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 정여창(1450∼1504)의 옛집으로,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사랑채는 현 소유자의 고조할아버지가 다시 지었다고 하며, 안채는 약 300년 전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이 집의 터는 500여년을 이어오는 명당으로도 유명하다.
솟을대문에는 정려(旌閭)를 게시한 문패가 4개나 걸려 있다. 대문을 들어서서 곧바로 가면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고, 왼쪽으로 비스듬히 가면 사랑채가 나온다. 높은 기단 위에 지은 사랑채는 ㄱ자 모양이다. 일각문을 들어서서 사랑채 옆면을 따라가면 다시 중문이 있고 이 문을 지나야 一자모양의 큼직한 안채가 있다. 왼쪽에는 아랫방채가 있고 안채 뒤쪽으로는 별당과 안사랑채가 있다. 또 안채 뒤 따로 쌓은 담장 안에는 가묘(家廟)가 있다.
이 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사랑채 앞마당에 꾸민 인공산이다. 돌과 나무를 적절하게 배치하고 엄격한 법도에 따라 아름다운 인공산을 꾸몄는데, 지금은 원래의 옛모습을 그대로 볼 수는 없다. 이러한 여러 가지 구조적 특성과 함께 살림살이들이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지정 당시 명칭은 함양정병호가옥(咸陽鄭炳鎬家屋)이었으나, 조선 성종 때의 이름난 유학자 일두 정여창(1450-1504)의 생가지에 후손들이 타계 1세기 후 중건한 가옥인 점을 반영하여 그의 호를 따라 ‘함양 일두 고택’으로 지정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
자잘하면서도 널찍널찍한 돌로 포장한 골목길에 들어서서 한참을 가야 막다른 듯한 즈음에서 솟을대문을 본다.
세종(世宗)32년(年)(1450)에 태어나 성종조(成宗朝)에서 크게 활약하다가 연산군(燕山君)4년(年)(1493)에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連累)되어 종성(鐘城)에 귀양갔다가 불귀(不歸)의 객(客)이된 일두(一蠹) 정여창선생댁(鄭汝昌先生宅) 대문이다.
이 집은 선생이 타계(他界)하신지 1세기(世紀) 이후에야 중건(重建)된 것이라 하나 원래의 집이 이 터에 있어서 500여년을 연기(延基)하여오는 명기(名基)의 터전으로 알려져 있다.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운위(云謂)하는 인사(人士)는 누구나 한번쯤 이 터를 열거(列擧)한다. 이 집을 지정한 특색의 한가지가 된다.
또 하나의 특색은 솟을대문에 정려(旌閭)를 게시(揭示)한 문패(門牌)가 여러개 편액(扁額)처럼 걸렸다는 점이다. 보통은 일점(一點)이거나 한데 이문에는 4개의 패(牌)가 자랑스럽게 걸렸다.
주목되는 구조가 또 있다. 원치(園治)이다. 사랑채 앞마당끝 담장 아래에 석가산(石假山)의 원치(園治)가 있다. 보통은 후원(後園)에 주력(注力)하여서 앞마당에는 취평(取平)한 채로 반듯하게 두는 일이 고작이나 이 집에서는 사랑채의 내루(內樓)에서 내려다 보며 즐길 수 있게 조산(造山)을 꾸몄다.
산석(山石)을 떠다 삼봉형(三峰形)으로 주산(主山)을 높게, 좌우를 그보다 낮게 하되 각각의 높이로 하고 그 아래에 심곡(深谷)을 의태(擬態)하는 석곡(石谷)의 형성과 알맞은 나무의 배식(配植)으로 아름답게 꾸몄는데 엄격한 법도에 따르고 있고 고형(古形)을 남겼다. 지금은 나무들이 웃자랐고 후대에 적절하지 못한 나무들이 첨가되어서 옛 모습을 다 볼 수는 없게 되었다.
대문간을 들어서서 직행하면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고 동북(東北)으로 비스듬히 가면 사랑채가 된다.
