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심동신(1824∼?)이 입던 금관조복 중 금관 1점이다. 금관은 조복에 갖추어 쓰던 모자로 양관(梁冠)이라고도 하는데, 량(梁)은 모자의 앞면에서 꼭대기를 지나 뒷면까지 연결되어 붙여진 금색선을 말하며, 그 수에 따라 계급이 구분된다. 이 금관은 5량관으로, 1품의 관리가 쓰던 금관이다.
금관의 모양은 원통형인데 머리둘레와 뒷면 전체에 금칠이 되어 화려하고 윗부분은 검은 비단으로 싸여 있다. 뒷면은 금칠한 나무비녀 2개를 꽂아 고정하였고 비녀의 양 끝에는 술을 감아 늘어 뜨렸다.
이 금관은 1948년 석주선씨가 심동신의 7대 손자며느리로부터 인수받았다고 하며, 1890년대를 전후한 구한말의 유품으로 추정된다.
|
송소 권우(1552∼1590)의 후손들이 사는 종택으로 조선 후기에 지었다. 권우가 지은 저택이라고 전하였지만 안대청 대들보에 순조 24년(1824)에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전형적인 재사(齋舍)의 형식을 지녔는데도 뒷산에 사당이 있는 이유는 이 집이 종가의 살림집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제사를 위한 정침이 마을 가운데에 있었는데, 이 종택이 지어진 후 어느 시기에 그 기능을 이곳으로 옮긴 듯하다. 이 집에 ‘이계재사록’이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보아 원래 집 이름이 ‘이계재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一자형 안채와 ㄷ자형 아래채가 마주하며 튼 ㅁ자형을 이루었고 트인 부분은 담장을 쌓아서 막았다. 집 아래쪽에는 문중에서 지은 서당인 ‘이계서당’이 있다. 이러한 재사형 집을 종가로 사용하는 경우는 특별한 계기와 규범상의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규명이 필요하다. 또한 집을 지을 당시의 용도가 주택이었는지 재사였는지 밝히는 연구가 좀 더 필요한 흥미있는 건물이다.
※ 위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전문설명 송소(松巢) 권우(權宇)(?∼1573, 선조(宣祖)6년, 진사(進士), 퇴계문인(退溪門人) 광해군사전(光海君師傳),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겸(承政院左承旨兼) 경정참찬관(經정參贊官)의 제택(第宅)이라 전하지만 안대청 서쪽 대들보의 상량기명(上樑記銘)에는 순조(純祖)24년(1824) 개기(開基)라 하였으니 송소의 종손(宗孫) 종택(宗宅)이라 보아야 할 것 같다. 송소는 현 종손 응룡(應龍)의 12대조라 한다.
집은 전형적인 재사(齋舍)의 형식을 지녔으면서 후산(後山)에 사당(祠堂)을 지은 것은 이 집이 종가의 살림집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一자형 안채와 ㄷ자형 아래채가 상 ·하로 마주하여 튼ㅁ자형을 이루었으며 동간(棟間)의 트인 부분은 담장을 쌓아 마감하였다.
안채의 길이는 5칸이고 너비는 2칸이며 대청칸에도 모두 퇴주(退柱)를 세운점은 보기 드문 예에 속한다.
동 ·서 양편(兩便)은 온돌방이고 중(中) 6칸은 대청(大廳)과 툇마루이다. 동온돌(東溫突)은 방을 줄여서 칸반(間半)으로 하고 반칸(半間)의 전퇴(前退)를 두었다. 대청의 서쪽 대들보에는 「숭정기원후사갑신이월이십이일개기삼월초택일입주동일상량성조(崇禎紀元後四甲申二月二十二日開基三月初七日立 柱同日上樑成造)라 묵서(墨書)하였다. 이 상량문(上樑文)으로서 이 집의 창건(創建)은 송소의 재세년대(在世年代)와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재사형(齋舍形)집을 종가(宗家)로 사용하는 경우는 각별한 계기와 규범상의 문제를 수반할 것이라는 점에서 구명(究明)될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래채도 길이가 5칸이며 여기에 고패로 2칸반(間半)이 더 있는 통집이다. 온돌방과 부엌, 고방(庫房), 마구간, 대문 등을 갖추었으며 그 배치형식이 역시 재사의 그것과 같다. 마구간이 대문옆외에 안마당에 또 간반이 들여진 것은 마굿간이 안으로 가장 깊숙히 들어선 예가 될 것이다. 대문 왼편 2칸의 부엌에는 “들마루 ”1좌(坐)가 있는데 이것도 드문 예에 속할 것이며 찬마루로 쓰였을 것이다.
이 집에는 지금 “이계재사도록(伊溪齋舍都錄) ”이 전래(傳來)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종택이라 불리기 전에는 원명(原名)이 “이계재사(伊溪齋舍) ”였음을 짐작케 한다.
한편 재하(齋下) 동중(洞中)에는 “이계서당(伊溪書堂) ”이라 게액(揭額)된 종중서당(宗中書堂)이 있는데 원래 이계서숙(伊溪書塾)은 부(父) 대기씨(大器氏)가 창건한 것이므로 그 이후로는 줄곳 지명인 이계(伊溪)라 관용(慣用)되어온 것으로 짐작된다.
서당은 길이가 4칸, 너비가 2칸이며 一자 동향집이다. 중(中) 4칸이 청(廳)이고 양단(兩端)은 각 2칸씩의 온돌방이며 홑처마 팔작(八作)집이다. 생각컨대 이계서당 창건당시에는 그 정침(正寢)이 촌중(村中)에 있었고 지금의 종택인 재사는 후건(後建)(순조(純祖)24년)된 것으로서 촌중(村中) 정침의 기능이 어느 시기에 끊겨 종택이 재사로 이동한 것이 아닐런지 추측해 보는 것이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99A75F355DE317CC2C)
안대청에서 내다본 전경 ![](https://t1.daumcdn.net/cfile/blog/99A405355DE317CD2D)
사당에서 내려다본 전경 ![](https://t1.daumcdn.net/cfile/blog/99A3DB355DE317CE2D)
안대청 상부가구 ![](https://t1.daumcdn.net/cfile/blog/99B014355DE317CF2C)
안대청 ![](https://t1.daumcdn.net/cfile/blog/99A3E7355DE317D02D)
전경 ![](https://t1.daumcdn.net/cfile/blog/99B070355DE317D22C)
사당 ![](https://t1.daumcdn.net/cfile/blog/99A4BA355DE317D32D)
안채 ![](https://t1.daumcdn.net/cfile/blog/99AE0E345DE317D42E)
언덕에서 내려다 본 모습 ![](https://t1.daumcdn.net/cfile/blog/99B10C345DE317D52D)
외양간 ![](https://t1.daumcdn.net/cfile/blog/99AF82345DE317D62E)
원경 ![](https://t1.daumcdn.net/cfile/blog/99AF21345DE317D72E)
헛간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