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160호 서울 살곶이 다리 <해제>

오늘의 쉼터 2008. 2. 18. 20:20


  

종    목 사적  제160호
명     칭

서울 살곶이 다리 (서울 箭串橋)

분     류 유적건조물 / 교통통신/ 교통/ 교량
수량/면적 10,618㎡
지 정 일

1967.12.15 ~ 2011.12.23

소 재 지 서울 성동구  행당동 58
시     대조선시대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성동구

일반설명

조선시대의 수도인 한양과 동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통로로 사용되던 다리로 살곶이 다리라고도 한다.

이 다리는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에 세종 2년(1420) 5월에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나 태종이 죽자 왕의 행차가 거의 없어 완성되지 못하였다. 그 후 이 길을 자주 이용하는 백성들 때문에 다시 만들 필요성이 제기되어 성종 6년(1475)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성종 14년(1483)에 완성했다. 마치 평평한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하여 ‘제반교(濟盤橋)’라고도 불렀다.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다리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다리로 모두 64개의 돌기둥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돌기둥의 모양은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형으로 고안되었다. 1920년대 서울에 내린 집중호우로 다리의 일부가 떠내려 가서 70년대에 다시 고쳐 지었으나, 다리의 오른쪽 부분에 콘크리트를 잇대어 복원함으로써 원래의 모습을 다소 잃었다.


대다수의 석교(石橋)문화재가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사적 지정요건인 (인물, 역사, 사건 등)을 고려해볼 때, 사적보다는 유형문화재로서의 성격이 강하므로 사적을 해제하고 보물로 변경 지정하고자 함 (2011.12.23 고시)


전문설명


살곶이는 청계천이 한강으로 흘러드는 지금의 성동구 왕십리, 한양대학에서 내려다 보이는 개울 부근이다. 즉 사근동 남쪽에서 성수동으로 건너가는 곳을 말한다. 이곳은 동으로는 강원도 강릉(江陵)으로 가는 길이 있고, 동남쪽으로는 송파(宋坡)에서 광주(廣州)·이천(利川)을 거쳐 충주(忠州)와 죽령을 넘어 영남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성수동 한강변에 이르는 교통상 중요 선상에 놓여있다. 또한 이곳은 넓고 풀과 버들이 무성하여 조선초부터 나라의 말을 먹이는 마장(馬場) 또는 군대의 열무장(閱武場)으로 사용되었던 곳이기도 했다. 따라서 살곶이다리는 조선시대 도성내 교량인 금천교(禁川橋), 수표교(水標橋)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한 다리 중의 하나였으며 당시 한양과 동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통로로 사용되었다.

이곳에 다리를 만든 것은 정종(定宗)과 태종(太宗)의 잦은 행차 때문이었다. 세종(世宗) 즉위 후 태종(太宗)은 광나루에서 매사냥을 즐기고, 전곶(箭串)에 있는 낙천정(樂天亭)과 풍양이궁(풍壤離宮)에 수시로 행차하면서 살곶이의 내를 건너기 위하여 다리를 놓게됐다는 것이다. 세종 2년(1420) 5월 상왕(上王)인 태종은 영의정 유정현(柳廷顯), 박자청(朴字靑)으로 하여금 공사를 담당하게 하여 석교(石橋)를 세우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공사의 어려움도 있었으며 또 세종 4년에 태종이 죽자 이곳을 통한 행차가 거의 없어졌으며 세종 3년부터 시작된 도성안 개천축성공사(開川築城工事)로 인해 도성 밖의 공역까지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을 이용하는 백성들로 인하여 살곶이다리를 만들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성종(成宗) 6년(1475) 9월 살곶이다리를 완성시킬 것을 양주목(楊州牧)에 명령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考)』에 따르면 성종 13년(1482) 한 승려가 방법을 고안하여 다리를 완공하게 되자 왕이 이를 높이 치하하고 다리가 옥우(屋宇)와 같이 평평하여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 하여 '제반교(濟盤橋)' 라는 이름을 붙이게 했다고 한다. 『한경지략(漢京識略)』권2, 「교량조(橋梁條)」에도 살곶이다리의 명칭은 제반교(濟盤橋)라 하여, 『용재총화(용재총화)』권9의 기록을 인용하여 쓰고 있다. 즉 세종때 만들어진 기초 위에 성종 때에 다리가 완성된 것이다.

전곶교(箭串橋)는 조선초 만들어진 장석판교(長石板橋) 중 가장 큰 규모의 다리로서, 횡단으로 기둥이 4열(列)(폭이 5.4m), 종단으로 16열(길이 76.2cm)이며 모두 64개의 돌기둥으로 만들어졌다. 다리 높이는 하상(河上)으로부터 10척내외이며 기둥의 높이는 4척 가량이다.

좌우의 교안(橋岸)을 장대석(長臺石)으로 쌓고 네모난 돌기둥 교각을 16개소를 세웠다. 교각의 간격은 대략 11∼13척 정도이며, 돌기둥 위를 3장의 장대석을 건너 지른 다음 그 위에 다시 귀틀돌을 놓아 청판돌을 받게 한 구조이다. 기둥돌 아래에는 네모난 주초가 있고 물밑에는 주초받침돌이 주초를 받고 있으며 초석 사이에는 포석을 깔아 기초를 단단히 하였다. 따라서 물이 줄때는 이 포석 면이 드러나 마치 지금의 잠수교와 같아 '이층다리' 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돌기둥의 모양은 마름모형으로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큰 혹띠기로 표면을 가공하였고 조립할 때 잔돌을 많이 사용하여 뜬 곳을 메꾸었으며 석난간(石欄干)은 없다.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할 때 살곶이다리의 일부를 헐어다가 석재로 썼다하는데 확인할 수 없다.

1913년(대정(大正)2)에 다리 상면을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보수하였으며, 1920년대 서울지방에 내린 집중호우로 살곶이다리는 일부가 물에 떠내려간 채 방치되었다. 그 후 늘어나는 교통량에 대처하고 장마와 홍수에도 사용할 수 있는 성동교가 1938년 5월에 가설되자 이 다리는 방치된 채 최근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1972년에 이르러 서울시는 무너진 다리를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는데, 하천(河川)의 폭이 원래보다 넓어져 다리 동측에 콘크리트 교량(길이 27m 정도)을 잇대어 증설(增設)함으로써 원래의 모양새를 다소 잃고 있다.




전곶교근경

전곶교

전곶교

전곶교

전곶교

전곶교

전곶교상부

전곶교하부

전곶교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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