사랑채는 ㄱ자형(字形) 평면에 내루(內樓)가 전출(前出)한 구조이다. 문헌세가(文獻世家), 충효절의(忠孝節義), 백세청풍(百世淸風) 등을 써붙인 사랑채는 전퇴(前退)가 있으며 높직한 댓돌 위에 지그시 앉아있는 것 같이 보인다.
사랑채의 내루(內樓)는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단아(端雅)하고 소박한, 난간과 추녀를 받치는 활주(活柱)를 세우되 세간(細竿)한 석주(石柱)로 석초(石礎)를 삼았다는 특색을 지녔으며 또 누하(樓下)의 주간(柱間)을 판벽(板壁)으로 막아 수장처(收藏處)로도 이용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
사랑채는 집주의 병호옹(炳鎬翁)의 고조부(高祖父)께서 중건(重建)하였다고 하는데 좌기(左箕) 이분은 서산군수(瑞山郡守)를 지냈다고 한다.
일각문을 들어서서 사랑채 측면을 통과하고 다시 문을 지나야 안채에 들어서게 되는데 원래 중문채와 문밖의 곳간채는 따로 있었다.
중문에 들어서면 일자형(一字形)의 큼직한 안채가 있다. 좌측(左側)에 아랫방채가 있고 안채의 뒤편으로 별당과 안사랑채가 있으며 그와 별도로 일곽(一廓)을 이룬 가묘(家廟)가 또 있다.
일곽(一廓)을 이룬 안채는 청하현감(淸河縣監)을 지낸 덕제선생(德濟先生)이 300여년 전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이 집엔 전기(前記)한데로 여러가지 특색이 있어 구조적인 특성을 보일뿐만 아니라 세간, 살림살이들이 비교적 예스러운데로 제자리에 보존되어 있어서 당시의 상황을 공부하는데는 다시 없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전문설명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 정여창(1450∼1504)의 옛집으로,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사랑채는 현 소유자의 고조할아버지가 다시 지었다고 하며, 안채는 약 300년 전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이 집의 터는 500여년을 이어오는 명당으로도 유명하다.
솟을대문에는 정려(旌閭)를 게시한 문패가 4개나 걸려 있다. 대문을 들어서서 곧바로 가면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고, 왼쪽으로 비스듬히 가면 사랑채가 나온다. 높은 기단 위에 지은 사랑채는 ㄱ자 모양이다. 일각문을 들어서서 사랑채 옆면을 따라가면 다시 중문이 있고 이 문을 지나야 一자모양의 큼직한 안채가 있다. 왼쪽에는 아랫방채가 있고 안채 뒤쪽으로는 별당과 안사랑채가 있다. 또 안채 뒤 따로 쌓은 담장 안에는 가묘(家廟)가 있다.
이 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사랑채 앞마당에 꾸민 인공산이다. 돌과 나무를 적절하게 배치하고 엄격한 법도에 따라 아름다운 인공산을 꾸몄는데, 지금은 원래의 옛모습을 그대로 볼 수는 없다. 이러한 여러 가지 구조적 특성과 함께 살림살이들이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지정 당시 명칭은 함양정병호가옥(咸陽鄭炳鎬家屋)이었으나, 조선 성종 때의 이름난 유학자 일두 정여창(1450-1504)의 생가지에 후손들이 타계 1세기 후 중건한 가옥인 점을 반영하여 그의 호를 따라 ‘함양 일두 고택’으로 지정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
자잘하면서도 널찍널찍한 돌로 포장한 골목길에 들어서서 한참을 가야 막다른 듯한 즈음에서 솟을대문을 본다.
세종(世宗)32년(年)(1450)에 태어나 성종조(成宗朝)에서 크게 활약하다가 연산군(燕山君)4년(年)(1493)에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連累)되어 종성(鐘城)에 귀양갔다가 불귀(不歸)의 객(客)이된 일두(一蠹) 정여창선생댁(鄭汝昌先生宅) 대문이다.
