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군 성주읍 성산리 소재 성산<星山>의 북사면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성주지역 최대의 고분군으로 5∼6세기경 성산가야 지배계층의 집단묘지이다. (참고로, 성주지역에는 금수면 명천리 고분군과 월항면 수죽·용각리 고분군이 성산리 고분군과 함께 3대 고분군을 이루고 있는데 이중에서 성산리 고분군이 주고분군이라 할 수 있다.)
해발 389.2m의 성산 정상부에는 이 당시의 방어산성인 성산산성이 있고, 이 산성을 둘러싸고 사방으로 뻗어 내린 산자락에는 군소 고분군이 다수 분포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대형 봉토분으로 군을 이루고 있는 것이 성산리 고분군이다. 현재 번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는 것은 70여기에 불과하나 완전 파괴되어 멸실되었거나 봉토가 삭평된 고분군을 포함하면 그 수는 수백기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 성산리 고분군은 1918년 일본인 학자 하마다 코오사쿠(빈전경작<濱田耕作>)·우메하라 스에지(매원말치<梅原末治>) 등이 3기를 첫 조사한 이래 1∼2회 더 조사가 있었는데, 1986∼87년 계명대학교에 의해 대형 봉토분 5기가 정식 조사되어 고분의 구조와 유물 등 성산가야국의 문물을 어느 정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고분의 구조는 크게 석실과 1∼2개의 부곽으로 이루어진 다곽식으로, 석실은 할석축조와 판석축조의 두 유형으로 나뉘며 부곽은 모두 할석축조이다. 석실은 할석축조나 판석축조 모두 수혈식이며 석실 길이에 비해 너비가 너른 장방형을 보여, 인접 고령지역의 세장방형과는 대조를 이룬다. 부곽은 주석실 피장자의 부장품곽인데, 역시 평면형이 길이에 비해 너비가 매우 너른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대부분의 부장품곽에는 100여개의 다종다양한 토기가 가득 채워져 있고 한 귀퉁이만이 빈자리로 남아 있어 노비 등의 순장자가 매 부곽마다 매장되어 있었던 것 같다.
성산리 고분군의 할석축조 및 판석축조의 구조는 대구지방의 내당동·비산동 고분군과 매우 상통하고 있고 출토유물 가운데 각종 토기양식도 흡사하여 양지방의 문화적 연계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한편 성산리 58호분 석실(판석조)에서 출토된 금제태환이식, 은제팔지, 은제반지, 금동제 행엽 등은 5∼6세기의 전형적인 신라제품으로 신라와 성산가야의 문화적 교류를 실증자료로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성산리 고분군은 고분구조나 출토유물의 양식이 바로 인접한 고령지역과는 너무나 판이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같은 가야문화권으로 인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양 지역간의 문화적 관련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대구지방과 일찍이 접촉하면서 신라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짐으로써 당시 신라와 대립관계에 있던 대가야와는 자연히 상당기간 문화적 단절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문설명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 소재 성산<星山>의 북사면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성주지역 최대의 고분군으로 5∼6세기경 성산가야 지배계층의 집단묘지이다. (참고로, 성주지역에는 금수면 명천리 고분군과 월항면 수죽·용각리 고분군이 성산리 고분군과 함께 3대 고분군을 이루고 있는데 이중에서 성산리 고분군이 주고분군이라 할 수 있다.)
해발 389.2m의 성산 정상부에는 이 당시의 방어산성인 성산산성이 있고, 이 산성을 둘러싸고 사방으로 뻗어 내린 산자락에는 군소 고분군이 다수 분포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대형 봉토분으로 군을 이루고 있는 것이 성산리 고분군이다. 현재 번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는 것은 70여기에 불과하나 완전 파괴되어 멸실되었거나 봉토가 삭평된 고분군을 포함하면 그 수는 수백기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 성산리 고분군은 1918년 일본인 학자 하마다 코오사쿠(빈전경작<濱田耕作>)·우메하라 스에지(매원말치<梅原末治>) 등이 3기를 첫 조사한 이래 1∼2회 더 조사가 있었는데, 1986∼87년 계명대학교에 의해 대형 봉토분 5기가 정식 조사되어 고분의 구조와 유물 등 성산가야국의 문물을 어느 정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고분의 구조는 크게 석실과 1∼2개의 부곽으로 이루어진 다곽식으로, 석실은 할석축조와 판석축조의 두 유형으로 나뉘며 부곽은 모두 할석축조이다. 석실은 할석축조나 판석축조 모두 수혈식이며 석실 길이에 비해 너비가 너른 장방형을 보여, 인접 고령지역의 세장방형과는 대조를 이룬다. 부곽은 주석실 피장자의 부장품곽인데, 역시 평면형이 길이에 비해 너비가 매우 너른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대부분의 부장품곽에는 100여개의 다종다양한 토기가 가득 채워져 있고 한 귀퉁이만이 빈자리로 남아 있어 노비 등의 순장자가 매 부곽마다 매장되어 있었던 것 같다.
성산리 고분군의 할석축조 및 판석축조의 구조는 대구지방의 내당동·비산동 고분군과 매우 상통하고 있고 출토유물 가운데 각종 토기양식도 흡사하여 양지방의 문화적 연계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한편 성산리 58호분 석실(판석조)에서 출토된 금제태환이식, 은제팔지, 은제반지, 금동제 행엽 등은 5∼6세기의 전형적인 신라제품으로 신라와 성산가야의 문화적 교류를 실증자료로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성산리 고분군은 고분구조나 출토유물의 양식이 바로 인접한 고령지역과는 너무나 판이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같은 가야문화권으로 인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양 지역간의 문화적 관련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대구지방과 일찍이 접촉하면서 신라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짐으로써 당시 신라와 대립관계에 있던 대가야와는 자연히 상당기간 문화적 단절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주성산동고분군전경 성주성산동제38호분석실 성주성산동제38호분제2곽 성주성산동제38호분제2곽 성주성산동제58호분유구배치상태 유개장경호 유개장경호 유개사이부호 신선로형태부환 전경1 전경2 전경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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