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에 이성계가 황산(荒山)에서 왜군을 무찌른 사실을 기록한 승전비가 있던 자리이다. 황산대첩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유명한 싸움으로, 당시의 승리 사실을 영원히 전하기 위하여 조선 선조 10년(1577)에 대첩비를 세우게 되었다. 비석이 처음 세워질 당시에는 비각·별장청 등의 건물을 지어 비석을 보호하도록 하였으나, 1945년 일본인들에 의하여 파괴되어 파편만 남게 되었다. 지금의 비석은 1957년에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다. 1973년에 비석이 보관되어 있는 비전·홍살문·삼문·담장, 그리고 부속건물들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전문설명 고려 말 이성계가 황산(荒山)에서 왜구를 격퇴시킨 사실을 기록한 승첩비(勝捷碑)가 서있던 옛터이다. 황산은 남원군 운봉면 동쪽에 자리잡은 해발 약 700m의 바위산인데 이 산골짜기에서 벌어진 왜구와의 전투사실과 이성계의 전공이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비석이 바로 황산대첩비였다. 이 비가 이루어진 것은 1577년(선조 10년)으로서 당시 왕명에 호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이 비문을 짓고 여성군 송인(礪城君 宋寅)이 글씨를 써서 운봉현감 박광옥(朴光玉)이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비석이 파괴되어 일부의 파편만 남아 있던 것을 해방 후 그 자리에 복원하였으며, 1970년대에 들어와 대대적인 정화사업이 이루어져 새롭게 단장되었다. 황산대첩은 1380년(우왕 6년) 9월에 벌어진 전투로서 왜구의 주력부대가 지리산을 넘어 운봉의 인월역(引月驛)에 주둔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 상주 방면으로 진출한 왜구들은 성주지방을 공격한 후 계속 함양 부근까지 쳐들어와 아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어서 왜적들은 남원 운봉현(雲峰縣)을 불태운 뒤 가까운 인월역에 머물면서 계속 북상 공격할 태세를 갖춤으로써 고려 조정을 놀라게 하였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이미 해주지방에서 왜구를 토벌하여 용맹을 떨친 이성계를 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慶尙)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에 임명하고 변안열(邊安烈)을 체찰사(體察使)로, 우인열(禹仁烈)·이원계(李元桂)·박임종(朴林宗)·도길부(都吉敷)·홍인계(洪仁桂)·임성미(林成味) 등을 원수로 삼아 이성계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당시 양측 군사들은 황산의 서북방 정산봉(鼎山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적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버팀으로써 아군으로서는 전세가 불리해진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장(主將) 이성계의 용전(勇戰)과 과감한 작전지휘에 따라 총공격을 펼친 결과 적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포함하여 무수한 왜구들을 사살함으로써 전사한 적병들의 피가 강물을 붉은 빛으로 물들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때 포획한 적의 말만도 1,600여필에 달하였으며, 적의 대군이 거의 전멸한 가운데 70여명만이 생존해 달아났을 만큼 큰 전승을 거두었다. 이와 같은 황산대첩은 최영의 홍산대첩(鴻山大捷)과 함께 왜구 격멸의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하였으니, 한국 전투사에서 크게 두드러진 쾌거로서 그 내용이 ≪용비어천가≫에도 수록되었을 정도로 이름난 역사적 사건이었다. 현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비지(碑址)에는 비신이 오석(烏石)으로 복원된 높이 4.25m의 대첩비가 서 있는데, 이것은 용을 새긴 이수(이首)와 1.25m의 귀부(龜趺)를 갖추고 있다. 1972년에 신석호(申奭鎬)씨가 국문으로 황산대첩의 사적(事蹟)을 기술한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1973년 이후 1995년에 이르기까지 비전(碑殿)과 홍살문·담장·어휘각 및 그밖의 각종 부속건물들을 새롭게 정비하고 단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적전경 황산대첩비지일원 어휘각 대첩비와비각 대첩비 황산대첩기념비 대첩비각 현판 비각 전경 비각 비석 사적비각 현판 사적비각 사적비신 우측면 사적비신 좌측면 사적비신 사적비와 현판 어휘각 현판 어휘각1 어휘각2 어휘각3 유적 전경1 유적 전경2 유적 전경3 입구 비석
입구 전경 입구에서 바라본 대첩비지 비각 파비각 현판 파비각 파비석1 파비석2 파비석3 황산대첩비1 황산대첩비2 황산대첩비3 황산대첩비지 원경 유적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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