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시조 수로왕의 왕비무덤이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의하면, 왕비는 성이 허, 이름은 황옥으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 인도 아유타의 공주로 16세에 배를 타고 와서 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9명의 왕자를 낳았는데, 그 중 2명에게 왕비의 성인 허씨 성을 주어 지금도 그 후손이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높이 5m 정도의 원형 봉토무덤으로서, 무덤의 밑부분에 특별한 시설은 없다. 무덤 주위에는 얕은 돌담을 4각형으로 둘러 무덤을 보호하고 있으며, 앞 쪽에는 긴 돌을 사용하여 축대를 쌓았다. 중앙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지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之陵)’이라는 글이 2줄로 새겨져 있다.
무덤에 딸린 부속건물로는 숭보제·외삼문·내삼문·홍살문이 있으며, 보통 평지에 있는 무덤과는 다르게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무덤 앞에는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전하는 파사석탁의 석재가 남아 있다. 세종 28년(1446)에 수로왕릉과 함께 보호구역이 넓혀졌으며, 임진왜란 때 도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비석과 상석 등은 인조 25년(1641)에 다시 정비하면서 설치하였다고 한다.
왕릉에 비해서는 시설이 소박한 편이고 수로왕비릉이라고 오래전부터 전해져 왔으므로 수로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본다면, 내부의 구조는 널무덤(토광묘) 또는 돌덧널무덤(석곽묘)일 가능성이 높다.
전문설명
구지봉<龜旨峯> 동북쪽에 있는, 이 능은 가락국<駕洛國> 시조 수로왕의 비릉<妃陵>이라고 전하여 오는 고분으로, 김해에서 마산으로 나가는 국도<國道> 건너편에 있다. 구산동<龜山洞> 고분군으로부터는 서쪽으로 100미터 거리이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의하면 허왕후는 옛 아유타국의 공주로 16세 때에 배를 타고 와서 수로왕 7년에 왕비가 되었으며, 189년 3월 1일에 수로왕보다 10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고 하며, 수로왕은 두 아들을 허씨의 성을 따르게 하여 지금도 그 후손이 이어져 오고 있다.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봉분의 주위에는 아무런 시설이 되어 있지 않다. 그 규모는 길이 18미터, 폭 6미터, 높이 약 5미터이며, 능 주위에는 자연석으로 쌓은 얕은 돌담이 방형으로 둘러져 있다. 능의 전면은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으며 중앙에는 상석과 능비가 세워져 있고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지능'<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之陵>이라고 두 줄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실려 있다. 능역의 입구에는 내삼문이 있고, 밖에 숭보재와 외삼문, 홍살문이 있다. 경내에 자연석 덩어리와 같은 상태로 남아 있는, '파사석탑'의 파편이라고 전하는 석재가 남아 있는데, 《삼국유사》 권 제3의 탑상 제4에 보이는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조의 내용에 의하면, 허왕후가 배를 타고 올 때 이 탑을 배에 실어서 풍파를 진정시켰다고 전한다. 이 능은 수로왕릉에 비해서는 시설이 빈약한 편이나, 수로왕비릉이라고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왔으므로 이것이 수로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한다면 그 내부구조는 토광묘 또는 수혈식 석곽묘일 가능성이 높다. 세종 28년(1446년)에 수로왕릉과 함께 보호구역이 넓혀졌으며 《김해읍지》에 의하면 임진왜란때에 도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조 25년(1641년)에 다시 수축하면서 현재의 능비와 상석 등을 설치하였고, 1972년과 1981년에 건물과 능묘 주변을 보수 정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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