화랑세기」에는 540년 풍월주가 설치돼 681년 폐지될 때까지 32명의 풍월주의 전기가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는 것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당시 신라사회는 왕을 중심으로 운용되던 골품제 사회였다. 따라서 왕과 얽혀있는 풍월주의 세보는 당시 신라의 정치 지배 세력들을 망라하는 계보이기도한 것이다.


<4>화랑의 조직과 활동

 

 「화랑세기」를 통해 본 화랑도 조직은 크게 화랑, 낭두, 낭도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화랑 가운데 우두머리는 풍월주였고 그 밑에 부제가 있었다. 부제 아래의 화랑조직에 대해서는 8세 풍월주 문노조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문노는 좌·우 봉사랑(奉事郞)을 좌·우 대화랑(大花郞)으로, 전방(前方) 봉사랑을 전방 대화랑으로 만들어 각기 3부의 낭도를 거느리게 했다. 그 외에 진골화랑 귀방화랑 별방화랑 별문화랑 등의 직제를 두었는데 12~13세의 진골 및 대족의 자제 가운데서 원하는 자를 뽑았다. 그리고 좌화랑과 우화랑을 각 2명씩 두었고 그 밑에 각기 소화랑 3명과 묘화랑(妙花郞) 7명을 거느린 것으로 돼 있다.
 화랑이 거느리는 하부 집단인 낭두(郞頭)에 대해서는 22세 풍월주 양도공조에 그 내용이 나오고 있다. 원래 낭두에는 망두 신두 낭두 대낭두 상두 대두 도두 등의 등급이 있었는데 양도공은 대도두, 대노두를 더했고 도두 이하는 각기 별장을 거느렸다.
 24세 천광공조에는 대노두는 60살, 대도두는 55살, 도두는 50살, 대두와상두는 45살, 낭두와 대낭두는 40살까지로 한정한 것으로 돼 있다. 대도 중입망자는 망두가 되었고 그중 공과 재주로 천거된 자는 신두가 되었는데 망두만이 낭두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상선(上仙)과 상랑(上郞)의 마복자(왕이 총애한 화랑의 부인이 낳은 화랑의 아들로 일종의 왕의 양자)만이 「입망의 법」에 의해 낭두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낭두 밑의 낭도조직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22세 양도공조에는 「국초에 서민의 아들들도 준수하면 낭도가 되었다」고 기록돼 있으며 13~14살에 동도(童徒)가 되었고 18~19살에 평도(平徒)가 되었고 23~24살에 대도(大徒)가 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다시 말해 연령별로 소년에서 청년기까지 각각 편제가 이루어져 있었던 셈이다. 대도 즉 성인 낭도 가운데서 입망자는 망두가 되고 신두도 되었다. 또 망두 가운데서 낭두를 뽑은 것으로나온다.
 대도는 30살이 되면 병부에 속하거나 혹은 농공에 종사하는 일로 돌아가거나 향리의 장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낭도로 활동하는 기간이 정해진 것을 의미한다.
 풍월주를 물려준 화랑들은 상선 등의 지위를 차지하고 풍월주 위에 존재하는 자문역을 맡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풍월주의 부인들은 선모(仙母) 또는 화주(花主)로 화랑도의 운영에 일정한 역할을 했고 화랑도들의 집단인 낭문에는 「유화」가 있었던 것으로 봐서 여자들도 화랑도와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화랑도 중에는 이와 같이 공식적인 편제에 속하지 않았던 사도(私徒)도 있었다.
 화랑도의 활동도 알려진 것 보다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8세 문노조에는 화랑도 조직이 3부로 나뉘었고 각기 다른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나온다. 그중 좌삼부(左三部)는 도의(道義)·문사(文事)·무사(武事)를 담당했고, 우삼부(右三部)는 현묘(玄妙:춤과 음악)·악사(樂事)·예사(藝事)를 담당했다. 또 전삼부(前三部)는 유화(遊花:산천경개 유람)·제사(祭事)·공사(供事:조정의각종 공식 행사)를 담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7세 풍월주 설원랑조에는 설원랑의 낭도들은 향가를 잘 했고, 속세 떠나 유람을 즐긴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에 비해 문노의 낭도들은 무사(武事)를 좋아했고 호탕한 기질을 가졌던 것으로 나온다. 20세 예원공조에는 선도(仙道)는 보종공을, 무도(武道)는 유신공을 따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로 보건대 각 유파별로 전문으로 수련하는 과정이 어느 정도 차별성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24세 천관공조에는 공과 낭두들이 낭도를 거느리고 친히 활쏘고 말 달리는 것을 익혔는데, 모인 자들을 선발해 병부에 보충한 것으로 나온다. 천관공이 5년간 풍월주로 있는 사이 낭정은 무사(武事)를 중심으로 운영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화랑도가 전쟁 수행이나 반란 진압 같은 군사적 활동에 동원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9세 풍월주 비보랑조를 보면 진평왕 25년인 건복 25년(603년) 왕이 고구려의 내침을 막으려고 친정할 때 낭도들이 많이 수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비담의 난을 진압한 세력은 천관공이 거느렸던 화랑도들이었다. 즉 화랑도들의 활동은 순국 무사나 도의 연마, 명산·대천 유람, 노래와 춤 등의 활동 외에 다양한 활동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전회에서 언급한대로 화랑도의 조직이 주요한 정치세력이었으며 화랑도를 장악한 정치계파가 정권을 장악했다는 추론도 가능한 것. 특히 삼국통일 과정에서 화랑도들의 종군 활동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또 화랑도는 신라의 인재 양성기구이기도 했다. 화랑도는 다양한 문·무·예등 다방면의 교양을 습득했다. 12세 보리공은 15살에 화랑이 돼 토함공에게 사(史)를 배웠고, 이화공에게 가(歌)를 배웠으며, 문노공에게 검(劒)을 배웠고 미생공에게 무(舞)를 배웠다고 한다. 말하자면 화랑도는 일종의 전인교육 기관이기도 했다. 화랑도의 교육과 활동을 통해 뛰어난 자질을 가진 사람을 골라내 조정에 천거했던 것. 화랑들은 물론이고 서민인 평인들 중에서도 발탁돼 대사(大舍)까지 올라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한편 화랑도는 신라를 불교사회로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알 수 있다.
 화랑도는 신라의 골품제 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장치였다. 다시 말해 신라는 골품사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화랑도 집단을 사회화 정치화했던 것이다. 

 

 <5>마복자(摩腹子) 제도


 『네 배가 불러올수록 더 예뻐 보이는구나.』
 멀리서 닭이 홰를 치며 울었는데도 벽아부인을 끌어안은 비처왕은 지칠줄 몰랐다. 궁성밖은 안개에 싸인 채 희붐해지고 있었다.
 『저를 그토록 사랑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앵두같은 입술로 교태섞인 소리를 내며 왕의 가슴을 더욱 파고들었다. 그는 한 손에 잡힐만큼 작은 그녀의 얼굴을 입술로 부비면서 배를 쓰다듬었다.
 『제 아이도 태어나면 저처럼 사랑해주실거죠?』
 『그러고 말고. 내 친자식보다 더 아껴줄테니 염려하지 말거라.』
 달이 차 벽아부인이 아기를 낳았으니 이 아이가 1세 풍월주 위화랑이다.
하지만 위화랑은 어머니의 정부(情夫)인 비처왕의 자식이 아니고 벽아의 남편인 염신공의 아들이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위화랑은 얼굴이 백옥 같고 입술이 붉은 연지를 바른 듯하며 맑은 눈동자와 하얀 이를 지녀 이야기할 때면 마치 상큼한 바람이 나오는 듯 했다.
 그러니까 비처왕이 벽아부인과 사통을 하다가 그녀가 남편의 아기를 배자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여 출산할 무렵까지 사랑해 주었던 것이다. 일종의 양아버지랄까, 아무튼 비처왕은 출산 직전까지 벽아를 사랑해주다 남편에게 돌려보내고 위화랑이 태어나자 친자식처럼 보살펴주었다. 위화랑은 또한 왕을 아버지처럼 모시며 충성을 맹세했다.
 이처럼 부하의 부인이 임신을 하면 불러 아이를 낳을 때까지 사랑해주다 태어난 아이를 보살펴주는 대신 복종하게 하는 신라의 독특한 입양아(?)를 두고 「화랑세기」는 마복자(摩腹子)라 일컫고 있다.
 위화랑은 어머니 덕에 마복자가 되었으며 세상에서 부러워하는 마복칠성 가운데 들었다고 화랑세기엔 적혀있다. 마복칠성은 위화랑 아시공(阿時公) 수지공(守知公) 이등공(伊登公) 태종공(苔宗公) 비량공(比梁公) 융취공이다.
비처왕은 마복칠성의 어머니들이 아이를 가지자 벽아부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녀들을 사랑했고 아이들을 보호해 주었다.
 법흥왕이 마복칠성의 첫째이고 위화랑은 어머니가 미천한 이유로 마복칠성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전기류인「칠성록(七星錄)」과 「보혜기(寶兮記)」에도 모두 위화랑이 기재돼 있었다고 한다.
 이들 마복칠성은 진덕여왕 때 알천공 임종공 술종공 호림공 염장공 유신공 춘추공 등 처럼 국왕을 호위하며 국가의 대사를 의논하던 중신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비처왕과 마복자들은 양부와 양자라는 일종의 부자간의 가족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대신 비처왕은 마복자로 구성된 정치적 추종자들을 거느리게 되었고 마복자는 비처왕이라는 정치적 후원자를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마복자 제도는 왕궁에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화랑의 하부조직에 속했던 낭두들은 풍월주의 지위를 거친 후 풍월주의 고문 역할을 한 상선(上仙)과 상랑(上郞)의 마복자가 아니면 이른바 출세의 대열에 끼어들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낭두의 처들은 임신하면 곧 산꿩을 예물로 하여 이들이 거처하는 집인 선문(仙門)에 들어가 밥짓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종을 자처하며 사랑을 받으려 애썼다. 이들의 사랑을 받다 처들이 출산할 무렵 물러날 때 그 남편들은 재물을 내놓고 예를 갖추어 처를 맞이하였는데 이를 사함(謝函)이라 불렀다.
 물러난 낭두의 처들이 자식을 낳고 석달이 지난 후 다시 선문에 들어가면 그 남편은 양이나 돼지를 바쳤는데 이를 세함(洗函)이라고 했다.
 그래서 처가 다시 사랑을 받다 나올 때 그 남편이 또 재물로 아내를 맞이했다. 이 때문에 낭두가 자식을 많이 낳으면 재산을 모두 선문에 내놓는 바람에 오히려 가세가 기우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헤픈(?) 여자는 종종 선문에서 놀려고 거짓으로 임신하였다고 속이고 탕비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녀들은 혹 임신하지 못할까 염려해서 선문의 노예나 병졸들의 아이를 임신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있는 등 그 폐단이 매우 심했다.
 이에 22세 풍월주 양도공이 이러한 폐단을 개혁해 인재를 뽑고 사함의 풍속을 금하기에 이르렀다. 17세 풍월주 염장공은 거느린 마복자가 무려 100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화랑세기」에 처음 보이는 이 마복자란 제도가 한국역사학계에서는 「화랑세기」 진위문제의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서울대 노태돈교수는 마복자라는 제도가 존재하고선 가정이 존립할 수 없다며 이것이 「화랑세기」가 후대에 다시 쓰여진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는 『혹 어떤 아이와 그의 후견인 간의 특수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후견인이 그 아이의 생물학적 아버지인 것처럼 꾸며 상징성을 나타내는 경우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이처럼 실제 성관계를 맺는 형태의 의례가 행해졌던 경우가 과연 있었겠는가. 더구나 6세기 이후에까지도 신라사회에서 상상을 뛰어넘는 그런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서강대 이종욱교수는 『이러한 주장은 한 마디로 유교적인 윤리로「화랑세기」를 위작이라고 단정하는 것』이라며 반박했다. 그는 『사회적인 강자가 약자의 처의 성을 강압한 것은 「삼국사기」에도 그 사례가 나오며 중국이나 흉노의 풍속에도 보인다』고 설명했다.

 

[마복자 거느린 첫 왕은 비처왕]

 

 비처왕은 소지왕(炤知王)이라고도 하며 신라 21대왕으로 재위기간은 479∼499년이다. 「화랑세기」전체를 읽어보면 마복자를 거느린 첫왕으로 기록돼 있다.
 「삼국사기」권 제3, 「신라본기」제3에는 비처왕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비처왕이 재위22년(500) 9월에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지역인 날이(捺已)에 행차를 했다. 그런데 그 고을에 사는 파로(波路)라는 사람이 벽화(碧花)라는 16세된 미색의 딸을 수레에 싣고 명주로 덮어 가려서 왕에게 바쳤다.
 왕은 음식을 올리는 것으로 여기고 열어보니 그 속에 고운 소녀가 있어 괴이하게 여기고 돌려보냈다. 그러나 궁궐에 돌아온 그는 벽화의 아름다움을 잊을 수 없어 남몰래 그집으로 가서 벽화와 함께 몇차례 잠을 잤다.
 한번은 벽화의 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안동지방인 고타군(古陀郡)에 들러 한 노파의 집에 묵으면서 노파로부터 요즘 왕의 행실이 나쁘다는 말을 들었다. 왕은 매우 부끄럽게 여기며 은밀하게 벽화를 궁궐로 맞아들여 별실에 두었으며 얼마 뒤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에는 비처왕과 사통한 벽아부인이 경북 영주에 있을때 딸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나중에 비처왕비가 된 벽화부인이며 위화랑의 여동생으로 나온다.
 그러나 파로라는 사람이 위화랑의 아버지인 염신공인지는 알 길이 없다.
 「삼국사기」에는 영주에 첫행차한 두달뒤인 11월에 죽었다고 기록돼 있는데 그 두달만에 벽화와 사랑하고 궁궐로 데리고 오고 아들을 낳은 것으로 돼 있어 이 기록이 재미있다.

 

<6>신라 최고의 자유부인 미실(美室)


 진흥왕 23년(서기 562년)의 일. 열여섯살의 5세 풍월주 사다함이 병사 5천명을 이끌고 지금의 경북 고령지방인 대가야로 출정하게 됐다. 그러자 그의 애인이었던 미실(美室)이 눈물을 흘리며 「풍랑가(風浪歌)」를 지어 사다함에게 바쳤다.
 그러나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은 것. 사다함이 치열한 전투 끝에 살아 돌아왔을 때 미실은 이미 궁중에 들어가 6세 풍월주인 세종(世宗)의 아내가 돼 있었다. 사다함은 이를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청조가(靑鳥歌)」를 지어 불렀다.
 미실이 변심(?)한 경위는 이렇다. 세종의 어머니인 지소태후(법흥왕의 딸로 진흥왕의 어머니)가 사다함이 출정하고 없는 어느 날 고관들의 아름다운 딸들을 가려 궁중에 모이게 했다. 그런데 세종이 2세 풍월주 미진부의 딸인 미실에게 한눈에 반하고 만 것. 이렇게 되자 지소태후는 미실을 궁중으로 불러 세종을 모시게 한 것이다. 세종은 지소태후와 이사부 사이의 통정으로 태어난 인물.
 원래 사다함은 미실의 사촌오빠였다. 결국 사다함이 죽자 미실이 천주사(天柱寺)에서 그의 명복을 빌었는데 그 날 밤 꿈에 사다함이 나타나 『나와 네가 부부가 되기를 원하였으니 너의 배를 빌려 태어날 것이다』고 하였다. 미실은 바로 세종과의 사이에서 임신이 되어 나중에 11세 풍월주가 되는 하종(夏宗)을 낳았다. 하종이 사다함과 비슷하게 생겨 세상 사람들이 사다함과 정을 통할 때에 이미 임신을 하고서 입궁하여 낳은 아들이라 쑥덕거렸으나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그녀는 가정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자유부인으로 변모한다.
 하루는 진흥왕비인 사도왕후가 미실을 불러 『내 아들 동륜태자를 모셔 아들을 둔다면 동륜이 즉위 후 너를 왕비로 삼겠다』고 말했다.
 세종은 동륜에겐 씨 다른 작은 아버지였는데도 미실은 기꺼이 동륜과 교합해 임신을 했다. 그런데 이를 알지못한 동륜의 아버지인 진흥왕이 미실로 하여금 자신을 시종토록 했다. 미실의 연이은 근친 탈선에 상처를 입은 미실의 남편 세종은 자청하여 싸움터로 나가버렸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미실은 워낙 미색이 뛰어나 그녀를 한번 본 남자는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고 그녀도 원래부터 남자를 좋아했다고 한다.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꺼릴게 없었던 그는 더욱 음란한 생활을 하며 7세 풍월주인 설원랑과 10세 풍월주인 미생랑과도 정을 통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를 알지 못했다.
 미실은 재색만 빼어난 것이 아니라 권력욕도 많았다. 정부(情夫)인 설원랑에게 『나를 원화가 되도록 도와달라』고 해 설원랑과 더불어 왕을 설득하여 마침내 원화가 됐다. 그녀는 또 남편인 세종을 풍월주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에 세종은 낭도들에게 『새 원화는 나의 옛 부인이다. 너희들은 불평하지 말고 잘 섬기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다시 말해 「아내는 바람, 남편은 절개」였다고나 할까.
 572년 동륜태자가 보명궁에서 사나운 개에게 물려죽은 일이 벌어졌다. 왕이 수색을 명령해 조사한 결과 미실에게 혐의가 갔다. 미실은 죄를 얻을 것을 두려워하여 바로 원화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왕은 아내 때문에 속 썩이는 세종을 불쌍히 여겨 궁중으로 미실을 불러 다시 세종에게 돌아가도록 했다. 진흥왕과 세종은 아버지는 다르나 어머니가 같은 동복(同腹)의 형제간이었으며 진흥왕은 세종을 좋아해 막내동생이라 불렀다. 하지만 미실은 이번에는 죽은 동륜태자를 이어 태자의 자리에오른 금륜(金輪·나중에 25대 진지왕이 됨)과도 관계를 한다.
 미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그녀는 신라 귀족사회의 최고의 「프리마돈나」였다. 그녀는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그리고 요절한 동륜태자와 정을 통했던 프리섹스의 여성이었던 것이다.
미실의 애정행각은 당대 신라 상류층의 자유분방한 성풍속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했다. 세종은 그의 아버지 이사부처럼 나아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었으나 아내 미실의 애정행각을 보고도 혼자서만 괴로워하며 자신을 다스렸다.
 이런 세종에 대해 「화랑세기」에서는 「태후에게 효도하고 대왕과 왕후, 그리고 태자에게 충성했으며 미실에게도 정조를 지켰으니 화랑 중의 화랑이었다」고 찬양하고 있다.

 

《미실은 누구?》

 미실은 화랑정치에 관한한 지소태후보다 더 지속적으로 그리고 막강하게 영향력을 행사한 매력적인 여성으로 기록돼 있다.
 진흥왕이 세상을 뜨고 금륜태자가 진지왕으로 즉위하였으나 세상의 여론으로 미실을 황후로 봉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자 미실은 낭도를 일으켜 진지왕을 폐하고 동륜태자의 아들을 즉위시키니 이가 진평왕이다. 그녀는 스스로 진평왕의 후궁 일을 맡아 조정의 일을 자기 마음대로 주물렀던 것이다.
 606년께 미실이 괴질에 걸리자 설원랑이 간호를 하며 자신이 미실의 병을 대신하겠다며 미실을 모셨다. 정말 그가 미실의 병을 가져가 먼저 죽자 그녀는 통곡을 하며 설원랑의 뒤를 따라 죽었으니 그녀의 나이 58세였다.


