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의 건물이 있던 자리로, 1937년 북천(北川) 둑의 안전공사를 할 때 흙으로 쌓은 자리(토단)가 별견되자, 옛날 절이 있었던 자리로 생각하여 일부를 발굴조사하였다.
약 2,000여평 정도를 발굴하여 전당터 6곳, 긴 복도자리로 보이는 장랑터 6곳, 문터 2곳, 담장터 3곳을 찾았고, 이 밖에 기와와 벽돌을 사용하여 만든 배수시설 2곳, 우물터가 1곳이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기와 및 그릇이 있었으며, 건물터 구조 및 출토된 유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건물터로 보이지만, 건물터의 성격은 알 수 없다. 다만 건물이 자리잡았던 배치형식과 구조로 보아서는 관청이나 귀족의 저택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유적이다.
전문설명
전랑지(殿廊址)는 경주시 성동동 17-1번지 현 경주고등학교 서쪽 북천(北川)의 남쪽 강둑에 인접하여 있다.
1937년 봄 북천(北川) 호안공사(護岸工事)를 할 때 이 지역에 토단(土壇)이 있어 폐사지(廢寺址)로 추정되어 부분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발굴조사한 유적의 범위는 약 2,000평에 달하였는데 여기에 많은 건물지(建物址)가 나타났다. 발굴조사 결과는 전당지(殿堂址)가 6개소, 장랑지(長廊址)가 6개소, 문지(門址)가 2개소, 담장터가 3개소, 우물이 1개소, 배수구시설이 2개소 등이었다.
건물지의 초석(礎石)들은 원형주좌(圓形柱座)가 새겨진 통일신라시대의 초석(礎石)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문지(門址)에는 장대석(長臺石)으로 기단(基壇)을 만들었으며 배수로(排水路)는 평와(平瓦)를 세워서 만들거나 전(전)돌을 사용하여 만든 것도 있었다.
출토(出土)된 유물은 고신라시대(古新羅時代)의 홑연꽃무늬 숫막새와 통일신라시대의 겹입 연꽃무늬 숫막새, 넝쿨무늬 드림새, 귀면와, 은제용기, 납석제 용기, 금동불상, 골호(骨壺),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류는 등잔과 병, 그릇뚜껑, 항아리 등이었다. 경주시 도로계획선이 전랑지(殿廊址) 서쪽을 지나가는 관계로 1993년 4월 15일부터 동년 12월 31일까지 경주문화재연구소가 재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제2차 발굴은 1937년 발굴한 지역의 서쪽 일부지역을 재발굴한 것이어서 새로운 학술자료를 크게 얻은 것은 없으나 유적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 주었고 이곳에 조성하기로 한 도로를 조성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 전랑지는 북천에 인접하고 있어서 유적의 일부가 강물에 유실되었다. 현재 사유지가 되었으나 이를 모두 사들여서 정밀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연구 규명되어 정비되어야 할 중요한 유적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옥사조(屋舍條)를 보면 진골(眞骨)의 집보다 큰 것으로 건축의 규제를 받지 않은 건물이다. 그러므로 전랑지는 왕궁의 건물지로 추정되는 것이다. 현재 경주에는 왕경지(王京址)의 발굴조사가 연차적으로 추진되고 있으므로 왕경(王京)의 중심지역에 있는 이 신라왕궁지(新羅王宮址)는 왕경연구에 중요한 유적(遺蹟)인 것이다.
경주 성동동 전랑지 건물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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