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이다.
백제 개로왕 5년(132)에 세워진 곳으로,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 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에 성을 다시 고쳐지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짓자는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지었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성내에는 중흥사를 비롯한 12개의 사찰과 99개의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가 있었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여장은 허물어 졌고, 대서문과 장대지·우물터·건물터로 생각되는 방어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는 중요한 곳이었다.
전문설명
북한산성이란 이름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132년(백제(百濟)개로왕(蓋로王)5)에 이미 나타나고 있고, 신라(新羅)는 이곳의 비봉(碑峰)에 진흥왕이 순수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603년(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25)에는 고구려 장군 고승(高勝)이 북한산성을 포위 공격하자 왕이 10,000명의 군사로 구원한 기록이 있고, 661년에는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군과 함께 북한산성을 20여일간 포위 공격하자 성주이던 동타천(冬陀川)이 성안의 주민 2,800명으로 필사의 결전으로 물리친 기록이 있다. 특히 이 전투는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부흥군의 도전을 받고 있던 때이므로 만약 고구려에게 함락되었다면 삼국 통일 계획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이 전공으로 성주 동타천은 대사(大舍, 제12관등)에서 대나마(大奈麻, 제10관등)로 승급되었다.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자 고려 현종은 고려 태조의 재궁(梓宮)을 옮겨오고 증축하였다. 1232년 (고종(高宗)19)에는 이곳에서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1387년(우왕(禑王)13)에도 개축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의 외곽 산성으로 축성론(築城論)이 일어나 1659년(효종(孝宗)10) 송시열(宋時烈)에게 명하여 수축하게 하고, 1711년(숙종(肅宗)37)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하여 둘레 7,620보의 석성이 완성되었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大西門)·동북문(東北門)·북문(北門) 등 3개의 성문과 10개의 암문(暗門), 그리고 시단봉(柴丹峰) 위의 동장대(東將臺)·나한봉(羅漢峰) 동북에 남장대·중성문(中城門) 서북에 북장대가 있었다. 성은 다시 중성(中城)을 만들었으며, 처음엔 경리청(經理廳)을 두었다가 1747년 (영조(英祖)23)에는 총융청(摠戎廳)에 속하여 관리되었다. 또한 이듬해에는 상원봉(上元峰) 아래에 130칸의 행궁과 140칸의 군창(軍倉)을 지은 바 있다. 성내에는 승군(僧軍)을 위한 136칸의 중흥사(重興寺)가 승군 총섭(總攝)이 있는 곳이었고, 이 밖에도 11개의 사찰과 2개의 암자가 있었다. 성 안에는 8개소의 창고가 있었으며, 99개소의 우물과 26개소의 저수지가 있었다.
현재의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성곽의 여장은 허물어 졌으나, 현재 대서문(大西門)이 남아 있고 장대지(將臺址)·우물터·건물터로 추정되는 방어 시설의 일부가 있다. 성벽은 아직도 잘 남아 있는 부분이 많다.
북한산성 북한산성 대남문 주변 북한산성 대남문 원경 성벽 북한산성 대동문 복원전 대동문 복원후 동장대복원전 동장대 복원후 성벽세부 대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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