 <7>사다함이 죽은 이유
 

 『사다함공(公), 제가 잘못했습니다. 공의 친구로서, 아랫사람으로서 의리를 배반한 저에게 큰 벌을 내려주십시오.』
 무관랑(武官郞)은 사다함(斯多含)앞에서 머리를 들지 못했다. 사방은 어둠속에 고요했고 벌판에 서있는 두사람의 머리위로 별빛만 쏟아졌다. 명활성(明活城) 쪽에서 어렴풋이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명활성은 자비왕과 소지왕때 정궁인 월성(月城)을 수리하느라 13년간 임시 궁으로 사용됐던 곳이다.
 이는 진흥왕 24년(서기 563년)의 일.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우정이 깊어 평생을 친구로 지내기로 하고 죽을 때도 같이 죽자고 맹세를 한 사이였다.
사다함은 나이가 비록 17세 밖에 되지 않았으나 1년전 대가야 정벌의 승전에 큰 공을 남긴 장수였던데다 5세 풍월주의 신분으로 그의 인품을 수많은 낭도들이 존경하고 따랐다. 그는 전공의 대가로 받은 대가야 노예들을 평민으로 풀어주고 땅을 부하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힘없이 시선을 궁쪽으로 돌려 한참동안 괴로워하던 사다함이 실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자네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모두가 나의 어머니 탓이지. 나는 자네를 이해하네.』
 사다함의 어머니 금진이 무관랑을 자주 불러 관계를 한다는 이야기가 낭도들에게 퍼지고 있어 사다함이 무관랑에게 주의를 주고자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마침 그가 먼저 찾아와 용서를 구한 것이다.
 『미실낭주로 인해 엄청난 괴로움을 겪고 있는 공에게 제가 고통을 줘 미안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아니야, 사람이란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살아갈 때가 있는 게지. 자네에게 승전(勝戰)에 대한 보답이 돌아가도록 해줘야 했는데 내 힘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해 미안하네. 사실 그게 늘 마음의 짐이 되고 있다네.』
 『아닙니다. 제가 신분이 미천한데도 친구로 대해주시고 늘 곁에 두시는 것만 해도 황송할 따름입니다. 앞으로 공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사다함은 돌아가는 무관랑의 뒷모습을 보자 왠지 모를 서글픔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차츰 멀어져 가는 무관랑은 어느새 그토록 그리워하는 미실의 웃는 모습으로 다가왔다가 분별없이 다른 남자를 탐하는 어머니 금진의 모습으로 바뀌어 혼란스러웠다.
 사다함은 진골 출신으로 내물왕의 7세손이며 아버지는 구리지(仇梨知)였다. 어머니 금진은 1세 풍월주 위화랑의 딸로 법흥왕을 섬겼으나 아들이 없었고 구리지와 몰래 정을 통해 토함, 새달, 사다함을 낳았다.
 사다함은 월성과 알천(閼川·경주시의 북천) 사이의 벌판에서 무관랑과 밤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진 며칠 뒤 무관랑이 죽어가고 있다는 연락을 갑작스레 받았다. 사다함이 한숨에 달려가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다함의 어머니 금진이 또 무관랑을 불러 관계를 가질 것을 요구하자 무관랑이 사다함과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금진의 손길을 뿌리치고 뛰쳐나왔다. 무관랑이 급하게 뛰어나오면서 월성의 담을 넘다가 담아래에 있는 못(구지·溝池)에 떨어져 중상을 입었던 것이다. 사다함이 그의 치유를 위해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고 며칠 후 무관랑은 죽고 만다.
 사다함은 알력과 시기가 횡행하던 당시의 정치 풍토 속에서 무관랑과 유일하게 가슴을 터놓고 이야기를 주고 받았으며 무관랑은 언제나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러던 그가 죽자 사다함은 무척 비통해 했다. 이제 그에겐 삶의 희망이 없었던 것이다. 사랑하던 여자인 미실도 뺏기고 행실이 문란한 어머니를 생각하면 삶의 회의부터 들었던 것이다.
 절망속에 사다함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오로지 가슴에 품었던 미실만 생각났다. 대장부에게 한 여자의 배신이 이토록 가슴에 사무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렇다고 미실을 미워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미실이 세종에게 시집갔다는 말을 듣고 청조(靑鳥·미실을 지칭함)가를 지어 부르며 두 사람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여러 생각들이 겹치고 실의에 빠져있는 사이 여위고 병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낸 지 7일이 되자 천하의 대장부인 사다함도 숨이 목에까지 차 올랐다. 그 때서야 달려온 어머니 금진은 사다함을 품에 안고 발을 굴렀다.
 『나 때문에 너의 마음이 상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이제 내가 어찌 살꼬.』
 그러자 효자로 소문났던 사다함이 『죽고 사는 것은 운명입니다. 제가 어찌 어머니 때문에 마음을 상하였겠습니까? 살아서 어머니의 큰 은혜를 갚을 수 없었는데 죽어서 저 세상에서 갚겠습니다』하고 힘들게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이어 미실의 남편인 세종이 풍월주가 되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하곤 숨을 거두었다.
 한편 「삼국사기」열전에는 사다함과 무관랑은 생사를 같이하는 친구가 되기로 언약했는데 무관랑이 병들어 죽자 매우 슬퍼하다 그 또한 7일만에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화랑세기」의 해석에 따르면 사다함이 죽은 근본적인 원인은 미실의 배신이 불러온 실연의 상심 때문이다. 실연의 상처가 큰 와중에 친구 무관랑의 죽음과 어머니에 대한 절망감이 겹친 셈이다.
 무관랑이 죽자 사다함이 상심 끝에 뒤따라 죽을 만큼 정서적으로 깊은 유대를 가진 사이였다는 점을 들어 일본 학자 아유가이 후사노신(鮎具房之進)은 저서 「화랑고잡고(花郞攷雜攷)」에서 「두사람은 동성애자였다」는 흥미있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무관량 빠져죽은 월성 못터]

 

 무관랑이 빠져 죽었다는 경주 월성의 못(구지)이 경주문화재연구소가 지난 84∼94년 10년에 걸쳐 시행한 「월성 해자 및 주변 유적 발굴조사」에서 확인되자 당시 학계에서 큰 화제가 됐다. 발굴 전인 84년 이전까지는 해자(垓字)라고 불리는 이 못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것.
 따라서 「화랑세기」 필사본이 1930∼40년대의 위작이라면 「무관랑이 월성의 못에 빠져 중상을 입었다」는 내용이 들어갈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책이 진서의 필사본이라는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대목이다.
 경주문화재연구소 이상준 학예연구사는 『사다함의 정확한 생몰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여러 사료들을 분석해보면 그의 생존기간은 545년에서 565년께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해자에서 발견된 목간(木簡)에 나오는 「도사(道使)」란 지방관직명이 5∼세기 사용됐던 점에서 본다면 연못형 해자는 5세기말에 축조돼 7세기말까지 존재했던 방어시설이었다.
 즉 당시의 궁이었던 월성은 자연천인 남쪽의 남천외에 동 북 서편에 인공적인 연못을 파 적으로부터 성을 방어했고 또 왕성인 월성과 외곽을 구분짓는 시설물로 이용했던 것이다. 

 

 <8>신라의 女權


 「화랑세기」로 재구성해 본 진흥왕 당시 지소태후와 사도황후라는 두 여성의 권력암투를 그린 삽화 한 토막이다. 당대 지소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지소는 섭정기간 동안 신라의 국력을 급격히 키워 553년엔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562년엔 가야연맹을 완전 복속시켰다.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은 「삼국사기」 등의 사서에는 나오지 않는, 「화랑세기」에서만 언급되는 신라의 신분제도. 신라의 왕위계승이나 가계 계승이 부계의 혈족원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는 달리 귀족들의 정치적 사회적 신분이라 할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은 모계로 계승됐다.
 당시 남자들은 모계에 의하여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이 정해지고 1대에 한해 그 계통을 이었다. 따라서 남자들은 부자간에 계통이 다를 수도 있었다.
이를테면 서현은 그의 어머니가 대원신통이었기에 그 계통을 이었지만 그의 아들인 김유신은 서현의 부인이자 어머니인 만명부인이 진골정통이었기에 진골정통이 되었다. 그러한 사정은 김춘추도 마찬가지였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같은 진골정통이었기에 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신라 귀족사회의 양대 파벌인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은 권력의 정점인 왕과 왕비의 옹립을 놓고 암투를 벌였다. 588년 풍월주가 되었던 하종대에 진골정통은 지소를, 대원신통은 사도를 정점으로 한다고 기록돼 있다. 즉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알력을 벌였으며 이들이 당대 양 계통의 중심 인물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는 동륜태자가 죽자 그 동생인 금륜을 진지왕으로 왕좌에 앉혔으나 너무 색을 밝히는 등 방탕생활을 하자 폐위시켜버린다. 그러니까 여성들이 왕위도 마음대로 주물렀던 것이다.
 26세 진공조에 27세 풍월주가 되는 흠돌이 문무왕의 어머니인 문명황후에게 『자의(慈儀·뒤에 문무왕비가 됨)가 후일 왕비가 돼 아들을 태자로 세우면 대권이 진골정통에게 다시 돌아가므로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처럼 「화랑세기」에는 모든 권력이 모계, 즉 여성에게서 나옴을 알 수 있다.
 화랑세기는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을 일종의 정치적 파벌 개념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라의 귀족사회를 신분적 격차의 개념으로 이른바 「성골」「진골」로 나눈 기존의 사서와는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모계사회의 잔영이 남아있던 신라에서 가장 큰 여권을 휘두른 것은 역사상 지소태후였다. 그녀는 섭정을 하면서부터 실질적인 세력행사를 했다. 원화를 없애고 화랑제도를 만든 것도 그녀였다. 681년 화랑도를 폐지한 것도 여성인 문무왕비 자의황후였다. 신라의 정치에서 최대의 파워조직인 화랑도를 만들고 폐지한 주인공은 모두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화랑도의 우두머리인 풍월주의 옹립도 이들 여성이 좌지우지했던 것이다.
 예를 든다면 미실이 설원랑이 8세 풍월주인 문노보다 자질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서도 7세 풍월주로 먼저 앉힌다. 이도 모자라 취임식날 설원랑에게 문노가 절을 하도록 만든다. 여기에는 문노의 모계가 미천하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됐다. 문노의 어머니는 가야국 문화공주인데 왜국이 조공으로 바친 여자 또는 가야국의 여자로 해석되고 있다. 이처럼 당시 신라귀족사회에서 모계가 가지는 비중을 읽을 수 있다.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으로 갈라져 각축전을 벌였던 신라 귀족 여성들의 역할에 대해 이종욱(서강대)교수는 이들 여성이 종전에 원화가 가졌던 임무 중 제사와 관련된 일을 일부 맡게된 것은 아닐까라는 추측을 내놓기도 했다.
 역사학자들도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시기인 540∼681년에 여왕벌처럼 군림한 여성들의 파워의 각축장이었던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에 대해 일치된 해석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최광식(고려대 한국사학과)교수는 진골(眞骨)을 진골왕통으로, 성골(聖骨)을 대원신통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이재호(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객원교수)씨는 진골정통은 적자녀이고 대원신통은 서자녀이며 왕의 자녀도 왕비가 대원신통이면 그 적자는 부계를 따라 진골정통이 되고 적녀는 모계를 따라 대원신통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소태후는 누구?》

 

 지소태후의 아버지는 법흥왕이고 어머니는 보도황후(保道皇后)이다. 어머니 보도는 소지왕의 딸이다. 지소의 초명(初名)은 식도부인(息道夫人). 처음에 삼촌인 입종공(立宗公)에게 시집을 가서 진흥왕을 낳았다. 하지만 아버지인 법흥왕이 죽자 영실공을 계부로 삼았는데 계부와 관계를 해 황화공주(黃華公主)를 낳았다. 또 이사부(異斯夫) 태종공과 정을 나눠 6세 풍월주인 세종을 낳았다.
 지소태후는 섭정을 하기 전부터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 풍월주를 만들어 위화랑을 1세 풍월주로 임명했고 첫남편인 입종의 아이인 만호낭주(萬呼娘主)를 가진 상태에서 이화랑을 총애해 4세 풍월주로 앉히기도 했다. 또 사다함을 통일신라 이전의 신라 무관계급이었던 귀당(貴幢)으로 삼아 궁궐의 문을 관장하게 했다. 지소는 그의 아들인 세종도 6세 풍월주로 앉혔다.
 그러니까 풍월주 1세 위화랑에서 6세까지는 지소가 자리에 앉힌 것. 지소태후는 풍월주의 임명뿐만 아니라 지금의 군사령관을 임명하는 등 병력도 장악했고 577년 10월에 백제가 신라 서쪽의 변경마을을 침범하자 이를 격퇴시키기도 했다.
 이보다 앞서 551년에는 풍월주 2세 미진부 등 9명의 장군에게 명령해 백제와 고구려를 침공하기도 하는 등 「화랑세기」전편에서 가장 힘있는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다.


 <9>준정과 남모


 『남모(南毛)공주님, 이 술은 제가 공주님께 드리려고 매일 새벽 이슬을 모아 담간 것입니다. 제 성의를 봐서라도 한 잔 드십시오.』
 삼산공(三山公)의 딸 준정(俊貞)은 무릎을 끓고 남모공주에게 술을 깍듯이 따랐다.
 『아니다. 난 술을 하지 못하느리라. 네 정성은 고맙지만 마신 걸로 하겠다. 그리고 이렇게 집에까지 초대를 해준 것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그 말을 듣는 준정의 속은 타들어가기 시작했고 마른 땀이 바짝 바짝 났다. 심지 타는 소리를 내며 촛불이 춤을 추며 빛을 더했다. 불빛에 아른대는 두 사람은 역시 소문대로 아름다웠다.
 『공주님이 제 술을 드시지 않으면 제 아버지로부터 꾸지람을 들을 것이고 또 공주님을 평소 존경하는 저의 체면이 서지 않습니다.』
 준정은 짐짓 남모공주가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자신이 마치 굉장한 낭패를 당할 것처럼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호소했다.
 『알겠다. 그럼 내 못 마시는 술이지만 한 잔 하마.』
 남모는 준정이 권하는 대로 한잔 쭉 들이켰다. 남모는 술을 다 마시고 잔을 놓자 맞은 편 벽에 걸린, 준정이 친 듯한 난(蘭) 족자가 흐릿하게 보이면서 어찔해짐을 느꼈다. 그 순간 남모는 모로 쓰러졌다. 야릇한 웃음을 흘리던 준정은 남모가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것을 확인하고는 바깥에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건장한 청년 네댓명이 방으로 들어와 눈깜짝할 새 공주를 업고 나가버렸다.
 신라 24대 진흥왕 원년인 540년 초겨울의 일이었다.
 준정은 진흥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미 원화(源花·화랑이 생기기전 그 역할을 일정부분 한 청소년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어 많은 낭도를 두고 있었다.
 남모는 법흥왕과 백제의 보과(寶果)공주 사이에서 난 딸로 뛰어난 용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미진부(未珍夫·2세 풍월주가 됨)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미진부를 사랑하던 지소태후는 이복자매인 남모공주의 편을 들어 그녀를 원화로 삼으려 했고 법흥왕도 나중에 지소태후의 계부(繼夫)가 되는 영실공(英失公)에게 준정을 원화에서 물러나게 하도록 명했다. 이런 눈치를 알아차린 준정은 영실공을 잘 섬기면서 남모공주가 원화가 되는 것을 저지하던 중이었다.
 한편 남모공주를 따르던 낭도들은 공주가 갑자기 사라지자 행방을 찾느라 서라벌 곳곳을 뒤지고 있었다. 궁중에서도 남모공주를 찾느라 발칵 뒤집혔다. 특히 이 소식을 들은 지소태후는 노발대발해 길길이 뛰었다. 지소는 서너달전(540년 7월)에 등극한 아들 진흥왕을 섭정(攝政)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였다.
 그러던 어느날 궁에서 놀던 아이들이 이상한 노래를 불렀다.
 『준정이 남모공주를 집으로 꾀어 술을 먹였다네 /준정이 공주를 시기하고있었다네 /술 취한 공주를 강물에 빠뜨렸다네 /공주는 돌밑에 깔려 죽었다네 /불쌍한 공주는 아직도 물속  바위밑에 누워있다네…』
 궁밖에서 아이들이 부르던 노래를 궁안에 살던 왕족의 아이들이 배워 부르면서 뛰어다녔다. 사건의 내막을 아는 누군가가 노래를 지어 아이들에게 퍼뜨린 것이다.
 지소태후는 준정을 잡아들이도록 명했다. 남모의 시체는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북천(北川)바위 아래에서 나왔다.
 이에 지소태후가 바로 준정을 사형에 처하고 원화 제도를 화랑으로 대체시켰다. 신라 최대의 「정치 단체」인 화랑도의 탄생 배경에는 여성들의 이같은 헤게모니 다툼이 숨어있었던 것.
 그러면 준정이 왜 남모를 유인해 죽였을까?
 「삼국사기」4, 진흥왕37년조를 보면 「미녀인 준정과 남모, 2명을 원화로 뽑았으나 두 여자가 아름다움을 서로 질투하여 마침내 준정이 남모를 살해했다」고 기록돼 있다. 즉 단순히 준정이 자신보다 미모가 빼어난 공주의 아름다움을 시기해 죽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랑세기」는 다르게 풀이하고 있다. 세력의 다툼, 즉 남모의 낭도의 수가 갑자기 늘어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준정의 역공이었다는 것이다.
 2세 풍월주 미진부편을 보면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소태후가 남모의 낭도들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위화공(원화가 폐지되자 1세 풍월주가 됨)으로 하여금 그 수를 갑절로 늘리도록 하자 세력에서 열세에 몰린 준정이 이를 해결할 돌파구를 찾다 공주를 유인해 술을 먹여 죽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모의 살해사건은 지금까지 서로 아름다움을 다투는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처럼 「화랑세기」에 의해 그 이유가 분명하게 밝혀지게 됐다.
 역사학자 정구복씨는 그의 논문 「동국통감에 대한 사학사적 고찰」에서 준정도 왕족 출신일 것으로 추측했다.
 이종학 서라벌군사연구소장은 논문 「필사본 화랑세기의 사료적 평가」에서 「준정의 아버지인 삼산공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진골출신임에 틀림없다」고 해석한 것으로 보아 준정도 왕족의 피가 섞인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청소년들의 조직을 지도하는 최고 실권자인 원화는 왕족출신이 아니면 추대되기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삼국사기」는 두 여성을 별 다른 해설 없이 「미녀 남모와 준정」이라고 기술한데 반해 「화랑세기」는 준정은 신라 귀족 삼산공의 딸이고 남모는 백제에서 신라에 온 보과공주가 낳은 법흥왕의 딸이라 기술하여 그들의 신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북천은 어디?》

 

 남모공주가 물속에 잠겨 죽었다는 북천(北川)은 알천(閼川)으로도 불리며 경주시내에서 보문단지로 가는 도로 옆 물길이다. 지금은 물이 거의 줄어든 상태이나 신라시대 당시에는 해마다 여름이면 홍수가 날만큼 큰 냇물이었다.
 북천과 관련해 이 물길의 북쪽인 동천마을과 남쪽 마을인 구황마을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동천마을에는 신라 41대 헌덕왕(809∼826년)릉이 있고 구황마을에는 신라의 7대 가람중에 손꼽히는 큰 절인 분황사(芬皇寺)가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북천의 물은 황룡 암곡 가내골 등 험준한 여러 계곡에서 급경사로 흘러내리기 때문에 해마다 여름이면 두 마을을 덮쳤다. 이들 마을사람들은 안심하고 살 수 없어 동천사람은 헌덕왕릉에 빌고 구황사람들은 분황사 부처님께 빌었다.
 마을 사람들의 기도를 받은 부처님은 큰 홍수가 날 때면 구황사람들의 피해를 적게 하기 위해 물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홍수의 물길이 북쪽으로 흐르게 되면 동천마을의 피해가 크고 헌덕왕릉이 훼손됐다. 동천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헌덕왕릉에 빌었다.
 이처럼 분황사 부처님과 헌덕왕의 영혼은 오랫동안 주민들과 합세해 일심전력으로 싸웠다. 그래서 물길이 북쪽으로 치우쳐 흐르면 헌덕왕릉의 석상과 비석에서 땀이 흘렀고 남쪽으로 치우쳐 흐를 때는 분황사 부처님이 땀을흘렸다.
 헌덕왕 영혼과 분황사 부처님이 치열하게 싸우자 북천 냇물의 홍수는 마침내 남쪽으로도 못가고 북쪽으로도 못가고 하늘로 치솟아 홍수가 사라졌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10>진지왕이 폐위된 까닭은


 서기 579년. 당대의 여걸 사도(思道)태후는 아들 진지왕의 엽색행각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큰 아들 동륜(銅輪)태자가 7년전인 572년 3월에 비명횡사하자 둘째아들인 금륜(金輪·또는 사륜(舍輪)으로도 부름)이 576년 신라 제25대 왕에 올랐다. 금륜은 왕위에 오르기 전 흔히 태자들이 그러했던 것과는 달리 여자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천하의 자유부인 미실의 유혹으로 그녀와 잠시 관계를 한 정도였다.
 그런데 어찌된 까닭인지 금륜은 왕이 되자마자 여자들을 밤낮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왕의 엽색행각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진지왕의 할아버지인 법흥왕은 보도부인 벽화후 오도부인 옥진궁주 금진부인 등 많은 여자를 거느렸고 아버지인 진흥왕도 씨 다른 형제인 숙명후와 잠자리를 했으며 심지어 큰 아들 동륜과 관계하여 임신한 미실을 침실로 불러들이지 않았던가. 아무도 그런 일을 두고 입밖에 내지 않았다. 당시에 색공(色供)이라하여 왕에게 여자를 공급하는 제도까지 있었다. 그렇지만 진지왕의 여성문제에 대해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는 달랐던 것이다.

