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심동신(1824∼?)이 입던 금관조복 중 금관 1점이다. 금관은 조복에 갖추어 쓰던 모자로 양관(梁冠)이라고도 하는데, 량(梁)은 모자의 앞면에서 꼭대기를 지나 뒷면까지 연결되어 붙여진 금색선을 말하며, 그 수에 따라 계급이 구분된다. 이 금관은 5량관으로, 1품의 관리가 쓰던 금관이다.
금관의 모양은 원통형인데 머리둘레와 뒷면 전체에 금칠이 되어 화려하고 윗부분은 검은 비단으로 싸여 있다. 뒷면은 금칠한 나무비녀 2개를 꽂아 고정하였고 비녀의 양 끝에는 술을 감아 늘어 뜨렸다.
이 금관은 1948년 석주선씨가 심동신의 7대 손자며느리로부터 인수받았다고 하며, 1890년대를 전후한 구한말의 유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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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이번(1678∼1763) 선생이 아들인 선암 권명신(1706∼1778)에게 지어준 가옥으로 선돌마을 입구에 경사지반을 이용하여 정침을 세웠다. 정침 우측에는 사랑을 두고, 사랑과 연하여 2층의 영풍루와 연결시키는 구조로 되어 있다.
조선후기 영남지방 사대부 저택의 다양한 기능과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지형의 고저차를 이용한 높은 기단과 특이한 평면 배치, 완벽에 가까운 민구(民具)등 전통적 풍습을 잘 담고 있는 격조 높은 고택이다.
당초에는 경북봉화 민속자료 봉화 송석헌(제95호)로 지정(1991. 5.14)되었으나 신청(2007. 4.12)을 받아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249호로 지정(2007. 10.12)되었다.
전문설명
본(本) 건물(建物)은 사복시 정(司僕寺 正)으로 추증(追贈)된 동암(東巖) 권이번(權以번)(1678∼1763)선생(先生)의 아들 선암(仙巖) 권명신(權命申)(증 좌승지(贈 左承旨):1706∼1778)선생(先生)에게 지어준 가옥(家屋)이라 한다. 선돌마을 입구(入口)에 배산(背山)하여 자리잡은 본(本) 가옥(家屋)은 경사지반(傾斜地盤)을 이용(利用)하여 정침(正寢)채를 세웠다. 경사(傾斜)가 심(甚)한 관계(關係)로 전면(前面)에 기단(基壇)을 높게 조성(造成)하여 정침(正寢) 우측(右側)으로 사랑을 펼쳤다. 축대(築臺)가 높아 마당에서 볼때는 건물(建物)이 상당히 크게 보이나 주고는 낮게 잡았다. 이는 건립(建立)할 당시(當時) 벼슬을 하지 않는 관계(關係)로 당시(當時)의 가옥규제(家屋規制)에 따라 낮게 치목(治木)하였다고 전한다. 우측(右側) 사랑과 연하여 계단(階段)을 달아 영풍루(迎風樓)와 연결(連結)시키고 있어 일반(一般) 상류주택(上流住宅)에서 찾아보기 드문 예이다. 사랑 우측(右側)으로 선암재(仙巖齋)가 사랑과 동일(同一) 레벨 상으로 건립(建立)되어 있다. 본(本) 재(齋) 후편(後便)에 사당(祠堂)을 두고 있다. 정침우측(正寢右側)으로 못채를 설치(設置)하고 후편(後便)쪽으로 한단 높게 방아간채를 배치(配置) 하였다.
송석헌 전경 사랑방에서 내다본 풍경 사랑채 마루 뒤편 야산에서 내려다본 풍경 사랑채와 영풍루 사랑채와 영풍루를 이어주는 계단 영풍루 내부 대문채 별채 사당 안채 마루 안채 언덕에서 내려다 본 송석헌 영풍루 원경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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