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보광사를 크게 일으킨 원명국사의 공적이 새겨져 있는 비이다. 원래는 충남 부여군 성주산의 보광사터에 있던 것을 1963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비문은 2차에 걸쳐 새겼는데, 앞면은 건립당시인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새겼고 뒷면은 조선 영조 26년(1750)에 추가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원명국사는 19세에 등과하여 선원사에서 뜻을 펴오다가 공민왕 원년(1351) 65세로 입적하였다. 죽으면서 문도들에게 비나 탑을 세우지 않도록 당부하여 6년이 지나서야 비가 세워졌다. 뒷면의 추가된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기록을 적은 비도 알아볼 수 없으므로 주지인 석능일이 고쳐 새긴다고 되어있다.
현재 비받침과 비머릿돌이 없고, 비몸만 남아있다. 비몸의 가장자리는 덩굴무늬를 띠 모양으로 둘러 새겼다. 석재는 편마암이고 윗쪽의 양끝을 사선으로 잘라냈다. ‘보광사중창비’라고도 하는 이 비는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석비양식과 불교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전문설명
보광사 중창비는 고려(高麗) 원종(元宗)(1259∼1274, 재위) 때 보광사를 크게 일으킨 원명국사(圓明國師)의 공적(功績)이 새겨져 있는 비로서 충렬왕(忠烈王) 7년(1281)에 세워졌다.
보광사는 임천면(林川面)의 성주산(聖住山)에 있었던 고려(高麗)·조선시대(朝鮮時代)의 옛 절로서당시 절의 규모(規模)는 500칸(間)에 이르는 큰 사찰(寺刹)이었다.
편마암제(片麻岩製)로 비신(碑身) 윗변 양모서리를 접고, 앞면 주연(周緣)에 화려한 보상화문(寶相華紋)을 조각하였다. 높이가 230cm인 이 비문은 2차(二次)에 걸쳐 새겨졌는데, 앞면은 건립(建立) 당시에 되었고, 뒷면은 조선(朝鮮) 영조(英祖) 26년(1750)에 추가한 것으로 여기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절과 비각이 불에 타 없어지자 절을 고쳐 지은 사실을 기록하였다.
원명국사는 19세에 등과(登科)하여 선문(禪門)에서 수도(修道)하였으며 선원사(禪源寺)에서 종지(宗旨)를 펴오다가 원종(元宗) 6년(1265)에 보광사로 왔고, 10년 후인 세수 65세에 입적(入寂)하였다.
이 비는 고려 후기의 건비양식(建碑樣式)과 불교사(佛敎史) 연구(硏究)에 좋은 자료가 된다.
비 전경 보호각 속의 비신 비문 부분 보광사대보광선사비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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