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심동신(1824∼?)이 입던 금관조복 중 금관 1점이다. 금관은 조복에 갖추어 쓰던 모자로 양관(梁冠)이라고도 하는데, 량(梁)은 모자의 앞면에서 꼭대기를 지나 뒷면까지 연결되어 붙여진 금색선을 말하며, 그 수에 따라 계급이 구분된다. 이 금관은 5량관으로, 1품의 관리가 쓰던 금관이다.
금관의 모양은 원통형인데 머리둘레와 뒷면 전체에 금칠이 되어 화려하고 윗부분은 검은 비단으로 싸여 있다. 뒷면은 금칠한 나무비녀 2개를 꽂아 고정하였고 비녀의 양 끝에는 술을 감아 늘어 뜨렸다.
이 금관은 1948년 석주선씨가 심동신의 7대 손자며느리로부터 인수받았다고 하며, 1890년대를 전후한 구한말의 유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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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택은 가야산에서 뻗어 내린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속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선조 때에 선전관(宣箋官)을 역임하였던 묵와(默窩) 윤사성(尹思晟, 1557~1619)이 건립하였다고 전하며, 윤사성의 10대손인 독립운동가 만송(晩松) 윤중수(尹中洙, 1891~1931)의 생가이다.
문간채의 가운데에 있는 솟을대문을 들어가면 ‘ㅜ’자형으로 동향한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의 우측에는 중문채가 있으며, 중문채를 들어서면 ‘ㄱ’자형의 안채가 있다. 안채 마당을 지나면 사당이 위치하고 사당은 사랑채 옆면의 협문을 이용하여 진입한다.
산간에 집터를 잡아 양반집을 짓는다는 것은 드문 사례인데, 임진왜란 이후 전쟁의 참상을 경험한 선비들이 난을 피해 은거하고자 했던 생각과 풍수적 이상향을 찾고자 했던 조선 중기 선비들이 집터 선정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성리학적 규율을 반영하여 자연적인 경사를 이용하였고, 짜임새 있는 건물 배치와 남녀 생활공간과 동선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다. 특히 사랑채의 높은 누각식 마루는 조선시대 양반 주택의 권위와 품격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기둥과 대들보 등 목부재의 견실한 맞춤과 세련된 형식은 조선 중기 양반집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 위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전문설명 가전(家傳)하는 바로는 선조조(宣祖朝)에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였고 인조 (仁祖) 때 영국원종(寧國原從) 일등공신으로 봉작된 파평윤씨(坡平尹氏) 사성 (思晟)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후 세세손손이 거주하여 오다가 10세손 중수대(中洙代)에 이르러 지령(地靈)의 도움을 얻어 항일투사로 활약한 애국지사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창건때의 집터는 넓이가 육백평이었고 명기(名基)의 산록(山麓)에 의지하여 고설(高設)하였으며 이른바 지기(地氣)의 윤덕(潤德)을 입어 집안이 융성하여져서 한 때는 여덟채나 되는 집이 들어차 있었고 그 때의 연건평은 무려 백여칸에 이르렀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만 못하나 우람한 집이 자리잡고 있다.
대문채는 5칸이며 가운데 칸이 솟을대문으로 열렸다. 반듯한 내정(內庭)이 있어 들어서면 좌측으로 산록(山麓)에 자리잡은 사랑채가 보인다. 마당보다 훨씬 높게 대(臺)를 모으고 ㄱ자형 평면의 사랑채를 지었는데 4칸 규모의 내루(內樓)가 앞쪽으로 전출(前出)되어 있다. 내루의 누하주(樓下柱)는 마당에 주초(柱礎) 놓고 원주(圓柱)를 세웠다. 축대 높이만큼을 기둥 높이로 잡은 것이다. 내루의 남동벽은 판벽(板璧)하고 문얼굴 내고 그 인방 위로 교창을 내었으나 지금은 문짝, 창 등은 없어져 원상을 보기 어렵게 되었다. 서벽은 판벽없이 개방되었다.
사랑채는 2칸의 방에 이어 주간(柱間)을 약간 좁힌 또 1칸이 있는데 배벽(背壁)을 판벽으로 막은 판상(板床)의 공간이다. 측벽과 전벽은 역시 개방하였는데 여기는 대청의 용도라기 보다는 배벽(背壁)에 감실 (龕室)을 만든 정실(淨室)과 같은 쓰임을 위하여 구성되었던듯이 보인다. 지붕은 맞배이나 내루의 앞부분 만은 합각을 세우고 팔작지붕 하였으며 홑처마에 기와를 이었다.
사랑채 내루에 이어 동편으로 중행랑(中行廊)채가 계속된다. 거기에 중간이 있어 내정(內庭)에 들어서게 되는데 안채는 행랑채 보다 일단(一段)이 높아진 댓돌 위에 자리잡고 있다. 안마당 오른쪽에는 창고가 있으며 안채 좌측 뒤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이집의 가묘(家廟)가 별설(別設)되어 있다.
안채는 ㄴ형중 북변(北邊)이 중심이고 이 부분에 안방 2칸이 있어 부엌으로 이어지고 있다. 방 앞에 전퇴(前退)가 있어 대청에 이어지는데 방 다음 칸과 다음칸, 그리고 ㄱ자로 꺽이어 이어지는 부분까지가 대청이 되어서 6칸의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대청에 이어 건넌방이 있다. 전퇴가 없는 1칸인데 다른 부분의 주간(柱間)보다 넓고 전벽(前壁) 중심에 큼직한 넉살무늬창을 내었다. 아주 넓어서 시원하며 다른 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형상을 지니고 있는데 이 집의 특색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지붕은 맞배가 ㄴ형으로 이어지고 기와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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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https://t1.daumcdn.net/cfile/blog/99DCC2405DE3210635)
대문채 솟을대문 ![](https://t1.daumcdn.net/cfile/blog/9922EE405DE3210701)
사랑채 전경 ![](https://t1.daumcdn.net/cfile/blog/992448405DE3210801)
사랑채 내루에서 내다본 대문 ![](https://t1.daumcdn.net/cfile/blog/99DC24405DE3210935)
사랑채 내루 ![](https://t1.daumcdn.net/cfile/blog/99D03A405DE3210B36)
사랑채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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