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 해제면 송석리 도리포 앞바다 지역으로, 고려청자가 매장되어 있는 곳이다. 이곳 바다의 깊이는 평균 8∼10m이고 바다 밑은 개흙과 모래가 섞인 지형이다. 이 유적은 처음에 민간 잠수부들이 120여 점의 유물을 찾아내면서 알려졌다. 3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고려청자 639점을 건졌다.
발굴된 유물은 상감청자들로 생각되며, 신안 앞바다 및 보령죽도 앞바다에서 출토된 14세기 전반기의 도자들과 함께 청자의 형식과 문양을 살필 수 있는 유용한 자료들이다.
청자들은 강진 대구면 사당리 미산부락 가마터에서 만든 것으로 짐작되며, 유물의 문양으로 보아 왕실과 관청에서 쓰던 것으로 생각된다. 문양은 구름, 봉황, 국화, 모란, 연꽃, 버들무늬를 찍어서 표현하였다. 이러한 문양의 특징은 12세기에 절정을 이룬 고려청자가 13세기 후반의 사회적 변화와 원나라의 영향으로 새로운 기형과 문양이 등장하는 시기에 나타난다.
고려 후기 청자의 특징과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며, 문양의 시대적 변천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시대 분청사기로 옮겨가는 시발점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무안도리포고려청자매장해역 → 무안 도리포 해저유물 매장해역)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전문설명
동 유적은 전남 무안군 해제면 송석리 도리포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약 3km 떨어진 곳(위도 35도09분16초, 경도 126도18분31초를 중심으로, 반경 1.5km 이내 해역)으로 함평만에 속하고, 이 함평만은 무안군·영광군·함평군의 경계해역으로 과거 경인지역과 서남해안을 연결하는 중요해로였던 칠산바다가 앞에 놓여 있으며, 사적 제274호인『신안송·원대 유물매장해역』과는 15km정도 떨어져 있다.
유물매장해역의 수심은 평균 8-10m이며, 조석에 의한 수심의 변화는 약 4m정도이다. 해저는 개흙과 모래가 섞인 지형으로서, 유속은 2-3노트(Knots)로 매우 빠른 편이며, 수중시계(水中視界)는 조금 시기때에만 1.5m에 이를뿐 거의 시계가 없다.
동 유적은 1995년 10월 민간인 잠수사들에 의해 청자대접 등 120여점의 유물이 인양됨에 따라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에 문화재관리국에서는『무안도리포 해저유물 발굴조사단』을 구성하고, 해군의 도움아래 해저 잔존유물 및 침몰선체의 확인을 위한 탐사를 3차례에 걸쳐 실시, 14세기 고려청자로 추정되는 총 639점의 유물을 인양하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 주요 경과는 다음과 같다. '95.10.9 중요문화재(사적)으로 가지정 되었고, -위도 35도09분22초, 경도 126도18분41초를 중심으로 반경 1.5km이내 해역이 '95.10.11-10.29 제1차 발굴조사(문화재관리국, 해군), '96. 6.15- 6.13 제2차 발굴조사(문화재관리국, 해군), '96.10.25-11.13 제3차 발굴조사(문화재관리국, 해군), '97. 4.18 중요문화재(사적) 및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위도 35도09분16초, 경도 126도18분31초를 중심으로 반경 1.5km이내 해역이 이곳 유적에서 발굴·인양된 유물은 청자의 대접, 잔탁, 잔 등으로 구분되며 대접이 대종을 이루고 있는데, 1351년경 청자상감대접, 1365-74년 정릉명(正陵銘) 청자상감대접, 1388년 영전사지삼층석탑출토(令傳寺址三層石塔出土) 청자상감원문대접 등의 편년자료들과 형태, 문양, 굽받침 등을 비교하면 1370, 80년경의 상감청자들로 추정되며, 14세기 전반의 신안해저출토 도자들(1323년 추정)과 보령 죽도출토 도자들(1329년 추정)과 함께 14세기 후반기에 제작된 청자의 형식 및 문양을 살필 수 있는 자료들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제작장소는 1992년 전남 강진군 대구면 일대의 출토 유물과 유사한 기형, 유색, 문양의 상감청자대접, 접시편들이 발견되어 특히 대구 사당리 미산부락 내의 가마터로 추정되며, 인양유물 중에는 봉황문양의 대접들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왕실 및 관청용의 것으로 생각된다. 가마로 구운(번조(燔造))법은 대접에서의 시제품 제작유물(예번(例燔))은 굽테면과 안바닥에 굵은 모래를 받쳐 구웠으며 본제품(상번(常燔))은 굽테면이나 안바닥에 모래를 받치고 내저면에 태토받침을 하였다. 본제품은 대부분 같은 기종을 포개지 않고 큰 유형의 대접 속에 작은 유형의 대접이나 접시류를 한점만 올려 놓고 번조한 것 같다. 따라서 작은 유형의 대접과 접시는 굽테면에만 태토 받침흔이 있을 뿐 안바닥에는 받침흔이 없다. 작은 유형 대접과 접시의 시제품은 큰 유형 대접처럼 모래 받침을 하였다. 태토 받침은 이 시기의 특징인 흑토를 사용하고 있다.
이곳 출토품들은 구운 후 바로 선적하여, 모래 받침의 경우 굽테면의 모래가 정리(정면(整面))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유색은 다갈색 계통과 번조과정에서 일부 산화가 이루어진 담갈색 계통으로 크게 나누어지며, 굽테면의 유약은 부분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닦아내고 있어 닦는 것을 원칙으로 한 것 같다.
기형에서 대접은 내저곡면식(內底曲面式)대접과 내저원각식(內底圓刻式)대접으로 구분되며, 내저곡면식대접은 측면선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으나 내저원각식대접은 구연부가 거의 직립되어 있다. 작은 유형의 대접은 모두 내저곡면식이며, 내저원각식대접이 내저곡면식대접보다 높다. 문양은 전성기의 고려청자 문양에서 시대가 지남에 따라 생략되는 단계여서 구름, 봉황, 국화, 모란, 연꽃, 버들 등의 문양이 자유롭고 재미있게 표현되어 생동감과 해학을 엿볼 수 있는데 대부분 도장을 찍은 인화상감(印花象嵌) 기법으로 시문하였으며, 내외측면과 내저면에 있는 주문양대의 동일 반복 문양은 같은 간격으로 배치되었다. 그리고 대접 안바닥의 문양대는 내저원각식은 연판문대, 내저곡면식은 여의두문대가 대부분 시문되었다.
이러한 문양의 특징은 12세기에 절정을 이룬 고려청자가 13세기 후반 사회적 변화와 원나라의 영향으로 점차 새로운 기형과 문양이 등장하는 시기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14세기에는 도리포 도자기와 같이 질과 상감문양의 섬세함이 퇴보하여 투박한 질감과 자유분방한 문양의 청자가 나타나며 이는 조선시대 분청사기로 옮겨가는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무안 도리포 해저유물 매장해역 전경 무안 도리포 해저유물 매장해역 전경 무안 도리포 해저유물-청자상감파도무늬접시 무안 도리포 해저유물-청자상감버드나무 물오리 무늬대접 무안 도리포 해저유물-청자상감꽃무늬 잔받침 무안도리포고려청자매장해역전경 청자상감연판문잔대 인양유물모습(청자상감노화문대접등) 출토유물 전경1 전경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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