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사람들을 함께 묻은 무덤이다.
왜군은 임진왜란때 전라도지방을 차지하지 못해서 결국 패했다고 생각하여,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 지역을 점령한 뒤 북상할 계획을 세웠다. 선조 30년(1597) 7월말 왜군 11만명이 황석산성과 남원을 공격하였다. 남원은 지역적으로 전라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요충지로 국가에서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방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왜군의 침입에 대항하여 군·관·민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남원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만 여명의 관리와 군사, 백성이 사망하였다.
임진왜란이후 전사한 사람들의 시신을 한곳에 합장하였으며 광해군 4년(1612) 충렬사를 세워 8충신을 제향 하였다. 처음 이 무덤은 남원역 부근에 있었으나 민가에 둘러싸이게 되어 1964년 현재 자리로 이전하였다.
전문설명
이는 조선(朝鮮) 선조(宣祖)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때 남원성(南原城)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倭賊)과 항전하다 전사한 군·관·민(軍·官·民)을 합장한 묘이다.
왜군은 임진란(壬辰亂) 때의 패배(敗北)가 전라도(全羅道) 지방(地方)을 점령하지 못한데 있다고 보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전라도 지역을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선조 30년(1597) 7월말 이 계획에 따라 왜군 11만명이 좌우군(左右軍)으로 나뉘어 우군은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좌군은 남원을 공격하였다. 남원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키는 중요한 전략상의 요충지(要衝地)로 나라에서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방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이곳에는 전라병사(全羅兵使) 이복남(李福男)과 광양현감(光陽縣監) 이춘원(李春元),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의 군사와 명(明)의 부총병(副總兵) 양위옌(楊元)의 3천군사가 지키고 있었다. 8월 7일 왜군의 선봉대(先鋒隊)가 남원 지역에 모습을 나타냈고 13일에는 왜군의 주력군이 남원성 아래 집결하여 남원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동문에는 양위옌, 남문에는 일군(日軍)의 천총(千摠) 지앙삐야오(蔣表), 서문에는 마오(毛) 청시엔(承先), 북문에는 이복남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하였다. 14, 15일 이틀동안 혈전이 전개되었다. 쳐들어오는 왜군과 맞서 침식도 잊은 채 군관민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다음날 남원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성이 함락ㄷ 직전 양위옌은 포위망을 뚫고 서문을 통해 달아났다.
이 싸움에서 접반사(接伴使) 정기원(鄭期遠),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 방어사(防禦使) 오응정(吳應井),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 별장(別將) 신호(申灝), 부사(府使) 임현(任鉉), 통판(通判) 이덕회(李德恢), 구례현감(求禮縣監) 이춘원(李春元) 등이 전사하였다. 이밖에 남문을 통해 성안에 침입한 왜군에 의해 학살된 군관민의 수는 거의 만여명에 달하였다.
난후 순절(殉節)한 시신을 한 곳에 합장(合葬)하는 한편 광해군(光海君) 4년(1612) 충렬사(忠烈祠)를 건립하여 접반사 정기원 등 8충신을 받들었다. 처음 이 묘는 남원역(南原驛) 부근에 있었으나 1964년 현재위치로 이전되었다.
만인의총
만인의총
봉분(의총)
기념관
기념관 내부1
기념관 내부2
기념관 내부3
기념관 내부4
기념관 내부5
기념관
만인의총 봉분 전경1
만인의총 봉분 전경2
만인의총 봉분 전경3
만인의총 봉분 전경4
만인의총 비석
만인의총 정면
만인의총 제단1
만인의총 제단2
만인의총 후면
만인의총에서 내려다본 충렬사1
만인의총에서 내려다본 충렬사2
성인문 현판
성인문
순의탑 원경
순의탑 전경
전경1 전경2 전경3 전경4 전경5 전경6 전경7
전경8
전경9
충렬사 내부1
충렬사 내부2
충렬사 내부3
충렬사 현판
충렬사
충의문 원경
충의문 전경
충의문 현판
팔충신 사적비
홍살문1
홍살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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