 진지왕을 왕위에 올린 그의 어머니인 사도태후는 마침내 금륜을 재위 4년만에 왕위에서 끌어내리기에 이른다. 진지왕의 여성편력 문제는 진지왕의 폐위원인이 되므로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다. 「화랑세기」전편을 통틀어 재위중인 왕을 폐위시키는 일은 유일무이한 것으로 화랑세기에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그 부분에 보다 상세한 기록을 보인다.
 삼국사기 권4, 진지왕조를 보면 금륜이 즉위 4년 7월 17일에 사망해 영경사(永敬寺)북쪽에 장사지냈다고 돼 있다. 권4, 진평왕 원년(579년) 8월에 이찬(신라 관등 17위 가운데 2위)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上大等·신라때 17관등을 초월한 최고 관직)으로 삼았다. 즉 삼국사기의 내용은 진지왕이 즉위한지 4년만에 죽어 자연히 동륜태자와 동륜의 고모인 만호부인 사이에서 난 백정(白淨)이 579년 26대 진평왕으로 등극한 것으로 돼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또 다르다. 진지대왕이 나라를 다스린지 4년에 정사(政事)가 어지럽고 또 음란한 짓을 많이 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는 것. 권1, 도화녀와 비형랑편을 보면 그는 폐위되자 죽어 귀신인 상태에서 도화녀의 방에 나타나 7일간 머물며 사랑을 나누어 아들 비형(鼻荊)을 낳았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처럼 진지왕이 죽었기 때문에 폐위됐거나 폐위직후 바로 죽었다는 기록과는 달리 화랑세기에선 폐위후 생존했다는 내용이 상세히 적혀있어 흥미를 끈다. 7세 풍월주 설화랑편에 보면 「진지대왕이 여색을 좋아하고 방탕하였으므로 사도태후가 이를 고민하다 오빠인 노리부공으로 하여금 폐위시키고 노리부공에게 왕의 직무를 대행하게 하였다」
고 기록돼 있다.  또 13세 풍월주 용춘(龍春)편을 보면 「금륜왕은 음란한 행실로 인하여 폐위되어 궁에 갇힌지 3년만에 죽었다」고 분명하게 기록돼있다.
 이처럼 화랑세기에는 진평왕이 즉위할 때까지 노리부공이 왕의 직무를 대행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나타난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에 노리부공이 상대등의 직위에 올랐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아마 화랑세기에 보이는 것처럼 노리부공이 진지왕을 폐위시킨 공로로 상대등에 임명됐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여러 사실들을 분석해보면 진지왕은 폐위를 당하기 전에 죽은 것이 아니라 실은 폐위되고 3년간 생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랑세기 13세 용춘편에 도화녀와의 사이에 낳은 비형도 폐위후에 낳은 아들임에 틀림이 없다고 적혀있다.
 그렇다면 당시 역대 왕들의 성도덕을 지금의 잣대로 견주어본다면 문란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도 유독 진지왕만이 여색문제로 폐위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도태후가 머리를 싸맸던 문제도 이것이다.
 역사가 이종학(전 공군대학교수)씨가 이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내놓았다.
그는 『해답은 바로 당시 골품제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며 『진골간 남녀의 통정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했으나 골품이 다른 경우는 용서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다시 말해 진지왕 폐위 근본 원인은 왕이 진골이 아닌, 골품이 아래인 여자와 통정한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진골이 아닌 도화녀와의 관계가 그 예이며 이는 진지왕의 여성편력중 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진지왕의 폐위 원인을 애써 숨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방증 사례가 삼국사기11, 문성왕 7년에 보인다.
문성왕이 청해진대사 궁복(弓福)의 딸을 차비(次妃)로 삼으려 하자 신하들이『궁복은 섬사람인데 어찌 그 딸을 왕실의 배우자로 삼겠습니까』하며 반대하자 왕이 그 말을 따른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의 왕들이 관계한 많은 여자들은 왕족과 진골신분의 여자들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신라사회는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면 임금조차도 폐위시켰을 만큼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다는 것이 진지왕의 폐위사건에서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역사적 편린이다.

 

《신라 궁궐터》

 

 신라시대 왕과 왕족들이 거주하며 신라의 화려한 역사를 이루었던 궁궐터에 현재 남아있는 건조물로는 1741년(영조 17)에 축조한 석빙고(石氷庫) 뿐이다. 그러나 사적 제16호인 이 곳에 대한 학문적 연구조차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등 외면되고 있는 실정이어서 안타까움을 준다.
 이 궁궐은 둘레가 2천4백m로 흙과 돌을 혼합해 남쪽의 남천을 끼고 자연지세를 이용해 축조됐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101년(파사이사금 22)에 궁성으로 쌓아 금성(金城)에서 이곳으로 왕궁을 옮겼다고 기록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안의 면적은 19만8천㎡.
 성안에 태후의 궁인 영명궁과 왕태자의 궁인 월지궁 외에 영창궁 동궁 내성 등 여러 궁이 있었고 내황전에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전설과 관계가 있는 만파식적이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또 남문 귀정문 북문 인화문 현덕문 등 여러 궁성문이 있었고 월산루 등을 비롯한 누각과 남당 조원전 등 관청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웅장했던 건물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경주시민들의 유원지로 전락해 당시의 역사를 상상해 볼 뿐이다. / 조해훈기자


<11>문노와 그의 어머니


신라는 철저한 골품제 사회였으므로 출생신분에 따라 정치 사회적인 활동에 특권과 제약이 따랐던 것이다. 즉 진골이어야만 출세를 할 수 있었으나 문노는 진골이 아니었다.
 문노의 아버지인 비조공은 군대를 통솔하는 병부령을 지내는 등 권력의 핵심에 있었다. 원래 비조공은 아내인 청진(靑珍)공주가 있었지만 가야국에 사신으로 자주 가다가 몰래 가야국의 문화공주와 관계를 해 문노를 낳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진골신분이었으나 어머니가 가야국 출신이어서 문노는 미천한 신분이 되었던 것이다. 윤궁은 진흥왕의 첫아들인 동륜태자를 모셔 윤실공주를 낳았고 동륜이 죽자 5년간 과부로 살았다.
 문노와 윤궁은 어떻게 부부의 연을 맺었으며 문노는 어떻게 몸을 일으켜 마침내 진골의 신분에까지 이를 수 있었을까.
화랑세기 8세 풍월주 「문노조」의 내용. 진지왕의 뒤를 이은 진평왕이 6세 풍월주를 지낸 세종전군과 포석사에 나가자 동행했던 윤궁은 왕에게 문노와의 결혼을 허락하게 해달라고 청한다. 『이제 문노가 진골이 되었으니 저와 혼인하게 해주십시오. 그를 진정한 남편으로 받들고 싶습니다.』 당시 문노와 윤궁은 골품이 달라 혼인식을 올리지 못하고 아들셋 딸셋을 낳은 상태였다.
 세월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문노를 사적으로 형으로 대우하고 있는 세종전군이 진흥왕에게 문노가 고구려와 백제 등을 치는데 공을 많이 세웠으나 신분이 미미하다고 은근히 압력(?)을 넣자 왕은 하급관등인 급찬의 위(位)를 내렸다.
 지도태후도 진지왕에게 문노를 따르는 낭도가 많고 인물이 출중하므로 국선(國仙)으로 임명해 달라고 청했다.
 미실도 문노가 국선이 되려면 선모(仙母)가 있어야 되므로 윤궁에게 선모가 될 의향이 없느냐고 은근히 떠보았다. 윤궁이 골품은 다르지만 그를 남편으로 삼겠다며 선뜻 나섰다. 이리하여 문노와 윤궁이 맺어졌던 것. 이를테면 신라판「평강공주와 바보온달」스토리라 할만 하다.
 당시 국선도 화랑의 우두머리였으나 왕이 임명했다는 점이 풍월주와 다르다.
풍월주보다 한 수 위인 셈이다. 문노가 국선이 된 것은 576년 10월. 그 뒤 진지왕의 폐위에 문노가 일조를 하자 문노는 신라관등 17등급중 6위인 아찬의 신분으로 격상한다.
 미실의 허락을 얻은 윤궁은 풍월주 겸 국선인 문노와 같이 살면서 선모로서의 역할을 잘 해내 마침내 문노를 진골로 만든다. 이리하여 문노와 윤궁은 마침내 정식 부부가 될 수 있었던 것.
 문노는 17세(554년)때부터 백제를 치는데 참가했고 18세때는 고구려를 쳤으며 20세때는 북가야를 쳐 여러번 공을 세운 인물이다. 문노는 「삼국사기」에선 열전제7 김흠운(金欽運)전에 「흠운이 어려서 화랑 문노의 문하에 드나들었다」는 언급 말고는 별다른 기록 없이 역사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러나 화랑세기 문노조에 「낭도들은 문노를 죽음으로써 따랐으며 이 때문에 화랑도의 기풍이 크게 일어나 삼국통일의 대업이 일찍이 문노공으로부터 싹텄다」고 기록돼 있다.
 문노가 진골로 신분 격상된 것은 이같은 특출한 공훈과 인품 때문이었던 것.
진골출신이 아니었다가 공을 많이 세워 진골이 된 경우는 문노의 예가 유일하지만 이는 신라 중 고 시대의 골품제에도 어느 정도의 융통성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문노가 진골이 되자 정식 결혼식을 올린 윤궁은 검소하게 살며 낭도들에게 손수옷을 만들어 주었으며 문노가 종양을 앓자 입으로 고름을 빨아서 낫게 해줄 만큼 헌신적이었다.
 문노가 화랑조직을 재정비하고 화랑들의 힘을 모아 신라의 국력을 강화시키도록 옆에서 조언을 한 것도 그녀였다. 문노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윤궁을 대했다. 윤궁은 남편이 죽자 곧 뒤따라 죽는다.
 그래서 당시 신라인들은 『지아비를 택하는데는 마땅히 문노와 같아야 하고 처를 얻는데는 윤낭주와 같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화랑세기 문노조에는 문노의 어머니인 문화공주가 가야국의 딸이라는 기록과 함께 야국왕(野國王)이 신라에 공녀로 바친 왕녀라는 기록도 나온다.
야국은 일본이었다는게 학계 일부의 주장. 박창화씨가 화랑세기 필사본을 쓴 시기가 일제시대였으므로 왜국(倭國)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가 어려워 야국으로 썼다는 것.
 서강대 이종욱교수는 『박씨가 일본에서 진본 화랑세기를 보고 필사를 하면서 문노의 어머니인 문화공주가 왜국이 바친 왕녀라고 했을 경우에 닥쳐올 위험을 피하기 위해 왜국을 야국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문노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 때문에 화랑세기는 일본인들이 공개를 꺼린 책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하는 짐작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경남 송학동 채색석실분 B호 무덤》

 

 지난 8월말 경남 고성군 송학동고분군에서 동아대박물관에 의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채색 석실분인 B호 무덤이 문노의 어머니 묘라는 흥미있는 추정이 제기되고 있다.
 심봉근 동아대박물관장은 『화랑세기에 보이는 문노의 어머니가 야국에서 온 왕녀라는 대목이 보이는데 그 야국을 왜국으로 해석할 수 있다』며 『또 가야에 거주했던 점으로 보아 소가야의 마지막 왕릉인 B호분이 그녀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심관장은 『이 무덤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가야의 채색고분이다. 채색고분은 일본의 규슈지방과 간사이(關西)지방의 무덤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만큼 일본과의 교류 흔적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이 고분에서 도굴되고 남은 토기중 일본계 스에키(須惠)토기가 있는 점도 같은 의미이며 또 신라의 영향도 발견된다는 것.
 그러니까 문노 어머니묘에서 일본계의 흔적이 나온 것은 당연하고 문노 아버지가 신라사람이니 신라의 흔적도 당연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 6세기대의 것인 이 무덤의 전체 분위기는 여성적이라는 것이다. 소가야가 562년 대가야가 멸망하기 전에 소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보아 대체로 이 무덤의 조성시기가 문노의 어머니의 생몰시기와 비슷하다는 점도 그런 추측을 할 수 있는 근거라고 설명했다.
 송학동 고분군은 남부지방의 대표적인 전방후원분으로 알려졌으나 전방후원분이 아닌 몇개의 무덤이 별도로 조성된 것으로 최근 밝혀져 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던 무덤이다. 만약 동아대의 추론대로 이 무덤이 문노의 어머니 묘라면 이는 한·일간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생각된다.


 <12>용수와 용춘

 

 「화랑세기」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와는 다른 기록들이 많지만 그중 아주 흥미를 끄는 내용이 있다. 바로 용수(龍樹)와 용춘(龍春)에 관한 부분이다. 이것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가 누구냐는 문제와 관련된다. 용춘은 13세 풍월주.
 이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엔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사람인 동인이명(同人異名)으로 적혀있으나 화랑세기에는 용수가 형이고 용춘이 동생인 형제로 나온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인다.
 우선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자. 「2월에 이찬 용수를 내성(內省)의 사신(私臣)으로 삼았다.」(권4, 진평왕44년) 「8월에 왕이 대장군 용춘·서현과 부장군 유신을 보내 고구려의 낭비성을 침공하니….」(권4, 진평왕 51년) 「10월에 이찬 수품(水品)과 용수(또는 용춘)를 보내 주와 현을 돌아다니며 위무하게 했다.」(권5, 선덕왕5년) 다음은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제27대 선덕여왕 이름은 덕만이다. 아버지는 진평왕,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다. 성골의 남자가 끊어졌으므로 여왕이 즉위했다.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이다.」(권1, 왕력10) 「29대 태종대왕의 이름은 춘추(春秋)요, 성은 김씨이고 용수(혹은 용춘이라고 함) 각간(角干)을 추봉한 문흥대왕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진평대왕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권1, 태종춘추공) 이처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용수와 용춘은 동인이명이라는 것이다.
 이번엔 화랑세기의 내용. 「13세 풍월주 용춘은 진지왕의 아들로 용수의 동생이다. 용춘은 아버지인 진지왕이 폐위돼 유궁(幽宮)에 3년간 살다가 죽었는데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의 얼굴을 잘 몰랐다. 용춘의 어머니인 지도태후가 진평왕(그녀에겐 아주버니의 아들이므로 장조카)을 섬기자 용춘은 진평왕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당시 진평왕이 아들이 없어 사촌동생인 용수를 사위로 삼으려고 했다.
 용수가 사양했으나 진평왕의 비인 마야부인이 허락하지 않고 끝내 사위로 삼으니 천명공주의 남편이 되었다. 천명공주는 진평왕의 딸이자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어머니. 또 선덕공주가 점점 자라 임금의 자질을 갖추자 진평왕은 그녀로 왕위를 이으려고 용춘을 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후사가 없자 용춘이 물러났다. 이에 진평왕은 용수에게 또 선덕공주를 모시도록 했으나 역시 후사가 없었다.
 그 무렵 마야부인이 죽은 후 승만황후(僧滿皇后)가 진평왕의 비가 돼 아들을 낳아 선덕을 대신해 왕위를 잇고자 했으나 불행히도 그 아들이 일찍 죽어버렸다. 그런 연유로 승만황후가 용춘형제를 미워하자 용춘은 전장에 나가버렸다.
 그는 고구려에 출정하여 큰 공을 세운 후 승진하여 각간(신라 17관등의 1위)에 봉해졌다.
 한편 선덕공주가 왕위에 오르기 전 용수가 임종에 이르러 부인과 아들을 동생인 용춘에게 맡겼다. 그 아들이 바로 김춘추이고 부인은 천명공주였다.
 선덕공주는 왕이 되자 공주때 남편이었던 용춘을 다시 남편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자식이 생기지 않자 용춘이 스스로 물러났다. 이에 군신들이 삼서제(사위를 3명 두는 제도)를 만들어 흠반공과 을제공으로 하여금 선덕여왕을 모시도록 했다. 용춘은 선덕여왕의 남편의 자리에서 물러나 형수인 천명공주를 아내로 삼고 태종 김춘추를 아들로 삼았고 진덕여왕 원년(647)에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화랑세기의 이러한 기록을 따져보면 선덕여왕이 즉위하기 전 공주로 있을 때 첫번째 남편이 용춘이고 두번째 남편이 그의 형인 용수였으며, 또 선덕공주가 왕으로 즉위한 후 다시 용춘을 남편으로 삼은 것도 알 수 있다.
 당시 왕실에선 이미 성골 남자가 없었기에 진평왕으로서는 용수나 용춘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 아들이 다름 아니라 29대왕인 김춘추였다.
 화랑세기의 이러한 내용을 분석해보면 태종무열왕과 용수, 용춘의 관계는 명확해진 것이다. 또 중혼제, 형사취수제 같은 유습이 신라 중기까지 남아있었음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1 왕력10편에 선덕여왕의 배필은 음갈문왕(飮葛文王)이라고 쓴 내용이 있다. 서울대 노태돈(국사학과)교수는 논문 「필사본 화랑세기의 사료적 가치」에서 「갈문왕은 여왕의 남편이나 왕의 아버지에게 주는 존호(尊號)이다」로 갈문왕에 대한 의미를 분석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일본 역사학자 히로나카 요시오(弘中芳男)씨는 지난 1991년에 발표한 논문 「화랑세기의 연구(5)-권씨의 필사본화랑세기의 비판적 검토」에서 「용수와 용춘은 형제지간이었으며 용춘이 문흥갈문왕이고 용수는 음갈문왕이다」고 밝혔다. 역사학자 이종욱(서강대교수)씨와 이강래(전남대교수)씨도 용수와 용춘을 형제지간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부산외대 권덕영(사학과)교수는 논문 「화랑세기 진위논쟁 10년」에서「황룡사 9층 목탑 찰주본기에 용수가 선덕왕 14년에도 살아있다는 기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전에 죽었다고 하는 것은 화랑세기에 문제가 있으며 용수와 용춘을 형제라 한 것은 더욱 더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등 학계에서는 용수와 용춘의 문제가 지속적인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삼국통일 기틀 마련한 진평왕》

 

 무려 54년간이나 재위했던 진평왕(재위 579~632)릉은 보호철책도 없이 외따로 떨어져 있다.
 사적 제180호인 이 능은 경주시내에서 보문으로 가는 도로를 타고 가다 오른쪽길로 빠져 한참 들어가면 나타나는 보문마을 인근에 위치해 있다. 능으로 가는 길엔 포장이 돼 있지 않아 길이 평탄하지 않고 방문객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여러 차례에 걸쳐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받았으나 수·당과 친교를 맺어 국난을 이겨냄으로써 훗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한 왕의 무덤이라고 하기엔 관리가 소홀한 듯 하다.
 그는 경주 남산성을 쌓고 명활산성을 개축하는 등 수도 방위대책을 세웠고 원광등의 고승들을 중국에 유학하게 해 호국불교의 진흥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는 또 왜에도 불교를 장려하기 위해 603년 보계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일명 우는 미륵상)을 보냈는데 현재까지 일본 교토 코류지에 모셔져 있다. 이 절은 당시 왜국이 이 반가사유상을 모시기 위해 지은 것. 녹나무(樟木)로 조각된 이 불상은 현재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다.
 616년에도 왜에 보관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보냈는데 이 불상은 현재 일본 국보1호.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진 이 불상은 보계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코류지에 나란히 모셔져 있다.
 계속된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신라를 고수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으면서 성골의 전통을 이으려고 애를 썼으나 결국 실패하고 딸인 선덕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준 왕의 무덤이기에 더 외로워 보이는 지도 모른다.


<13>김춘추와 선덕


 서기 625년. 선덕(善德·신라 27대 왕)은 김춘추와 여러 신하들을 데리고 자신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골치 아픈 문제를 잠시 잊으려고 경주 남산으로 거동했다. 그 무렵 선덕의 아버지 진평왕은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7세기 전반기 신라사회는 외적의 침략으로 바람잘 날이 없었을 뿐 더러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을 만큼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많았다. 왕실의 권위까지 흔드는 내부 분란의 핵심은 왕위 계승문제였다. 법흥왕 이래 확립된 성골이라는 신분의식이 문제였다. 진평왕은 자신의 직계가족에 대한 신성성을 지나치게 강조해 놓았는데, 자신에게 아들이 없었던 것. 그동안 신라사회에서는 공주가 왕위에 오른 적은 한번도 없었다. 또 진평왕의 삼형제중 아들 가진 이가 아무도 없었으며 권력층 내에서도 성골남자가 없었다. 과거의 전통에 따라 화백회의(신라 국가의 대사를 의논하던 기구)를 통해 왕위 계승자를 뽑는다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여지도 있었다. 그러나 성골출신 왕의 화신과도 같은 진평왕이 건재하는 한 아무도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성골인 공주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사람들과 여왕은 부당하며 화백회의를 통해 장래의 왕을 선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파가 갈려 알게 모르게 알력이 자라고 있었다. 진평왕은 그런 사정을 무시하고 사실상 선덕에게 왕위를 계승하려고 수업을 시키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선덕이 머리를 식히러 오랜만에 남산으로 나들이를 간 것이다.
 복잡한 심정을 달래고 있던 선덕은 문득 김유신의 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게 됐다. 신하들에게 자초지종을 물으니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가 김춘추의 아이를 몰래 가졌으므로 김유신이 문희를 태워죽이려 한다는 것이었다. 선덕은 김춘추에게 화를 내며 『네가 저지른 짓이니 당장 가서 그 누이를 구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춘추가 말을 타고 급히 달려가 유신의 집에 가니 마당에는 장작불이 벌겋게 타오르고 있었고, 문희는 옆 기둥에 묶인채 혼절해 있었다. 『유신공, 이러시면 안됩니다. 진정하십시오. 그 아이의 씨는 저의 것입니다. 제가 누이를 거두겠습니다.』
 『아니, 자네가 그랬단 말인가?』
 김춘추는 선덕의 명으로 문희를 포석사에 데리고 가 혼인할 것을 맹세했다.
 애초 김유신이 누이동생을 불에 태워 죽이려고 한 것은 「화랑세기」와 「삼국유사」에 기술돼 있듯 일종의 자작극이었다. 유신이 일부러 자신의 집 앞에서 춘추와 축구를 하다가 춘추의 옷을 밟아 옷고름이 찢어지자 이를 누이동생에게 꿰매게 함로써 두 사람이 사랑을 하도록 유도했고, 문희는 임신을 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안 유신이 선덕과 춘추가 남산에 놀러간다는 정보를 미리 듣고 그 시간에 맞춰 짐짓 불에 태워 죽인다는 소문을 퍼뜨린 뒤 연기를 피워 올렸던 것이다.
 하지만 춘추에게는 아내 보량(寶良)궁주(화랑세기를 쓴 박창화는 필사본을 다시 발췌하면서 보라(寶羅)로 적었음)가 있었다. 보량은 16세 풍월주 보종공의 딸이자 미실의 손녀로 할아버지는 7세 풍월주 설원랑이었다. 애정이 깊었던 두 사람 사이엔 딸 고타소(古陀炤·선덕왕 11년(642) 백제가 대량주(大梁州)를 함락할 때 성주였던 남편 품석과 함께 참살당했다)가 있었다.
 그 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 보량이 아이를 낳다 죽자 문희가 춘추의 정궁이 되어 아들 법민(法敏·후에 문무왕이 됨)을 낳았다. 서악(西岳)이라는 곳에 올라 오줌을 누자 서라벌이 잠기는 꿈을 꾼뒤 동생 문희에게 이를 팔았던 언니 보희는 뒤에 춘추의 첩이 돼 아들 지원과 개지문을 낳았다.
 왜 김유신은 자신의 여동생을 아내까지 있는 김춘추에게 시집보내려고 애를 썼던 것일까? 유신은 자신보다 9세 아래인 김춘추라는 재목을 일찌감치 알아 보았던 것이다. 자신의 집안이 신라에 귀순한 가야의 왕족이어서 신라의 주류사회로 편입되는데 어려움을 겪어온 김유신은 김춘추를 출세(?)의 버팀목으로 이용하려했던 것. 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 만명부인과 결혼하려 할 때 장인이 되는 숙흘종이 강력히 반대한 사실로도 알 수 있듯 그의 집안은 신라의 진골 정통으로부터 홀대를 받았다. 춘추는 신라왕족의 진골 정통이었으며 왕이 될 가능성을 갖고 있었던 것.
  629년 고구려와의 낭비성(娘臂城)전투에 부장군으로 참가한 유신이, 적의 기세에 눌린 신라군의 사기를 일으키기 위해 혼자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적의 장군과 병사들을 수없이 무찔렀다는 고사도 그의 용맹뿐만 아니라 목숨조차 아끼지 않았던 그의 출세욕을 보여준 사례의 하나다.
 김춘추는 18세 풍월주의 지위에 오른지 4년만에 부제인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에게 지위를 물려주었다. 김유신은 김춘추가 즉위한 다음해인 655년에 61세의 나이로 김춘추와 문희의 사이에서 난 생질녀인 지소와 결혼했다. 이같이 두 사람은 혼맥으로 동맹관계를 맺었다. 이 두 사람의 동맹은 나아가 곧 삼국통일의 힘으로 이어졌으니 고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역사학자들간에 또 재미있는 논쟁거리가 하나 등장했다. 바로 김춘추와 문희와의 사이에 끼어 들어 두 사람이 혼인할 것을 지시한 선덕의 당시 신분문제. 즉 선덕은 그때 공주였을까, 여왕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편에는 선덕왕으로 기록돼 있으나 화랑세기에는 선덕공주로 나오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은 「삼국사기」 권 제5편을 보면 632년에 즉위, 재위 16년인 647년에죽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문희가 임신한 아이는 후일 문무왕으로 그는 626년에 출생했고 선덕은 632년 왕위에 올랐다. 그러면 당시의 선덕은 공주였을까, 왕이었을까? 화랑세기가 진본의 필사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처럼 선덕에 대한 분명한 기록은 화랑세기 필사본이 위서가 아니라는 점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역설하고있다.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

