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180호 경주 진평왕릉

오늘의 쉼터 2008. 2. 18. 22:00


종     목 사적  제180호
명     칭경주 진평왕릉 (慶州 眞平王陵)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고대
수량/면적 43,722㎡
지 정 일 1969.08.27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보문동 608
시     대신라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경주시

일반설명

신라 26대 진평왕(재위 579∼632)의 무덤이다.

진평왕은 독자적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새로운 중앙 행정부서를 설치하였다. 또한 중국의 수·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통해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을 효율적으로 막았고, 경주 명활산성을 보수하여 수도 방위에 힘썼다.

높이 7.9m, 지름 36.4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둘렀으나, 현재 몇 개만 남아있다. 규모로 보아 왕릉급 무덤임이 분명하며 평야 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전문설명


경주 시가지 동쪽 보문들의 평지 가운데에 있다. 동쪽으로는 명활산(明活山), 서쪽으로는 낭산(狼山)을 대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보문사지(普門寺址)가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36.4m, 높이 7.9m이다. 봉분의 밑부분에 호석(護石)의 받침돌로 보이는 자연석이 몇 개 보일 뿐 별다른 장식물이 없다.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재위(在位) 579-632)은 본명이 백정(白淨)이고, 진흥왕(眞興王)의 태자 동윤(太子 銅輪)의 아들이며, 왕비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 다음으로 재위기간이 길어 54년간 왕위에 있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침공에 대항하는 한편 지명(智明)·원광(圓光)·담육(曇育) 등이 수(隋)·진(陳) 등에 왕래하였고, 수가 망한 이후에는 당(唐)과 교류하면서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즉 이때를 기점으로 삼국전쟁 시기에 당과 연합할 수 있는 계기를 확고히 만들었던 것이다. 또한 불교진흥을 위해 힘썼으며, 수도 방위대책의 일환으로 591년에 남산성(南山城), 593년에 명활산성(明活山城)을 축조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32년 1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진평(眞平)이라 하고 한지(漢只)에 장사지냈다고 전하다. 한지(漢只)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규모로 보아 이 고분이 왕릉급인 것은 분명하다.




경주 진평왕릉

경주 진평왕릉

경주 진평왕릉

경주 진평왕릉

경주 진평왕릉

경주 진평왕릉

경주 진평왕릉

경주 진평왕릉

경주 진평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