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심동신(1824∼?)이 입던 금관조복 중 금관 1점이다. 금관은 조복에 갖추어 쓰던 모자로 양관(梁冠)이라고도 하는데, 량(梁)은 모자의 앞면에서 꼭대기를 지나 뒷면까지 연결되어 붙여진 금색선을 말하며, 그 수에 따라 계급이 구분된다. 이 금관은 5량관으로, 1품의 관리가 쓰던 금관이다.
금관의 모양은 원통형인데 머리둘레와 뒷면 전체에 금칠이 되어 화려하고 윗부분은 검은 비단으로 싸여 있다. 뒷면은 금칠한 나무비녀 2개를 꽂아 고정하였고 비녀의 양 끝에는 술을 감아 늘어 뜨렸다.
이 금관은 1948년 석주선씨가 심동신의 7대 손자며느리로부터 인수받았다고 하며, 1890년대를 전후한 구한말의 유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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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사에 있어서 큰 자취를 남긴 시인 영랑 김윤식(永郞 金允植, 1903-1950)이 태어난 곳으로 현재 본채와 사랑채, 문간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변 밭을 포함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불탑이 있었고 문화적으로는 재능과 지식을 갖춘 영랑 김윤식의 생가라는 역사문화적 가치와 함께 20세기 초반 건조물인 전통한옥과 근대 건조물의 이행기의 가옥으로서 문화변용의 한 형태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며, 영랑의 문학적 세계를 후손에게 길이 체감할 수 있는 공간으로 그 가치가 중요하다.
전문설명
영랑은 서울의 휘문고보를 거쳐 1919년 기미독립운동이 발발하자 고향에 내려와 강진지역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대구교도소에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후 영랑은 고향집에서 문학에 뜻이 있는 인사들과 함께 『靑丘(청구)』라는 동인지를 내며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일본 東京 靑山학원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여 용아 박용철(1904. 6. 21-1938. 5. 12) 등과 교류하면서 최초로 『시문학』 동인지를 만들면서부터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의 문학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일본강점기 치하에서 설움받은 내용을 시로 표현하고 그의 젊은 정열과 민족의 기상을 은연중 문학을 통해서 불살랐던 우리나라 현대문학의 큰 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인 팔작집으로 지붕은 후대에 보수하였다. 좌측 2칸은 전면에 유리창문을 달았으며 우측 3칸은 앞면은 마루이며 모두가 방이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는 편이다. 전면과 양칸에 ㄷ자형으로 마루를 깔았으며 우측 1칸에는 마루 앞에 나즈막한 난간을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이 가옥을 통하여 전통한옥이 시대 변화를 따라 변용되어가는 모습을 알 수 있다.
강진 영랑생가 강진 영랑생가 전경 사랑채 대문채 안채 안마당 전경 안채 부엌과 모방 문간채 전경 문간채 사랑채 시비 아궁이 안채마루 안채부엌 안채안방 안채전경 안채측면 입구 장독대와시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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