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 살아던 집으로, 고종이 태어나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이기도 하다. 흥선대원군의 집과 1910년대 새로 지어 덕성여자대학 본관으로 사용하던 서양식 건물을 합쳐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한옥은 제일 앞 남쪽에 대원군의 사랑채인 노안당이 자리잡고, 뒤쪽인 북쪽으로 행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있으며 북쪽에 안채인 노락당이 자리잡고 있다.
고종이 즉위하자 이곳에서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였고, 궁궐과 직통으로 연결되었다. 흥선대원군은 10여년간 정치를 하면서 세도정치의 폐란을 제거하고 인사·재정들에서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하였고,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경북궁을 다시 짓기도 하였다.
지금은 궁의 일부가 덕성여자 대학으로 사용되고 있고 방송국 시설이 있기도 하다. 이로 인해 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도 헐려 나가고 영화루와 은신군·남연군의 사당도 모두 없어졌다.
전문설명
이곳은 조선< 朝鮮 > 제26대 고종< 高宗 >의 생부< 生父 >인 흥선대원군< 興宣大阮君 >(1820∼1898)의 저택으로, 고종< 高宗 >이 탄생하고 즉위하던 12세까지 자란 곳이기도 하다. 고종< 高宗 >이 즉위하자 이곳은 집정을 맡은 흥선대원군< 興宣大阮君 >이 정치를 하는 곳으로 되었고 임금이 계신 궁과도 직통으로 연결이 되었다. 흥선대원군< 興宣大阮君 >은 10여 년간 집정하면서, 세도정치하에서의 폐단을 제거하고 인사, 재정 등에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경복궁 을 중건하기도 하였다. 1882년 일어난 임오군란< 壬午軍亂 > 때는 청군< 淸軍 >에게 납치당하여 청< 淸 >으로 갔다가 1885년 귀국하였다. 현재는 궁의 일부가 덕성여자대학으로 사용되고 있고 방송국 시설이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도 헐려 나가고 사랑채인 노안당, 노락당만 남아 있다.
운현궁 내부전경(이로당) 뒷마당출입통로 노락당출입문 노안당뒷면툇마루난간 외부마당회랑 운현궁과외부경역담장 양관전경 노락당 전경1 노락당 전경2 노락당 전경3 노락당 노안당 입구 노안당 전경 누마루1 누마루2 수직사 운현궁 솟을대문 이로당 우물터 이로당 전경 이로당 이로당과 우물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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