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71호 성산사부동도요지 <해제>

오늘의 쉼터 2008. 2. 14. 15:15



종     목 사적  제71호
명     칭성산사부동도요지(星山沙鳧洞陶窯址)
분     류 유적건조물 / 산업생산/ 요업/ 도자기가마
수량/면적 5,570㎡
지 정 일

1963.01.21 ~ 2011.07.28

소 재 지 경북 고령군  성산면 사부동 산16
시     대고려시대
소 유 자사유
관 리 자고령군

일반설명

경상북도 성산면 사부동에 있는 도자기나 기와 등을 만들어 굽던 가마터이다.

사부동 가마터는 사부곡 안에 있는 마을 중간의 한곳과 남쪽 골짜기 일대로 나누어져 있다. 마을 안의 가마터는 집들이 들어서서 훼손이 심하지만, 밭으로 사용되는 곳은 아직 퇴적이 남아 있고 부근에서 도자기 조각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에 걸치는 시기의 가마터가 5, 6곳 있으며, 그 중 퇴화된 상감청자 가마터는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의 것이고, 분청사기 가마는 15세기의 것이다. 분청사기류는 대부분이 접시와 대접 종류이고, 두께는 두껍고 굽은 투박하다. 대부분 인화기법과 상감기법을 쓴 국화·구름·소용돌이 무늬가 많다.

백자 조각은 매우 적은 양이지만 흰색의 백자조각과 약간 무른 백자조각이 발견된다. 근처의 기산동도요지(사적 제72호)와 더불어『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자기소상품현동예현리(磁器所上品縣東曳峴里)’로 선택되어 좋은 품질의 분청사기를 만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많은 양의 분청사기, 특히 우수한 인화분청사기류가 발견되고는 있으나, 질이 좋은 백자는 극히 적은 양만 발견되고 시기도 정확하지 않아서 앞으로 보다 정확하고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다.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한 인접지역 고분군 통합 ※ 재지정 : 사적 제510호 '고령 사부동과 기산동 요지'


전문설명


사부동 요지는 사부곡 안에 있는 마을 중간의 한곳과, 남쪽 골짜기의 산 6-1, 산 10번지 일대의 크게 두곳으로 나누어져 있다. 마을 안의 요지는 70·71·72번지와 전<田> 95번지가 한데 몰려 있는 지점에 위치하며, 인가가 들어서 요지의 훼손이 심하나 밭으로 경작되고 있는 곳에는 아직 퇴적이 남아 있고 이 부근에서 파편과 요벽편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마을에서 남쪽으로 500m 남짓 떨어진 골짜기에 위치한 요지에는 넓은 범위에서 파편과 요폐기물들이 산포되어 있으나 수량은 많지 않다. 이곳에서는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의 것으로 보이는 퇴화된 상감청자류와 15세기의 인화분청 사기류 및 소량의 백자가 만들어졌다. 분청사기류는 대부분이 대접과 접시 종류이고, 기벽은 두텁고 굽은 투박하며 죽절 굽이 많고, 굵은 태토빚음받침이나 모래받침을 받쳐 구웠다. 문양은 대부분 상감·인화기법으로 소략하게 베풀어져 있으며, 국화판·운문<雲文>·와문<渦文> 등의 모양이 자주 보인다. 유약은 대체로 암록색을 띠고 있다. 사부동 요지에서 발견된 백자편은 매우 소량이지만, 순백색의 정치한 백자편과 약간 연질의 백자편이 발견 되는데, 바닥에 백색의 내화토를 빚어 받침으로 사용한 편도 있다. 특히 마을 안의 밭에서는 갑발이 발견되고 있어 이곳에서 상품<上品>의 자기를 구웠음을 알 수 있다. 사부동 요지는 인근의 사적 제72호인 기산동<箕山洞> 요지와 더불어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자기소상품 현동예현리<磁器所上品 縣東曳峴里>"로 비정되어 일찍부터 주목을 받고 있는 곳이다. 또한 고령지방에서 조선 초기에 상품의 백자생산으로 유명하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곳에서는 다량의 분청사기와 특히 우수한 인화분청사기류가 발견되고 있으나, 질좋은 백자는 극히 소량만 보이고 시기도 명확치 않아 그 성격규정에 이론이 많은 실정으로, 앞으로 보다 정밀한 조사가 요망되는 중요한 요지이다. 현재 사적지정 안내판과 표석이 세워져 있는 마을 왼편의 산록에는 지정구역과는 상관없는 곳이지만 이곳에도 소규모의 분청사기 요지가 있다. 주로 인화와 귀얄분청사기류가 발견되며 내화토빚음눈을 사용해 번조하였다.




성산사부동도요지

사부동도요지전경

도요지출토자기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