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심동신(1824∼?)이 입던 금관조복 중 금관 1점이다. 금관은 조복에 갖추어 쓰던 모자로 양관(梁冠)이라고도 하는데, 량(梁)은 모자의 앞면에서 꼭대기를 지나 뒷면까지 연결되어 붙여진 금색선을 말하며, 그 수에 따라 계급이 구분된다. 이 금관은 5량관으로, 1품의 관리가 쓰던 금관이다.
금관의 모양은 원통형인데 머리둘레와 뒷면 전체에 금칠이 되어 화려하고 윗부분은 검은 비단으로 싸여 있다. 뒷면은 금칠한 나무비녀 2개를 꽂아 고정하였고 비녀의 양 끝에는 술을 감아 늘어 뜨렸다.
이 금관은 1948년 석주선씨가 심동신의 7대 손자며느리로부터 인수받았다고 하며, 1890년대를 전후한 구한말의 유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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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 연당은 칠원천이 흐르는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붉은 정려로 장식된 주씨 고가가 있고 이 안에 무기 연당이 위치한다. 무기 연당은 주씨 고가에 딸린 정원이며, 주씨 고가는 1700년대에 지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국담(菊潭) 주재성(周宰成, 1681~1743)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 대문채를 통해 진입하면 한서문을 통해 무기연당이 위치하는 공간 내부로 들어 갈 수 있는데, 정방형의 연당을 중심으로 좌측에 하환정이 있으며, 우측에 충효각와 영정각이 위치한다. 연당의 위쪽에는 풍욕루라는 누각이 있다. 연당의 서북쪽에는 주재성의 종택인 함안 무기리 주씨 고가(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0호)가 위치하고 있다.
직사각형의 연당은 길이 20미터, 폭 12.5미터로 민가 정원에서는 보기 드문 큰 규모이다. 연당의 둘레에는 자연석으로 두 단의 석축을 쌓고, 연목 가운데 기암괴석으로 원형의 당주를 만들어 봉래산을 상징하는 양심대(養心臺)를 만들었다. 이는 천원지방을 상징화한 음양화합형의 원리를 따라 조성한 것으로 천지가 화합해 있으니 곧 축소된 우주를 뜻하는 것이다. 또한 석가산의 돌에 봉황석(鳳凰石)과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귀를 새겨 봉황과 더불어 노니는 도교적 이상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비교적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무기 연당은 조선 후기 양반집 정원의 형식과 공간구조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 위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전문설명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 세가 제법 거세어서 영남(嶺南)은 혼란되고 있었다. 인좌(麟佐)는 호남(湖南)으로의 진출을 기도하고 종당(從黨)을 진군시켰다. 이에 분연히 맞서 상주주씨(尙州周氏) 재성(宰成)이 창의(倡義)의 깃발을 들었다. 함안(咸安) 일대의 의병을 초모(招募)하여 분치령(分峙嶺)을 진수하니 김해진(金海鎭)의 관병(官兵)이 합세하였다. 인좌군(麟佐軍)은 감히 진출하지 못하고 물러섰다가 스스로 자멸하고 복죄(伏罪)하기에 이르니 난(亂)이 평정되었다. 초모한 의병은 물론이려니와 관군에게도 사재(私財)로 넉넉히 공궤(供饋)하고 군기(軍器)를 신조하여 공급하니 칭송이 자자하였다.
난이 평정되고 관군들이 원대 복귀하는 길에 주씨(周氏) 향리(鄕里)에 모였다. 그의 덕을 칭송한 뒤에 돌아가려는 생각들이었다. 그들은 동네 입구에 창의사적비(倡義事蹟碑)를 세우고 또 서당(書堂)앞 넓은 마당에 연당(蓮堂)을 파고 당주(當洲)를 만들었다. 이에 연당을 이름하여 국담(菊潭)이라 이르고 석가산(石假山) 쌓은 당주를 양심대(養心臺)라 하였다. 또 담장 쌓고 일각문을 내니 그 문을 영귀문(詠歸門)이라 하였다. 고마움을 보답하려는 병사들의 정성이었다. 이후로 주재성(周宰成)은 국담(菊潭)이라 자호(自號)하고 서당에서 학구에 전념하면서 유유자적 하였다. 사철 모습이 변하는 국담(菊潭)에서 우주(宇宙)를 보고 진리를 탐구하였다. 나라에서는 그의 공로를 치하하여 양무원종훈(揚武原從勳)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서(敍)하였고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끝내 관로(管路)에는 나서지 않았다.
이인좌(李麟佐)의 난은 영조(英祖)4년(1728)에 발발하였고 선생은 1681년 태어나 1743년에 타계(他界)하였는데 1745년에 영조는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겸경정참찬관(承政院左承旨兼經정參贊官)을 추서하였으며 정조 4년(1783)에는 충신의 정려(旌閭)와 후호(後戶)의 명(命)이 내렸다. 이에 앞서 영조 37년(1761)에는 사림들이 기양서원(沂陽書院)을 건립하여 주벽(主壁)으로 모셨다.
연당(蓮塘)은 선생의 생가 일곽(一廓)에 조성되어서 고래(古來)의 정침일동(正寢一棟)이 연당 서북쪽에 지금까지 남아있다. 一자형의 평면이고 칸반통(間半通)의 전퇴(前退) 있는 홑집인데 정면이 5칸)이다. 지붕는 맞배이며 기와를 얹었는데 사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상당 부분을 개수(改修)하여서 학술적인 가치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방형(方形)에 가까운 국담의 연당은 산석(山石)으로 호안(護岸)을 쌓되 이급(二級)으로 하여 석축의 높이를 완화시켰고 중앙에 당주 하나를 모았는데 산석을 써서 봉래산(蓬萊山)을 형상하는 석가산(石假山)을 쌓았다. 연당의 지반(池畔)에 정(亭)과 누(樓)를 세웠고 최근에는 충효사(忠孝祠)를 건립하였다.
정(亭)은 통변(東邊)에 있는데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이고 연당쪽으로 난간을 설치하였다. 마루가 고설(高設)하지 않은 것이어서 그저 사기(四起)하였을 정도이다. 홑처마의 팔작 기와지붕이다. 누(樓)는 댓돌을 높이 쌓고 앞뒤퇴가 있는 3칸을 구조하였다. 역시 홑처마의 팔작기와지붕인데 이들은 후대에 세운 건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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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환정 ![](https://t1.daumcdn.net/cfile/blog/9941AD4A5DE3328C09)
하환정 상부가구 ![](https://t1.daumcdn.net/cfile/blog/99C0A74A5DE3328E07)
풍욕루 ![](https://t1.daumcdn.net/cfile/blog/99FE684A5DE3328F0A)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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