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시 동북쪽에 있는 분산 서남쪽 기슭에 있는 무덤들으로, 수로왕비릉에서 동북쪽으로 100∼500m 정도 떨어져 있다.
현재 2기의 무덤이 남아 있는데 1기는 규모가 매우 크고, 다른 1기는 절반정도 남아 있는 상태이다. 무덤의 안은 관을 넣는 방(현실)을 만들고 그 위를 흙으로 쌓아 둥글게 무덤의 형태를 만든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다. 현재 2기만이 확인되고 있지만, 원래는 더 많은 무덤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발견된 유물만으로는 무덤의 정확한 성격을 파악할 수 없으나, 무덤의 구조로 보아 김해지방에서는 시대가 가장 늦은 무덤 중 하나로 생각된다.
낙동강 하류지역에서는 많지 않은 굴식돌방무덤이면서 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시내에 있어, 이 지역의 무덤을 연구하고 가야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무덤들이다.
전문설명
김해시 동북쪽에 있는 분산과 서남쪽 기슭에 자리한 고분군으로, 허왕후릉에서 동북쪽으로 100미터∼500미터사이에 분포한다. 구산동고분군은 수로왕비 허후릉에서 가까운 구산동 63-64번지 일대가 'A'고분군이고, 좀더 멀리 떨어진 대성동 21-1번지 일대의 구릉 정상부에 분포하는 것이 'B'고분군으로 [A] [B] 2개의 고분군을 합해서 구산동 고분군이라 한다. 각각 분구가 남아 있는 것은 2기이며, 'A'고분군에는 일제때에 세워진 '삼산리 고분' 푯말이 있고, 'B'고분군에는 근래에 세운 '구산동 고분' 푯말이 있다. 이렇게 구산동 고분군에 삼산리 고분과 구산동 구분의 다른 푯말이 있게 된 것은, 구산동은 구지봉이 있는 곳이라 하여 구산동으로 불렸었는데, 구산동이 삼산리로 바뀌었다가 일제시대에 구산정<龜山町>으로 되었다가 광복과 함께 1947년에 구산동으로 되었기 때문이며, 이후의 행정구역 개편 때문이다. 구산동 고분군은 김해지방에서는 드물게 봉토분<封土墳>으로 모두 횡혈식 석실분이다. 현재 허왕후릉과 김해향교 뒤편의 백운대 구릉에 있는 이들 고분 가운데서 2기가 발굴되었다.
'A'고분군 가운데 1기는 봉분의 크기가 길이 12.8미터, 폭 11.5미터, 높이 4미터로 상당한 대형이고 다른 1기는 봉분이 절반 정도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이 가운데서 1919년에 발굴된 1기는 '삼산리 1호분'으로 불리는 것이며, 삼산리 1호분은 'A'고분군의 봉토가 완전한 큰 고분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횡혈식 석실분으로 석실의 평면은 동서의 길이 2.4미터, 남북의 길이 3미터의 장방형이며 연도는 남벽의 서쪽에 설치되어 있다. 4벽은 위로 올라가면서 안쪽으로 기울어지게 쌓았으며 좁혀진 천장은 2장의 개석으로 덮었고 석실의 바닥에는 'ㄱ'자 모양의 관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었다.
'B'고분군은 2기 모두 봉분이 무너져 흔적만이 남아 있었는데 그 가운데 1기는 지상에 개석이 노출되어 한쪽 벽이 파괴되어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상태이었는데, 내부 구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은 남북 길이 2.77미터, 동서 길이 1.45미터의 장방형으로 남벽 동쪽에 연도가 달렸고, 4벽은 안쪽으로 기울어지게 쌓아올려 좁혀진 천정벽에 3장의 개석을 덮었다. 1997년에 발굴된 백운대 구릉에 위치한 1기는 주석실과 호석 사이의 봉토 내부에서 유물만을 매납한 부장석곽 2기와 배묘 1기가 확인되었다. 주석실은 가로 2미터, 세로 3.2미터의 장방형이며, 최초의 시상은 현실 바닥에 소형 판석을 한벌 깔고 그 위에 자갈을 연도에 이르기까지 깔아서 만들었고, 1차추가장 시상은 최초의 시상 위에 마련하였는데, 현실 입구에서 정벽에 이르기까지 판석을 깔고 자갈을 깔아 시상면을 마련하였고, 2차추가장 시상은 같은 방법으로 1차추가장 시상면의 중앙 위에 설치하였다. 부장곽들은 주석실의 추가장과 관련하여 각각 시기를 달리하여 축조된 것들이다. 주석실은 남쪽 벽석의 좌측에 연도<羨道>를 냈으며, 이를 통하여 2회에 걸친 추가장이 이루어졌다. 여기에서는 금동제 장식구와 각종 토기 및 철기가 출토되었는데, 유구의 형태와 출토유물로 미루어 6세기 말엽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분군의 입지는 원래 김해만을 조망하는 구릉상이었으나, 동상대성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 지구내에 위치한 백운대 구릉의 고분은 주변 환경이 원래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였다.
김해는 가락국, 가야, 금관국 등으로 불린 가야의 옛터로 시조 수로왕<首露王>대에서부터 구해왕<仇亥王>이 신라에 항복할 때까지 가야의 도읍이었고, 신라 문무왕때에는 금관소경이 설치되어 우리 고대사회에서 남부지방 문화의 중심이었다. 두 고분군 모두 할석으로 쌓은 횡혈식 고분이며 석실의 장축방향도 같은 남북방향이고 출입구도 남쪽에 설치되어 있다. 최근에 있었던 구산동 고분군의 조사성과에 의하면, 6세기 말엽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고분군은 이 지역이 신라세력권에 흡수되고 난 다음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김해구산동A고분군 김해구산동B고분군전경 김해구산동B고분 봉분전경 묘도부추가장확인토층단면 주석실내유물출토상태 제2부곽전경 김해구산동B고분군전경 김해구산동고분군 김해 구산동 고분군 근경 김해 구산동 고분군 입구 김해 구산동 고분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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