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심동신(1824∼?)이 입던 금관조복 중 금관 1점이다. 금관은 조복에 갖추어 쓰던 모자로 양관(梁冠)이라고도 하는데, 량(梁)은 모자의 앞면에서 꼭대기를 지나 뒷면까지 연결되어 붙여진 금색선을 말하며, 그 수에 따라 계급이 구분된다. 이 금관은 5량관으로, 1품의 관리가 쓰던 금관이다.
금관의 모양은 원통형인데 머리둘레와 뒷면 전체에 금칠이 되어 화려하고 윗부분은 검은 비단으로 싸여 있다. 뒷면은 금칠한 나무비녀 2개를 꽂아 고정하였고 비녀의 양 끝에는 술을 감아 늘어 뜨렸다.
이 금관은 1948년 석주선씨가 심동신의 7대 손자며느리로부터 인수받았다고 하며, 1890년대를 전후한 구한말의 유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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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표적 서양화가로 우리나라 전통미를 현대화시키는데 주력한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 1913~1974) 화백이 태어난 곳으로 현재 안채와 화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환기는 우리나라 모더니즘의 제1세대 화가로 한국의 고전적 소재를 추상적 조형언어로 양식화하여 한국미술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인물로, 이 곳은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 작품활동이 이루어졌던 공간이라는 역사적, 예술적 가치와 함께 20세기 초반 전통가옥이 근대로 들어서면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실용적으로 변용되어 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전문설명
수화 김환기는 일찍이 서울로 올라간 뒤 동경유학을 떠나 1930년대 후반 일본화단에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서울대와 홍익대에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국전이 창설되자 심사위원으로 참가하였고, 1948년에 유영국, 이규상 등과 함께 “신사실파(新寫實派)"라는 그룹을 조직하여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56년에는 프랑스에서 3년 동안 체류하면서 유럽의 유수화랑에서 몇 차례의 개인전을 가지기도 했다. 1959년 귀국 후 홍익대 학장에 취임하고, 1963년에는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에 피선되어 한국현대미술을 주도적으로 이끌기도 했다. 그리고 1963년 돌연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 거주하면서 종래 고전적인 소재의 재구성으로서 전개되었던 구상위주의 화단에 한국적 정서를 양식화하여 흔적의 반복을 통한 순수 추상세계를 구현함으로서 한국미술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빛나는 업적을 세우기도 했다. 특히 1970년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출품하여 대상을 차지한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작품은 추상성과 현대성을 유감없이 발휘해 주는 김환기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김환기 가옥의 안채는 ㄱ자형 기와집으로 평면구성은 좌측으로부터 곡간, 건너 방, 대청마루, 안방, 정지 순으로 꾸며져 있고 정지 앞쪽으로 꺾어져서 다시 방 1칸이 드려져 있다. 다듬은 방형(方形) 초석위에 방주(方柱)를 세운 납도리집 형식이며 정지의 판장문만을 제외하고 모두 띠살문이다. 화실은 一자형 납도리집이다. 두 건물은 전통가옥이 근대로 들어서면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실용적으로 변용되어 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김환기의 위치와 업적 등을 고려해 볼 때 김환기 가옥은 역사문화 인물유적지라는 점과 전통적 기능에서 실용적 생활공간으로 변용되어 가는 20세기 초반 전통가옥의 모습을 잘 갖춘 실증적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하겠다.
안채 정면
부엌 안채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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