 

 즉위 때부터 죽을 때까지 김유신과 김춘추의 보위를 받았던 선덕여왕(재위632~647년)은 경주 남산 맞은 편인 낭산(狼山)의 숲속에 묻혀 있다. 여왕은 죽거든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평소 입버릇처럼 말했으나 신하들이 그 뜻을 잘 알지 못하자 여왕이 직접 도리천은 낭산의 정상이라고 일러줘 소나무향 가득한 지금의 자리에 누워 있다.
 즉위하기 1년 전에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그녀의 즉위를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키는 등 40세를 넘긴 나이에 어렵게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은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이 계속되자 당나라에 조공사신을 파견하는 등 당나라에 접근한다. 이는 후일사가들에 의해 당나라와 연합함으로써 국가를 보존하려는 자구책의 일환이었다는 해석을 받는다.
 재위시 분황사를 창건하고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의 건의에 따라 호국불교의 상징인 황룡사 9층탑을 축조하고 첨성대도 건립하는 등 문화발전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재위 16년인 647년 정월에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 진골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것을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고, 김유신과 김춘추에 의해 진압이 되었으나 이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기자가 초겨울 오후 늦게 숲속에 가려진 선덕여왕릉을 찾았을 때 누군가 금방 놓고간 듯한 꽃 한 다발이 무덤 위에 놓여 있어 1천4백년전의 여왕에게 헌화한 사람이 과연 누구였을까라는 궁금증을 낳게 했다.


 <14>가야파의 등장

 

 경남 양산시 북정동 고분 중 10호인 부부총(사적 제93호)은 무덤의 중요성을 간파한 일본인들이 지난 1920년 발굴이란 명목으로 도굴해 그 유물은 현재 일본 도쿄박물관에 수장돼 있다.
 6세기대 신라시대의 무덤으로 파악되는 장방형의 석실무덤인 이곳에서는 우리나라 고분발굴사상 최초로 신라 금동관이 출토됐으며 각종 장신구류 토기류와 주인부부와 하인으로 보이는 남자 3인의 인골이 조사됐다. 동아대박물관은 지난 1990년4~9월 이 일대의 고분군을 조사하면서 이 부부총을 정식으로 발굴하기도 했다.
 「삼국사기」지리지에 보면 신라시대 당시 양산(양주)는 관할지역이 김해를 비롯, 12군 34현이 있었으며 이는 당시 수도였던 경주시내를 제외한 경상도의 낙동강동쪽 유역 전체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당시 양산의 위치를 짐작케 하고 있다.
 한편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 구형왕의 손자로 금관가야 출신이고 지금의 충북 진천군 태수를 지낸후 양산(당시 양주) 총관을 지낸 것과 관련, 이 부부총이 김서현과 그의 부인 만명부인의 묘일 것으로 고고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즉 이 묘의 규모나 금동관 등의 부장품으로 볼 때 이 지역의 가장 강력한 지배자의 것으로 분석되고 있는 만큼 양산을 다스리던 총관묘일 것이란 추측은 자연스럽다. 무덤 조성시기도 김서현이 활동한 시대와 동시대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양산은 지리적으로 신라의 남서쪽 입구로서 삼국시대에는 왜와 가야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므로 김서현을 양산 총관으로 임명한 이유는 가야인들을 위한 무마용이었을 것이란 게 학자들의 견해다.

 

《김유신, 반란 진압 후 출세가도》

 

 가야왕족이 신라사회에 등장한 것은 가락국 6대왕인 좌지(座知)가 신라의 아찬(6위관등) 벼슬에 있던 도령(道寧)의 딸 복수를 아내로 맞음으로써 비롯됐다. 이후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10대 구형왕까지 모두 신라의 골품여성을 왕후로 맞았다.
 구형왕의 손자인 김서현. 그는 할아버지 구형왕과 아버지 무력의 그늘에서 벗어나 신라사회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해야 했다. 서현은 진흥왕의 조카딸인 만명부인을 아내로 맞아 진평왕 17년(595)에 유신을 낳았다. 그가 고구려와 백제와의 싸움에 나서 여러차례 공을 세우는 동시에 진지왕의 아들인 용춘과 관계를 긴밀히 한 것도 어찌 보면 생존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노력은 용춘의 아들 김춘추와 자신의 아들 김유신이 642년(선덕왕11)에 피로써 평생 동지가 될 것을 맹세해 결실을 맺었으며 이런 동맹관계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발판이 되었다.
 유신은 외할머니인 만호태후의 허락으로 서라벌에 입성해 15세에 풍월주가 되었다. 「삼국유사」엔 18세에 국선화랑이 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신라사회는 고구려와 백제 등의 침입으로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김유신도 아버지 김서현처럼 목숨을 내놓고 공을 세우는 방법 외엔 신라사회에 살아남을 길이 없었다.
 유신이 17세때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 땅을 자주 침범하는 것에 분노하여 홀로 중악(中岳·지금의 경주 인근 단석산으로 알려져 있음)의 석굴에 들어가 도인으로부터 삼국통일에 대한 비법을 들었다거나 자신의 애마가 기생 천관의 집앞에 이르자 그 말을 베어 죽인 이야기 등은 어떤 의미에선 신라 정치판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의 안간힘이기도 했다.
 김유신이 신라 중앙정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647년 귀족회의의 수장이었던 상대등 비담이 반란을 일으키자 김춘추와 더불어 진압한 일 그것이다. 왕을 모반으로부터 지켜냄으로써 그는 결정적으로 출세의 길을 달리게 된다. 진덕여왕 3년에는 중앙군으로 편성된 군단을 지휘함으로써 신라군대 통수부의 중심적 위치에 섰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김유신이 주동이 돼 김춘추를 등극시키고 이듬해인 10월에 김춘추의 셋째딸 지소와 혼인함으로써 김춘추와의 결속력을 더욱 다지게 된다. 이는 가야계 출신이란 제약을 벗어나 드디어 왕실과도 통혼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김유신 당대에 가야파가 신라 정치무대의 전면에 서게 됐음을 보여준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 고구려원정군의 수뇌였던 김인문과 김흠순이 그의 생질과 아우였고 그의 맏아들 삼광은  이찬직을 지내는 등 다섯 아들과 서자 군승도 높은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681년 신문왕 원년 8월 가야파인 김흠돌 김흥원 김진공 등이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당함으로써 신라정치무대에서 가야파는 마침내 사라지게 된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김유신편을 상 중 하에 걸쳐 싣고 있으나 화랑세기를 쓴 김대문은 김유신이 가야파라는 이유 때문이었는지 그에 대한 기록에 매우 인색했다.
화랑세기엔 김유신의 활동사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그의 조상인 가락국의 왕들이 신라의 여성을 왕후로 맞아 구형왕 때는 신라에 항복하고 들어왔다는, 신라의 우월성만 강조했다. 이는 가야파에 대한 토착 귀족세력의 시각을 읽게 해주는 대목이다.
 김대문은 또 김서현이 만명부인과 혼인할 때 장모인 만호태후가 서현이 대원신통이라 하여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등 진골정통의 우월성을 내세웠고 자신이 가야파의 반란을 진압한 세력의 집안 자손임을 강조하고 있다.  

<15>신라임금들은 황제로 불렸을까

 

 천년 왕조 신라는 56대왕까지 이어져 우리나라 고대사의 핵을 이루고 있다. 박혁거세부터 시작해 경순왕까지 내려오면서 신라를 이끌어온 왕들은 어떤 호칭으로 불렸을까? 「화랑세기」 전편을 읽다보면 놀라운 사실이 기록돼 있다.
가령 6세 풍월주 세종조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진흥왕」을 「진흥대제(大帝)」와 「진흥제(帝)」로 표기하고 있는 것. 다른 임금들도 마찬가지이다. 왕비의 경우 황후(皇后)로 기록돼 있다. 그러면 신라의 왕들은 과연 실제로「제」 혹은 「대제」로 호칭됐을까. 사실이라면 신라가 중국과 대등하게 「칭제(稱帝)」했다는 이야기가 되므로 이는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 문제를 소개하기 앞서 우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타난 왕들의 호칭을 알아보자. 신라에서 왕의 명칭은 여럿 있었다.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는 「거서간(居西干)」으로 불렀고 2대 남해는 「차차웅(次次雄)」이라 했다. 신라 제3대 유리 때부터 제18대 실성까지는 「이사금(尼師今)」이란 칭호를, 제19대 눌지에서 22대 지증까지는 「마립간(麻立干)」으로 불렀다. 국문학자 이병도는 「마립간」이 마리「頭」 혹은 마루「宗·廳」등과 같은 어원에서 유래한 것으로「정상」을 뜻한다고 풀이하고 있다. 「거서간」은 삼국유사엔 「거슬한」으로도 기록되어 있는데 진한의 말로 왕, 귀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차차웅」은 무당을 뜻하는, 제정일치 시대의 호칭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왕이라는 칭호는 중국과 본격 교류하기 시작한 제23대 법흥왕 때부터 썼던 것. 한편 화랑세기 곳곳에 보이는 「갈문왕(葛文王)」이란 명칭은 신라때 왕의 근친에게 주던 일종의 봉작(封爵). 즉 혈통을 달리해 왕위를 이은 왕의 생부나 왕의 장인 등에게 주던 것으로, 조선시대의 대원군 부원군 등과 같은 의미로 보면 된다. 하지만 왕의 생부나 장인이 모두 갈문왕으로 추봉된 것은 아닌 듯 하며 28대 진덕여왕 이후 갈문왕이란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화랑세기에서 신라왕들을 「제(帝)」로 호칭한 대목을 놓고 역사학자들간의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화랑세기의 이러한 호칭이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견해는 이렇다.
 김대문이 화랑세기를 지었을 시기로 추정되는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 사이에 만들어진 신라의 여러 금석문을 살펴보면 신라왕을 제 혹은 대제라 칭한 예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문무왕 초기에 세워진 무열왕릉비에는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적혀있고 신문왕 2년(681)에 세워진 문무왕릉비에는 「신라문무왕릉지비」로 돼 있으며 신문왕 6년(686)에 세워진 청주 천수산사적비(天壽山寺蹟碑)에는 「국주대왕」(國主大王)이라 기록돼 있다는 것.
효소왕 10년(701)의 김인문묘비에는 태종무열왕을 태종대왕으로, 성덕왕 5년(706)의 황복사 금동사리함명에는 신문왕 효소왕 성덕왕을 각각 신문대왕 효소대왕 금주대왕(今主大王) 혹은 융기대왕(隆基大王)으로 칭하고 있다.
 특히 이 가운데 문무왕릉비와 김인문묘비에는 대제 혹은 황제와 대왕이 동시에 등장하는데 대제는 고종대황대제(高宗大皇大帝)라 하여 당 고종을 지칭하고 황제는 태종문무성황제(太宗文武聖皇帝)라 하여 당 태종을 가리키며, 대왕은 신라의 태종무열왕을 지칭한 것으로 분석된다.
 「칭제」를 부인하는 학자들은 화랑세기의 중요 무대인 신라중기의 임금들의 호칭도 마찬가지였다고 주장한다.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냉수리비(503년)의 내지왕(乃智王), 그리고 2왕(二王)과 7왕(七王), 진흥왕순수비의 신라대왕, 천전리 서석의 법흥대왕에 관한 사례에서와 같이 신라 중고기 금석문에도 신라왕을 「제」 혹은 「대제」라 부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또 신라 금석문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세워진 냉수리 신라비에서부터 가장 늦은 시기의 봉림사 진경대사탑비에 이르기까지의 금석문에 대제 황제를 포함한 「제」의 용례는 모두 25차례, 특정 임금을 지칭하는 왕의 용례는 중고기 금석문의 19건을 포함해 모두 132건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성주사 낭혜화상비문의 한왕(漢王), 봉암사 지증대사비문의 준왕(准王), 승복사 비문의 노공왕 초장왕 문왕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라의 왕들이었다.
 부산외대 권덕영교수(사학과)는 『이러한 용례로 보아 결국 신라 금석문에서의 제는 곧 중국 정통 왕실의 임금을 지칭하는 용어로, 신라 임금에 대해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학자들에 따라서는 오히려 이러한「칭제」는 김대문이 화랑세기를 어떤 역사관으로 서술했는가를 말해주는 자료가 된다고 보고 있다. 신라 당대에 서술된 화랑세기의 역사관은 중국의 영향 아래 놓였던 고려 때의 삼국사기 삼국유사 때보다는 훨씬 주체적이었다는 것. 또 만일 화랑세기가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위작이라면, 일본왕실 도서관의 서기인 박창화씨가 일제의 감시 아래서 과연 이러한 칭호를 쓸 수 있었을까 라는 점을 들어 화랑세기의 「칭제」문제는 보다 신중하게 검토돼야 한다고 말한다.
 왕실과 가까운 일족이었던 김대문이 왕을 지칭할 때 일부러 제나 대제 등의 명칭을 사용했는지, 아니면 일제시기 화랑세기를 필사한 박창화씨가 일본에 대해 상징적으로 신라의 왕들을 보다 격상된 의미인 제 대제 등으로 표기했는지는 앞으로 더 규명돼야 할 문제이나 이러한 논란은 당분간 계속 될 것 같다.

 

《냉수리 신라비》

 

 현존하는 신라 최고의 비석인 냉수리비는 지난 1989년 농부 이상운씨가 자신의 밭에서 밭갈이를 할 때마다 농기구에 걸리던 돌을 뽑아내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빨랫돌로 사용하려고 물로 씻던 이씨가 돌에서 글자가 드러나자 행정당국에 신고해 그 존재가 밝혀진 것.
 비문의 내용은 절거리라는 사람의 재산소유 인정과 죽은 뒤의 재산상속 문제를 해결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계미년에 지도로 갈문왕(지증왕) 등 6부출신의 유력자 7명이 실성왕 내물왕 두 왕이 재산소유를 인정한 결정사항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한편 절거리가 죽은 뒤 아우 아사노에게 재산을 상속하고 다른 사람은 그 재산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지 말 것을 결정했다는 내용이다. 즉 당시의 서울이었던 경주 근처 흥해지역의 절거리란 지방민의 재산권을 보증하기 위해 신라의 왕이 두번이나 회의를 연 과정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또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 7명이 결정사항을 집행하고 촌주 2명이 비 세우는 일을 담당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 비는 503년(지증왕4)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지방민의 재산보증 결정을 구두로 통보하거나 나무 따위에 기록할 수도 있는데도 오래도록 남을 돌에 새긴 것은 지방민으로 하여금 신라 왕실의 권위를 믿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이 비는 개인의 재산소유와 상속에 따른 분쟁을 해결하는 절차를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5~6세기 신라의 정치 경제제도를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가로65~73㎝, 세로 47~69㎝,두께 30㎝의 고르지 못한 화강암의 자연석 앞면 뒷면 윗면에 모두 231자가 새겨져 있으며 1991년 국보 제264호로 지정됐다. 
 

 <16>비형랑은 귀신의 아들인가

 

 「화랑세기」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신비화된 설화나 기록을 깨버리거나 뒤흔들어버린 경우가 더러 보인다. 달리 말하면 당대에 쓰여진 화랑세기가 안개 속과 같은 이들 사서의 불명확한 부분들을 걷어내어 역사적 사실을 보다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신라 25대 진지왕의 서자인 비형(鼻荊)에 얽힌 이야기이다. 삼국유사 권1 도화녀와 비형랑조에 비형에 대한 설화가 아주 재미있고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때는 581년(진평왕3년). 서라벌의 여섯 마을중 하나인 사량부의 한 민가에서 일어난 이야기다. 밤중에 이 집에 범상치 않은 남자 손님이 한 명 들자 오색구름이 몰려와 집을 에워싸고 온갖 새들이 날아들어 노래하는 것이었다. 이 손님은 다름 아닌 진지왕의 유령이었다.
 당시 신라의 임금들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하루에도 몇명의 여성과 사랑을 나누어도 아무런 흠이 되지 않았으며 더구나 임금에게 여성을 공급해주던 색공(色供)이란 제도까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그 당시에도 임금은 성골 혹은 진골의 신분이거나 그에 상당하는 신분의 여성들을 선택해야했다.
그런데 진지왕은 그러한 룰을 깨트리고 골품에 관계 없이 뭇 여성들과 관계를 하는 바람에 신라사에서 전무후무하게 여자문제로 즉위 4년만에 왕위에서 쫓겨난 인물. 25대 왕으로 낙점되었던 그의 형 동륜태자의 방탕한 생활과는 달리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지내다 형의 급사로 생각지도 않게 왕위에 오른 그가 어느날부터 성이 자유로웠던 신라사회에서도 용납이 되지 못할 만큼 문란한 생활을 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이 부분은 역사학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이지만, 허울은 왕이었지만 지소태후 사도태후 등 입김 센 여성들에 둘러싸여 왕권을 휘두르지 못한 데서 오는 비애, 장자 적통이 아닌데도 즉위한 자격지심이 그 원인이었을 것으로 풀이된다.
 삼국유사에선 진지왕이 귀신이 되어 도화(桃花)를 찾아오기 2년전인 579년, 폐위되기 직전에 그는 도화라는 여성의 미모가 출중함을 듣고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여 탐하려고 했다 한다. 그때 도화는 아무리 임금이라도 남편이 있는 여자를 탐할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진지왕이 『그러면 남편이 없으면 모실 수 있겠느냐』고 물어『그럴 수 있다』고 답했다. 얼마후 진지왕이 쫓겨나고 바로 죽었다는 것.
 그리고 나서 도화의 남편이 죽은 지 10일이 지나 불쑥 나타난 것이다. 도화의 부모는 하늘의 뜻인 모양이라며 합방할 것을 권유, 7일 동안 두 사람이 방에서 한번도 나오지 않고 사랑을 나누어 낳은 아이가 비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비형은 진지왕의 유령의 아들로 13세 풍월주 용춘의 배다른 남동생이 된 것이다. 그러니 비형은 진평왕과도 사촌인 셈. 진평왕은 이 소문을 듣고 비형을 궁에 불러 키웠으나 밤이면 월성을 날아 넘어가 서쪽에 있는 황천(荒川)언덕에 가 귀신들과 놀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인 귀교(鬼橋)를 만들었다거나 임금의 명을 어긴 길달이라는 귀신을 죽이기도 했다는 것.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에는 이러한 이야기 외엔 비형에 대한 언급은 없다. 진지왕이 폐위되고 나서도 비천한 신분이었던 여성인 도화와 계속 관계를 했던 역사적 사실을 삼국유사가 「유령의 등장」이란 설화로 포장해 재구성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의 신비화한 설화적 내용을 걷어내고 생각한다면 비형이 귀신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바로 삼국유사의 이 설화를 당대에 쓰여진 화랑세기가 역사적 사실로「증언」하고 있는 것. 이 부분이 화랑세기 필사본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대목으로 주장되는 것이다.
 우선 화랑세기 13세 풍월주 용춘편에 보면 용춘의 아버지 진지왕이 「음란함에 빠졌기 때문에 폐위돼 3년 동안 궁에 갇혀 있다 죽었는데 용춘이 어릴 때이므로 아버지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고 적혀있다. 이 기록은 아주 놀라운 것이다. 김대문이 화랑세기를 통해 가능하면 신라의 왕들과 자신의 선조들이 가까웠다는 것을 넌지시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감히 폐위된 왕의 후일담을 허위로 기록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나아가 진지왕이 죽은 때와 화랑세기가 쓰여진 시점의 차가 100년을 넘지 않을 것이란 점을 생각한다면 진지왕의 폐위사건은 김대문 당대 왕족과 귀족들 사이엔 그 내막이 생생하게 전해져 내려왔을 것이다.
다시 말해 진지왕이 폐위된 후 도화와 관계를 계속해 비형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되고, 설화로 처리된 삼국유사의 내용을 화랑세기가 역사적 사실로 입증하는 것이 된다.
 용춘편의 또 다른 기록을 보면 진평왕이 작은 아버지인 진지왕의 아들들인 용춘과 비형을 불쌍히 여겨 궁으로 불러 정성들여 키웠다는 내용과 용춘은 9세 풍월주 비보랑을 형으로 섬기고 서제(庶弟) 비형과 함께 힘써 낭도를 모았고 당시 분열돼있던 낭도들 모두 이들을 따랐다는 대목이 보인다.
 이러한 기록들로 유추해보면 비형은 용춘 비보랑 김서현(김유신의 아버지) 호림(14세 풍월주) 등과 같은 시기에 화랑으로 활동했으며 비록 풍월주는 되지 못했으나 낭도의 무리를 이끌며 용춘을 힘껏 도운 것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비형이 귀신의 아들이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당시 임금의 아들일지라도 적자와 서자의 구분이 확실했던 만큼 나라의 안정을 위해 신라왕조 체제를 본받으려 했던 고려왕조가 진지왕의 흠을 숨기고자 신비화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유추할 수 있다.
 또 화랑세기엔 진지왕의 이름이 일관되게 금륜(金綸)으로 나오고 있으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엔 사륜(舍輪) 금륜(金輪) 일작(一作) 혹작(或作)으로 나오고 있어 이부분도 사서로서의 화랑세기의 신빙성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카사노바 같이 살다간 진지왕》

