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타란 부는 악기(취악기)와 치는 악기(타악기)를 함께 연주하는 것을 말한다. 대취타는 왕의 행차나 군대의 행진 또는 개선 등에 취타와 세악(비교적 음량이 적고 실내에 알맞은 악기들로 연주하는 국악 합주)을 대규모로 연주하는 것으로, ‘무령지곡’이라고도 한다.
취고수(취타 악사)들의 행진음악은 고구려 벽화라든가 백제의 악기에 관한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때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취각군이라는 군사가 있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으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 변화가 생겨 세악이 연주에 끼게 되었다.
군악수(취타와 세악을 연주하는 악사들을 합한 말)들은 황색 옷을 입고 남색 띠를 두르며 머리에는 초립을 쓰고, 악기는 징, 장구, 북, 나발, 소라, 태평소 등으로 편성된다. 집사(지휘봉이라 할 수 있는 등채를 양손에 받쳐들고 음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사람)의 호령에 따라 징이 울리고 북을 치면 모든 악기가 일제히 연주를 시작하는데, 매우 씩씩하고 우렁차며 장엄한 느낌을 준다. 한말 일본에 의해 군대가 해산된 후 형식을 갖추어 연주한 적은 없으며, 민간의 광고악대나 사찰의 의식에 사용되면서 겨우 명맥을 유지해 왔으나 지금은 거의 절멸상태에 있다.
대취타는 우리 선조들의 기개를 한층 더 느끼게 해주는 고귀한 음악으로 그 가치가 큰 소중한 문화재이다.
※ 명칭변경 : 대취타 → 피리정악및대취타 (변경일 : 1998.6.5.)
전문설명 대취타는 호적(湖笛), 나발(喇叭), 소라(나각, 螺角), 바라징북(용고, 龍鼓)과 같이 음량이 큰 악기들로 편성되어, 왕의 거동이나 귀인의 행차 및 군대행진에서 취고수(吹鼓手)들이 연주하는 행진음악을 가리킨다.
고구려 벽화에 고취악대(鼓吹樂隊)의 행렬이 보이고 백제의 음악에 고(鼓), 각(角)과 같은 고취악기가 쓰였다는 것을 통해 취고수들의 행진음악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 때에는 법가위장(法駕衛仗), 팔관위장(八關衛仗), 순행위장(巡幸衛仗)과 같은 각 위장(衛仗)에 기악(伎樂), 잡기(雜技)와 더불어 취각군(吹角軍), 취라군(吹螺軍)이 딸리어 행진음악을 연주하였다. 고려의 취각군의 행진음악은 조선조에 이어져 왔는데 조선중기 이후에는 행진음악에 호적, 나발소라, 바라, 징과 같은 음량이 큰 악기들로 편성된 취고수에 향피리, 젓대, 해금, 장고와 같은 삼현육각(三絃六角) 즉 세악(細樂)으로 편성된 세악수들이 행렬에 포함된다. 조선 말기에는 행렬의 선두에 취고수가 앞장 서고 뒤에 세악수가 딸리었고 이들이 연주하는 음악도 분화되었다.
취고수는 취타(吹打), 굿거리염불을 연주했는데 세악수가 연주하는 음악과 구별하기 위하여 대취타, 취타, 굿거리타령, 염불(打令念佛)이라 불렀다. 세악수가 연주하는 행진음악에는 취타, 길군악, 길타령, 별우조타령, 군악이 있다. 취고수들은 취라치(吹螺赤)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황철릭(黃天翼)을 입고 남색 띠를 두르며 머리에는 초립(草笠)을 쓰고 미투리를 신었다. 임금의 거동이나 귀인의 행차에 행진음악이 딸리는 것이지만 취라치들은 오영문(五營門)각 감영(監營), 병영(兵營)의 군대행렬에 대취타를 연주하였다. 한말 군대해산 후 군영의 취라치들은 없어졌으나, 민간의 광고악대와 사찰의 재의식에는 취라치가 등장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취라치 최인서(崔仁瑞)가 중요무형문화재 대취타의 보유자로 인정받았으나 작고하였으며 현재 보유자는 정재국이다.
대취타는 행진음악으로 일명 무령지곡(武寧之曲)이라 이르며 호적(태평소, 太平簫), 나발, 소라, 바라, 북, 징으로 편성된다. 호적은 주선율을 연주하며 나발과 소라는 교대로 뚜- 하고 지속음을 길게 불며 바라, 북, 징은 리듬을 연주한다. 장단은 12박인데 쿵-쿵-쿵-쿵쿵쿵-쿵- 하고 친다. 철릭을 입고 전립을 쓰고 손에 등채를 든 집사(執事)가 '명금이하대취타(鳴金二下大吹打) 하랍신다' 하고 구호를 부르면 징수가 징을 두 번 크게 치고 북수가 북을 딱 딱 치면 호적을 비롯하여 모든 악기들이 일제히 '퉁 쾌 처르르' 하고 장중하게 울린다.
대취타는 매우 씩씩하고 장중한 음악이다
대취타 대취타 전정고취 행악 피리정악(정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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