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국가민속문화재

국가민속문화재 제225-4호 수정죽절비녀

오늘의 쉼터 2008. 5. 10. 11:52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225-4호
명 칭 수정죽절비녀(水晶竹節비녀)
분 류 유물 / 생활공예/ 금속공예/ 장신구
수량/면적
지 정 일 1990.10.10
소 재 지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 300
시 대
소 유 자
관 리 자

 

일반설명

고불 맹사성(1360∼1438)의 유품 5점 가운데 하나이다. 맹사성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1386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때 예조좌랑을 시작으로 1427년 우의정이 되었다. 우의정으로 있으면서『태종실록』편찬의 감수를 맡았는데, 세종임금이 실록을 보고싶어 하자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사관이 두려워 일을 할 수 없다하여 반대했다. 집을 들어오고 나갈때는 항상 소를 타고 다녀 사람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몰랐다고 한다.

이 수정비녀는 수정을 다듬어 대나무 밑둥처럼 만들어 비녀머리를 삼고 몸통에다 구리판을 말아 끼웠으며 끝부분도 수정이었을 것이나 부러져 없어졌다. 비녀의 전체길이 23.8㎝, 수정길이 8.3㎝이다. 이 비녀의 특징은 우리나라 고대 유물 중에는 순수한 구리판을 사용한 예가 매우 희귀한데, 이 비녀는 0.5㎝ 판을 말아서 주석땜을 하였다.

제작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조선시대 고분에서 비녀의 출토사례가 더러 있으므로 그와 비교 검토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전문설명

 

수정을 다듬어 대나무 밑둥처럼 만들어 비녀머리를 삼고 몸통에다 구리판을 말아 끼웠으며 끝부분(部分)도 수정(水晶)일터인데 부러져 멸실되었다.

이 비녀의 특징(特徵)으로서 우리나라 고대유물(古代遺物) 중에는 순수한 구리판을 사용(使用)한 예(例)가 매우 희귀한 편인데 이 비녀에 있어서는 0.5㎜판을 말아서 주석땜을 하였다. 제작년대(製作年代)는 분명치 않으나 조선시대(朝鮮時代) 고분(古墳)에선 비녀의 출토(出土) 사례(事例)가 더러 있으므로 그와 비교(比較) 검토(檢討)할 수 있을 것이다.

 

 

 수정죽절비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