 

 불운한 임금이었던 진지왕은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능(사적 제178호)에 묻혀있다. 역사학자들 중에는 신라 제46대 문성왕과 합장돼 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나 무려 278년간의 시간차가 있음을 볼 때 이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또 어떤학자는 서악동 고분군(사적 제142호) 중 아래에서 두번째 무덤을 진지왕릉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576년에서 579년까지 짧은 기간동안 재위했던 그는 형이 죽었기 때문에 왕으로 즉위했다는 주장 외에 그의 즉위와 관련된 다른 입장도 있다. 당시의 왕위계승에는 부자상속제가 확립돼 있었는데 진흥왕의 둘째 아들인 진지왕은 진흥왕의 적손 즉 동륜태자의 아들인 백정(白淨·뒤의 진평왕)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왕위계승자가 아니었다는 것. 그러나 진흥왕대 막강한 힘을 가졌던 거칠부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찬탈했다는 것이다.
 역사학자 김영하씨는 『이러한 추측은 진지왕이 즉위하던 해에 거칠부를 상대등에 임명하여 국정을 맡긴 사실과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또 정치를 어지럽히고 음란한 생활을 하는 바람에 폐위됐다는 점이 그것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했다. 여하튼 그의 사생활이 세세하게 기록돼 있지는 않으나 곳곳에서 음란한 생활이 폐위의 원인이 됐다고 나오는 걸로 봐서 성에 그토록 관대했던 신라인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임금 자리에 구애받지 않고 카사노바적 삶을 산 것은 분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조해훈기자
 

 <17>포석정은 어떤 곳인가

 

 서기 927년 음력 11월 어느날, 신라 55대 임금인 경애왕은 포석정(鮑石亭)에서 왕비와 궁녀, 친척들과 함께 연회를 베풀고 있었다.
 그는 아름다운 궁녀들과 봄놀이를 하면서 자신이 지은 노래인 「번화지곡」(繁華之曲)을 악공(樂工)들에게 연주하게 했다.
 「기원과 실제사 두 절의 동쪽에 /두 그루 소나무 기대 선 나정 골짜기 가운데 /머리 돌려 바라보면 꽃은 언덕 가득한데 /엷은 안개 실구름에 희미하게 가렸어라」 경애왕이 이렇게 질펀하게 놀고 있는데 갑자기 견훤이 군사들을 이끌고 바람같이 들이닥쳤다. 경애왕은 아연실색해 왕비와 더불어 후궁으로 달아났고 미처 피하지 못한 신하와 궁녀들 그리고 악공들은 현장에서 살해됐다.

 궁궐을 점령한 견훤은 왕과 왕비, 후궁들을 잡아오게 해 왕을 자결하게 했으며 왕비를 욕보이고 휘하들을 풀어 비첩들을 유린하게 했다. 이때 견훤은 61세 환갑의 나이였다. 그보다 두달 앞선 9월에 견훤이 고울부(지금의 경북 영천)까지 쳐들어오자 경애왕은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며 왕건은 즉각 시중인 공훤(公萱)을 사령관으로 삼아 군사 1만명을 급히 보냈으나 견훤이 고려군사들보다 빨랐던 것이다. 그가 쳐들어온 이유는 고려의 왕건과 가까웠던 경애왕이 왕건을 초청했기 때문에 먼저 신라에 들어와 친왕건주의자들을 응징하고 신라를 후백제의 주도권 아래 놓아두기 위해서였다. 경애왕을 제거한 견훤은 경애왕의 이종사촌인 경순왕을 임금으로 세우나 경순왕은 김웅렴 등 친고려주의자 대신들에 의해 제대로 뜻을 펴지못하고 935년 마침내 왕건에게 스스로 나라를 바치고 만다.
 그런데 신라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이같은 기록은 무언가 앞뒤가 맞지않는 것 같다고 말한다. 아무리 말기적 현상이 누적됐다 해도 절대절명의 국가 위기에서, 그것도 음력 11월의 추운 겨울에 왕과 대신들이 과연 포석정에서 곡수유상(曲水流觴)을 하며 질펀하게 취해 놀 수 있었을까?
 백제사를 전공하고 견훤은 진훤으로 불리는 게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 이도학(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씨도 『당시 견훤이 신라의 궁성을 향해 쳐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받고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그렇게 놀고만 있었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이 간다』고 밝혔다. 그 점에서 임금의 놀이터라는 「포석정」의 기능에 대해 이견이 잇따라 나오고 있는 것.
 지난 1999년 4~5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포석정주변을 시굴조사 했을 때 「砲石」(포석)이라는 글자가 적힌 명문기와와 기와무지를 확인했다. 이 명문기와와 함께 사당으로 보이는 건물터가 나왔다. 이로써 역사학자들은 포석정이 지금보다 더 넓고 큰 규모였을 것이라는데 동의했다. 화랑세기 연구자인 이종욱교수는 『이 명문기와를 통해서도 추측할 수 있듯 신라 당시 포석정은 단순히 유희를 즐기던 곳이 아니라 틀림없이 제사 등 국가적 주요행사를 담당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대목들이 놀랍게도 화랑세기에 군데군데 등장한다. 다시 말해 화랑세기가 「포석정」의 기능에 대한 새로운 학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 이를테면 8세 풍월주 문노조에 진평왕과 6세 풍월주 세종이 참석한 가운데 문노와 윤궁이 포석사에서 결혼을 고(告)하는 길례를 행했으며 포석사에 문노의 화상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문노는 삼한을 통합해 당시 신라인들의 상징적인 영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문노의 화상이 포석사에 모셔진 까닭은 포석사가 나라의 안녕을 비는 행사가 치러지던 곳이었기 때문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문노의 화상외에 선대 왕들의 화상도 같이 모셔져 있어 국가의 중대사와 왕족들의 혼인서약 등을 했던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화랑세기에 포석정이 아니라 사당 사(祠)자를 써서 포석사(鮑石祠)라고 기록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12세 풍월주 보리공조에도 보리공과 만룡공주가 혼인하기로 하자 만룡의 어머니인 만호태후가 친히 포석사에서 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길례를 했으며 김춘추도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와 함께 포석사로 가 결혼을 하겠다고 약속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근거도 있다. 조경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윤국병(고려대교수)씨는 1983년 논문 「경주 포석정에 관한 연구」에서 『포석정 옆 포석계곡에 포석사에서 제사를 지내기 전 몸을 씻던 바위 웅덩이가 있다』며 『이런 걸로 봐서 포석정에서 제사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파악된다』고 주장했다. 지난1993년 논문 「포석정의 종교사적 이해」를 쓴 종교학자 강돈구(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씨도 『포석정은 고려의 팔관회 성격의 불교행사를 치르는 등 국가의 중대사 등과 그에 관한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포석정은 포석사에 부속된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아직 포석정 인근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나 포석정 바로 옆 마을인 경주시 배동 포석마을엔 지금도 큰 규묘의 건물터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초석들이 나오고 있다. 이 마을에 신라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절인 성불사도 포석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역사연구자들은 보고 있다고 경주시청 이채경 학예연구사는 설명했다.

 

《포석정》

 

 경주 남산의 서쪽 계곡가에 위치한 포석정은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니까 포석사가 먼저 세워졌고 그 이후에 포석정이 만들어 졌다는 것.
 「삼국사기」엔 남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을 받아들여 이것을 수구(水溝)에 흐르게 해 잔을 띄워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물을 받아 토하는 거북모양의 돌이 있었으며 1871~1873년 사이에 안동으로 옮겨졌다고 하나 그 소재는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
 지금의 포석정은 1915년에 개축한 것이나 당시 원래 있던 돌들을 움직이기도 했고 또 임의대로 돌을 놓아 원형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없지 않다.
 지난 1999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이 인근에서 발견한, 명문기와에 새겨진 글자인 「砲石」(포석)은 당시 이두가 통용되던 시기였으므로 한자를 소리나는 대로 적었기 때문에 삼국사기나 화랑세기에 보이는 鮑」(포)자와 다르다는 게 일반적인 주장이다. 또 기와에는 어렵고 획이 많은 글자를 새기기가 어려웠다는 사실과도 맥을 같이 한다.
 「포석」 명문기와가 수습된 지점이 포석정 동남쪽 70m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곳에 포석사의 중심지가 있었을 것이라는 학자들의 설명에 수긍이 가기도 한다.
 

<18>아내를 바쳐 출세한 사나이

 

 미실의 남편이었던 세종이 6세 풍월주로 있을 때 당시 열세살의 처남을 화랑도의 기구중 높은 직책이었던 전방화랑(지금의 대대장급)으로 삼았으며, 문노(8세 풍월주)가 반대하자 미실이 낭도들에게 뇌물을 주어 미생을 따르게 하는 등 끊임없이 동생의 뒤를 돌봐줬다.
 미생은 역시 바람기가 많은 동륜태자와 같이 여색을 탐하러 자주 다녔다. 화랑세기에선 이를 「색을 낚는다」는 뜻의 「어색(漁色)」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유부녀라도 상관않고 사랑을 나누고 첩으로 삼았던 것. 한번은 이들이 당두(唐斗)라는 사람의 아내가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 밤에 그 집에 찾아가 불러내 동륜태자와 같이 관계를 맺었다. 한 여자가 두 외간 남자와 한꺼번에 관계를 갖는 것은 요즘에도 용납이 되지 않는 터인데 비록 강압에 따른 행위라곤 하지만 1천4백여 년전의 당시로선 대단한 사랑법(?)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 진흥왕의 여자인 미실과 몰래 사랑을 나누던 동륜태자가 572년(진흥왕33) 3월 어느날 밤에 미실이 있던 보명궁(寶明宮)에 가다 큰 개에게 물려 죽은 후 미생은 당두의 아내를 집으로 불러 첩으로 삼으려 했다.
 이때가 미생의 나이 23세였다. 이에 당두가 미실을 찾아가 『아이들이 엄마를 찾고 있으니 첩은 곤란하고 집에 살림을 하면서 한번씩 색공(色供)만 들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하자 미실이 미생을 나무라 여자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미생을 잊지못해 집에서 도망쳐와 자진해서 첩이 될 것을 희망했다. 미생은 누이의 충고가 있은지라 좋은 말로 달래 여자를 돌려보낸 후 당두를 관리에 앉히도록 천거했다.
 이에 당두라는 사나이가 고마워하며 아내를 미생에게 바치려 하자 미생이 『손위 누이의 명령이라 그럴 수는 없다』며 첩으로는 삼지않고 색공하도록 해 자신의 아이를 세명이나 낳게 했다.
 당두는 미생의 도움으로 조부(調府·신라때 공물과 세금 등을 관장하던 관청)의 우경(右卿·진골 다음가는 신분인 6두품이 지낸 벼슬로 추정됨)이라는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는 『사람들이 미생공을 두고 색을 너무 밝힌다고들 하나 나는 미생공이 어머니와 누이에게 효심이 깊고 아랫사람에게 덕을 많이 베푸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오히려 미생을 변호하고 다녔다고 한다.
 미생은 당두의 처남인 만세도 관직에 오르도록 해주고 당두의 처제를 첩으로 삼았는데 그 첩이 미생의 아들인 백생과도 관계를 하자 아들에게 그녀를 주었다.  이처럼 화랑세기 전편의 성풍속도는 지금도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자유분방하다.
자신의 아내나 첩을 남에게 주는 것이 흠이 되지 않고 오히려 일반적인 현상처럼 나타난다.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 용수도 죽으면서 아내와 아들인 춘추를 동생 용춘에게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내를 바쳐 출세를 한 당두의 이야기는 신라사회에서도 화제거리였던 모양이며 노래로 만들어져 당시 아이들에게 불리어졌다. 13세 풍월주 용춘공편의 기록을 보면 아이들이 이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처를 바쳐 부자가 되고
  일곱 아들이 모두 말을 탄다네
  딸을 바치고 가난해져
  세 아들이 모두 베옷을 입었다네
 
 화랑세기에는 아내와 첩을 남에게 주는 것 외에 남편이 있는 여자와 사통(私通)하는 내용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자주 나온다. 이를테면 미실의 아버지인 2대 풍월주 미진부는 남모공주와 사랑을 하다 그녀가 죽자 외할아버지인 법흥왕의 후궁인 묘도와 사랑을 해 미실과 미생을 낳은 것이다.
 화랑세기의 신빙성을 지지하는 역사학자들은 화랑세기가 이러한 복잡한 통정(通情)을 기록한 것은 당대인의 음란함을 보이려는 게 아니라 이들의 혼인과 출생에 관한 정보를 남기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당시엔 어떤 사람의 자식인지가 사회· 정치적 지위를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11세 풍월주 하종편에는 진흥왕이 동륜태자와 미실이 사통해 낳은 애송(艾松)을 자신의 딸인줄 알고 애송공주로 봉했다는 기록도 나올 만큼 남녀의 관계가 복잡했다.
 5세 풍월주 사다함의 할아버지 비량은 법흥왕의 왕비인 벽화후를 좋아해 그녀가 뒷간에 갈 때마다 따라가 관계를 해 아들을 낳았다. 구린 곳에서 관계를 해 낳은 아이라 해서 구리지라 불렀으며 바로 사다함의 아버지였다.
 이런 것 외에 임신한 부하의 아내를 거두어 관계를 하다가 아이를 낳으면 남편에게 돌려보내는 마복자 제도도 있었다.
 낭도들도 출세를 위해 풍월주 등에게 임신한 아내를 바쳤는데 낭도의 아내들이 임신한 것처럼 속이고 윗사람의 집에 들어가 모시다 임신이 제대로 되지않을 경우 그 집의 노비 등과 관계를 해 임신을 하는 일도 잦았다.
 이처럼 골품제가 엄연히 존재했던 신라사회에서는 남의 아내를 뺏거나 남의 아내와 사통을 해도 제재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지금의 도덕적인 기준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처럼 자유로운 성풍속에 대한 기록을 놓고 역사학자들간 화랑세기의 진위여부 논쟁이 지금도 첨예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생은 누구》

 

 미생은 색공(色供·왕의 자손을 낳기 위해 왕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여성으로 거의 진골계급)출신이자 당대 최고 섹스 심벌이었던 미실의 남동생이다.
 아들이 100명이나 됐으며 첩이 많아 다 기억하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화랑세기」는 기록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천간성」(天奸星·간사함이나 음탕함을 상징하는 하늘의 별)이라 부를 만큼 바람기를 타고 났고 눈길을 한번 주면 반하지 않는 여자가 없었으며 많은 여자들이 스스로 그의 첩이 되고자 했다고 한다.
 반드시 미생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신라시대의 성풍속도를 적나라하게 형상화한 것이 당시에 제작된 수많은 토우다. 토우는 당시 신라백성들의 농경 어로 등 생활상이나 가무를 즐기는 모습 등을 그대로 표현해 역사 해석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으며 특히 다양한 체위의 성행위 장면은 너무 리얼해 보기에 낯뜨거울 때가 많다.
또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인 나무로 만든 남성 성기는 궁중의 여성들이 은밀히(?)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신라인들이 성에 대해 얼마나 자유분방했는지를 읽게해 준다.
 누나 미실의 도움으로 동륜태자와 금륜태자 등과 함께 궁중에서 사다함의 형인 토함으로부터 글을 배우는 총애를 누리기도 한 미생이었으나 공주들에게 춤을 가르쳐준다며 공주들을 건드려(?) 진흥왕이 이를 알고 처벌하려 하자 누이의 도움을 얻어 위기를 모면하는 등 카사노바로서의 면모를 일찍부터 보였다. 오죽하면 진(陳)나라의 사신이 『상국(上國·중국)에도 아직 미생같은 이는 없다』며 놀라 입을 벌리기까지 했을까.
 

