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25대 진지왕(재위 576∼579)과 46대 문성왕(재위 839∼857)이 같이 묻혀있는 무덤이다.
높이 5.5m, 지름 20.6m의 원형 봉토무덤으로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둘렀으나 지금은 몇 개만이 남아있다.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진지왕과 문성왕은 시대적으로 278년의 시간차가 있어 두 왕의 합장이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고 서악리 무덤들 중 아래에서 두 번째 무덤이 진지왕릉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한 고분군 분리 ※ 재지정 : 사적 제517호 '경주 진지왕릉', 사적 제518호 '경주 문성왕릉'
전문설명
경주의 서악<西岳> 선도산<仙桃山>의 동쪽 기슭에 진흥왕릉<眞興王陵>과 인접하여 있으며 무열왕릉<武烈王陵>의 북쪽에 해당된다. 모두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20.6m, 높이 5.5m 규모이다. 봉분<封墳>의 밑에 호석<護石>의 자연석 받침돌 몇 개가 나와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없다. 위치와 호석 구조로 보아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일 것으로 추정된다. 진지왕<眞智王>은 신라 제25대로 중고시기<中古時期>의 왕이고 문성왕<文聖王>은 제46대로, 하대<下代>의 왕으로 두 왕은 계보<系譜>도 다르고 재위시기에도 300년 가까운 차이가 있는데, 그 왕릉<王陵>들이 인접하여 있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규모 또한 왕릉<王陵>으로 보기엔 작은 편이다. 진지왕<眞智王>(재위<在位> 576-579)은 본명이 김사윤<金舍輪>(혹은 김윤<金輪>)으로 진흥왕<眞興王>의 둘째아들이고 왕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재위 기간이 짧아 치적은 거의 없으나 중국의 진<陳>나라와 통교한 기사가 확인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597년 7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진지<眞智>라 하고,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진지왕릉<眞智王陵>이 애공사<哀公寺> 북<北>에 있다고 하였다. 현재의 릉<陵> 아래편에는 삼층석탑<三層石塔>이 있어 그곳을 영경사지<永敬寺址>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지왕은 무열왕<武烈王>의 조부<祖父>로서 무열왕릉<武烈王陵> 뒤편에 도열한 4기<基>의 대형 고분 중 위에서 3번째 고분을 그의 릉<陵>으로, 그리고 그 아래 4번째 고분을 그의 아들이자 무열왕<武烈王>의 부<父>인 문흥대왕<文興大王>(용춘일추존<龍春一追尊>)의 릉<陵>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문성왕<文聖王>(재위<在位> 839-857)은 본명이 김경응<金慶膺>이고, 신무왕<神武王>의 아들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857년에 9월에 왕이 죽으니 시호<諡號>를 문성<文聖>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공작지<孔雀趾>의 위치는 확인할 수 없으며, 다음 왕인 헌안왕<憲安王>의 장지도 공작지라고 하였다.
신라진지왕릉근경
신라문성왕릉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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