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176호 경주 법흥왕릉

오늘의 쉼터 2008. 2. 18. 21:37


종     목 사적  제176호
명     칭경주 법흥왕릉 (慶州 法興王陵)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고대
수량/면적 72,817㎡
지 정 일 1969.08.27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효현동 63
시     대신라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경주시

일반설명

신라 23대 왕인 법흥왕(재위 514∼540)의 무덤이다.

법흥왕은 신라를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체제로 완성시킨 왕이다. 왕권강화를 위해 상대등과 병부를 설치하였고, 520년 율령을 반포하였다. 532년 금관가야와 합병하여 낙동강유역에 처음 진출하였다. 신라 처음으로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중국 양(梁)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527년 이차돈이 순교하면서 불교를 국가종교로 수용하고 고대국가의 이념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높이 2m, 지름 14m로 삼국시대 신라 왕의 무덤으로는 작은 편이다. 무덤 아래에는 둘레돌을 받쳤던 자연석이 있다. 법흥왕 이전의 왕 무덤은 평지인 경주 무덤들에 밀집되어 있어 소재파악이 어려우나, 그 이후의 왕 무덤은 구릉이나 교외에 2∼3기씩 따로 자리하고 있으며 소재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변화는 왕 무덤의 형태 변화와도 연관되는 듯한데 그 변화의 시작이 법흥왕릉에서 찾아 볼 수 있어 중요한 곳이다.


전문설명


경주의 서악(西岳)이라 불리는 선도산(仙桃山) 서쪽 기슭에서 뻗은 낮은 구릉의 송림(松林) 속에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삼국시대 신라 왕릉(新羅 王陵)으로서는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한다.

봉분의 표면이나 주위에는 아무런 장식물이 없으나, 봉분 아래에 자연석의 일각이 드문드문 드러나 있다. 이것은 호석(護石)을 받쳤던 자연석 받침돌로, 선도산(仙桃山) 동쪽 기슭의 무열왕릉(武烈王陵)과 같은 구조의 호석(護石)이 축조된 것이다. 이러한 호석 구조는 경주시내 평지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보다 한단계 발전한 것이며, 위치와 호석 구조로 보아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일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23대 법흥왕(法興王)(재위(在位) 514-540)은 본명이 원종(原宗)이며, 지증왕(智證王)의 아들이고 왕비는 보도부인(保刀夫人)이다. 재위기간인 서기 520년에 관리들의 복장을 법률로 정했고, 521년에는 중국 양(梁)나라와 통교했으며, 또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금관국(金官國)을 점령하였다. 특히 528년에는 불교(佛敎)를 국교로 수용하여 신라(新羅) 호국불교(護國佛敎)의 기틀을 닦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재위 27년만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법흥(法興) 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峯)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도 애공사 북쪽에 법흥왕릉(法興王陵)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의 법흥왕릉 남쪽에 신라(新羅) 하대(下代)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三層石塔)이 있는데 이를 애공사지탑(哀公寺址塔)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법흥왕릉(法興王陵)은 이 릉(陵)이 아니라 선도산 동쪽 기슭 무열왕릉 뒤편에 도열한 4기의 대형 고분 가운데 가장 위쪽에 있는 고분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경주 법흥왕릉

경주 법흥왕릉 전경

능사성부위단

경주 법흥왕릉 봉분

경주 법흥왕릉 전경

경주 법흥왕릉 후경

경주 법흥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