 <19>왕좌를 둘러싼 권력투쟁

 

 화랑세기 13세 풍월주 용춘공편에는 아들이 없었던 신라 26대 진평왕이 용춘의 형인 용수 전군(殿君·왕과 후궁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용수가 용춘에게 의논하니 용춘이 말하기를 『대왕의 춘추가 강성할 때인데 혹시 왕위를 이으면 불행할까 염려됩니다』며 말렸다. 이에 용수가 사위가 되기를 사양했다는 내용이다.
 이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없는 「화랑세기」만의 기록이다. 삼국사기 등에는 용수와 용춘이 같은 인물로 등장하고 있는 마당에 이 기록은 화랑세기만이 보여주는 내용인 것이다.  삼국유사 왕력편의 제27대 선덕여왕조에는 성골의 남자가 모두 없어졌으므로 부득불 여왕이 즉위했다고 간단히 기록돼 있다.
 그러나 여자가 왕이 된 유례가 없고, 다음 보위를 둘러싸고 온갖 음모가 난무하던 당시 상황에서 후사문제에 대한 진평왕의 고민이 「화랑세기」에는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딸을 다음 왕으로 즉위시켰던 진평왕이 그에 앞서 여러가지 방안을 시도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 화랑세기 전편을 보아도 진평왕의 후사 문제 만큼 머리 아프고 혼란스러웠던 왕위계승 논란은 없다.
 여러차례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용수는 어쩔 수 없이 진평왕의 딸인 천명공주의 남편이 되었으나 아들이 생기지 않았다. 진평왕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천명의 동생인 선덕이 차츰 용봉(龍鳳)의 자태를 띠자 선덕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천명에게 그 지위를 양보하도록 했다.
 아버지의 말에 따라 천명은 순순히 남편 용수를 따라 궁을 벗어나 살게됐고 그에 따라 성골에서 진골로 신분이 격하됐다. 당시 성골집단은 대궁 양궁 사량궁의 삼궁으로 이루어진 왕궁에 살았는데 궁을 떠나면 신분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진평왕은 용춘을 후사로 생각했다. 그래서 용춘에게 선덕을 보필하도록 했으나 역시 아들이 없어 용춘이 물러나니 어쩔 수 없이 선덕이 여자의 신분으로 왕위를 이었던 것이다. 용수와 용춘은 진평왕의 사촌동생이었으나 진골신분이었고 더 이상 왕손의 남자, 즉 성골은 없었다. 선덕이 왕으로 즉위하기로 내정되자 칠숙과 석품은 「여자가 왕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처럼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이해 당사자들간에 치열한 힘겨루기와 신경전이 있었다는 기록이 기존의 두 사서와는 달리 화랑세기 곳곳에 보인다. 이같은 갈등과 음모는 왕이 붕어한 후에도 이를 공표하지 않고 모종의 암략을 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진흥왕의 죽음이나 문무왕의 죽음을 비밀로 한 것 등이 그 예다. 진흥왕이 죽었을 때 진흥왕의 왕비인 사도황후는 금륜을 왕위에 앉히기로 내정했지만 당사자에게는 비밀로 하고, 미실로 하여금 그와 관계를 갖게 해 그가 다른 마음을 갖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다음에야 왕위에 오르게 했다.
 또 문무왕이 죽었을 때도 흠돌 등이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왕의 죽음을 비밀로 했던 것이다. 이처럼 왕의 죽음을 비밀로 한 까닭은 권력을 장악한 세력들이 그들의 뜻에 따라줄 왕을 즉위시키기 위한 공작을 벌일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역사학자 김기흥(건국대 사학과 교수)씨는 저서 「천년의 왕국 신라」에서 진지왕의 즉위를 일종의 권력투쟁의 소산으로 해석하고 있다.
 금륜의 형으로 당시 죽은 동륜태자를 옹호했던 세력과 거칠부를 중심으로 한 금륜태자 옹호세력간의 파워게임에서 금륜(진지왕)이 왕좌에 올랐으나 4년만에 힘의균형이 동륜파로 넘어가는 바람에 금륜이 왕좌에서 밀려나고 동륜의 아들(진평왕)에게 왕위가 넘어갔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런 경우도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21대 비처왕(소지왕)이 죽은 서기 500년에 지증왕이 즉위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영일 냉수리비(冷水里碑)」는 이러한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즉 비문에는 503년 9월까지도 지증왕이 갈문왕으로 기록돼 있는 것이다. 당시는 왕의 칭호가 마립간이었으나 지증은 마립간으로 불리지 못하고 갈문왕으로 불렸던 것이다. 지증왕은 500년 11월 비처왕이 세상을 떠나자 즉시 정권을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503년 9월까지 갈문왕으로 칭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해 10월이 되어서야 신라 국왕을 칭하며 왕호를 사용했던 것. 다시 말해 그는 왕좌에는 올랐으나 지지파와 반대파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지면서 반대파들의 저항으로 그때까지 왕으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그렇다면 왕위계승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은 누구였을까. 앞에서 말한대로 진흥왕 사후 진지왕이 즉위했을 때 진흥왕의 부인 사도황후의 영향력이 컸다.
 또 문무왕의 장자인 31대 신문왕이 즉위했을 때 흠돌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것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문무왕비인 자의황후를 중심으로 오기공 등이 힘을 합쳤다. 이처럼 신라의 왕위계승에서 선왕의 왕비, 즉 신왕의 어머니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화랑세기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내용이다.
 한편 이 당시 왕위계승 경쟁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증이 비처왕대에, 영실공이 법흥왕대에 부군(副君·왕의 후사가 없을 때 지명된 왕위 후계자)이 됐던 사실이나 왕들이 미리 태자를 봉하도록 한 제도는 나중에 벌어질지도 모르는 왕위 계승 경쟁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비처왕이 아들이 없어 재종간인 지증을 부군으로 앉힌 것은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한 사전 장치였던 것이다.
법흥왕이 영실공을 부군으로 임명한 것도 마찬가지였으나 영실공의 경우는 지소태후의 거부로 왕좌에 앉지 못했던 것이다.

 

《23대 법흥왕》

 

 서기 514년에 즉위한 23대 법흥왕은 지증왕의 아들이었다. 화랑세기 1세 풍월주 위화랑 편에 보면 그는 비처왕(소지왕)의 마복칠성 중의 우두머리로 기록돼 있다. 마복칠성은 소지왕이 부하의 임신한 아내를 거두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살을 섞음으로써 태어난 아이의 아버지 역할을 해 임금이 아이의 정치 사회적인 후견인이 돼 신라사회의 왕권을 뒷받침하게 한 독특한 제도였다. 그는 여걸 지소태후의 아버지로서 딸을 자신의 동생인 입종공에게 시집보내기도 하고 당시 후계자로 지목한 영실공을 섬기도록 하기도 했다.
 하지만 법흥왕은 신라역사에 있어 초기 중앙집권적인 왕권체제를 갖춘 인물이었다. 517년에 중앙관부 중 군사력을 장악한 병부(兵部·지금의 국방부에 해당)를 가장 먼저 설치하는 등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의 통치제제를 완비했던 것이다. 또 수상과 같은 존재로서 신라의 최고관직인 대등으로 구성되는 귀족회의의 주재자였던 상대등을 531년 설치해 귀족들을 장악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중국 연호의 사용에서 벗어나 재위 23년(536)에 독자적 연호인 건원(建元)을 사용, 중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자주의식을 나타내기도 했고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국가차원에서 불교를 공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또 자신을 필두로 정통왕손을 「성골」이라 칭해 보다 확실한 신분질서를 만들어 왕권강화에 주력했다. 그러나 성골출신의 왕은 28대 진덕여왕으로 끝나버리고 29대 태종무열왕부터는 진골출신이 왕좌에 올랐다. 540년에 붕어한 법흥왕은 경주의 서악(西岳)이라 불리는 선도산 서쪽 기슭에서 뻗은 낮은 구릉인 경주시 충효동에 묻혀있다. 초라한 봉분 주위엔 화려한 보호석 하나 없이 냇돌이 드문 드문 보일 뿐 별로 찾는 이 없이 1천4백여년이 지나도록 조용히 묻혀 있다.
 

 <20>근친혼


「…양도공이 『저는 누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사람들이 나무랄까 걱정이 됩니다. 제가 오랑캐의 풍속을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 모두 좋아하겠지만, 중국의 예를 따르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가 모두 원망할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오랑캐가 되겠습니다』라며 어머니 양명공주(良明公主)의 뜻을 좇아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양명공주는 양도를 감싸안으며『참으로 나의 아들이다. 신국(신라)에는 신국의 도가 있으니 어찌 중국의 도를 따르겠느냐』고 말했다.…」 「화랑세기」 22세 풍월주 양도공편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를 더 자세히 설명하면 이렇다.
 양도공은 신라 26대 진평왕의 딸인 양명공주와 미실궁주의 손자인 모종공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양명공주는 양도공을 낳기 전에 미실의 아들인 16세 풍월주 보종공과의 사이에서 딸 보량을 낳았다. 양명공주는 씨는 다르지만 자신이 낳은 두 자녀인 양도공과 보량을 결혼시키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양도공과 보량 부부는 아버지는 다르지만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이부동모(異父同母)의 남매지간이자 미실의 가계로 따지면 당고모와 조카뻘인 것이다. 양도공은 동기간에 혼인하는 당시신라의 풍속을 싫어해 5살 위인 누나 보량과의 혼인을 원치 않다가 어머니의 간절한 권유에 못이겨 결혼한 것을 알 수 있다. 20세 풍월주 예원공편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예원공은 우리나라의 혼인의 도를 부끄럽게 여겨 신(神)의 뜻에 따른다고 대답하고 당나라에서 돌아와 의논하여 고치려 하였으나 관습이 오래돼 고치기 어려워 늘 걱정했다. 그리고 자손들에게는 다시는 나쁜 혼인 풍습을 따르지 말라고 훈계했다. 그러나 공의 아들인 오기공이 사촌누이인 운명(雲明)을 아내로 맞이하자 공이 노해 이들을 보지 않았다.…운명은 곧 김대문의 어머니로 대문을 낳자 공은 기뻐하여 말하기를 『하늘의 뜻이로구나. 아니면 선품(오기공의 형)이 이 손자를 점지하려고 너희
들을 사랑에 빠지도록 하였느냐』하였다. 마침내 다시는 혼도(婚道)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이같은 내용을 보면 당초에는 근친혼을 당연하게 여겼던 신라 사회의 귀족들도 근친혼을 금기시하던 중국 유가(儒家)의 세례를 받으면서, 점점 근친혼을 꺼려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혼인풍속이라는 게 원래 뿌리 깊은 것이어서 쉽게 근친혼이 사라지지 않았음도 이 같은 기록이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근친혼을 고쳐야 할 폐단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나타나고있는 것으로 봐서 중기 이후부터 신라에도 중국의 혼인예법이 조금씩 뿌리내리기 시작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근친혼의 또 다른 예로는 지소태후를 들 수 있다. 1세 위화랑편에 「지소태후는 보도부인의 딸인데 입종공의 부인이 돼 진흥대왕을 낳았다」는 기록이 있다. 입종공은 지소의 아버지인 법흥왕의 아우로, 즉 그녀의 숙부인 것이다. 이 역시 당시 왕궁에 거주하던 성골집단 안에서 근친혼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것을 알게 해준다.
 김춘추가 김유신의 두 여동생 문희와 보희를 취하고 다시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난 딸이 외삼촌인 김유신과 혼인함으로써 두 사람의 정치적 결속이 강화됐다는 것은 이미 소개한 바다. 삼국사기 진성왕편엔 진성(여)왕이 즉위 2년(888) 삼촌인 위홍(魏弘)과 관계를 했다거나 진흥왕의 맏아들인 동륜태자가 고모인 만호부인과 혼인해 아들 백정을 낳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삼국사기 내물이사금 즉위년(356년)조에 「…신라는 동성을 취할 뿐만 아니라 형제의 딸이나 고종 이종 자매를 다 맞아 아내로 삼기도 했다. 비록 외국이 각기 풍속이 다르다 하나 중국의 예로 이를 따져본다면 크게 잘못된 일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미 유교적인 관념이 보편화된 고려 사회 중엽 유학자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서도 이처럼 신라사회의 근친혼 관련 기록이 나오고 있는 것. 다시 말해 화랑세기에 기록된 숱한 근친혼을 김부식이 상당부분 삼국사기에서 누락했을 것인데도 부분적으로 남아있으니 신라 귀족사회의 근친혼 풍속은 보편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골품제 사회인 신라에서 근친혼이 행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종욱(서강대)교수는 이렇게 해석한다. 『하와이와 이집트, 잉카에서도 남매가 혼인을 하는 왕실 근친혼이 있었다. 왕들은 그의 누이를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혈통의 신성함을 과시하고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 재산이 다른 집안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도 했다. 이처럼 신라의 지배세력들도 근친혼을 통해 지배세력으로서의 지위를 세습해 나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신라에서 근친혼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지배 세력의 유지에 있었다고 해석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친족은 골품신분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왕실세력간의 근친혼은 사회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 조건이었다. 신라보다는 고려의, 고려보다는 조선의 지배세력들의 혼인 범위가 넓어지긴 했지만 고려의 경우 이자겸 등을 비롯한 문벌귀족 세력인 인주(仁州) 이씨 집안과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왕 80년에 걸친 고려의 왕들과의 혼인관계도 근친혼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자연이 세딸을 문종에게, 이자겸도 큰딸을 예종에게, 둘째 셋째딸을 인종에게 시집보냈던 것이다.
 따라서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400여명의 인물들 사이의 혼인관계를 그려보면 대체로 어떤 형태로든 서로 연결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의 저술 목적이 화랑들의 활동상을 보여주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들의 혈통의 유래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일부 학자들의 지적이 타당성을 지니는 대목이기도 하다.  

 

《양도공은 누구》

 

 어머니의 뜻을 헤아려 5살 위인 누나와 결혼한 양도공은 사람 섬기기를 잘 하고 일의 추이에 밝았으며 공명을 중히 여겼다. 문장에 뛰어났고 격검에도 능했던 그는 17세 풍월주 염장공을 따라 화랑이 됐으며 선품공이 21세 풍월주가 되자 부제가 돼 온 힘을 다 해 당시 전횡을 일삼아 비난을 받던 선품공을 섬겼다.
 그는 또 효성이 지극해 부모를 잘 모셨다. 그러다 보니 외할아버지인 진평왕이 공을 사랑해 자주 불러 내사(內賜·임금이 신하에게 물건을 내리는 것)를 많이 했다.
공은 이렇게 받은 선물을 혼자 가지지 않고 번번이 어머니에게 줘 형제들과 고루 나누어 가졌다. 양도공은 누나인 보량을 처로 대우하기 보다 항상 극진하게 섬기자 어느날 그녀가 불평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양도공이 『저는 큰 사랑으로 그대와 함께 하기를 원하지, 그대를 큰 누나로 생각하여 그런 것이 아닙니다』고 말했다. 이에 보량은 남편 섬기기를 임금과 같이 하며 『나의 지아비는 훌륭한 사람이다』며 자랑했다. 또 양도공에 대한 존경심이 깊어져 늘 보도(寶刀)를 지니고 다니며 따라서 죽을 뜻을 품고 있었으며 실제 흠돌의 반란때 남편이 연루돼 죽었다는 소문을 잘못 듣고 보도로 자결했다.
 양도가 다소 늦은 28세에 풍월주가 되자 보량은 자신은 아름다움이 쇠했다며 능보라는 여자를 화주(花主·풍월주의 처)로 삼기를 원했으나 그는 『당신이 아니라면 내가 어찌 풍월주가 됐겠느냐』며 끝내 보량을 화주로 삼자 낭도들 모두 그의 큰 사랑에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그도 여자를 가까이 해 마복자를 많이 두었다. 7명의 아들과 서자녀 10여명을 두었다. 양도공은 4년간 풍월주에 있으면서 화랑도 조직을 개혁했으며 부제인 군관에게 지위를 물려주었다. 군관은 양도공의 누이 2명을 아내로 맞음으로써 그와 처남 매부간이 됐다. / 조해훈기자


 <21> 신라사회의 뇌물


‘설원랑(설화랑)은 풍채가 아름답고 옥적(玉笛)을 잘 불었으나 출신이 한미해 낭도들이 그를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신라 제 24대 진흥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던 미실궁주가 그 힘으로 낭도들을 호령해 설원랑에게 예속 시켰다. 그래도 미실은 미덥잖아서 늘 진귀한 물품들을 낭도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곤 설원랑에게 “당신의 낭도들을 내가 잘 구슬리고 있으니 염려놓으라”고 말하곤 했다. 설원랑은 이 덕에 심복을 몇명 만들었다. 설원랑이 마침내 7세 풍월주가 되자 미실의 동생인 미생을 부제로 삼고 낭도들에게 뇌물을 주며 복종하게 했으나 신임을 얻는데는 역부족이었다’.

7세 풍월주 설원랑편에 나오는 이 기록은 신라 화랑 가운데 뇌물로 낭도를 거느린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미실이 정부(情夫)인 설원랑을 풍월주로 만들기 위해 낭도들의 지지를 구하려고 뇌물을 썼고 풍월주가 된 설원랑도 낭도들이 따르지 않을 것을 우려해 뇌물로 꾀었다는 내용이다.

이런 기록은 또 있다. ‘세종공이 6세 풍월주의 대를 잇자 처남인 미생을 전방화랑으로 삼아, 아내이자 당대 신라사회에서 왕 다음가는 실력자였던 미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했다. 하지만 청렴강직 했던 화랑 문노(8세 풍월주가 됨)의 반대로 이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러자 미실이 낭도들에게 뇌물을 주어 세종공에게 힘을 실어주었는데 눈치빠르고 이해에 밝은 자들이 많이 따랐다’. 6세 풍월주 세종편의 이 이야기 역시 뇌물에 얽힌 이야기이다.

이처럼 화랑세기에는 다른 사서에서 볼 수 없는, 화랑도들간에 뇌물이 오갔다는 사실을 언급한 기록이 많다. 이는 호연지기를 길러 나라에 충성을 다한다는, 화랑도에 대한 오늘날의 일반적 상식을 깨뜨리는 구절이다.

22세 풍월주 양도공편에는 더 심각한 내용이 나온다. 마복자 제도가 화랑도에도 퍼져 있었던 것이다. 출세를 원하는 화랑들은 풍월주를 지낸 원로급인 상선(上仙)과 상랑(上郞)에게 임신한 아내를 예물과 함께 보내 그들의 사랑을 받도록 했으며 아내가 물러날 때, 그리고 자식을 낳고나서 석달 뒤에 다시 아내를 보낼 때 양과 돼지 등을 뇌물로 바쳤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화랑세기에는 횡령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실려있다. 17세 풍월주 염장공편을 보면 염장공이 풍월주가 되기 전에 16세 풍월주 보장공의 집안 일을 돌보아주면서 재물을 몰래 빼돌렸다고 한다. 또 선덕여왕 즉위 재정을 관장하던 관청인 조부(調府)의 우두머리가 된 그는 본격적으로 축재에 나섰다. 그 축재가 얼마나 심했던지 당시 사람들이 염장공의 집을 가리켜 ‘수망택(水望宅)’이라 일컬었다. 홍수처럼 돈이 염장공의 집으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다.

축재를 많이 한 인물이라면 신라 최고 바람둥이였던 10세 풍월주 미생랑도 빠질 수 없다. 자신에게 아내를 바치면서까지 아첨을 했던 당두라는 사람을 조부의 고위직인 우경의 자리에 앉히고 그를 통해 거액의 돈을 모은 것. 그는 이 돈으로 낭도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 뇌물을 주었다니 일종의 정치자금이었다고 할까. 그는 또 수십명의 첩을 거느리며 돈을 물쓰듯 펑펑 써댔다고 한다.

하지만 화랑세기는 이처럼 뇌물을 주고 받거나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 축재를 한 사람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재산을 풀어 어려운 이들을 힘껏 도운 사람들이 있었음도 보여준다. 12세 보리공이 그 좋은 예다. 원광법사의 동생인 그는 늘 재물을 풀어 생활이 어려운 낭도들을 몰래 도와주었다. 그의 장모가 진흥왕의 아들인 정숙태자의 비 만호태후였으므로 장모에게서 얻은 재물이 엄청났다. 그러나 그는 이 재물을 자신은 가지지 않고 낭도들에게 고루 나눠주었던 것이다.

14세 호림공도 그러했다. 그는 문노의 딸인 현강낭주와 결혼했으나 그녀가 일찍 죽자 미실의 손녀인 유모낭주를 다시 아내로 맞았다. 청렴하고 마음이 곧았던 호림공은 가진 재물을 생활이 궁핍한 낭도들에게 베풀었던 것이다. 그의 베풂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당대인들은 그를 가리켜 ‘탈의지장(脫衣地藏)’이라 불렀다. 다시 말해 불쌍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주는 지장보살이라는 뜻.

24세 풍월주 천관공의 아내였던 윤화도 마찬가지였다. 윤화의 할머니 은륜공주는 사도태후의 딸이었다. 그래서 윤화는 친정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났다. 그녀는 남편 천관공과 같이 이 재산을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썼던 것이다.

이처럼 풍월주 중에는 뇌물을 주고 출세를 하거나 뇌물을 받거나 사취해 축재를 한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자신들의 재산을 털어서 궁핍한 사람들을 도운 사람들도 있었다.

1천4백년이나 지난 지금도 뇌물이나 비자금 등을 통해 지위를 유지하거나 더 큰 재산을 불리는 사람들이 있듯이 신라고기에도 당대 지도층인사들 간에 뇌물이 횡행했던 것이다. 화랑세기의 이같은 기록은 화랑들이 삼국통일을 고민하고 풍류만 즐기던 사람들이 아니라 장삼이사들처럼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진흥왕 치세 때 미실과 내연의 관계를 맺은 덕에 7세 풍월주가 된 설원랑의 아버지는 사다함의 아버지인 구리지가 데리고 있던 낭도 설성(薛成)이었다. 설성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어머니가 16살에 우연히 한 낭도를 만나 관계를 해 낳은 아이가 설성이었던 것.

화랑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설성은 자라면서 매일 냇가에서 아이들과 화랑놀이를 했는데 하루는 구리지가 지나다가 설성이 매우 총명하게 보여 집을 물어 찾아가 보았다. 설성의 집은 평민들이 사는 허름한 집이었다. 설성의 어머니는 천한 옷을 입고 맨발로 보리를 찧고 있었다. 구리지는 14년동안 결혼도 않고 아이만 쳐다보고 산 그녀를 꼬드겨 관계를 했다. 설원랑의 할머니인 그녀는 구리지의 서자 3명을 낳았다.

구리지는 그녀의 아들인 설성을 불쌍히 여겨 데려다 키웠다. 설성은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몰라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설성은 자신을 보살펴준 구리지가 전쟁에 나간 사이 구리지의 처이자 사다함의 어머니인 금진궁주와 정을 통해 설원랑을 낳은 것이다.

한편 설원랑은 미실과 정을 통하면서 출세가도를 달려 결국 풍월주까지 됐다. 미실의 명에 의해 설원랑은 당시 38세의 과부였던 준화낭주와 결혼해 아들 설웅을 낳았다. 또 모랑공과 준화 사이에서 난 딸인 준모를 꾀어 정을 통했다. 이를 안 미실이 자신의 동생인 미생에게 준모를 주었으며 준모는 의붓아버지인 설원랑의 딸 미모(美毛)를 낳았다. 549년에 나서 606년 7월에 죽은 것으로 화랑세기에 기록돼 있는 설원랑은 미실이 죽을 때까지 사랑했다.


<22> 화랑도와 불교


신라는 법흥왕14년(527)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했다. ‘화랑세기’는 화랑을 선의 무리인 선도(仙道)라고 기록하고 있어 얼핏 화랑도와 불교는 큰 관계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화랑세기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신라에서 불교가 융성해진 데는 화랑들이 불교를 신봉한 것이 큰 몫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랑세기엔 역시 다른 기록에서 보이지 않는, 불교와 관련된 화랑도들의 행적들이 많이 실려 있다.

 

우선 14세 풍월주가 된 호림공에 관한 기록을 보자.

