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에 세워졌던 신라 진흥왕비의 옛 자리이다.
북한산비는 비석을 세운 이래 1,200여 년 동안 잊혀져 오다가 19세기 전반에 추사 김정희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북한산비에는 진흥왕이 북한산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지나온 여러 고을에 세금을 면제해 주고, 죄수들을 석방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북한산비의 ‘남천’이란 글자를 통해 4개의 진흥왕비 가운데 가장 늦은 재위 29년(568)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았으나,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오히려 북한산비를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옳은것 같다. 진흥왕이 북한산의 이곳저곳을 다닌 것은 555년 이외에는 달리 확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비는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한 553년 이후부터 창녕비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 이전의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현재 이곳에는 비석이 놓였던 자리와 비석을 꽂았던 홈이 남아 있으며, 비석의 옛터임을 알려주는 표지가 서 있다. 우리나라에서 광개토왕비 다음가는 귀중한 금석문으로 1934년에 국보 제3호로 지정되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래쪽이 떨어져 나가고 한국전쟁시 총탄자국이 생기는 등 보존대책이 필요하여 1972년에 경복궁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전문설명
진흥왕순수비는 우리나라에서 광개토왕비에 다음가는 귀중한 금석문으로, 그중 북한산 소재의 진흥왕순수비는 일찍이 국보 제3호로 지정되어 원래의 장소에 있다가 보존대책의 필요상 1970년대 초에 옮겨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신라는 진흥왕 때(540-576) 힘차게 삼국 항쟁의 대열에 뛰어들어 한반도 전체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한강유역으로 진출하였다. 즉 진흥왕은 재위 12년(551)에 백제와 손잡고 당시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죽령(竹嶺) 이북의 한강 상류로 진격하여 이곳에 10여개의 군을 설치하였고, 이어 여세를 몰아 14년(553)에는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지역으로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에 신주((新州), 뒤에 한주(漢州)로 고침)를 설치하고 남한산성 부근 공주지방을 그 치소(治所)로 삼았다. 이때부터 신라는 현 서울지역을 북방 경영의 일대 군사적 거점으로 삼아 삼국통일의 기반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진흥왕은 16년(555) 10월 북한산을 순행(巡行)하여 강역을 확정하였고, 11월에는 북한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통과한 여러 고을에 1년간의 세금을 면제해주는 한편 특별사면을 베풀어 사형수 이하의 죄수들을 석방하도록 조처했는데, 북한산순수비는 바로 이를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종래 학계에서는 북한산비에 남천(南川)이란 글자가 보이는 것을 단서로 하여 4개의 진흥왕순수비 가운데 가장 늦은, 즉 재위 29년(568)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았으나, 그뒤 비문 연구가 진전함에 따라 오히려 북한산비가 순수비들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유력해졌다. 그러니까 북한산비는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한 553년 이후 창녕비가 건립된 22년(561) 이전의 어느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야 하겠는데, 이 기간중 진흥왕이 북한산을 순수한 것은 555년 10월 이외에는 달리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북한산비는 19세기 초에 김정희(金正喜)가 승가사에 들렀다가, 이곳에 찾아와 이끼로 뒤덮인 비면을 닦아내어 진흥왕순수비임을 확인하게 되기까지 오랜 세월 무학(無學)대사의 왕심비(枉尋碑) 혹은 글자가 없는 소위 몰자비(沒字碑)로 알려져왔다. 사람들은 이를 조선의 건국 직후 무학대사가 태조의 명을 받들어 새로운 왕조의 도읍지를 살피러 다닐 때에 세운 비석으로 흔히 생각했던 것이다.
북한산순수비는 문수암(文殊庵) 뒤쪽으로부터 동남방에 위치한 표고(標高) 556m의 큰 바위 위에 건립되었는데, 현재는 이를 비석이 있는 봉우리라는 뜻에서 비봉으로 통칭하고 있다. 순수비는 바로 이 험준한 큰 바위의 꼭대기를 파내어 비석 받침(비좌(碑座) 일명 비부(碑趺))을 만들었는데, 그 구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즉 바위의 남쪽으로 뻗쳐나간 조금 낮고 비교적 평평한 부분 남쪽에 조금 튀어나온 곳을 택하여, 여기에 3층의 단(段)을 만들어 비를 세운 비좌를 만든 것이다.
그 제1단은 바위의 표면을 깎아내어 가로가 약 106.1㎝·세로가 약 51.5㎝·높이가 약 6.1㎝로 되어 있고, 제2단은 여기에 폭이 18.2㎝·높이가 약 4.8㎝ 되는 면(面)을 둘러쌓았으며, 제3단은 다시 폭이 18.2㎝ 되는 면을 둘렀다. 그런데 제3단은 그 앞면을 제외하고는 세 방향 모두 떨어져 나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게 되어 있다. 더욱이 각 단 모두 바위가 부식하고 또한 모서리가 떨어져나간 까닭에 그 넓이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비석 받침의 중앙에는 폭이 71.5㎝·두께가 16.6㎝쯤 되는 장방형의 굴을 파서, 이곳에 비신(碑身)을 깊숙이 세웠다. 지난날 비신은 이곳에 동남쪽으로 70°쯤 치우쳐진 방향으로 꽂혀져서 현저하게 뒤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순수비유지비뒷면 옮기기전의순수비모습 비석실물사진(국보제3호,국립중앙박물관내전시)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복제비 전경 복제비 설치 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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