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악리 태종무열왕릉의 남쪽 길 건너편에 남아있는 것으로,『삼국사기』의 기록이나 서악서원의 영귀루 북쪽 받침에서 찾아낸 비석조각에 새겨진 글로 미루어, 김인문(629∼694)의 공적을 새겨놓았던 비의 받침돌인 것으로 짐작된다.
네 발로 힘있게 디디고 있는 받침돌의 거북은 목을 앞으로 길게 빼고 있다.앞뒷발의 발가락이 모두 5개인 것이 다를 뿐 기교면에서 태종무열왕비의 귀부와 쌍벽을 이루고 있으며, 목에 새겨진 다섯가닥의 목주름은 사실적이면서도 자연스럽다. 거북의 등에 새긴 큼직한 육각무늬 역시 조각솜씨가 뛰어나며, 등 주위에 새긴 구름무늬와 그 바깥쪽에 구슬을 꿰놓은 듯한 무늬를 돌린 것은 독특한 모습이다. 등중앙에는 비를 꽂아 두었던 네모난 홈이 마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거북받침돌의 양식적인 변천을 볼 때, 9세기 부터는 거북의 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게 되는데, 서악리 귀부는 거북머리의 원형을 잘 지니고 있어, 한국 석비 받침돌의 최초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삼국통일 후인 7세기 중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문설명
이 귀부(龜跌)는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의 아우 김인문(金仁問)의 공적을 새겨 놓은 묘비(墓碑)의 대석(臺石)으로 알려지고 있다.
귀부의 크기는 길이 2.81m, 폭 2.14m이며 귀갑(龜甲)무늬를 새긴 거북등에는 비석을 꽂았던 흔적이 직사각형의 구멍이 뚫어져 있다. 이 귀부는 용두화(龍頭化)되기 이전의 귀두(龜頭)의 원형을 지니고 있어서 한국석비대석의 시원적(始原的) 형식(形式)이라 하겠다.
전체 구성(構成)이 조금 형식화되고 약해 보이는 느낌이 있으나 목을 길게 뽑아 들고 멀리 앞을 바라다보는 기상은 통일신라(統一新羅) 초기(初期)의 호국정신(護國精神)을 잘 나타내고 있다.
경주 서악동 귀부 경주 서악동 귀부 등 부분의 비좌 경주 서악동 귀부 후면(귀갑과 연화문, 비좌) 경주 서악동 귀부 머리 부분(턱 아래쪽) 경주 서악동 귀부의 발 경주 서악동 귀부 경주 서악동 귀부 경주 서악동 귀부 비문 경주 서악동 귀부정면 경주 서악동 귀부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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