 

‘…호림공은 낭도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선불(仙佛·즉 화랑과 불교)은 우리가 갖추어야 할 하나의 도(道)이다. 따라서 화랑 또한 불교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 미륵선화(설화랑·7세 풍월주)와 보리사문(보리공)같은 분은 잘 알다시피 모두 우리들의 스승이다…호림공은 곧 12세 풍월주이자 원광법사의 동생인 보리공에게 나아가 계(戒)를 받았다. 이로써 선·불이 점차 서로 융화하였다.…’

호림공이 보리공에게 계를 받음으로써 선·불이 점차 융화했다고 한 내용은 화랑도들이 점차 불교를 믿게 된 것을 의미한다. 법흥왕이 불교를 수용하려고 하자 귀족들이 거세게 반발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고 있다가 이차돈이 자청하여 순교함으로써 불교가 받아들여지긴 했으나 그 무렵에는 화랑도들은 불교를 거의 믿지 않고 있었던 것. 그러다 호림공이 풍월주로 있던 시기(603~612년)에 이르러 화랑도들이 불교를 널리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호림공에 대한 기록을 더보자. ‘호림공은 아내인 현강낭주가 일찍 죽자 11세 풍월주 하종공의 딸인 유모 낭주를 다시 아내로 맞았다. 그때 나이가 이미 많았던 미실 궁주(宮主)는 손녀인 낭주를 몹시 사랑해 귀한 아들을 보기를 원했다. 그래서 호림공에게 명하여 천부관음을 만들어 아들을 기원하도록 했다. 이에 선종랑(자장)을 낳았는데 자라서 율가의 대성인이 되었다. 호림공은 더욱 부처를 숭상했고 이에 김유신에게 풍월주를 물려주고 스스로 무림거사라 불렀다.’ 이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호국불교적인 성격으로만 알려졌던 신라불교에서도 현생의 복을 비는 구복적인 성격이 이에 못지 않게 강했다는 사실이다.

21세 풍월주 선품공의 기록에도 ‘…선품공은 문장을 좋아하고 선불(仙佛)을 통달하였으니 진실로 높은 골품의 인물이다.…’라는 내용이 나오고 22세 풍월주 양도공 또한 부처를 숭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랑세기를 쓴 김대문의 4대조(祖)인 4세 풍월주 이화랑 편에도 불교와 관련한 기록들이 있다. ‘…이화랑은 숙명공주와 더불어 영흥사에 나가 살며 불도에 전심했다. 그를 사랑하던 지소태후 또한 뒤따라 귀의했고 숙 태자 또한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다. 공의 아들인 원광법사는 숙명공주의 소생으로, 숙명공주가 원광을 임신할 때의 이야기이다. 갑자기 금불(金佛)이 와서 고하기를 ‘나는 곧 약사불이다. 공주의 배를 빌려 머물고자 한다’했다. 이에 공주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합장배례 했다. 부처가 이에 공주를 안고 마치 엎드려 들어오는 것 같았다.…’

이화랑은 풍월주의 지위에서 물러난후 숙명공주와 더불어 영흥사에서 살며 불교에 심취했고 지소태후와 숙 태자도 불교에 귀의했다. 사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한 이래 신라 왕실 세력들이 불교를 신봉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7세 설화랑은 풍월주를 문노에게 물려주고 미실을 따라 영흥사로 가서 살며 후에 미륵선화라는 이름을 얻었다. 원광의 동생인 12세 풍월주 보리공과 불교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기록도 있다.

‘그는 3년간 풍월주로 있다가 부제인 용춘공에게 지위를 물려주고 불문에 몸을 바쳐 형인 원광을 도왔다. 이에 아내인 만룡과 첩인 후단 모두 머리를 깎고 여승이 돼 공의 뜻을 받들었다. 만룡은 보리공과 늘 같은 날 성불할 것을 기도했는데 과연 그 말과 같이 됐다. 공의 만년의 일은 ‘고승전’에 나온다.’

원광은 일찍이 보리공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부처가 되고 동생인 보리공은 화랑을 의미하는 선(仙)이 되면 신라를 평안하게 활 수 있으리라 했다. 결국 보리공은 원광의 가르침에 따라 화랑도에 들어갔고 그 지위를 그만둔 뒤에 불문에 들어갔다.

세종조에는 세종이 561년 풍월주가 되고 천주사에서 사다함의 명복을 빌었는데 그날 밤 미실은 사다함이 자신의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사다함은 구리지의 아들로, 구리지는 천주사에서 5년동안 발원을 해 금진과 통해 사다함을 낳았다. 사다함은 546년에 출생했으므로 천주사는 적어도 541년에는 창건돼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화랑세기에 자주 등장하는 영흥사는 어디에 있었을까? ‘삼국사기’ 직관편에 신문왕4년(684)에 처음 만들었다고 하는 영흥사 성전이 나오고 있다. 영흥사의 존재가 영흥사 성전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지 입증할 증거는 아직 없으나 당시 왕족과 귀족들만이 출입하던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9세 풍월주 비보랑은 18살의 나이에 지명법사를 따라 진나라에 들어가 많은 책을 가지고 와서 후진 사문을 가르쳤으니 그 공이 크다고 했다. 화랑출신인 원광이 600년에 수나라에서 돌아온 일도 이화랑편에 나오고 있다. 10세 미생랑편에 당시 화랑도의 다섯파중 네번째였던 이화류가 정숙태자를 풍월주로 삼고 원광을 부제로 삼으려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원광도 화랑 출신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화랑세기를 통해 화랑도의 우두머리인 풍월주와 불교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당시 큰 정치세력이었던 화랑도는 신라에서 불교가 확산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원광(圓光)법사는 555년(진흥왕16)에 태어나 638년(선덕여왕7)에 열반에 들었다. 화랑도로 있다 13세에 출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00년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경북 청도 인근의 가슬사에 있을 때 화랑 귀산과 추항이 찾아와서 평생 지닐 계명(誡銘)을 구했다. 그때 원광은 “불교에는 보살십계가 있지만 그대들은 아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므로 세속오계를 준다”며 이른바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의 가르침을 일러주었다.

원광의 세속오계는 뒤에 화랑의 실천덕목이 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정신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특히 살생은 불교이념에 위배되는 조항이지만 당시 고구려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고 백제와 항쟁을 계속하던 신라사회로서는 필요불가결한 행동윤리가 요청됐으며 이에 따른 그의 현실주의적 불교관의 일단면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원광은 불교보다 국가를 우선적으로 고려한 승려였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호국불교의 전통은 원광법사로부터 연유된 것이라 할 수 있다. 608년 원광은 진평왕으로부터 수나라에 고구려를 칠 원군을 보내달라는 걸사표(乞師表)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때 원광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을 없애려는 것은 중이 할 바가 못되지만 왕의 땅에 살면서 그 물과 풀을 먹고 있으니 어찌 감히 명을 받들지 않으리오”하며 걸사표를 지었다고 한다. 불교의 토착화에 주력한 그는 ‘여래장경사기(如來藏經私記)’3권과 ‘여래장경소(如來藏經疏)’ 1권 등을 지은 것으로 보아 여래장 사상에 조예가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3> 6-7세기 신라의 대외관계


우선 중국과의 대외관계를 살펴보면 신라에서 중국의 진(陳), 수, 당 등 역대 왕조 때 사신과 승려들이 건너가고 그곳의 사신들이 찾아온 기록 등으로 보아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9세 풍월주 비보랑편에 보면, 그의 나이 열여덟(566년)에 지명법사(智明法師)를 따라 진나라에 갔다가 많은 책을 가지고 들어와 후진사문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있다. 이로 미루어 이미 6세기대에 신라인들이 중국에 들어가 불교문화와 선진 문물을 배우고 받아들인 것을 알 수 있다. 10세 풍월주 미생랑편에는 진나라 사신이 신라에 왔다는 기록도 나온다. 그 사신은 미생의 바람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미생의 향락은 중국의 천자보다 더하며, 중국에도 미생랑처럼 첩과 자식을 많이 둔 재상은 없다”고 말했다. 물론 그 사신이 무슨 일로 신라에 왔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신라 조정에 공무로 와 머물다가 신라 최고의 카사노바였던 미생랑 이야기를 듣고는 경탄(?)을 금치 못했던 것.

한편 20세 풍월주 예원공이 648년(42살)에 당나라에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이 “예원공은 원광법사의 조카로 문장을 잘 한다”며 그를 환대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원광법사는 그에 앞서 589년 진나라에 들어갔는데 그해에 진나라가 망했으며 새로이 들어선 수나라에서 불법을 배운 후 600년에 귀국했다. 그러니까 원광법사가 귀국하고 그의 조카인 예원공이 48년만에 중국에 갔는데도 당시 중국인들은 원광법사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의(道義), 혜소(慧昭) 등 신라의 승려들은 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에 가 불법을 구하고 돌아와 신라 전역의 심산(深山)에 선문을 개창하고 불법을 전했다.

화랑세기의 주무대인 6세기 중엽 신라는 한강 유역의 주인이 되었으며, 555년 북한산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웠다. 이 무렵 백제는 신라의 기세에 밀리는 형국이었고 가야는 최후의 몸부림을 치다 신라에 복속됐을 때다.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수나라를 무너뜨리고 고구려 침공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삼국 사이에 대중국 관계를 둘러싼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하던 시기이다.

화랑세기 예원공편에는 당나라의 황제와 재상들이 신라에서 온 사신들에게 신라의 혼인관계, 신라의 시조, 백제와 가야의 관계 등 다양한 것들을 물었다는 내용도 보인다. 이는 중국이 신라의 사신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예원공이 당나라에서 신라의 근친혼에 대한 질문을 받고 돌아와 이를 고치려 했다는 기록도 신라인들이 서서히 중국의 풍습과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예원공편에 보이듯 신라는 가야를 부용(附庸·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딸려서 붙음)국으로 삼았다. 예원공이 당나라에 갔을 때 당의 재상이 신라가 가야를 부용국으로 삼았는지, 가야가 신라를 부용국으로 삼았는지를 물어보자 예원공이 “우리가 가야를 그렇게 했다”고 대답했다. 8세 문노편에 ‘법흥왕이 가야를 나눠 이뇌(異腦)를 북국왕으로 삼고 청명(靑明)을 남국왕으로 삼았다’고 나와있다. 이 기록은 부용국의 의미, 즉 왕이 존재하는 독립국이지만 강국에 속해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법흥왕이 가야 통치를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신라와 가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기록이어서 학계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신라와 백제와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들도 있다. 즉 백제의 왕이 대국인 신라의 여자를 데려다 왕비로 삼았으며 신라의 왕족이 백제의 여자와 혼인을 하기도 했다. 당나라 재상이 당나라에 들어온 예원공에게 “신라와 백제가 서로 혼인을 하면서도 왜 서로 싸우는가”고 질문을 한 것으로 봐 신라와 백제 사이엔 혼인관계가 생각보다 빈번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예는 다른 사서에도 보인다. ‘삼국사기’4권 진흥왕편에 ‘진흥왕이 즉위 14년(553) 10월에 백제왕녀를 아내로 맞아 소비(小妃)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 보다 3개월 앞선 7월에 신라는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유역을 빼앗아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무력을 군주(郡主)로 앉히는 등 양국이 팽팽한 긴장상태에 놓여있던 시기였다. 양국이 전쟁을 벌이면서도 교류는 끊지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유사’ 무왕편에는 백제 무왕이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와 혼인을 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는 신라와 백제의 왕들이 상대국의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화랑세기에도 3세 풍월주 모랑편에 법흥왕이 즉위하기 전 백제에 들어가 백제 동성왕의 딸인 보과공주와 사랑을 했는데 법흥왕이 신라에 돌아온 후 보과가 몰래 신라에 도망쳐와 모랑을 낳은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8세 풍월주 문노편에는 왜와의 관계를 암시하는 내용도 있다. 바로 문노의 외할아버지인 찬실이 왜왕의 사위가 돼 딸 문화공주를 낳았는데 문화공주를 야국왕이 신라에 바쳤다는 것이다. 문화공주는 신라의 귀족인 비조부공의 첩이 돼 사랑을 해 문노를 낳은 것이다. 561년 사다함이 가야를 공격했을 때 가야인들은 많은 야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5, 6세기에 가야지역에 많은 왜인들이 와 있었고 가야에서 그들을 거느린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화랑세기에 야국이 왜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학자들은 야국을 왜로 추정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처럼 왜국의 공주를 왕비로 삼지 않고 신하의 첩으로 삼았다는 것은 당시 신라가 왜의 상국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화랑세기의 기록들을 종합하면, 당시 신라는 중국과 지속적인 교류를 하는 한편, 백제와 왜 등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 조해훈기자

20세 풍월주를 지낸 예원공은 화랑세기를 쓴 김대문의 할아버지이다. 그는 풍월주를 3년동안 지내고 선품공에게 물려준 후 선덕여왕에 의해 내성사신(內省私臣·당시 대궁 양궁 사량궁 등 3궁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의 우두머리)으로 발탁됐다.

김춘추가 진덕왕 2년(648) 당나라에 갈 때 승려 3명과 유화(遊花·여자화랑) 3명을 데리고 들어가기로 돼 있었다. 김춘추는 그들을 통솔하고 자신을 보좌할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해 고민했다. 19세 풍월주를 지낸 흠순공이 “그 일은 예원공이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고 천거하자 김춘추가 아주 기뻐했다.

예원공이 흠순공의 부제로 있을 때 가야파들이 예원공을 시기했다. 하지만 오히려 가야파의 잘못을 감싸주자 그가 풍월주가 됐을 때 마침내 가야파는 그를 따랐다. 진골정통 대원신통 가야파 등 파벌이 심했던 낭도들이 모두 예원공을 존경할 만큼 덕이 높았다.

예원공이 김춘추 등과 배를 타고 당나라에 가는 도중에 풍랑을 만났을 때, 뱃사람들이 여자를 바다에 빠뜨리면 용왕이 파도를 멈춘다고 말했다. 그때 동승했던 양도공(22세 풍월주가 됨)도 춘추공을 보호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권했다. 그러자 예원공은 화를 벌컥 내며 “위험하면 같이 위험하고 편안하면 같이 편안해야지, 어찌 사람을 죽여 우리만 편할 수 있는가”고 일갈하자 갑자기 풍랑이 그쳤다고 화랑세기는 쓰고 있다.


 <24> 화랑세기를 보는 눈


지난 1989년 처음 발견된 ‘화랑세기’는 당시 역사학계 뿐 아니라 역사에 관심있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학자들간에 서로 눈치(?)를 보며 논의되고 있을 뿐 소수의 학자를 제외하고는 학계에서 본격적인 연구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신라의 역사가이자 저술가인 김대문이 681년에서 687년 사이에 썼다는 진본 ‘화랑세기’의 필사본인 이 책의 진위가 완전히 가려지지 못한데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그동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을 저본으로 삼아 학문적 체계를 쌓아온 학자들의 폐쇄성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보이는, 삼국통일을 위해서 심신을 단련하고 정의로운 모습으로만 각인돼온 화랑이 어느날 갑자기 남의 여자를 빼앗고, 뇌물문제를 일으키는 등 어떤 측면에선 일그러진 영웅(?)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화랑세기에서만 보이는 화랑도의 구체적인 조직체계와 정치적인 지위 등 새로운 사실(史實)은 기존의 화랑도 연구의 틀을 전면적으로 바꾸어야 할 만큼 새로운 것이기도 했다.

이 연재에서도 소개되었다시피 화랑세기엔 지금 우리의 잣대로는 이해하지 못할 대목이 많다. 대표적인 내용이 아랫사람의 임신한 아내를 취하는 마복자 제도. 무관이 친구인 사다함의 어머니와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든지 출세를 위해 아내를 상납했다는 기록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의 한강유역에서 동북해안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곳곳에 순수비를 세워 우리가 존경해마지 않는 진흥왕은 아들 동륜태자와 관계를 맺던 여자를 침실로 불러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 그래서 보수적인 기존의 역사학계에서 화랑세기는 1930년대 박창화라는 사람이 지어낸 위작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화랑세기가 다루고 있는 540년에서 681년까지는 유교문화가 신라사회에 자리잡기 전이어서 유교적인 도덕관념에 젖어 버린 지금의 시각으로 화랑세기를 보아서는 신라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색안경을 끼고 화랑세기의 내용을 매도하는 입장에 서서는 화랑세기가 그려내는 신라사회의 실체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이다. 신라인 400여명이 등장하는 이 책에는 그 어떤 사서에도 나오지 않는 신라인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어있다. 백성들을 계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려때 쓰여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로는 신라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으며 더구나 유교와 기독교 등으로 무장된 오늘날의 도덕적인 시각은 화랑세기에 가득 들어있는 1천3백여년전 신라인들의 모습을 볼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이라는 것이 화랑세기의 기록을 믿는 학자들의 주장이다.

화랑세기는 중국과 일본, 백제·가야 등의 대외관계를 알려주는 것은 물론 왕이 주연을 베풀던 곳으로만 인식돼온 포석사가 나라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던 곳이라는 사실 등 새로운 내용들을 알려주고 있다. 또 6세 풍월주 세종편에 기록돼있는 향가인 ‘풍랑가’는 국문학사에 향가를 한 편 더 보태준 셈이다.

유학자인 김부식이 ‘삼국유사’를 쓰면서 신라 왕들의 복잡한 통정(通情)관계 등의 내용이 서술된 화랑세기를 일부러 멀리했으리란 추측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도 삼국사기에 ‘김대문이 화랑세기에 썼듯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화랑에서 나왔다’고 기록해 화랑세기를 완전히 묵살하지는 못했다.

화랑세기에서 신라사회는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고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어떻게든 혈연적으로 얽혀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누구에게서 태어나느냐가 바로 정치 사회적인 신분과 역할을 결정했기 때문에 근친혼이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러한 대목은 삼국사기도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 죽죽조에 김춘추의 사위 품석이 부하인 검일의 처를 빼앗은 내용이 나온다. 삼국유사에 들어있는 ‘처용가’의 내용도 처용이 그의 아내를 뺏기고 부른 노래이며 ‘서동요’는 진평왕의 공주인 선화가 백제인 서동과 사통(私通)하는 장면을 노래한 것이다. 이는 화랑세기에 보이는 사통의 내용과 별 차이가 없다.

이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본이냐 위본이냐는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골품제를 유지하기 위한 당시 왕들과 귀족들의 고심을 들여다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신라의 궁궐인 월성(月城)에 숨어든 기분이 드는 것을 화랑세기를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지금 학계에는 화랑세기의 위작설이 만만찮게 제기되고 있지만, 20세기에 이뤄진 한국 고대사 연구체계에 물들지 않은 학자들에 의해 사서로서의 당당한 가치가 받아들여질지 여부는 학계의 연구결과를 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만약 일본황실도서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박창화 필사본의 원본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면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변화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재야 역사학자들은 화랑세기가 진본임을 주장하고 있고, 젊은 역사학도들이 학위논문에 화랑세기의 내용을 인용하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화랑세기는 한국고대 신라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이자 한국 고대의 역사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화랑세기가 앞으로 한국 고대사 연구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일 ‘판도라의 상자’로 인정받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화풍월주랑 화 랑풍월풍 월 주

 

 

 

  

1.화랑의 조직

 

 1)정통품계 풍월주(1명, 화랑의 리더)

 

  부제(1명,차기풍월주의 제1후보)

  좌방대화랑(1명)->좌화랑(2)/소화랑(3)/묘화랑(7) -->3부(도의,문사,무사관장)

  우방대화랑(1명)->우화랑(2)/소화랑(3)/묘화랑(7) -->3부(현묘,약사,예사관장)

  전방대화랑(1명)->우화랑(2)/소화랑(3)/묘화랑(7) -->3부(유화,제사,공사관장)

 

 2)별도품계

 

  (1)진골화랑,별문화랑,별방화랑 -12~13세의 진골,명문귀족의 준수한 자제로 구성

  (2)낭도 -일반서민의 준수한 자제들로 구성

                13~14세(동도)18~19세(평도)23~24세(대도)->망두->신두

  *上仙; 화랑도에서 물러난 풍월주.

  *상화; 풍월주를 지내지 않고 퇴임한 화랑들.

 

2.화랑의 반열(1-32세 풍월주) 시대(540~681)

 

 1세 위화랑(魏花郞)[생몰?~?][재임540~?]

화랑의 시조1세 지소태후가 국정을 맡자 源花를 폐지하고

선화를 화랑으로 삼았다.그 무리를 일러 풍월이라 하고,

그 우두머리를 풍월주라 하였다.

공의 얼굴이 백옥과 같고, 입술은 마치 붉은 연지와 같고,

맑은 눈동자와 하얀 이가졌는데, 말이 떨어지면 바람이 일었다.

 

: 염신(廉信)[생몰?~?]

: 벽아(碧阿夫人)[생몰?~?]

: 준실(俊室夫人)[생몰?~?]

자녀 → 이화랑(二花郞)[생몰?~?]

           옥진(玉珍)[생몰?~?]:보현공주의 아들인 영실공이었다

           준화(俊華)[생몰?~?]

: 오도(吾道郎主)[생몰?~?]

자녀 → 금진(金珍)[생몰?~?]

: 지소태후[생몰?~?]

 

副第: 미진부(未珍夫)

 

 2세 미진부(未珍夫)[생몰?~?][재임?551~?]

551년 고구려를 정벌작전 주도

법흥대왕은 옥진궁주의 사부인 영실공을 용양군(龍陽君)으로

삼아 총애하며 높은 위에 있게 하고, 원화를 물러나도록 하였다.

