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국가무형문화재

국가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

오늘의 쉼터 2008. 2. 7. 22:36


종     목

국가무형문화재  제7호

명     칭

고성오광대 (固城五廣大)

분     류

무형유산 / 전통연행/ 연희/ 탈놀이

수량/면적

단체

지 정 일

1964.12.24

소 재 지

경상남도 고성군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기능보유자

관 리 자

고성오광대놀이보존회

일반설명

오광대는 남부지역(낙동강 서쪽지역)의 탈춤을 가리키는 말로 초례 밤마리 마을 장터에서 놀던 광대패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광대’란 다섯 광대 또는 다섯 마당으로 이루어진 놀이라는 뜻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도 하고, 오행설에서 유래된 오(五)에서 온 것이라고도 하는데, 오행설의 의견이 유력하다.

고성오광대는 제1과장 문둥북춤마당, 제2과장 오광대마당, 제3과장 비비마당, 제4과장 승무마당, 제5과장 제밀주마당 등 5개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등장인물은 문둥이, 말뚝이, 원양반, 종가도령, 비비, 중, 각시, 영감, 제밀주 마당쇠 등 19명이 등장한다. 양반과 파계승에 대한 풍자, 그리고 처와 첩의 문제 등 서민의 삶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고성오광대는 다른 지역의 오광대에 비해 놀이의 앞뒤에 오방신장춤, 사자춤 같은 귀신 쫓는 의식춤이 없다. 주된 춤사위는 덧뵈기(탈놀이)춤이고, 반주음악으로는 꽹과리, 징, 장구, 북 등의 타악기가 사용된다.


전문설명 

 

초계 밤마리 장터에서 대광대패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오광대놀이는 점차 각지에 전해져 의령, 진주, 산청, 창원, 통영, 고성, 진동, 김해 등지에 분포되었고, 해로(海路)를 통해 수영, 동래, 부산진 등지로 퍼져서 야류(野遊)라고 불렸다.

이같이 오광대와 야유는 거의 경상남도 내륙과 해안일대의 각지에 분포되었으나 이 놀이를 받아들인 연대와 경로는 제각기 다르다. 경상우도(慶尙右道)에서의 오광대가 전문연예인들에 의해 연희된 도시의 가면극이라면 주로 경상좌도(慶尙左道)에 분포된 야류는 들놀음으로서 비직업적인 연희자들, 즉 마을 사람들에 의해 토착화된 놀이이다.

고성오광대는 초기에 통영오광대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현재는 통영오광대에 비해 보다 더 고형(古型)에 가깝다. 오광대라는 이름은 오행설(五行說)에서 유래된 오(五)에서 온 것이라는 의견이 유력하며 통영과 고성오광대는 놀이 내용도 오과장(五科場)으로 구성되어 있어 신라오기(新羅五伎)의 다섯마당 놀이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주제는 산대도감계통극(山臺道監系統劇)으로서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어 말뚝이의 양반에 대한 조롱이 매우 심하다. 파계승에 대한 풍자는 아직 이 지역에 널리 불교신앙이 남아 있어서인지 약한 편이다.

제1과장은 문둥광대가 북춤을 추고 퇴장한다. 자탄가는 없다. 제2과장 오광대는 양반들과 종인 말뚝이놀이다. 제3과장 승무는 중 둘과 각시 둘이 나와 춤만 추고 주고받는 대사는 없다. 파계승놀이로서는 상징적이며 아주 약하다. 제4과장 비비는 통영오광대의 영노탈놀이와 같다. 영노는 일명 비비새라고 하는데 입에서 비- 비- 라고 호드기로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제5과장은 제밀주로 영감과 큰어미와 제밀주(또는 작은어미)와의 일부처첩(一夫妻妾)의 갈등에서 큰어미가 죽어 상여가 나간다. 큰어미가 물레를 돌리며 노래부르는 대목은 가산오광대(駕山五廣大)와 마찬가지로 통영오광대보다 고형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성오광대의 연희 시기도 전에는 세시놀이로서 정월 대보름을 중심으로 행하여졌으나 나중에는 춘추의 놀이로서 오락화되었다.

고성오광대의 배역은 문둥이 원양반(청보 양반), 젓양반, 젓광대(5명), 말뚝이, 초랭이, 중(2명), 소무(2명), 비비양반, 비비(영노), 영감, 작은어미(제밀주), 큰어미 등 19명이 등장하며 19개의 가면과 아기인형이 사용된다. 고성오광대 가면은 전에는 종이를 풀로 이겨 만든 종이탈이 특색이었으나 근래에는 오동나무로 만든 나무탈을 사용하기도 하고 종이탈, 바가지탈을 쓰기도 한다.




오광대놀이

상여놀이

오광대춤

승무

저밀주(영감의첩)의해산

고성오광대

고성오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