이 집은 선생이 타계(他界)하신지 1세기(世紀) 이후에야 중건(重建)된 것이라 하나 원래의 집이 이 터에 있어서 500여년을 연기(延基)하여오는 명기(名基)의 터전으로 알려져 있다.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운위(云謂)하는 인사(人士)는 누구나 한번쯤 이 터를 열거(列擧)한다. 이 집을 지정한 특색의 한가지가 된다.
또 하나의 특색은 솟을대문에 정려(旌閭)를 게시(揭示)한 문패(門牌)가 여러개 편액(扁額)처럼 걸렸다는 점이다. 보통은 일점(一點)이거나 한데 이문에는 4개의 패(牌)가 자랑스럽게 걸렸다.
주목되는 구조가 또 있다. 원치(園治)이다. 사랑채 앞마당끝 담장 아래에 석가산(石假山)의 원치(園治)가 있다. 보통은 후원(後園)에 주력(注力)하여서 앞마당에는 취평(取平)한 채로 반듯하게 두는 일이 고작이나 이 집에서는 사랑채의 내루(內樓)에서 내려다 보며 즐길 수 있게 조산(造山)을 꾸몄다.
산석(山石)을 떠다 삼봉형(三峰形)으로 주산(主山)을 높게, 좌우를 그보다 낮게 하되 각각의 높이로 하고 그 아래에 심곡(深谷)을 의태(擬態)하는 석곡(石谷)의 형성과 알맞은 나무의 배식(配植)으로 아름답게 꾸몄는데 엄격한 법도에 따르고 있고 고형(古形)을 남겼다. 지금은 나무들이 웃자랐고 후대에 적절하지 못한 나무들이 첨가되어서 옛 모습을 다 볼 수는 없게 되었다.
대문간을 들어서서 직행하면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고 동북(東北)으로 비스듬히 가면 사랑채가 된다.
사랑채는 ㄱ자형(字形) 평면에 내루(內樓)가 전출(前出)한 구조이다. 문헌세가(文獻世家), 충효절의(忠孝節義), 백세청풍(百世淸風) 등을 써붙인 사랑채는 전퇴(前退)가 있으며 높직한 댓돌 위에 지그시 앉아있는 것 같이 보인다.
사랑채의 내루(內樓)는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단아(端雅)하고 소박한, 난간과 추녀를 받치는 활주(活柱)를 세우되 세간(細竿)한 석주(石柱)로 석초(石礎)를 삼았다는 특색을 지녔으며 또 누하(樓下)의 주간(柱間)을 판벽(板壁)으로 막아 수장처(收藏處)로도 이용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
사랑채는 집주의 병호옹(炳鎬翁)의 고조부(高祖父)께서 중건(重建)하였다고 하는데 좌기(左箕) 이분은 서산군수(瑞山郡守)를 지냈다고 한다.
일각문을 들어서서 사랑채 측면을 통과하고 다시 문을 지나야 안채에 들어서게 되는데 원래 중문채와 문밖의 곳간채는 따로 있었다.
중문에 들어서면 일자형(一字形)의 큼직한 안채가 있다. 좌측(左側)에 아랫방채가 있고 안채의 뒤편으로 별당과 안사랑채가 있으며 그와 별도로 일곽(一廓)을 이룬 가묘(家廟)가 또 있다.
일곽(一廓)을 이룬 안채는 청하현감(淸河縣監)을 지낸 덕제선생(德濟先生)이 300여년 전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이 집엔 전기(前記)한데로 여러가지 특색이 있어 구조적인 특성을 보일뿐만 아니라 세간, 살림살이들이 비교적 예스러운데로 제자리에 보존되어 있어서 당시의 상황을 공부하는데는 다시 없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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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마당 앞에서 바라본 안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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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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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내루의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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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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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와 석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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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랑채 마당에서 본 사랑채 동쪽 내루와 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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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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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일두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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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일두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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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일두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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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일두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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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일두고택 (촬영: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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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일두고택 (촬영: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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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일두고택 (촬영: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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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일두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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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의내부와앞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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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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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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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을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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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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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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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의내부와앞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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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깐고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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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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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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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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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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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마당 앞에서 본 안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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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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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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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에서 본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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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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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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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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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석 및 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