 

: 비량(比梁)[생몰?~?]

: 벽화(碧花王后)[생몰?~?]

: 묘도(妙道)[생몰?~?]

자녀 → 미실(美室)[생몰549~606.7]

미생(美生)[생몰551~?]

 

     副第: 모랑(毛郞)

 

 3세 모랑(毛郞)[생몰? ~ ?][재임? ~ ?]

: 법흥왕[생몰?~540][재위514~540]

: 보과(寶果公主)[생몰?~?] 백제 동성왕의 딸

: 준화(俊華)[생몰?~?] 위화랑의 딸

자녀 → 준모(俊毛)[생몰?~?]

 

副第: 이화랑(二花郞

 

 4세 이화랑(二花郞)[생몰?~?][재임?~561]

피부가 옥과 같이 부드럽고, 눈은 미소 짓는 꽃과 같고,

음율과 문장을 잘하였다.

: 위화랑(魏花郞)[생몰?~?]

: 준실(俊室)[생몰?~?]

: 숙명(淑明)공주[생몰?~?]

자녀 → 1원광법사(圓光法師)[생몰542~638]

           2보리(菩利)[생몰?~?]

“불교에는 보살십계가 있지만 그대들은 아마 감당 할 수 없을 것이므로 세속오계를 준다”며

① 사군이충(事君以忠):임금(국가)에 충성을 다할 것,

② 사친이효(事親以孝):부모에 효도를 다할 것,

③ 교우이신(交友以信):신의로써 벗을 사귈 것,

④ 임전무퇴(臨戰無退):전쟁터에 나아가서는 물러남이 없을 것, 

⑤ 살생유택(殺生有擇):함부로 살생을 하지 말 것 등

 

副第

 

 5세 사다함(斯多含)[생몰546~563][재임561~563]

562년 장군 이사부와 함께 대가야 격파

처음에 무관랑과 함께 사우(死友)로서 사귈 것을 약속하였는데,

무관랑이 죽자 그는 심히 슬퍼 7일 동안이나 통곡하다가 죽었다

사다함이 미실를 열렬히 사모하여 상사병으로 죽었다.

 

: 구리지(仇梨知)[생몰?~?]

: 금진(金珍)[생몰?~?]

애인: 미실(美室)[생몰549~606.7]

「풍랑가(風浪歌)」

바람이 불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 치지 말고

빨리빨리 돌아 오라 다시 만나 안고 보고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

 

「청조가(靑鳥歌)」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너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 될까. 나는 죽어 신병 되리

(전주)에게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護神) 되어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전군부처 보호하여

만년 천년 오래 죽지 않게 하리

 

     副第: 세종(世宗)

 

 6세 세종(世宗)[생몰?~?][재임563~565]

577년 선산전투에서 백제군을 격파

 

: 태종(苔宗), 이사부[생몰?~?]

: 지소(只召太后)[생몰?~?]

: 융명(隆明)[생몰?~?]

: 미실(美室)[생몰549~606.7]

자녀 → 하종(夏宗)[생몰562~?]

     副第:

     전방화랑: 미생

 

 7세 설원랑(薛原郞)[생몰549~606.7][재임565~?]

미실궁주의 신하요, 미륵선화의 시초 원화 미실

 

: 설성(薛聖)[생몰?~?]

: 금진(金珍)[생몰?~?]

: 준화(俊華娘主)[생몰?~?] 38세과부 혼인

자녀 → 웅(雄)[생몰?~?]

잉피(仍皮)[생몰?~?]

정금(淨金娘主)[생몰?~?]

: 개원(開元娘主)[생몰?~?]

자녀 → 충죽(忠竹)[생몰?~?]

선죽(善竹)[생몰?~?]

(開)[생몰?~?]

개천(開川)[생몰?~?]

선월(善月)[생몰?~?]

양월(良月)[생몰?~?]

: 미실(美室宮主)[생몰549~606.7]

자녀 → 보종(寶宗殿君)[생몰580~?]

: 난○(蘭○)[생몰?~?]

자녀 → 양약(兩若公主)[생몰?~?]

: 준모(俊毛)[생몰?~?]

자녀 → 미모(美毛)[생몰?~?]

: 후만(後萬)[생몰?~?]

자녀 → 후단(後丹)[생몰?~?]

 

副第: 미생(美生)[생몰551~?]

 

 8세 문노(文努)[생몰538~606]69 [재임? ~ ?]

  가야국의 외손, 화랑체계의 토대를 마련 화랑도 조직이 3

나뉘었고 각기 다른 임무를 좌삼부(左三部) 도의(道義)

문사(文事)·무사(武事) 담당했고, 우삼부(右三部)

현묘(玄妙:춤과 음악)·악사(樂事)·예사(藝事) 담당했다.

전삼부(前三部) 유화(遊花:산천경개 유람)·제사(祭事)

공사(供事:조정의각종 공식 행사) 담당

 

: 비조부(比助夫)[?~?]

: 문화공주[?~?] 야국왕의 딸: 호조의 첩

: 윤궁(允宮)[548~606] 576년10월 재혼

자녀 → 대강(大剛)[생몰?~?]

충강(充剛)[생몰?~?]

금강(金剛)[생몰?~660].상대등

윤강(允剛)[생몰?~?]

현강(玄剛)[생몰?~?]

신강(信剛)[생몰?~?]

 

*윤궁은 동륜과 사이에 윤실을 낳고 5년후 문노와 재혼

 

     副第

 

 9세 비보랑(秘寶郞) 생몰[549~?]재임[?603~?]

 설화랑과 같은 해에 태어났으나 노래나 피리 실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문노에게 검을 배우고 마침내 뛰어난 제자가 되어 문노를 힘써 보좌하였다.

법흥왕의 손자, 진흥왕의 사위

 

: 동대(冬臺)[생몰?~?]

: 실보(實寶)[생몰?~?]

이모:골보(骨寶)[생몰?~?]→ 대세(大世)[생몰?~?]

: 덕명(德明公主)[생몰?~?]

자녀 → 홍주(紅珠)[생몰?~?]

 

      副第

 

 10세 미생(美生)[생몰551~?][재임?~588]

 

: 미진부(未珍夫)[생몰?~?]

: 묘도(妙道)[생몰?~?]

: (1백명의 아들을 둠)

자녀 → 백생[생몰?~?]

   매생[생몰?~?]

: 여러명

: 준모[생몰?~?]

: ? (제문의 누나)[생몰?~?]

: ? (당두의 처제)[생몰?~?]

색공? (당두의 처)[생몰?~?] 3남

 

      副第: 하종(夏宗)[생몰562~?]

 

 11세 하종(夏宗)[생몰562~?][재임588~591.1]

열다섯 살에 화랑에 들어가 역사는 토함공에게, 노래는 이화공에게,

검술은 문노에게, 춤은 미생공에게 배워 그 정수를 얻었다.

 

: 세종(世宗殿君)[?~?]

: 미실(美室)[생몰549~606.7]

: 미모(美毛)[생몰?~?]

자녀 → 유모(柔毛)[생몰?~?] 호림의 처

영모(令毛)[생몰?~?] 유신의 처

: 은륜(銀倫)[생몰?~?]

 자녀 → 효종(孝宗)[생몰?~?]

하희(夏姬)[생몰?~?]

 

副第; 보리(菩利)[생몰574~?]

 

 12세 보리(菩利)[생몰574~?][재임591.1.15~594]3년

청렴과 결백의 화신

 

: 이화랑[생몰?~?]

: 숙명(宿命公主)[생몰?~?]

: 만룡(萬龍)[생몰?~?]

 자녀 →예원(禮元)[생몰?~?] 34살때생

보룡(寶龍)[생몰?~?] 선품의 처

: 새달(塞達)[생몰?~?]

                자녀 →

: 후단(後丹)[생몰?~?]

자녀 → 보단(寶丹)[생몰?~?] 흠순의처

           이단(利丹)[생몰?~?]      

 

副第: 용춘(龍春)

 

 13세 용춘(龍春)[생몰578 ~ 647.8][재임594 ~ 603]

춘추의 의부이자 숙부, 탁문흥갈문왕(卓文興葛文王)

 

: 진지왕(眞智王)[생몰?~?]

: 지도부인(知道夫人)[생몰?~?]

: 천화공주[생몰?~?](용수-용춘-백룡의 처로 밀림)

: 호명공주(昊明公主)[생몰?~?]

자녀 → 딸5명 ?

: 선덕여왕[생몰?~?]

: 천명공주(天明公主)[생몰?~?]

자녀 → 춘추(용수아들 양자)

妾 서자5 서녀18명

: 대씨(大氏)[생몰?~?]

자녀 →  용산(龍山)[생몰?~?]

            용석(龍石)[생몰?~?]

            용태(龍泰)[생몰?~?]

: 매생(梅生)[생몰?~?]미생의 딸

자녀 → 용귀(龍貴)[생몰?~?]

: 홍주(紅珠)[생몰?~?]비보랑의 딸

자녀 → 용주(龍珠)[생몰?~?]

용능(龍凌)[생몰?~?]

용능(龍凌)[생몰?~?]

      副第: 호림(虎林)

 

 14세 호림(虎林)[생몰?~?] 재임[603~614]

  진덕여왕 때'칠성회'회원 부처를 숭상 스스로 무림거사라 불렀다.

위화랑 아시공(阿時公) 수지공(守知公) 이등공(伊登公) 태종공(苔宗公) 비량공(比梁公) 융취공

 

: 복승(福勝)[생몰?~?]

: 송화(송화公主)[생몰?~?]

: 현강(玄剛)[생몰?~?]문노의 딸

자녀 → 계림(계林)[생몰?~?]

: 유모(柔毛)[생몰?~?]

자녀 → 선종(善宗):자장율사(慈藏律師)

        [생몰590~658]

 

副第: 보종(寶宗)[생몰580~?]

 

 15세 유신(庾信)[생몰595~673.7.1][재임614~617]

 태대각간 진덕여왕때'칠성회'회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책봉하였다,

 

: 서현(舒玄)[생몰?~?]

: 만명(萬明夫人)[생몰?~?]

: 영모(令毛)[생몰?~?]612년 결혼

     자녀 → 삼광(三光)[생몰?~?]

진광(晋光)[생몰?~?]김흠돌의 처

신광(信光)[생몰?~?]문무왕 태자시 첩

작광(酌光)[생몰?~?]보로전군의 처

영광(令光)[생몰?~?]흠순의 삼자 반굴의 처

             영윤을 낳음

: 지소(智炤)[생몰?~?]655년12월 결혼 57년후 부인칭호 득

자녀 → 원술(元述)[생몰?~?] 소판 비장(裨將)

원정(元貞)[생몰?~?] 해간(海干)

장이(長耳)[생몰?~?] 대아찬

원망(元望)[생몰?~?] 대아찬

:?     서자 → 군승(軍勝)[생몰?~?] 아찬

 

      副第: 춘추(春秋)

 

 16세 보종(寶宗) 생몰[580~?] 재임[617~621]

   칠성회 회원 중 특히 김유신의 자문역

공의 성품은 청아하였고 문장을 좋아하였으며 정이 많았다.

사람들을 위하여 웃고 울었으며,온화함과 순량 함은 마치

부녀자와 같았다.선과 악, 이와 해를 나누지 않았다.

술과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호림이 사랑하여 부제로 삼았다.

 

: 설화랑(薛花郞) [?~?]

: 미실(美室)[생몰549~606.7]

: 양명(良明公主)[생몰?~?]

자녀 → 보량(寶良)[생몰?~628]

 

副第: 염장(廉長)

 

 17세 염장(廉長)[생몰586~648] 재임[621~627]

         칠성회'회원 염장공은 보종공의 아름다움을 좋아하여(愛)

       자원하여 그의 아우가 되었다.

 

: 천주(天柱) 진흥왕의 아들

:

: 하희(夏姬)[생몰? ~?]

           자녀 → 하장(夏長)[생몰?~?]

윤장(閏長)[생몰?~?]

춘장(春長)[생몰?~?]

: 양명(良明)[생몰?~?] 사통

 자녀 → 장명(長明)[생몰?~?]

: 수망택(水望宅)

 

副第: 흠순(欽純)[생몰599~680.2]82세

 

 18세 춘추(春秋) 생몰[604~661] 재임[627~631]

태종무열왕, 칠성회'회원

 

: 용수(龍樹殿君.文興大王)[생몰?~?.4]

: 천명(天明公主.文貞太后)[생몰?~?]

: 보량(寶良.寶羅夫人)[생몰?~628]

자녀→ 고타소(古陀炤)[생몰?~642]: 품석의 처

요석(瑤石公主)[생몰?~?]: 설총의 모

문주(文注):교각(喬覺선사)[생몰628 ~726]

: 문희(文姬.文明皇后)[생몰?~?]

자녀→ 법민(法敏)[생몰 626~]

인문(仁問)[생몰?~?]

문왕(文王)[생몰?~?]

노단(老旦,老且)[생몰?~?]

지경(智鏡)[생몰?~?]

개원(愷元)[생몰?~?]

지소(智昭夫人)[생몰643~?]70 이후졸

: 용태(龍泰)[생몰?~?]

자녀 → 인태(仁泰)[생몰?~?]

: 보희(寶姬)[생몰?~?] 文姬의 언니

자녀 → 지원(知元)[생몰?~?]

           개지문(皆知文)[생몰?~?]

: 용보(龍寶)[생몰?~?]

자녀 → 차득(車得)[생몰?~?]

           마득(馬得)[생몰?~?]

 

副第: 흠순(欽純)[생몰599~680.2]82세

 

 19세 흠순(欽純)[생몰599~680.2]82세 재임[631~635]4년

황산벌전투의 좌장군, 김유신의 동생

 

: 서현(舒玄)[생몰?~?]

: 만명(萬明)[생몰?~?]

: 보단(寶丹)[생몰?~?]: 보리와 후단의 딸

자녀 → 3반굴(반굴)[생몰?~?]

영광(令光)[생몰?~?]

자녀 → 영윤(令胤)[생몰?~?]

4원수(元帥)[생몰?~?]

6원선(元宣)[생몰?~?]

: 이단(利丹): 보단의 동생

자녀 → 9원훈(元訓)[생몰?~?]

副第: 예원(禮元)

 

 20세 예원(禮元)[생몰607~673] 재임[635~637]

성현의 도를 지님

 

: 보리(菩利)[생몰?~?]

: 보룡(寶龍)[생몰?~?]

: 양약(兩若公主) 우약[생몰?~?]

자녀→ 오기(吳起)[생몰?~?]

온희(溫喜)[생몰?~?]

성희(星喜)[생몰?~?]

우희(雨喜)[생몰?~?]

: ?

서자녀→ 찰덕(察德)[생몰?~?]

찰원(察元)[생몰?~?]

찰희(察喜)[생몰?~?]

찰연(察燕)[생몰?~?]

찰미(察美)[생몰?~?]

찰해(察亥)[생몰?~?]

 

副第: 선품(善品)

 

 21세 선품(善品)[생몰609~643]35세 재임[637~?]

파진찬으로 문무대왕의 장인

 

: 구륜(仇輪)[생몰?~?]

: 보화(寶化公主)[생몰?~?] 진평과 미실의 딸

: 보룡(寶龍)[생몰?~?]

      자녀 → 순원(順元)[생몰?~?]

자의(慈義皇后)[생몰?~?] 문무왕비

운명(雲明)[생몰?~?] 오기의처

야명(夜明)[생몰?~?] 문무왕후궁:인명전군

(仁明殿君)

 

副第: 양도(良圖)

 

 22세 양도(良圖)[생몰?~?] 재임[?~?4년 28~31살]

김유신의 부장, 문장가, 호국간성의 모범을 세움

화주 보량

 

: 모종(毛宗)[생몰?~?]

: 양명(良明公主)[생몰?~?]: 보명(寶明宮主)의딸

: 보량(寶良)[생몰?~681]:(5살위누나 이부동모 보종의 딸)

    보량은 남편 섬기기를 임금과 같이 하며『나의 지아비는

    훌륭한 사람이다』며 자랑했다.또 양도공에 대한 존경심

    이 깊어져 늘 보도(寶刀)를 지니고 다니며 따라서 죽을

    뜻을 품고 있었으며 실제 흠돌의 반란때 남편이 연루돼

    죽었다는 소문을 잘못 듣고 보도로 자결했다.

: 능보라(능보라)[생몰?~?]

서자 7명의 아들과 서자녀 10여명을 두었다

 

副第: 군관(軍官)[생몰613~681.8.28]

 

 23세 군관(軍官)[생몰613~681.8.28] 재임[?~?]

680년 상대등, 아찬,김흠돌의 반란에 연류되어 사사됨

 

: 동란(冬蘭)[생몰?~?] 祖 동종(冬宗) 曾祖 오종(五宗)

:

:

: 양도공의 누이 2명을 아내로 맞음

 

副第: 천광(天光)

 

 24세 천광(天光)[생몰?~681][재임?~?]5년간

        화랑의 세파벌을 조율시킴 얼굴이 아름다운 꽃과 같고 교태는 마치 부인과 같았다

     

: 수품(水品)[생몰?~?] 이찬

: 반야(半夜公主)[생몰?~?]

: 윤화(允華)[생몰?~?]

자녀 :

: 5명

: 효월(孝月)[생몰?~?]: 효종(孝宗)의딸

: 만수(萬壽)[생몰?~?]: 만덕(萬德)의딸

:

:

 

副第: 춘장(春長)

 

 25세 춘장(春長)[생몰?~?] 재임[?~?]

 

: 염장(廉長)[생몰?~?]

: 하희(夏姬)[생몰?~?]

:

 

副第: 진공(眞功)

 

 26세 진공(眞功)[생몰?~681.8.8] 재임[?~656]

대아찬진공(眞功), 소판김흠돌, 파진찬흥원과 난에 연류 됨

 

: 사린(思麟),수종전군(壽宗殿君)[생몰?~?]

: 호명(昊明)[생몰?~?]

: 흠신(欽信)[생몰?~?]→재가(보로전군 혼인):흠돌의 누나

자녀 → 신공(信功)[생몰?~?]

 

副第: 흠돌(欽突)

 

 27세 흠돌(欽突)[생몰627~681.8] 재임[656~662]

신문왕의 장인, 신문왕 즉위 초 반란획책

 

: 달복(達福)[생몰?~?]

: 정희(正姬)[생몰?~?] 문희동생

: 진광(晋光)[생몰613~?] 유신의 큰딸

자녀 → 女문무왕비김씨[생몰?~?]

: 언원(言元)[생몰?~?]  홍원의 누이

자녀 → 흠언[생몰?~?]

 

副第: 오기(吳起)

 

 28세 오기(吳起)[생몰633~?] 재임[662~664]

호성장군, 김흠돌의 반란을 제압

 

: 예원(禮元)[생몰?~?]

: 양약공주(兩若公主)[생몰?~?]

: 운명(雲明)[생몰?~?]순원의 딸

자녀 → 대문(大問)[생몰?~?]

 

副第: 원선(元宣)

 

 29세 원선(元宣)[생몰?~?] 재임[664~?]

 

:

:

:

 

副第: 천관(千官)

 

 30세 천관(千官)[생몰?~681.8] 재임[?~?]

 

: 군관(軍官)[생몰?~?]

:

: 00[생몰?~?]흠돌의딸

 

副第: 흠언(欽言)

 

 31세 흠언(欽言)[생몰?~?] 재임[?~?]

 

: 흠돌(欽突)[생몰?~?]

: 언원(彦元)[생몰?~?]

:

 

副第: 신공(信功)

 

 32세 신공(信功)[생몰?~681.8] 재임[?~681.8]

 

: 대아찬 진공(眞功)[생몰?~?]

: 흠신(欽信)[생몰?~?]흠돌의 누나

: 정처00[생몰?~?]흥원(興元)의 딸

 

副第:

 

 

 

 3.화랑가

 (1) 너는 누구며 나는 누구냐 살아 사나이 죽어 사나이

      끓는 한줄기 화랑의 피로 티없는 피는 죽음이 없다

 화랑을 보라 앞으로 간다 해달이 밝아 별이 나고나

 화랑을 보라 앞으로 간다 앞길이 터져 질펀 하고나

 무지개 띠에 꽃송이 사매 봄바람 맞아 나부끼나니

 화랑이 피어 나라가 피어 화랑의 나라 영원의 꽃을

 말은 가자고 굽을 쳐울고 칼은 번득여 번개를 치네

 너도 갈까나 나도 갈까나 때만난 청춘을 지처두다니

 어제 승전고 오늘 깃발이 펄펄 바람도 살아 승전고

 하늘은 높고 땅은 넓은데 장부의 숨결이 시원하고나

 화랑의 노래

 

 (2) 달빛 푸른 알천의 시냇가에서 너와 나 꽃다운 청춘을 걸고

목숨의 의리로서 맹세하나니 피 끓는 이몸은 화랑의 열혈아

보검은 번득여 허공을 가르고 말굽은 땅을 쳐 지축을 울리며

대장부 기개는 태산을 뽑나니 아 우리는 천년호국의 대화랑

오늘은 해맑은 풍류를 즐기고 내일은 전선으로 말을 달리

매가없는 기상은 목숨도 가벼워 티없는 이몸은 화랑의 선혈아

드높은 월성에 황엽이 쓰러져 물 깊은 임해에 낙조가 들어도

순국의 불꽃을 영원히 태우는 아 우리는 천년사직의 대화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